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나의 운명 -
선수로서의 축구운명
운명이란, 사전적 정의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의미한다. 이미 하늘이 정해준 운명처럼 방향을 바꾸어도 혹은 속력을 늦추어도 어떻게든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축구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축구와의 인생이 꼭 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 같은 운명을 타고난 한 사람이 있다. 예전엔 잘 나가던 프로축구선수로서 현재는 모든 연령층을 다 지도해 본 뛰어난 지도자로서 축구와 함께해 온 "축구는 나의 운명", 그는 강원FC의 든든한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와 가을이 문득 다가왔다고 느껴졌던 9월 어느 날, 강릉의 한 대학교 기숙사에서 그를 만났다. 긴 세월만큼 풍부하고 재미있는 그의 축구와의 운명적인 스토리를 이제부터 시작해보자.
축구가 너무 좋았던 키 작은 아이
"단지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4~5살 즈음 아주 어렸을 때죠. 위로 형들하고 십년정도 차이가 나는데, 골목길에서 같이 공을 차고 그랬어요. 축구가 그냥 좋았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축구를 정말 선수로서 해야겠더라고 생각했던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었어요. 당시 박스 컵이라는 국제대회가 열렸는데, 경기가 보고 싶은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볼 수가 없었죠. 근데 당시 저희학교 안에 축구부가 있었는데, 축구부 얘들이 교무실에서 단체로 축구를 보고 있는 거예요. 저도 보고 싶어서 교무실 창문 너머로 올라가서 보고 그랬는데, 그게 너무 부러워서 '아 나도 축구선수가 되어서 텔레비전도 보고 그래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물론 축구도 좋았고요. 그래서 4학년 2학기 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어린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5,6학년 때 팀의 주축이었죠.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체육특기자로 광주 북성중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중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어느 날, 체육과로 누가 부르더라고요. 가보니까 나하고 체력조건이 비슷한 얘들이 몇 명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 하시기에, '볼은 좀 차는데 체격이 너무 작다. 축구선수로서 힘들 것 같고,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하겠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고 정말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에 축구를 하고자 했는데, 축구를 하지 말라고 하니까 온 세상이,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죠. 그래서 그때부터 울기 시작해서, 방과 후에 집에도 안가고 선수들 훈련하는 거 보면서 또 울고, 집에 걸어오는 길에 울면서 오고 그러니 집에 도착하니 얼굴이 엉망이더라고요.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셔서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시고, 저는 울면서 제가 키가 너무 작아서 축구를 하지 말라고 하니까 문틈에 잡고 있을 테니까 다리 좀 늘려달라고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축구를 너무나 하고 싶고, 또 좋아했어요. 그 때처럼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축구를 완전히 접었죠. "
왜소한 체격 때문에 어릴 적부터 갈망하던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겪게 된 그의 축구인생의 첫 번째 위기였다. 공차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어린
축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
"그래서 1학년 2학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연합고사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커트라인을 정해서 그 점수 이상이 되어야 고등학교 진학할 수 있는 제도였어요. 저는 과외도 못했지만,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밤늦게까지도 공부하고 그래서 연합고사에 합격했죠. 그러나 그 당시엔,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추첨이었어요. 컴퓨터 추첨을 했는데 8번을 뽑았어요. 저는 집에서 가까운 살레시오고등학교나 동신고등학교로 갈 줄 알았는데, 금호고등학교였어요. 제가 8회 졸업생이니까 이 학교가 언제 생겼나 할 정도로 신생학교였죠. 그런데 학교를 진학해서 보니 축구부가 있더라고요. 근데 또 그렇게 좋아했던 축구를 학교에서 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제가 선수는 아니니까 하고 싶은 일반학생들끼리 팀을 만들었어요. 1.2학년끼리 같이 만들어가서 광주시내에서 서클 식으로 하는 경기에 나가기도 했고, 거기서 2번 우승했어요. 시합을 준비하는 중에 축구부선수들하고 연습경기도 했었죠. 근데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축구가 운명처럼 다시 나타났다. 너무나 왜소했던 체격 때문에 축구를 할 수 없게 된 그가 들어온 고등학교는 하필 금호고등학교였다. 금호고등학교는 당시 광주에 축구부가 있는 학교 중 그가 들어갈 수 있었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했다. 그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 중에서 금호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된 것은 그와 축구가 다시 만나게 된 운명적인 시작이었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축구를 다시 하게 된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선수로서 성장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동계훈련을 하는데, 갑자기 힘든 훈련을 하니까 훈련 3일 만에 등에 담이 너무 심하게 왔어요. 그래도 허리 숙여가면서 뛰고 고통을 참아가며 이겨냈어요. 다행히 2학년 때 시합도 나갔죠. 처음에는 교체멤버로 나갔는데, 6월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대회를 나갔어요. 예선전에는 20분, 30분, 45분 뛰다가 결승전에 나갔는데 스타팅멤버로 저를 내보내주셨어요. 그 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당시 모든 방송사가 다 중계해 줄만큼 경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볼을 잡아서 왼발 슈팅을 했는데, 긴장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볼보다 축구화가 더 멀리 날라 갔어요.(웃음) 그렇지만 그 경기에서 2 대 0으로 우승을 했어요. 2학년 때 나가서 우승 2번하고, 3학년 때 우리 동기들,
광주효동초등학교에서 북성중학교, 그리고 금호고등학교까지 초, 중, 고 시절 한 번의 큰 굴곡을 겪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논의하던 중, 큰 형님과 동문이셨던
프로축구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다
"포항제철에 입단하고 나서, 포항이 작년에 우승했으니까 이번에 우승시켜야겠다는 부담감보다는 프로에 와서 잘 할 수 있을까, 선수로써 잘 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안 되면 빨리 군대를 다녀와야겠다고 생각도 했었죠. 큰 꿈을 갖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미약했어요. 훌륭한 선배들 사이에서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까하고 기대는 했지만 큰 꿈을 가지고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프로축구선수로서 첫 개막전에 대한 기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87년 현대와의 개막전이 열리던 강릉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김상호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이회택 감독님의 감독으로서의 첫 데뷔경기이기도 했었던 개막전 엔트리 18명안에는 들어가긴 했지만 스타팅이 아니라 후보명단이었어요. 경기가 20분이 남아있는데 포항이 현대에 2 대 0으로 지고 있었어요. 그때 이 감독님이 교체멤버로 신인인 저를 투입시켰어요. 첫 경기라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또 신인이니까 열심히 선배들 따라다니며 그라운드를 누볐죠. 근데 하다보니까 2 대 1이 되고 경기 분위기가 우리 쪽으로 오고, 스코어도 2 대 2가 되었어요. 지고 있는 경기에서 신인인 저를 출전시켰는데 2대2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 다음에도 경기에 많이 뛰게 되었어요. 프로에 진출 한 후 저한테는 생각지도 못했던 출발이었어요. 그리고 그해 준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미드필더 출신
"5월, 천안 오륜경기장에서 럭키금성과 경기를 했어요. 경기 들어가기 전에 이은실선배하고 제가 스트레칭을 하는데, 바닥이 콘크리트였어요. 축구화를 신고 다리를 벌리고 손을 다리 사이로 뒤로 뻗으면 뒤에 근육을 늘려주는 스트레칭을 하는데 축구화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을 찍어버렸어요. 경기도 나가기 전에 얼굴이 부었죠. 저의 몸개그 한번으로 라커룸이 웃음바다가 되었고요. (웃음) 그 때 마침 첫 골을 넣었어요. 물론 데뷔 골이기도 했지만 에피소드가 있어서 쉽게 잊을 수가 없어요."
축구를 다시 시작하고 난 뒤 탄탄대로의 축구선수의 길을 걸어 온 그에게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부상이었다. 88년 1월 프랑스로 떠난 전지훈련에서 무릎인대가 파열되며 그의 인생의 첫 번째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
88년 포항의 우승과 함께 프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온다. 운동선수의 생사가 결정되는 '부상' 이라는 치명적인 이름이다.
"91년은 프로입단 이후 가장 좋은 컨디션이었어요. 34경기에 뛰고 득점도 하고 도움도 많이 하고 최고의 한해를 보냈죠.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대표에도 도전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92년에 리그 초반에 9경기를 풀타임으로 뛰다보니 피로가 누적되어서 5월, 88년 수술했던 십자인대가 끊어 졌어요.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을 했어요. 제가 혼자 수영과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프로그램을 짜서 재활훈련을 했어요. 그렇게 재활에만 몰두해서 93년 1월 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십자인대파열'이라는 부상을 혼자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이겨 낸 그가 또 한 번 '십자인대파열'이라는 부상에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93년 7월 포항전용구장에서 경기를 했어요.
또 다시 부상에 발목이 잡히면서 재활훈련에만 열중했던 그가 94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골이 손상되어 또 한 번의 수술을 하게 되었다. 92년부터 3년 간 총 4번의 수술을 하였다. 그렇기에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보다 선수로의 재기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그러나 그런 그를 끝까지 믿어준 포항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다. 이후 94년 포항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에 전남드래곤즈가 창단되었다. 당시 무릎 부상으로 재활훈련을 하고 있던 그에게 다시 선수로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95년 정규리그부터 다시 선수생활을 시작했어요. 다행히 전남에 있는 동안은 한 번도 수술을 하지 않았어요. 전남은 97년도에 들어서서 가장 좋았던 해였어요. '21경기 무패기록'도 세우고, 정규리그, 컵대회 준우승과 FA컵 우승을 했죠. 저도 노장이었지만 팀의 주축으로 경기를 다 뛰었어요. 그때는 정말 화려한 해였어요."
*좀처럼 맞닿지 못했던 국가대표와의 인연
"1983년, 멕시코에서 청소년 대회가 열렸어요. 그 국가대표를 4월에 선발을 했는데 최종엔트리는 18명이었는데 총 21명을 뽑았어요. 그 21명은 훈련도 많이 시키시고, 세밀한 축구를 구사하는 걸로 유명하신
"숙소가 있던 다대포에서 축구골대를 두고 매일 같이 20바퀴 씩 뛰었어요. 매일같이 뛰니까 체력에 자신이 생겼어요. 어떤 시합을 나가도 체력은 정말 좋게끔 만들어놨어요. 멕시코 대회에서 4강에 들어 간 선수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지만, 청소년대회가 선수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얼마든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훈련했죠."
1988년 포항제철의 우승은
"이것도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요. 나중에 이회택 감독님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89년에 예선에 나가서 우승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고, 그 후 지금의 FA컵 전시인 왕중왕전이 있었는데, 분명히 미리 경기 일정을 보고
선수생활을 접게 되다
'박수칠 때 떠나라'
K리그 통산 232경기 15골 24도움을 기록한 그가
"98년, 노장이었지만 몸 상태가 좋았어요. 이탈리아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경기에 많이 참가하고 골을 넣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골도 많이 넣고 그래서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귀국을 했어요. 그런데 귀국하고 10일이 지났을 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시즌 일주일을 남겨두고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좋았던 몸이 어머니 상주역할하고, 또 그러다보니 훈련에 불참하고 몸이 한순간에 안 좋아지더라고요. 당시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또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죠. 당연히 개막전에도 못 나가고 정신적 방황도 하고, 또 선수생활에 대한 갈등도 심했어요. 그런데도 축구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2군과 훈련하면서 '꼭 재기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훈련을 하고 몸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지고 경기에 나서고 싶었는데 이미
지도자로서의 축구운명
"전남이 정말 고맙죠. 영국에서 3개월, 스페인에서 3개월 연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시간이 저에게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동안의 생각을 있었지만 접하지 못했던 유럽축구를 직접 접해보고, 또 특히 스페인 같은 팀은 2부 리그였지만 객원코치로 들어가서 직접 코치가 되서 선수들과 가깝게 지도자 공부도 했었죠. 저에게는 98년이 선수로써 은퇴한 시기였지만 지도자로써 첫 출발하고 좋은 계기를 만들었던 해였어요. 사실 그때 당시에 간단한 영어만 하고 있었는데, 같이 갔던
지도자로서 첫 우승일 일구다
그렇게 지도자로서 첫 발을 디디게 된
"99년 4월부터 코치생활을 하기 되었는데, 그때 당시 호남대 감독이 동아대학교 스승님이었던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다
2000년,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유소년 전임지도자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만12에서 만15세까지의 선수들을 전임지도자가 뽑아 선수들의 연령별로 관리하는 시스템인데, 이 시스템의 첫 지도자로
"1년 6개월 동안 전임지도자를 하였는데, 마침 들어 간지 3개월 만에 아시아 청소년 대회가 있었어요. 그 때 선수가
그는 2001년, 전남드래곤즈 코치로서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된다. 이회택 감독의 부름에 2군 코치를 자청하였다. 2군은 직접 선수들을 꾸려 보며 더 가까이서 선수들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02년부터 2년 동안 프로지도자로써 2군 대회 우승을 하며, 지도자로서 차츰 경험을 쌓아 나갔다. 이어 2004년 전남의 2군 코치 생활이 끝나고, 쉴 틈도 없이 U-17 수석코치로서 2년 6개월 코치생활을 했다.
"당시 2007년 한국에서 대회를 개최했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에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주었어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큰 대회를 유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충분히 훈련도 많이 했죠. 유럽과도 경기를 해보고, 전지훈련도 가고, 브라질도 가고, 그러나 한국에서 치룬 경기였지만 예선탈락하고 말았어요. 그때 느꼈어요. 사람이 물론 실패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지만 저에게 U-20, U-17 청소년 대회가 지도자로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했어요."
호남대학교 코치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 U-20, U-17세 수석코치와 전남의 코치로써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한 그가 이윽고 도착한 이곳은 강원FC이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 강원FC
"강원에 오게 된 필요한 이유는 저도 몰라요. 저는 2008년 전남과의 계약기간이 끝나서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마침 매스컴에서 강원의 감독이 누구누구 물망에 올랐다는 건 알았지만 제가 강원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아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최종적으로
2009년 첫 시즌을 무난히 잘 치루고 있는 강원FC의 수석코치로써 그는 강원FC의 경기를 가장 밀접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는 선수들이 편하게 자기기량을 발휘해준다면 첫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지녔다며 칭찬하고 격려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운동장 사무실이 처음 만들어져서 갔는데, 그 때 각 팀 전적 만들어놨어요. 직원이 '올 시즌 몇 위나 할 거 같아요?'라고 묻더라고요. 감독님은 9번째, 사장님은 11번째 붙였는데, 저는 7번째로 붙여놨어요. 최소한 7~8위하다가 막판에 6강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왜 그런 자신감이 있었냐면 선수들을 3개월 지도를 해봤을 때 기본적인 기량이 95년 전남 창단멤버보다 낫다고 생각을 했어요. 또 감독님께서 꼼꼼하게 지도를 하시고, 그런데 지금 보면 선수들이 부담을 가지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선수들이 욕심이 가해지면 부담이 커지고 그럼 움직임이 좋지 못하는데, 선수들이 편하게 자기 기량을 발휘해준다면 6강안에도 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축구를 재밌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이
공격축구를 하는 강원FC의 경기덕분에 평균 관중 2위, 득점력 3위로 창단 첫 시즌 놀라운 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지역민과 함께하는 마케팅으로 관중몰이에 다른 구단보다 훨씬 여유 있는 모습이다.
"강원의 인기비결은 아무래도 시민들의 열정적인 축구 열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거의 축구에 미쳤다 싶기도 해요. 매번 그렇게 호응 해주시고, 사실 처음에 어느 정도 호응은 되겠다싶었는데, 이 정도는 놀랄만하죠. 그리고
축구와 함께하는 일생
"선수에서 2군 코치, 수석 코치로 단계적으로 올라왔잖아요. 사실 제가 명성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바로 수석코치를 했겠지만, 올해까지 11년 지도자 생활 중 모든 연령을 다 관리해봤으니까, 맡아보지 못한 실업팀을 제외하고 12세부터 프로축구수석코치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까지 모든 연령층을 해본 것이 모두 다 자산이고 또 지도자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도 많고 또 제가 앞으로 어떤 팀을 맡아도 연령에 맞는 지도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며 거기에 자부심이 있죠. 사실 공백기가 없이 지도자 생황을 이어 오게 된 것도 저한테는 참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사실 남들처럼 족적을 남긴 것은 없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도 오지 않을까 생각도 해봐요."
축구와의 끈질긴 인연의 운명을 갖고 사는
"제가 광주 효동초등학교에서 축구부를 시작했는데, 제가 졸업하고 2년 후에 팀이 해체 되어 지금까지 축구부가 없어요. 사실 소박한 꿈이지만 다시 그 팀에 축구부를 창단시켜서 어린아이들이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지금까지 선수로서 또 지도자로서 그동안의 자료를 모아둔 게 많은데, 저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축구훈련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아직 내놓은 단계는 아니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자를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세 번째로는 아시아에 지도자로 진출하신 장외룡 김판곤 감독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최초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쪽에 진출하고 싶기도 해요. 생각은 자유고 꿈은 되던 안 되던 한 번 꿔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한번 꿔 봐야 하잖아요. 첫 번째는 소박하고 두 번째는 해보고 싶은 꿈이고, 세 번째는 원대한 꿈이죠."
"산다는 것은 행복하다 일하는 것이 즐겁다.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 매일 매일이 새롭고 감사하다."
축구와 운명을 함께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또 살고 있는 그의 마음속에 꼭 간직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의 인생의 축구는 바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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