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위의 영원한 주장 강철 ⓒ부산아이파크
현재 부산 아이파크의 수석코치인 강철은 청소년-올림픽-국가대표팀을 거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는 연세대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89년, 만 17세 7개월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했고, 1991년에는 세계 청소년 대회에 참가해 팀을 8강까지 이끌었다.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했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도 참가해 역대 최고의 성적(2승 1패)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유독 월드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축구가 어려울 때 그는 항상 구세주를 자청했지만 월드컵만큼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1990년에는 홍명보 (현 올림픽팀 감독)에 밀려 최종명단에서 탈락했으며, 94’ 월드컵에서는 출국 하루 전 심각한 발목 부상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2001년에는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2002 월드컵을 준비했지만 히딩크 감독과의 사소한 마찰로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했다.

육상부 소년, 축구부 주장이 되다

강철은 타고난 주장이었다. 그는 축구를 시작하자마자 주장이 됐으며, 현역을 마무리한 전남에서도 주장 완장을 찬 바 있다. 재미있는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하기 위해 인근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전학 간 이듬해 곧바로 주장이 됐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주장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다. (그는 목소리도 아주 좋으며, 말도 조리 있게 잘한다. 그래서 더욱 주장을 맡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당시에는 할 게 없었어요. 야구를 하려면 글러브나 배트 같은 걸 사야 되니까 할 수 없었고, 동네에서 축구 밖에 안 하니까 축구를 할 수 밖에 없었죠. 맨 처음에는 육상을 했었어요. 학교에 축구부는 없고 육상부만 있어서 육상부였는데, 축구부가 있는 바로 옆 학교랑 축구 시합을 하게 된 거에요. 초등학교 5학년 때 거기서 게임을 뛰고 스카우트 됐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에서도 다 주장을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주장을 했죠.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볼을 잘 차서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아무래도 선수들이랑 잘 어울렸고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들이 주장을 시킨 거 같아요. 제 생각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리더십도 있었고요.”

프로와 대표팀에서의 강철은 영리함과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믿음직한 왼쪽 수비수였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강철은 수비수가 아닌 최전방 스트라이커였다. 대신고 재학 중에는 아시아 학생 선수권대회에 참가해 득점상과 MVP를 싹쓸이 하는 등 공격적인 재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였다.

“아시아 학생 선수권 대회를 나가는 (국내)대회가 있었어요. 제가 고3때는 한양공고가 그 대회에서 우승을 한 거에요. 그래서 한양공고 선수들이 주축으로 가는데 거기에 제가 일원으로 들어간 거죠. 저보다 더 잘하는 선수가 많았는데 운 좋게 제가 한양공고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됐어요. 근데 제가 득점상하고 MVP를 다 받았죠.”

“고등학교 졸업할 시기에 연세대 진학이 결정되고서는 절박했죠. 축구 아니면 힘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때는 제가 공격수를 봤으니까 공격 포인트가 중요해서 항상 포인트에 신경을 많이 썼죠. 예를 들어 후배한테 크로스를 올려달라고 해서 들어가면서 골 넣는 연습이나 슈팅, 일대일 돌파 같은 것을 많이 연습했어요.”

이후 연세대에 진학한 그는 측면 공격수를 보던 선배의 부상으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우연한 계기로 포지션을 바꾼 그였지만 어렵지 않게 주전 자리를 꿰찼고, 결국 이회택 감독(현 KFA 부회장)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경사를 누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7세 7개월로 파격적인 대표팀 발탁이었으며, 3년 선배인 홍명보보다 먼저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대학 첫 대회를 앞두고 풀백을 보던 형이 다쳤어요. 그래서 정병택 감독님께서 제가 빠르니까 그 포지션을 보라고 하셨죠. 근데 제 생각에도 잘 했어요. 어시스트도 몇 개 했고, 포항 1.5군하고 결승전에서 4-1인가 4-2로 이겼는데, 제가 1골 1어시스트를 했어요. 그때 이회택 감독님께서 경기를 보신 거죠. 당시 대표팀 감독이셨으니까요. 그때 감독님이 뽑으셔서 대학교 1학년의 나이에 처음으로 대표팀에 들어가게 된 거죠.”
91년 U-20 월드컵에 참가했던 남북단일팀(3번이 강철) ⓒ한국사진기자회
악바리 같은 승부근성, 그리고 일찍 찾아온 첫 월드컵 기회

강철이 처음 국가대표팀에 입성했을 당시, 대표팀에는 정해원(KFA 기술위원), 변병주(전 대구 감독), 조병득(수원 삼성 코치), 최순호(현 강원 감독) 같은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들이 즐비했다. 이미 농익은 플레이를 펼치던 대스타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20살 이상이나 어렸던 막내 강철은 타협이 아니라 도전을 선택했다. 특유의 승부근성 때문이다.

“솔직히 힘들었어요. 그때는 형이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죠. 다 ‘삼촌, 삼촌’이라고 했죠. 조병득 선배님은 제가 어렸을 때 동대문운동장에 가서 사인 받았던 분이었어요.(웃음) 한번은 타워호텔에서 샤워를 하는데 서러움이 북받치는 거에요. 어리니까 게임은 못 뛰고, 볼만 들고 다니고.. 그게 맨날 서러운 거에요. 나도 게임을 뛰어보고 싶고, 자신 있고 그런데 말이죠. 샤워를 하면서 막 울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승부욕이 정말 강한 것 같아요. 운동하는 사람은 다 마찬가지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승부근성이 강한 것 같아요. 선착순 같은 거 하면 이기고 싶어서 막 울면서 뛰었으니까요. 내 앞에 누가 뛰는 것을 못 봤어요.”

“고등학교 때 이후로 노력을 정말 많이 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안 빼놓고 약수터 정상까지 매일 뛰었어요. 대학교 때는 합숙을 하잖아요. 합숙을 하면 새벽 운동을 나가고 싶은데 각방에 몇 명씩 같이 쓰잖아요. 그러면 몰래 일어나서 나가야 돼요. 내가 막 부시럭거리면 다른 애들도 잠 깨서 따라온단 말이에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남보다 더 많이 훈련하고 싶어서요.”

새벽에 남 몰래 나가서 훈련을 하기 위해 강철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알람이라도 맞춰놓으면 편했겠지만 알람이 울린다면 동료들이 깨는 건 당연했다. 그는 항상 자기 전에 새벽에 입고 나갈 옷을 입은 후, 행여나 아침까지 잠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수 차례나 눈을 떠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 승부근성이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철의 첫 월드컵 진출 도전은 실패로 마무리됐다. 대표팀에서 꾸준히 훈련을 해왔지만 당시 대학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로 각광을 받던 홍명보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어디서나 승승장구하던 강철에게 찾아 온 첫 번째의 좌절이었다.

좌절된 첫 월드컵 도전, 청소년 대표팀-올림픽대표팀의 성공으로 위안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행 티켓을 놓친 18세 소년에게 심리적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다는 점은 큰 실망감을 주위와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아픔을 나누고, 그의 실망감을 위로해준 사람은 그의 부모님. 당시에는 에이전트라는 것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부모님이야말로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실망을 많이 했었죠. 저는 그 동안 1989년도에 대표팀에 들어가서 꾸준히 있었고, 1990년 월드컵 바로 직전에 엔트리가 바뀌었으니까요.”

“그 당시에 실망을 많이 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대학교 1학년이면 아직 어린 나이였잖아요. 저도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기회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도 ‘내가 최고는 아니구나,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밀리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구나’ 생각했죠.”

“이게 다가 아니다,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온다, 내가 여기서 실망을 해서 포기하면 나는 실패한 거다.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얘기를 해주시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죠. 아, 더 노력을 해야겠다.”

다행히 강철은 오랫동안 실망감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실망감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1990년 U-19 대표팀에 발탁돼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AFC U-19 챔피언십에서 한국에 우승컵을 선사한 강철은 이듬해 열리는 포르투갈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이 함께 U-20 월드컵 티켓을 따내자 국내에서는 남북단일팀을 구성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남북단일팀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남, 북한 각각 9명씩으로 이루어진 남북단일팀은 본선 첫 경기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를 만났다. 강철은 남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수비진에 포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력으로 아르헨티나 공격수들을 놓치지 않았다. 결과는 후반 43분에 터진 북한 조인철의 벼락 슈팅으로 1-0 승리. 이 승리로 남북단일팀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아르헨티나는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그 때만해도 아르헨티나나 다른 팀들이 어떤 축구를 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강팀이라는 것은 알잖아요. 저는 수비수였기 때문에 동료들한테 말은 안 했지만 ‘5~6골 먹을 수도 있다. 최소실점을 하자. 1~2골은 괜찮은데, 5~6골은 망신이다’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몸을 던지고, 11명 선수들이 그러다 보니까 하늘이 도왔는지 1-0으로 이겼어요.”

“서로 울고, 전부 쥐가 나서 차를 못 탔어요. 얼마나 열심히 뛰었으면 배까지 근육경련이 일어나서 앉아있지를 못했어요. 저는 호텔까지 실려갔다니까요. 업히면 종아리에, 앉아있으면 배에 근육경련이 일어나서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꺾으며 파란의 주인공이 된 남북단일팀은 조별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아일랜드와 기적 같은 1-1 무승부를 기록하고, 홈팀 포르투갈에는 0-1로 패하면서 1승 1무 1패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1-5패)을 연속으로 만나 8강의 벽은 넘지 못했다.

U-20 월드컵에서 역대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일군 강철은 쉴 팀도 없이 올림픽대표팀에 발탁됐다. 마라톤의 감동으로 기억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축구대표팀은 3무를 거두며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서정원(현 올림픽대표팀 코치), 정재권(현 한양대 코치), 신태용(현 성남 감독) 등 뛰어난 공격수들이 모여있어 기대를 모았지만 단 2골 밖에 득점하지 못해 아쉬움을 전했다. 발목 부상으로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스웨덴전) 밖에 뛰지 못했던 강철 역시 무패에도 불구하고 8강에 들지 못한 것에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골은 2골 밖에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떨어지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그래도 나름대로 얻은 것은 전에는 세계대회에 나가면 실력차가 많이 났었잖아요. 근데 진 것 없이 3무를 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거에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 참가했을 때(뒷줄 5번이 강철) ⓒFIFA
월드컵이요? 전 올림픽을 두 번이나 나갔는걸요...

촉망 받던 축구선수에게 과거의 좌절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실패는 덮어놓고 싶은 법이니까.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강철 코치가 “조금 있다 월드컵에 대해서 물어보실 거잖아요”라며 웃을 때에도 긴장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픔을 초월한듯한 그의 말투는 방심을 불렀고, 반짝이며 빨개진 그의 눈을 봤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철은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이 없다. 월드컵이라는 무대가 4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의 대회니만큼 그 경험을 가진 선수라면 최고 중의 최고임이 분명하다. 강철은 17세에 국가대표가 돼 U-20 월드컵과 올림픽을 통해 검증된 대한민국 최고의 왼쪽 수비수였다. 1993년에 입단한 유공(현 제주)에서도 줄곧 주전이었고, 프로 첫 해 대표팀 소집으로 단 9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신인왕 후보에 올랐을 만큼 임팩트가 강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좌절 후, 쉼 없는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왼쪽 수비수가 된 강철의 1994 미국 월드컵 출전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축구는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는 출국 하루 전 가진 자체 연습경기에서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의 두 번째 월드컵 도전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8주 동안 깁스를 해야만 했다.

“그 때는 정말 포기하려고 했었어요. 너무 많이 다쳐서요. 청소년, 올림픽, 그 다음이 월드컵에 나갈 차례인데...엔트리까지 다 확정되고 내일이면 출발하는 거였어요. 근데 오늘 훈련을 한 거에요.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누가 패스한 볼이 길었는데 저는 멈췄단 말이에요. 근데 안익수(FC서울 수석코치) 선배가 온 거에요. 피한다고 피했는데 익수 형 발목을 밟아버린 거에요. 오른발이 제껴지면서 두두둑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때 경기를 보면서 솔직히 속상하잖아요. 저 자리에 내가 뛰어야 되는데 실망을 많이 했죠. 그래서 내가 축구를 계속 해야 되나 많이 고민 했었죠. 그만 둘 생각도 했었죠. 근데 월드컵 뒤에 또 아시안게임이 있었단 말이에요. 운동할 수 있는데 운동도 안하고 그러니까 그때 유공 박성화 감독님이 ‘포기하면 안 된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봐라’면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죠. 거기서 힘을 얻어서 아시안게임에 나갔던 거고요.”

미국 월드컵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출전한 아시안게임 4강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 0-1로 패해 병역 혜택을 받지 못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전은 슈팅수 35 대 1, 볼 점유율 약 9:1로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한 번의 골키퍼 실수로 무너져 국민들을 허탈감에 빠트린 경기였다. 강철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축구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신문선(명지대 교수) 선배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얘기를 했지만, 그건(우즈베키스탄전 패배) 정말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그때 내가 게임을 뛰면서 우리 감독님(황선홍)한테 골 좀 넣으라고 울면서 부탁을 했었어요. 제발 골 좀 넣으라고 계속 말을 했더니 우리 감독님이 ‘누가 넣기 싫어서 못 넣냐’면서 짜증을 내더라고요. 안 되려면 그렇게 안 되는 거에요. 그 다음해에 군대에 끌려갔죠.(웃음)”
2000년 아시안컵에 참가했을 때(뒷줄 2번 선수) ⓒ베스트일레븐
강철은 95년 12월 상무에 입대해 96, 97시즌을 쉬었다. 실전 감각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그는 98 프랑스 월드컵을 TV로 지켜봤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 2001년 1월 1일에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그 해 4월 강철을 선발해 9월까지 꾸준히 그를 지켜봤다. 강철은 홍명보가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을 때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서기도 하는 등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최종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정말 좋아했었어요. 제가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이집트 전지훈련에도 합류하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제가 주장이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선수들을 길들이려고 조금 독단적으로 했던 경향이 있었어요.”

“선수들이 밥을 다 먹었는데, 밥 먹는 거 30분이면 다 먹잖아요. 그리고 (밥 먹었으면) 쉬어야 되는데, 코칭스태프에서 사인을 안 주고 오래 잡아 놓는 거예요. 동료들과 형들이 ‘네가 주장이니까 이야기를 해라, 한국 스타일은 밥 먹으면 가서 쉬어야 된다’고 말하라고 부추겼어요. 그래서 가서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자신이 한국팀을 맡을 때 한국 선수들은 거의 다 복종하는 스타일이라고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안 뽑더라고요.”

“그리고 당시 (홍)명보 형을 뽑지 않았을 때인데, 어쩌면 제가 명보 형을 길들이기 위한 방패막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를 먼저 생각했다면 저를 먼저 길들였겠죠. 주장까지 하고 시합이란 시합은 다 뛰었는데...”

“또 하나는 당시 전남이 조금 힘들었어요.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제가 수비를 보다가 공격으로 올라갔단 말이에요. 이회택 감독님이 전남에 계실 때였는데, 제가 미드필더도 보고 공격수도 봤어요. 그때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팀에서 네 자리를 보지 않으면 대표팀에 오기 힘들다. 너희 감독한테 얘기를 하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근데 의리라고 해야 할까, 이회택 감독님하고 저 사이의 신뢰가 있고, 또 아무리 월드컵이라도 팀도 중요하잖아요. ‘감독님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를 공격에 배치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는 말씀을 못 드렸죠.”

“은퇴를 하고 난 뒤 지도자 공부도 할 겸 네덜란드, 독일 등 몇 군데를 다녔어요. 그때 히딩크 감독님을 찾아갔죠. 훈련하는 것 좀 보려고요. 거기서 미팅을 하게 되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물어볼게 있다고 하니까 히딩크 감독님이 ‘스톱’하시더라고요.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안다’면서요.”

“그러면서 저한테 뼈 있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너도 지도자가 되어 봐라’ 지금도 아직 제가 지도자로서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선수 기용 면에서 그런 뉘앙스를 풍긴 것 같아요. 너도 괜찮은 선수였지만 홍명보가 더 나았다. 이런 뉘앙스가 제 귀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2001년 9월 말,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을 때까지도 강철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월드컵까지는 앞으로 수 개월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다시 불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2002년 4월 30일 발표된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긴 한숨)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못 받았어요. 월드컵에 못 나가서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대표팀을 계속 했는데 월드컵을 못 나가다 보니까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도 못하더군요. 축구선수라면 월드컵은 꿈 아니에요. 못 나간 게 큰 마이너스고...”

“그런데 또 저 나름대로 위안을 삼는 게,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두 번 나가본 선수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강철 외에 한국에서 올림픽에 두 번 출전한 축구선수는 이천수와 최태욱, 김동진, 김정우 정도 밖에 없다. 어쨌든 12년간 한국축구를 위해 성실히 뛰어준 축구 스타의 슬픔이 진심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런 그가 올림픽 두 차례 출전에 위안을 삼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다. 2002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황선홍 감독도 “골을 넣어서 기뻤지만 월드컵에서의 1골만으로 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월드컵 성과로만 축구선수를 평가하는 것에 경계심을 표시한 바 있다.
부천 시절 2000년 대한화재컵에서 우승한 직후(왼쪽) ⓒKFA 홍석균
유공과 부천, 그리고 전남 드래곤즈

강철의 축구 인생은 대부분 대표팀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부천(현 제주)에서의 강철 역시 빛나는 별이었다. 1993년 연세대를 졸업한 강철은 유공(전 부천/현 제주)에 입단해 프로에 데뷔했다.

“당시에는 6개 팀이었어요. 따라서 각 팀마다 대표급 선수들이 지금보다 많았죠.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가 게임이 더 치열했고 더 하기 힘들었죠. 대학 때만해도 영리하게 볼만 연결해주는 스타일이었는데, 프로에서는 그렇게 했다가는 내가 죽겠더군요. 몸싸움도 더 강하게 해야 하고, 포인트도 올려야 하고..좀 더 적극적인 선수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94년 유공에는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현 톰 톰스크 감독)이 부임해 아기자기한 ‘니포 축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니폼니시 감독님이 오셔서 처음부터 아기자기한 축구를 하지는 않았어요. 훈련이 매번 똑같았죠. 3년 동안 패턴이 거의 비슷했어요. 그 축구가 결실을 본 건 니폼니시 감독님이 러시아로 돌아가시고 나서 조윤환 감독님이 맡으면서였죠. 3~4년에 걸쳐 계속 똑같은 훈련을 하니까 그게 선수들의 몸에 배었어요. 결국 2000년에 K-리그 준우승과 대한화재컵 우승, FA컵 3위를 했어요.”

부천 특유의 시스템에 익숙해진 강철은 1999, 2000시즌에 자신의 전성기를 보여줬다. 그는 이 두 시즌에만 8골-4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베스트 11상을 수상했다. 부천에서 성공적인 두 시즌을 보낸 강철은 2001년 돌연 오스트리아 라스크 린츠로 이적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생활은 단 4개월로 짧았지만, 강철은 이 곳에서 많은 것을 얻어왔다고 말했다.

“그때 제 자신을 돌아봤죠. 저는 후보생활이라는 것을 안 해봤어요. 대표팀에서도 후보생활은 안 해봤어요. 근데 오스트리아에 갔는데 아픈 것도 아닌데 저를 후보명단에 넣더라고요. 그때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되나 싶었어요.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지만, 창피하고 괜히 고개도 못 들겠더라고요. 후보들은 워밍업을 하잖아요. 워밍업 하는 것 자체가 창피했어요. 관중들이 다 저만 보는 것 같았어요. 어디든지 숨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오스트리아 애들은 감독 앞에서 워밍업을 하더라고요. 자기를 뛰게 해달라는 시위였죠. 저는 창피해서 ‘어떻게 저렇게 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 친구들은 그런 게 없더라고요. 단 1분을 뛰어도 감독하고 하이파이브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운동장을 밟는 순간 미치는 거에요. 내가 축구를 정말 잘못 배웠고 너무 순탄하게만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단 1분을 뛰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창피한 게 아니다. 게임을 뛰고 안 뛰고를 떠나서 운동장을 밟는 게 나의 행복이라면 내가 이렇게 좌절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죠.”
베이징 올림픽대표팀 코치 시절의 강철 ⓒ이상헌
이후 수원과 전남에서 러브콜을 받은 강철은 이회택 감독과의 의리를 위해 전남을 택했다. 그러나 4개월 만에 타 팀으로 돌아온 강철을 바라보는 부천 팬들의 시선은 잔인하기까지 했다. 경기장에서 강철의 유니폼을 태우는 화형식까지 했을 정도다.

“저 욕 많이 먹었어요. 한번은 전남 홈 경기를 하는데 헤르메스(부천 서포터즈)가 뒤에서 욕을 하더라고요. 너무 북받쳐서 운 적도 있었어요. 제가 가고 싶어서 오스트리아로 간 게 아니었거든요. 사실상 쫓겨난 거였어요. 그런데 팬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정말 답답했죠. 부천 후배와 동기들이 돈 더 받게 해주려고 구단과 협상하다가 미운 털 박혀서 팀을 나오게 된 것이었거든요.”

이후 강철은 전남에서 주장 완장까지 차며 마지막 투혼을 불태웠다. 비록 2002 월드컵 출전은 물거품이 됐지만 그는 전남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 부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피치를 떠났다.

“2년 동안 운동할 때보다 더 열심히 재활을 했어요. 거의 다 나았는데 훈련을 하다 또 다쳤어요. 구단에서 은퇴를 권유했고 유학도 보내준다니까 은퇴를 결정했죠. 물론 은퇴하면 모든 선수가 다 아쉽잖아요. 많이 부족했던 것 같고, 더 잘할 수 있는데 못 한 것 같고. 잘했든 못했든 축구선수라면 언젠가 한번은 은퇴를 해야 되기 때문에, 동기들보다 빨리 공부를 해서 지도자로 성공을 하면 되잖아요.”

전남에서 은퇴한 그는 2007년 8월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해 후배들을 지도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는 부산에서 황선홍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활약 중이다.

“축구는 제 일생의 행복이에요. 축구를 하면서 행복했고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요. 지도자로서의 계획이요? 내년 준비를 잘해서 좋은 성과를 갖고 싶고, 좋은 성과라는 것은 우승이에요. 저는 목표는 크게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은퇴하면서 선수 때는 월드컵에 못 갔지만 지도자로 월드컵에 가보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래서 자비로 영국도 가보고 나름대로 많이 배운다고 배웠는데, 아직은 배우는 과정이고 시행착오가 생길 거라고 생각을 해요.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요?(웃음)”


인터뷰=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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