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했던 최종수비수 조영증 ⓒ스포탈코리아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활약한 ‘수비의 명수’ 조영증.
그는 중동중, 중대부고, 중앙대 출신의 중앙 수비수였다. 1975년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그는 제일은행과 해병대를 거쳐 1981년 NASL(북미축구리그)의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해 수비수로 뛰었다. 1년 뒤 시카고 스팅즈로 옮겨 활약하다가 1983년에 한국에도 본격적인 프로축구가 시작되자 돌아왔으며, 럭키금성(현 FC서울)에서 4시즌을 더 뛰었다. 조영증은 태클-몸싸움-제공권에 강하고 감독과 동료에게 신뢰를 주었던 한국의 대표적인 최종 수비수였다.

명수비수의 기본은 패스 차단 기술과 팀 전술 이해

“훌륭한 수비수는 상황을 잘 예측하며, 전술도 잘 이해하고 움직입니다. 개인 전술과 부분 전술, 그리고 팀 전술이 있는데 개인 전술은 기본 기술이 있는 선수라야 가능하죠. 상대가 나를 돌파하지 못하도록 자세를 낮추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을 빼앗거나 상대를 압박해야 합니다. 또 패스의 도중 차단과 제공권 처리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동료의 수비를 돕는 커버링도 팀 전술의 하나죠. 측면 수비수는 중앙 수비수와 역할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비수는 매우 귀합니다. 우측에 김호곤, 좌측에 황재만, 최종덕, 중앙에 김호, 김정남, 박성화 같은 선수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비수였죠.”

국가대표 향한 뚜렷한 목표의식

그는 LG축구단(현 FC서울)과 현대축구단(현 울산현대)의 코치를 거쳐 안양LG 감독을 맡아서 프로 감독 통산 31승 33무 47패 성적을 거뒀다. U-17 대표팀과 U-20 대표팀 감독을 맡았었고, 대한축구협회(KFA) 유소년위원, 기술위원, 기획실장, 아시아축구연맹(AFC) 강사와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을 두루 거쳐 지금 파주NFC 센터장을 맡아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KFA 기술교육국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금의 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목표 의식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성권 감독님이 권하기도 했지만, 좋아해서 축구를 시작했죠. 파주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그때부터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중동중학교 시절 3년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거쳐 통학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4시간 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미아리로 갔습니다. 중동중학교 훈련장이 미아리에 있었거든요. 훈련하고 다시 서울역을 거쳐서 파주로 돌아오면 밤 10시였어요. 힘들었지만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서 그 생활을 꾸준히 했죠. 그때 유판순 감독님, 김영민 코치님이었는데 기억할 거예요.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키가 작았습니다.”

당시 그의 통학 친구가 이영무 안산할렐루야 단장이었다.
“나는 파주 금촌에서 기차를 탔고, 이영무는 능곡에서 탔죠. 통학하면서 날마다 기차에서 만났고, 같은 학년이라 경기장에서도 계속 자주 만났죠.”

둘은 나란히 중동중-중대부고-중앙대와 경희중-경희고-경희대를 졸업했다. 이영무 단장도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가 경의선 기차 통학 친구였지만 나는 공격수고, 조영증은 수비수라 경기장에서 만나면 서로 양보할 수 없었죠. 중학교 때는 그의 키가 작아서 나랑 비슷했어요. 그때 통학하는 운동선수가 대부분 거칠었는데 조영증은 차분하고 성실해서 친하게 지냈죠. 그래서 계속 지켜봤는데 영리해서 위치 선정도 좋고, 상대 패스를 잘 끊었어요. 빠르지는 않았는데 느리긴 해도 1:1에 강하고 돌파 당하지 않아서 듬직한 수비수였죠. 기본 기술을 잘 갖추고 있어서 나중에 공격수도 할 수 있었습니다.”

통학하던 1960년대는 남북관계가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북이 가까웠던 파주에는 소문도 많았어요. 무장 간첩이 넘어와 귀와 목을 잘라간다는 말이 돌 때였는데 캄캄한 새벽에 집에서 역까지 허허벌판을 20분 넘게 걸으면서 공포가 말도 못했죠.”

하지만 그는 국가대표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두려움과 고단함을 모두 이겨냈다.
“중대부고에서 합숙하면서 잘 먹고 잘 자면서 키도 부쩍 컸습니다. 아침마다 겁먹을 일도 없고 걱정도 덜하게 됐죠. 중앙대 시절 드디어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경제적인 부는 따르지 않았지만 대단한 자부심을 누릴 수 있었죠.”
1975년 박스컵에서 우승한 후 한국대표팀(윗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조영증)
꾸준히 연습을 반복, 성실히 준비

“발전을 위해서는 반복 훈련이 필요한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나아질 수 없습니다. 마음 먹는 선수는 많지만 이틀 연습하고 하루 쉬는 식이라면 훈련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죠.”

꾸준한 연습은 부상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12살에 축구를 시작해 34살까지 22년 축구를 하는 동안 큰 부상이 없었습니다. 1987년 은퇴 무렵 겨울에 오른발 피로골절 부상이 유일했으니까요.”

선수 시절 부족한 점을 보완했던 경험담이다.
“예측력이 좋아서 쉽게 수비를 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체력-지구력-스피드가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풋워크(Foot work, 잔발 운동)를 열심히 했죠. 첫째, 줄넘기를 매일 30분에서 1시간 가량 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둘째, 계단 오르내리기를 했어요. 중대부고 시절부터 중앙대학교 도서관으로 오르는 100개 남짓 계단을 무수히 오르내려서 순발력을 길렀습니다. 셋째, 터닝 연습입니다. 혼자 돌아서서 뛰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그는 훈련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팀 훈련에 보다 프로답게 철두철미해진 미국에서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영어를 못했는데 통역도 없이 팀 경기와 훈련에 참여했지요. 훈련 시각이나 소집 장소도 자주 바뀌어서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한 번은 공항, 한 번은 전혀 다른 처음 가는 훈련장에서 연습한다는 걸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곳에서 혼자 기다린 적도 있었죠. 훈련장이 멀 때는 카풀을 했는데 오후 4시 30분 시각을 잘못 알고 있다가 놓치고 장소를 몰라서 훈련에 못 간 적도 있어요. 그 무렵부터 시간과 약속 관념이 철저해졌죠.”

1986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한 번도 주전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 번 교체로 뛰었던 그가 멕시코 본선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전했던 것도 전지 훈련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솔선수범하고 연습경기 때마다 좋은 플레이를 보여 감독에게 신뢰를 준 때문이었다.

(조영증 : 1954년 출생. 1975~1987년 국가대표 선수. A매치 84경기 1득점. 1984~1987년 K리그 52경기 14득점 5도움. 현 KFA 기술국장 겸 파주NFC 센터장)


글=손성삼(KFA 기획실 과장)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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