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반 한국축구를 이끌었던 인천 유나이티드 박이천 감독 ⓒ스포탈코리아
1970년대 한국축구를 논하는데 있어 박이천(60, 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170cm가 되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폭발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상대 수비를 헤집는 그의 플레이는 당시 축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7년 U-20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된 박이천은 1969년부터는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1974년 태국 킹스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날 때까지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윙 또는 중앙 공격수로 활약하며 빠른 돌파와 정확한 킥 능력으로 대표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영도중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하다.

박이천이 축구를 처음 시작한 시기는 다른 이보다 조금 늦은 중 3때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 선수로 서울시 대회 200m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스피드를 자랑했다. 축구부가 있던 영도중에 입학했지만 평범한 학생으로 생활하던 박이천의 인생이 바뀐 것은 중 3이 끝나가던 11월이었다.

어느 대회에 참가 중이던 영도중 축구부는 선수가 11명밖에 없었고, 그 중 1명이 경기에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11명은 맞춰서 나가야 했던 축구부 입장에서는 일반 학생 중에서 대체 선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반 아이들과 자주 축구를 하긴 했었죠. 그런데 축구부에서 1명이 부족하게 되자 일반 학생들 중에서 볼 잘 차는 애가 있냐고 물어봤고, 아마 애들이 저를 지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대회에 나가게 됐지요.(웃음)”

“대회에 나갔는데, 수원중학에 0-2로 지면서 탈락했죠. 그런데 감독이셨던 윤재봉 선생님이 소질이 있으니까 축구를 해보라고 그러시더군요. 하지만 집안 반대도 워낙 심하고 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윤재봉 감독의 설득은 집요했다. 영도중과 영등포공고의 감독을 겸직하고 있던 윤 감독은 몇 번이나 박이천의 집으로 찾아와 장학금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당근책을 제시하며 가족을 설득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박이천은 결국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영등포공고 축구부로 들어갔다.

1971년 제 1회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활약하는 박이천
기본기부터 다시 익힌 동북고 시절

영등포공고 1학년 때부터 베스트 멤버로 출전한 박이천은 이 무렵‘한국축구의 풍운아’이회택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김포에서 학교를 다니던 이회택이 영등포공고로 전학을 온 것. 그러나 이회택의 합류로 전력 급상승을 기대했던 영등포공고의 꿈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이회택의 기량을 눈여겨본 축구명문 동북고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고, 결국 이회택은 동북고로 다시 전학을 가고 말았다.

이회택이 나가고 박이천이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영등포공고는 팀 해체설이 나돌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박이천마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배들이 여기 있지 말고 다른 학교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광주상고로 전학을 갔고, 거기서 3개월 훈련하고 대회에 나갔어요. 그런데 부정 선수로 지적을 당해서 계속 뛸 수가 없었고, 다시 영등포공고로 오게 됐죠.”

우여곡절 끝에 영등포공고로 다시 돌아온 박이천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먼저 동북고로 전학을 간 이회택의 추천으로 동북고로 팀을 옮기게 된 것. 2학년이었던 박이천은 동북고에서는 다시 1학년부터 시작했다. 그 곳에서 축구의 기본을 제대로 배우게 됐다. 박 감독은 그 시절이 선수 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박병석 선생님이 감독이셨는데, 기본기를 정말 잘 가르쳐 주셨거든요. 처음엔 리프팅도 제대로 못했지만 개인훈련을 열심히 해서 두세달 만에 기존 선수들을 따라잡았죠. 2학년 때부터 게임을 조금씩 뛰기 시작했는데, 연습경기에서는 잘하면서 실전에서는 경험 부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연습게임용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그러다가 2학년 마치고 겨울 훈련을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했습니다. 다른 선수가 쉴 때도 혼자 연습했죠.”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박이천을 중심으로 한 동북고는 간판스타 이회택이 졸업한 바로 그 해에 11개 대회에 참가해 9개 대회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때는 최상철, 정규풍, 최재모가 버티고 있던 한양공고가 동북의 라이벌이었는데, 우리가 9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한양공고가 2개 대회에서 우승했죠. 저는 그 해에 30골 정도 넣은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졸업 선수 중에서 랭킹 1위로 평가받았죠.”

중앙대 입학, 그리고 양지 팀으로

동북고를 고교 최강으로 이끈 박이천은 여러 대학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중앙대였다. 동북고 시절 은사인 박병석 감독이 동북고와 중앙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고, 존경하는 스승 밑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

그러나 중앙대에서의 생활도 길지는 않았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양지 팀으로 들어가게 된 것. 그 무렵 창단된 양지 팀은 북한이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자극받아 만든 군 축구팀. 김호, 김정남, 이회택, 이세연, 정강지 등 대표팀의 주축 멤버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대표팀이나 마찬가지였죠. 숙소가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안에 있었는데 처음엔 제가 막내여서 선배들 빨래부터 뒤치다꺼리를 다 했어요.(웃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팀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힘든 점은 없었어요.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죠. 1년 내내 합숙이었고 외박은 1주일에 한번 주고... 지루하다든가 그런 것도 못 느꼈습니다. 군인이니까 하라면 당연히 해야 했지요.(웃음)”

“양지팀 소속 기간이 학력으로 인정되어서 양지 팀을 나오자마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죠. 그런데 제대를 열달 정도 앞두고 양지 팀이 해체됐어요. 그래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지키는 부대에서 남은 기간을 복무했죠. 물론 그 곳에서도 축구를 했습니다.”
1972년 메르데카배 우승컵을 들고 귀국한 박이천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에 잇따라 뽑혀

박이천이 처음 태극마크를 달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하자마자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대회 멤버에 포함되었던 것. 첫 대표 발탁의 설레임을 안고 대회에 임한 박이천은 홍콩과의 경기에서 5골을 뽑아내는 엄청난 득점력을 뽐내며 아시아 무대에 그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1승 1무 1패로 조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외국에 나가서 경기를 하다보니 긴장이 많이 됐죠. 그렇지만 스피드나 기술면에서 동남아 선수들보다 내가 낫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코칭스태프에서도 좋게 평가해줬고...”

1969년부터는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김호-김정남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최고 수비진과 이회택이라는 가공할 스트라이커가 주축이었다. 박이천으로서는 그들과 함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찬다는 것 자체가 꿈과 같았다.

“김호, 김정남, 이회택 같은 분들은 아시아에서 알아주는 선수들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 분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지금 선수생활을 했다면 대단한 주목을 받고 유럽 무대를 휘저었을 겁니다.”

“당시 대표선수들은 각자가 특기 하나씩은 갖고 있었어요. 지금 후배들은 특징 있는 선수가 드문 것 같아 아쉽습니다. 다만 지금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선수들이 팀 플레이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면은 있죠.”

대표팀 초창기 시절 그는 주로 윙으로 많이 뛰었다. 빠른 스피드를 살리기에 가장 적합한 포지션이었다. 1972년 차범근이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중앙에서도 뛰었다. 이회택과 함께 투톱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회택 선배와는 워낙 오래 같이 있다보니까 패스 타이밍이나 움직임에서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차)범근이가 합류하면서 범근이가 오른쪽 윙, 제가 중앙, 왼쪽에는 정규풍이 서곤 했죠. 대표팀 말년에는 허정무가 들어왔고요.”

대표팀에서의 기억들

1969년부터 6년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박이천은 수많은 하이라이트를 연출했다. 특히 1972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5경기에서 4골을 뽑아내며 최다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첫 경기 이라크전을 제외하곤 결승전까지 4경기 연속골을 기록했죠. 이란과의 결승전에서 1골을 먼저 내준 뒤 제가 동점골을 터트렸어요. 결국 연장전까지 갔는데, 연장 끝날 무렵에 이차만의 패스가 인터셉트 당하면서 결승골을 내주면서 졌죠. 참 잊지 못할 경기입니다.”

“1972년이었던가요? 제1회 한일정기전을 일본에서 했는데 제가 40m 거리에서 장거리 킥을 시도한 것이 그대로 골로 연결됐죠.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은 1971년 뮌헨 올림픽예선에서 말레이시아에 0-1로 패한 것입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는데, 정말 득점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결국 득점에 실패하고 헤딩골을 허용해 패했죠. 그 경기만 이겼으면 올림픽에 한번 나가볼 수 있었는데...”

박이천은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지만 A매치에서 36골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득점을 올렸다. 문전에서 스피드를 살린 돌파에 이어 날카로운 슛으로 골을 뽑아냈고, 프리킥도 정확했다. 차분함을 갖춰 페널티킥도 도맡아 찼다.
1973년 서독 월드컵 예선을 앞둔 대표팀 훈련중(왼쪽)
국민은행 거쳐 홍콩에서 선수생활

1971년 국민은행에 입단한 이후 실업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당시에는 금융팀들이 한국축구를 이끌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국민은행은 상업은행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는 실업축구도 열기가 대단했죠. 어느 대회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우리가 결승전에서 상업은행을 2-0으로 이긴 경기가 있었어요. 한참 우승 기분에 들떠 헹가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충격이 오더니 피가 흐르더군요. 상대팀 관중석에서 병을 던져 머리를 맞았던 것이죠.”

1976년에는 국민은행에서도 은퇴를 하고,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광운전공고가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박이천을 창단 감독으로 영입한 것. 그러나 2년 뒤인 1978년 다시 현역으로 돌아왔다. 그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홍콩이었다.

“학교 측과 잘 안 맞는 것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홍콩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변호영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홍콩에 있는 해봉 팀으로 갔는데, 운동량이 부족해서 힘들었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던 터에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어요.”

“1년을 쉬다가 사우스 차이나 팀에 입단했습니다. 그 팀은 중국계 선수만 뽑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가 비중국계로는 처음 입단한 것이었죠. 그런데 거기서도 허벅지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은퇴를 해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선수생활을 하다가 홍콩에 갔다면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였을텐데, 지도자 생활을 하다 간 것이라 아쉬움이 있었죠.”

“당시 홍콩은 세미 프로였지만 수준은 우리보다 떨어져서 한국 선수들이 많이 왔습니다. 세이코 팀에 김재한, 변호영, 박수덕, 강기욱 같은 선수들이 왔고, 우리 팀에도 이회택, 이차만 같은 선수들이 오곤 했어요.”

정명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 시작

1980년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한 박이천은 한동안 축구계를 떠나 개인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1986년 정명고 창단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후 2003년까지 정명고를 이끌며 이기형(전 FC서울), 김대의(수원), 최성국, 김철호(이상 성남), 김영삼(울산)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다.

“예전 동북고 시절 박병석 선생님께 기본기를 많이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저 역시 제자들에게 기본기 훈련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게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네요.”

1996년에는 U-19 대표팀 감독을 맡아 아시아 청소년 대회 우승을 이끌어냈지만, 이듬해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악몽과도 같았던 브라질전 3-10 패배로 물러나야 했다.

“역시 국제 경험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어요. 당시만 해도 프로 선수는 한 명도 없었고... 또 전술적으로도 변화를 주지 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정명고에서 다시 후진 양성에 몰두했던 그는 2004년부터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기술고문 역할을 맡은데 이어, 장외룡 감독의 잉글랜드 유학으로 인해 올 시즌 감독에 부임, 인천을 이끌었다.

“나중에는 유소년 축구 쪽으로 돌아가 어린 선수들을 양성해보고 싶은 것이 마지막 꿈이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7년 10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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