그라운드의 폭주 기관차 -
지난 시즌 K리그를 휘감았던 최고의 아이콘은 바로
많은 이들은 프로 첫 해
유난히도 운이 좋았던 어린 시절, 악연으로만 남겨진 대표팀의 기억, 그리고 K리그 무대에서의 화려했던 시기와 선수말미 시절에 보냈던 J-리그에서의 경험까지. 그가 지금껏 축구만을 위해 달려온 길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이야기는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인 1972년.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희 아버지께서 해병대 1기였습니다. 그만큼 저희 아버지께서 운동을 잘하셨어요. 아버지의 운동적인 재능은 아마도 제가 그대로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는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체육대회가 있으면 제가 항상 나가서 1등을 했었죠.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축구뿐 만 아니라 운동 자체를 좋아했고, 열심히 했습니다.”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던
“제가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네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시작할 때 쯤, 제가 다니던 성덕 초등학교에서 없앴던 축구부를 다시 창단하면서 4,5학년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때 3학년 이었잖아요. 당연히 내년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제 담임선생님께서 저의 운동신경을 보시고 절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3학년에서 저 혼자만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3학년 학생이었던
“제가 남들보다 스피드가 있었습니다. 그 스피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드리블 능력, 즉 1대1 능력이 받쳐주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드리블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등하교하면서도 제 발에서는 공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었죠. 그래서 4학년 때부터 시합에 나갈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제일 잘했던 것은 모든지 제 몸에 익히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하나를 가르쳐 주면 그 기술에 대해서 두 번 더 생각해보고, 제 것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었죠. 정말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되거든요. 아마도 제가 그러한 노력은 어렸을 때, 기초를 다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훗날 프로 선수 생활과 국가대표로 가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시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는 바로 장점의 극대화였다. 단점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장점을 가꾸는 것이 더욱 그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를 거치면서 저의 가장 큰 약점을 발견했어요. 바로 체력이었죠. 저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구력 훈련 또한 열심히 했습니다. 또한 저는 체력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짧게 움직이고 순간 스피드를 많이 키웠죠. 짧은 순간에 폭발력 있게 움직이면 분명 찬스는 나거든요. 그 때 골을 넣던지, 다른 동료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는지, 결정을 했기 때문에 제 약점을 커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네요.”
강릉 출신인
“제 고향인 강릉에는 강릉더비가 있어요. 바로 강릉상농고 정기전이에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일전이나 고연전 같은 라이벌 경기입니다. 그 때 정기전 날짜만 잡히면 그 날부터 긴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경기 시작 20일 전부터 응원전이 시작되었어요. 그런 모습이 긴장감을 주는 거예요. 선배들 눈빛도 틀려집니다.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사소한 실수에도 선생님께 많이 혼났습니다. 정말 어느 전국대회보다 힘이 들었어요.”
“요즘에 펼쳐지는 강릉더비를 보면 과거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저희 때는 정말 게임이 아니라 전쟁이었습니다. 수비수는 공격수를 잡아당기고, 공을 못 차게 하고 거친 태클도 많았어요. 그리고 지는 팀은 많이 혼났습니다. 정말 그 때는 서로가 비기는 것이 최선의 결과였어요. 학교만 다를 뿐 다들 축구하는 친구들이잖아요. 저희가 이겨서 밖에서 농고 친구들을 만나면 정말 미안했었죠.”
화려했던 고교시절 막바지,
“많은 고민 끝에 고려대로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공을 차면서 한 번도 벤치에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쟁쟁한 선배들이 가득 차 있는 고려대에서 제대로 출전이나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었죠. 만약에 중고등학교 때 후보에서 주전의 자리로 뛰어 오른 경험이 있었다면 과감하게 도전 했겠지만 전 그런 경험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비교적 약한 대학팀에 가서 경기를 뛰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감독이셨던 이차만 선생님께서 정말 끈질기게 저를 설득하셨어요. 그리고 부모님께서도 고려대 진학을 원하셨고요. 그래서 저는 생각을 바꾸고치열한 경쟁을 선택하기로 했었죠.”
하지만 주전경쟁에 대한 그의 걱정도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리 좋은 선배들이 있어도 전 예전과 같이 계속 경기를 뛰고 싶었어요. 전 그래서 동계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었고, 절 발전시키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결과 대학 입학 후 첫 대회인 대통령배 대회부터 기회를 왔습니다. 전 그 기회를 안 놓치고, 펄펄 날았었죠. 결국 저희 팀은 우승할 수 있었고, 저는 득점왕을 했었죠.”
“전 축구 선수 생활하면서 목표가 있었고, 축구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축구에 대한 집착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만큼 남들보다 열심히 했고,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꿈은 바로 국가대표였습니다. 대통령배를 훌륭하게 치르고 난 뒤,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발표된 명단에 제 이름이 포함되었어요. 전 청소년 대표도 거치지도 않았었고, 대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목표를 이뤄서 기분이 좋았어요.”
20살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의 꿈을 이룬
“처음으로 국가대표 뽑혔을 때부터 그런 징크스는 시작되었죠.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멕시코에서 대학 선수권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 4강 독일전 이었어요. 제가 빠르게 침투하는 과정에서 독일 수비수가 절 걷어찼어요. 많이 아팠지만, 게임을 다 소화하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었죠. 진단결과가 왼쪽 정강이 부분 뼈가 부러지는 부상과 함께 한 달간 기브스를 하면서 쉬라는 거예요.”
“이제 아시안 게임에 뛰어야 하는데, 제가 못 뛰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다쳤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을 안했어요. 아픈 사실을 숨겨서 아시안 게임을 나가도 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포기를 하고 쓸쓸하게 강릉으로 내려가서 쉬었습니다. 부상에서 완쾌 후 다시 고려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서 다시 국가대표에 뽑혔었죠,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부상으로 또 못 뛰는 등 악순환은 계속 되었습니다.”
국가대표의 아쉬움도 잠시, 대학교 2학년 시절인 8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마라하림컵에 출전한 고려대는 국제대회 첫 우승과 함께 전국대회 3개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최고의 해를 보내게 되었고 그 축에는
“대학교 3학년 때였죠. 어느 순간부터 눈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일정기전을 뛰고 난 뒤, 병원에 가봤더니 6개월 정도 휴식을 취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감독선생님께서는 제가 뛰길 원했었죠. 감독님께서는 절 많이 아끼셨거든요. 결국 감독님과 의사선생님과 이야기하시더니, 감독님께서는 저에게 휴식을 주셨습니다.”
6개월의 긴 공백 시간은 지금까지 큰 부상과 어려움 없이 선수 생활을 했던 함현기였기에, 큰 좌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빨리 일어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믿음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6개월 동안 병원에 다니면서, 제 의지는 약해졌어요. 다른 곳이 다친 것이 아니라 눈이라서 밖에 제대로 못 나갔고, 답답했었죠. 자연스럽게 제 자신도 운동을 포기 하고 싶을 정도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절 옆에서 잡아주셨어요. 특히 아버지 믿음이 큰 도움을 주셨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절 많이 믿으셨고 그 믿음이 제가 운동에만 매진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하나의 믿음이 더 있었어요. 바로 감독님의 믿음이었죠. 운동을 많이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님께서는 제가 복귀하자 바로 경기에 투입시켜주셨습니다. 전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뛰었어요. 그래서 고려대에서 다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고,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할 수 있었죠. 하지만 국가대표의 징크스는 여전히 깨지는 못했었죠.”
부활의 찬가를 울리던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여러 팀에서 제의가 왔었죠. 특히 대우에서 저를 영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팀은 바로 현대였어요. 제가 현대를 간 이유는 바로 김평석 형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김평석 형님은 제가 대학 선수권 대회 때 처음 만났고,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자주 만나면서 가까워졌습니다. 그때 형님이 그냥 좋았습니다. 저를 잘 챙겨주셨고, 정신적으로 편하게 해주셨어요.”
“저는 축구를 하면서 선수와 감독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저는 프로에서 한 경기도 뛰어 본 적 없는 이제 갓 입단한 신인이었고 프로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께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연구가 필요했었죠.”
탄탄대로. 현대에 입단하기 전까지
“제가 축구 생활을 하면서 변하지 않은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모든 것을 저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었죠. 프로에서도 감독 선생님께서 하나를 가르쳐 주시면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저에게 맞도록 접목시켰죠. 만약에 제가 생각했던 것과 틀리다면, 감독 선생님께 찾아가서 논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면서 저를 발전시켰습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이 감독님께 조금씩 믿음을 준 것 같네요.”
“‘골은 넣어본 사람만이 넣는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골을 넣으면 넣을수록 생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이 있을 때, 플레이도 살아나고 골도 더 잘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생각보다 빨리 데뷔 골을 터트렸죠. 아마도 86축구대제전 4라운드 포항과의 경기였을 거예요.”
첫 골을 터트린 이후
“제가 프로축구선수권대회에서 9골을 넣으면서 득점왕을 했어요. 득점왕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다면 팀이 우승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이죠. 프로 데뷔한 해 팀이 우승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깊었어요.”
“득점왕. 정말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 때 골 맛은 절정이었습니다. 골을 넣으면 넣을수록 더 큰 스릴도 느낄 수 있었고 희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 때 골에 대한 집착이 참 많이 있었죠. 집착과 희열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득점왕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프로대제전에서 득점왕을 놓쳤다는 거예요.
쾌속행진을 이어가던
“86년도에 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으셨어요. 10월 19일 대구에서 유공과의 시합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듣고 숙소를 떠나 아버지께서 계시는 병원에 갔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운동장의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임종을 보지 못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갔어요. 결국 시합 도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시합을 끝내고 난 뒤, 정말 허무했죠. 항상 옆에 지켜주시던 아버지께서 없다는 것이 허전했어요. 정말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아버지의 잃은 시련을 생각보다 빨리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운동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보고 싶어 하시던 모습은 바로 제가 운동하는 모습,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는 제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저는 정말 후회가 없을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했었습니다.”
신인왕이었기에 어느 누구보다 기대되는
“그 때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의 남미 순방 경기가 참 많았어요. 그리고 남미 순방 경기를 위해 차출된 국가대표팀 명단에 항상 제가 있었죠. 그래서 제가 K리그에서 뛸 수 있었던 시간은 적었어요. 아마도 제가 87년과 89년 시즌 경기 출장 기록이 가장 적을 거예요. 바로 국가대표 차출 때문이었죠.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남미 순방 경기에서 잘 뛰고도 중요한 A-매치를 앞두고는 그 경기만 뛸 수 없는 작은 부상을 당하는 통에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가 없었어요.”
87년 K리그 무대에서 많이 뛸 수 없었던 아쉬움은 뒤로하고,
“제가 지금까지 만나온 지도자 분들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바로
특히 선수들과 대화도 많으시고, 선수들의 배려가 참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선수 생활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분이 있다면 바로
“그리고 저와 감독님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했었어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 벤치에 앉아 있어도 감독님께서는 언제든 투입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항상 심어주셨습니다. 경기에 투입하면 저는 감독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아픈 다리를 이끌고 팀 승리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도 많은 역전승을 일궈냈기도 했죠.”
88년은 축구 선수
“88년 아시안 컵이 제가 유일하게 국가대표에서 중요한 시합에 나설 수 있었던 대회인 것 같습니다. 물론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4강전 중국과의 시합에서 다쳤어요. 사우디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한 것이죠. 아무튼 제가 그때 평범한 신발을 신었을 때는 아프지 않았는데, 축구화만 신으면 아팠어요. 아마도 보통 신발의 밑 부분이 평평해서 지면에 모든 부분이 닫지만 축구화는 스터드때문에 지면에 다 닫지 못하기 때문에 아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땐 정말 운이 좋았어요. 저희가 머물던 숙소에 중국팀도 같이 머물고 있었는데 중국 의료진이 제 다리를 보더니, 한약재 같은 것을 다리에 감아줬죠. 전 그렇게 잠을 청했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숨 자고나니 그 약이 마취작용을 했는지 다리가 멀쩡하더라구요. 그래서 결승전에 뛸 수 있었죠.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그 때 정말 교체되는 순간까지 열심히 뛰었지만 아쉽게 승부차기에서 져서 우승컵을 놓쳤습니다.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제가 뛰었던 A-매치 중 가장 중요한 경기였는데...”
눈 부상을 제외하고는 장기간의 부상과 슬럼프 한 번 없이 앞만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왔던
“연봉문제로 시간이 지체되다보니 90년 동계훈련에 참가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부족한 훈련량으로 인해 좋은 컨디션으로 그라운드에 나설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없었죠. 또한 91년에 부임한
91년 6월
“그 때 당시 LG
그의 축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슬럼프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특히 감독의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그에게 가장 큰 타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입단한 팀은 오이타팀 이었어요. 당시 오이타팀은 3부리그에 있었습니다. 하위리그였기 때문에 기량 면에서는 제가 월등히 앞설 수 있었죠. 그래서 한 시즌에 50골도 넣었습니다. 비록 하위리그였지만 처음 경험하는 외국 생활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팀에서 자동차와 집도 제공해 주었고, 축구용어는 비슷하기 때문에 그라운드에서 큰 어려움 없이 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죠.”
“그리고 제가 J리그를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발전된 일본의 축구 문화였어요. J리그는 5부 리그부터 1부 리그까지 있었고, 승강제 시스템과 주말리그가 정착되어 있었죠. 특히 5부, 4부 리그 같은 경우에는 평일에 자신의 일을 하면서 주말에는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회축구가 발전되었고. 많은 팬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부러운 점이었죠. 제가 뛰는 기간 동안 오이타팀도 3부에서 2부로, 2부에서 1부로 올라갔었어요.”
그렇게 일본에서 두 시즌을 보내고 나니
“제가 일본에서 운동을 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순발력 저하였죠. 제가 지금까지 선수 생활하면서 순간 스피드가 뛰어나고, 스피드 하나는 타고났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스피드가 줄어드니. 1대1 상황에서 돌파가 잘 안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 색깔이 없어졌죠.”
“당시 일본 생활도 답답했고,
은퇴를 결정한 이후,
“제가 은퇴를 한 뒤,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 제의가 왔습니다. 감독을 꿈꾸던 저였기에 뿌리칠 수 없는 기회였었죠. 더군다나 제가 졸업한 학교인 강릉상고를 맞게 된 것은 가슴을 설레게 했고 많은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려웠죠. 바로 제가 운동했을 때와 아이들이 운동했었을 때의 환경차이로 생긴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저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눈과 생각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훈련할 때, 아이들과 함께 뛰면서 가르쳤고, 최대한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시간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지도자의 길이 보람차고 선수 시절보다 즐겁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지도자
축구로 채워진 그의 인생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집착일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식지 않는 열정과 집착이 있기에 앞으로 펼쳐질 지도자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것은 바로 현장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아이들과 항상 같이 뛰면서 훈련을 할 때도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힘이 들지만, 아이들이 좀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잖아요, 그리고 같이 뛰면 훈련할 때도 시합 때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제 모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꿈꾸는 최종 목적지는 바로 프로팀 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프로팀 감독직을 맡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부터 차분히 공부하고, 노력한다면 분명 프로팀 감독의 꿈을 이룰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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