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던 김호 감독 ⓒ스포탈코리아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김정남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고, 아시아 최고로 꼽혔던 수비의 명수 김호. 축구 선수 김호는 1964년부터 1976년까지 13년 동안 제일모직, 해병대, 상업은행, 포항제철 등 실업 팀에서 맹활약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뛰었는데, 특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아시아의 거의 모든 대회를 우승하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기여했다. 1969-1970-1971년 태국 킹스컵 우승, 1970년 아시안게임과 1971년 박스컵 우승, 1972년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우승까지 이웃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중동의 강팀을 모두 물리치며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나라가 지다니, 내가 축구 배워 이길 것

축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가 열한 살이었던 1954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 때까지 김호는 육상 선수로 뛴 적은 있었으나 축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라디오를 통해 축구중계를 들었는데 국가대표팀이 자유중국(현 대만)에 2-5로 졌다. 5월 8일 열린 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 결승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속이 상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6월에는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에게 0-9, 터키에게 0-7로 대패했다.

소년 김호는 그때 “축구를 배워서 국가대표팀에 뽑히고 우리나라가 지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그 무렵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최정민, 문정식, 차태성을 우러러 보며 그와 같은 선수가 되겠다고 꿈을 가졌다.

“그때 축구부가 있는 통영중과 통영고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축구부가 없었거든요.”

김호는 두룡초를 졸업한 뒤, 통영중과 통영고에 입학했고 마침내 동래고로 전학했다. 동래고는 수비의 명수를 잇따라 낳은 축구 명문이다. 김호, 김호곤, 박성화, 정용환, 최영일, 김치곤 등이 이 학교 축구부 출신이다. 동래고에서 태극 마크를 달겠다는 야망을 키웠던 그는 1966년에 마침내 태극 마크를 달고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열 살 많은 차태성 선배님과 대표팀에서 함께 생활할 때는 감개무량했습니다. 존경했던 대선배였는데 같이 뛰었으니까요. 처음 선발됐을 때는 내가 막내였는데, 말년에는 아홉 살 아래의 차범근이 막내로 들어왔습니다. 10년 주기로 맏형과 막내가 한 팀이 되는 게 역시 감격스러웠죠.”
김호 감독 ⓒ스포탈코리아
단점을 찾아 빨리 보완하라

단점을 보완하고자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실력이 달라진다고 그는 믿는다.
그 견해는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인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40년 전 최고의 수비수가 꼽은,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한 비결이다.

“자기의 단점을 빨리 보완해야 명수비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선수 시절에 경기를 마치면 내 시간을 가지고 조용히 경기 내용을 되새겼는데, 그날 밤 자리에 누우면 경기 상황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죠.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 되지 않는지 생각합니다.”

“나는 수비수였는데 점프력이 약했죠. 또 순발력을 보완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점프를 했고 또 순발력 연습을 했어요. 멈췄다가 뛰기, 턴(제자리에서 방향 바꾸어 달리기), 산을 오르면서 구간 정해서 달리기, 산 내리막길 빨리 뛰기를 했습니다. 수비하는 사람에게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언제나 돌아설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하죠.”

학생이 시험을 치른 뒤 틀린 문제를 공부해서 왜 틀렸는지 알아내고 다음에 틀리지 않도록 복습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박이천 인천 부단장은 선수 시절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대표팀에서는 동료지만 실업에서는 무서운 상대였죠. 나는 국민은행, 김호 선배는 상업은행이었죠. 신장이 좋고, 스피드도 빠른데다가 침착하고 냉철했던 한 마디로 완벽한 수비수였습니다. 지금 K-리그에서도 그만한 능력 있는 수비수가 없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렇게 플레이를 하는 수비수가 있다면 유럽리그에 곧바로 진출했을 겁니다.”
대전을 지휘하고 있는 김호 감독 ⓒ스포탈코리아
화를 다스리고 냉철하게 판단하라

“마음가짐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화를 다스릴 수 있어야죠. 훌륭한 기술을 가진 좋은 선수지만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중요한 경기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성급하고 다혈질의 플레이를 하면 퇴장·경고를 자주 받기 때문에 좋은 수비수라고 볼 수 없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냉철한 판단력이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축구와 같은 단체 종목은 참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협동하고, 조직의 요구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팀의 상황을 빨리 읽고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하죠.”

김호는 선수 시절 숱한 반칙과 자신을 향한 공격을 참아냈다. 경기를 위하여 냉정을 찾고 꾹꾹 눌러 참아 팀을 위한 자신의 플레이를 했다. 이러한 자세는 그가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삶을 이어가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모교인 동래고를 시작으로 한일은행, 현대(현 울산현대), 수원삼성과 현재는 대전 시티즌에서 감독을 맡고 있다. 1999년 4개 대회 전 관왕과 리그 우승 2회를 비롯해 8년 동안 창단 팀을 13회나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프로 통산 203승을 거둔 명장이다. 이 감독 최다승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79년에는 청소년대표팀 코치로서 U-20 월드컵에 참가했고, 1994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는 선수로 이십여 년을 뛰었지만, 두 배인 사십여 년을 지도자로서 바쁘게 지냈다. 침착하고 냉철했던 중앙 수비수는 한결같은 자세로 오늘도 축구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김호 : 1944년 출생. 1966~1973년 국가대표 선수. A매치 71경기. 1964~1976년 실업 선수. 현 대전시티즌 감독)


글=손성삼(KFA 기획실 과장)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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