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전설이었던 강정훈 ⓒ손춘근
대전의 축구 팬들은 ‘강정훈’이라 쓰고 ‘레전드’라 읽는다. 1998년 대전에 입단한 강정훈은 K-리그 통산 259경기에 출전해 총 8골과 12도움을 기록했다.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꿋꿋이 대전의 승리를 갈구했다. 대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부주장으로 선수단을 이끌었고, 2007년에는 동료와 팬들의 신임 속에 주장 완장을 찼다. 그 해가 강정훈의 선수시절 마지막 시즌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정훈의 프로생활은 대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97년 창단한 대전은 이듬해 강정훈을 드래프트로 선발했다. 대전에 입단하자마자 공격수로 인정받은 강정훈은 이후 10년 동안 대전을 위해서 몸을 바쳤다. 스트라이커가 필요할 때는 스트라이커로, 미드필더가 없을 때는 미드필더로, 그리고 수비가 약해지면 수비수로 피치에 나선 이가 바로 강정훈이다. 자신을 버리고 팀을 위해 뛰었던 그를 팬들은 레전드로 기억한다.

빵과 우유의 유혹, 땅끝마을의 작은 소년이 서울로

요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이어트 한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30년 전만해도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이미 은퇴한 대다수의 축구선수들은 ‘빵과 우유’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한다. 지금은 그깟 ‘빵과 우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당시는 ‘빵과 우유’라면 대단한 유혹이었다.

“제가 자란 곳은 지도에도 나올까 말까 한 전라도 땅끝이에요. 그때는 밥 한끼를 먹으면 잘 먹었다고 생각해요. 아침에 한 끼만 먹고 점심은 수도꼭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고 그렇게 지냈어요.”

“한번은 너무 배고파서 저녁때 솥 단지를 열어봤더니 개미들이 무지하게 많은 거에요. 개미를 빼고 빼도 너무 많으니까 그냥 물을 말아먹은 적도 있어요. 개미밥을 먹은 거죠.”

강정훈은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덩치가 좋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강정훈은 삐쩍 말랐다. 그는 어렸을 때 힘들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축구만큼은 줄곧 잘했다. 그는 해남으로 전지훈련을 왔던 한양중 감독의 눈에 띄어 서울 영의초로 전학을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한양중 감독님이 서울로 전학을 오라고 해서 영의초로 갔죠. 영의초를 가야 한양중을 갈 수 있거든요. 한양중에서 정말 잘하면 한양공고를 갈 수 있고, 거기서 더 잘하면 한양대에 가는 거였죠.”

전라도 땅끝의 어느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강정훈은 서울로 오게 되면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 어머니는 덩치가 아주 작았던 강정훈이 축구라는 힘든 운동을 하는 게 못미더웠지만, 그가 축구를 하는 모습에서 강정훈의 재능을 발견했다. 결국 그는 한양중-한양공고를 거쳐 한양대까지 진학했다.

결국 허리 수술로 이어진 힘겨웠던 유년기

축구라는 운동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세계 유수의 축구선수들이 대단한 근육질을 가지게 된 것은 몸 자랑하려고 일부러 만든 게 아니다. 그라운드에서 버텨내기 위해 스스로 자리잡은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니 160cm도 안 되는 작은 선수가 감당하기에 축구는 너무 힘들었다. 강정훈의 몸에는 과부하가 축적되고 있었다.

“중학교 때 키가 너무 작다 보니까 남들보다 운동을 두 배로 많이 했어요. 어두울 때까지 기본기를 연습했던 기억이 많은데, 키가 너무 작으니까 감독님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시기에 6개월을 쉬게 한 거에요. 이때 거의 20cm가 커버린 거에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다시 운동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키가 컸으니까 허리는 힘이 없지, 밸런스는 안 맞지. 그 때 재활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그런 게 없었을 텐데, 그런 거 없이 혼자 열심히 했죠. 그러다 보니까 허리가 고질병이 된 거에요.”

지금도 강정훈의 허리에는 네 개의 핀이 박혀있다고 한다. 대학교 때 받은 허리 수술 때문이다. 그는 완치가 불가능한 허리를 가지고 보통 사람도 견뎌내기 힘든 어려운 운동을 해야 했다. 그로 인해 방황도 많았고, 두 번이나 그만 둘 생각을 했다. 만약 강정훈이 말하는 ‘인복’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축구를 그만 뒀을 것이다.

“한양대에 가서 MRI를 찍으니까 ‘척추분리증’ 판정이 난 거에요. 그때 이회택 감독님(현 KFA 부회장)이 한양대 부장이셨는데, 축구부 감독님은 ‘수술을 하지 마라’고 하시고 이회택 부장님은 ‘수술을 하라’고 하셨어요. 결국 수술을 했고 4개월이 지나서 다시 축구를 하기로 했죠. 그 때부터 축구부 감독님은 저하고 얘기도 안 했어요. 저한테 운동 그만두라고 하고 다른 거 찾아보라고 하시고. 저는 도저히 미래가 안 보여서 그만두기로 하고 어머니와 함께 이회택 부장님을 찾아갔죠.”

“옆에 사모님께서도 계셨는데 이회택 부장님께서 막 욕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그만두면 뭐해서 부모님 먹여 살릴 거냐고, 내셔널리그라도 가서 돈 벌 생각이나 하라고, 당장 내려가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저는 말도 못하고 그냥 내려왔어요. 이회택 부장님이 저를 키워주신 거에요. 지금도 저를 보시면 ‘넌 참 웃긴 놈이라고, 금방 그만 둘 놈이 제일 오래 한다’고 항상 말씀하세요.(웃음)”

이후 강정훈은 벨트 두 개로 허리를 고정하고 축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몸에 탄력이 생기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프로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대전에서의 강정훈
프로선수로의 시작,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강정훈

K-리그 드래프트를 신청한 강정훈은 안양(현 서울)이나 울산에 지명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대전이 그를 지목했고 그는 대전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각오를 새롭게 다진 프로에서의 생활. 그러나 신인의 프로 생활은 자기가 잘하는 것보다 팀에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쉽지 않았어요. 그때 감독 선생님이 저를 잘 보셨는지 개막전부터 뛰게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내 위치가 아니다 보니까 자신감은 많지 않았죠. 그러나 건방지게 내 위치가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남들은 뛰고 싶어서 안달하는 자리에 선발로 뛰게 하는 거니까요. 말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대학 때까지 미드필더밖에 안 봤어요. 오직 미드필더였지, 공격수나 수비수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프로에 와서 힘들었던 것이 감독님께서 저를 공격수로 기용하시는 것이었어요. 몸도 왜소한데... 상대팀은 외국인 선수도 무탐바(콩고, 전 안양)라든지 이랬는데.(웃음) 저는 장점이 패스인데 골을 넣어야 되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데뷔전이 안양이었는데 어떻게 경기 했는지 모르겠어요.”

강정훈의 입단 초기에 대전에는 신진원이라는 간판급 미드필더가 있었다. 당시 대전에 필요한 건 미드필더를 받쳐주는 공격수였고, 미드필더 강정훈에게 그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미드필더로만 뛰어온 강정훈에게 스트라이커라는 자리는 낯설기만 했다.

“’프로에서는 한계가 있구나’하고 순간적으로 포기도 많이 했어요. ‘내가 정말 안 되는 걸까? 왜 안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죠. 자신감이 없었어요. 내 위치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이 떨어졌던 거 같아요.”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강정훈은 대부분의 시간을 교체 선수로 보내야 했다. 대전은 2001년 ‘기적’처럼 FA컵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듬해 1승 11무 15패라는 치욕스러운 성적으로 K-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2002년 말에는 대전의 해체설까지 나돌아 선수들을 괴롭혔다.

“한심했죠. 그 때는 ‘비겨도 이긴 거다’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선수들이 이긴다는 생각은 못했으니까요. 솔직히 이겨야지 돈을 더 받는 건데, 우리는 비겨도 이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기고 싶었지만 이긴다는 것 자체가 생각이 안 드니까 거의 비기거나 졌던 것 같아요.”

“(해체설이 나돌 때는) ‘이제 대전이 해체하면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을 많이 했죠. 실력이 괜찮은 선수들은 다른 팀으로 가야겠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고요. 구단 상황이 계속 열악하니까 우리 선수들은 ‘언제 또 해체될까’ 이런 마음도 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의가 있으면 가야 되겠다는 마음도 많이 들었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동료와 함께 득점의 기쁨을 나누는 강정훈
최윤겸 감독의 분석축구, 강정훈에게 날개를 달다

대전 입단 초기, 맞지 않은 옷을 입고 허우적대던 강정훈은 최윤겸 감독이 부임한 2003년부터 드디어 미드필더에 서게 된다. 최윤겸 감독은 철저한 상대 분석과 빠른 템포의 축구로 대전 축구의 색깔을 만들었다. 그의 전술에는 미드필더 강정훈이 있었다. 강정훈은 120% 능력을 발휘하는 느낌이라고 당시를 표현했다.

“서로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제 스타일 그대로 한 것뿐인데, 그게 감독님 스타일하고도 맞았던 것 같아요. 최윤겸 감독님은 공부(분석)를 정말 많이 하세요. 한 게임을 위해 상대 게임, 우리 게임을 계속 보시죠. 상대팀을 어떻게 압박을 하고, 압박이 풀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걸 연구하시는 거에요. 조직적으로 약속된 플레이를 일일이 연습했어요. 비디오를 계속 보게 유도하고 상대팀 분석을 하고 그러니까 그게 공부가 많이 됐죠.”

“비디오를 한 번 본 것과 서너 번 본 것과는 다르거든요. 저는 진짜 집사람이 싫어할 정도로 비디오를 많이 봤어요. 게임을 뛰면 무조건 녹화를 하고, 구단이 찍은 비디오도 복사를 해서 집에 가자마자 한 번 보고 자요. 그 다음날 아침에도 한 번 더 보고, 숙소에 가서도 보고, 집에 와서도 또 한 번 봐요. 제가 뛴 경기는 못해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아요. 상대팀의 경기도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봤고요.”

강정훈은 자신의 전성기를 최윤겸 감독이 부임한 2003년에서 2004년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대전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2003년 6월 18일 울산과의 경기에서는 43,077명의 관중이 찾아 대전의 축구 열기를 자랑했다.

“그 때는 홈에서 진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한 골을 먹더라도 무조건 ‘이건 역전이다’, 쉽게 진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지금도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면 그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해요. 힘들었지만 재밌었다고요.”

“이동국하고 김상식이 광주에 있을 때였는데, 완전히 압도적인 경기를 했거든요. 말 그대로 광주를 희롱했어요. 광주는 최고로 좋은 멤버였죠. 그 때 제가 코너킥 상황에서 상대가 걷어낸 것을 발리슛으로 골을 넣었어요. 그 경기가 최고의 경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 다시 봐도 프로하고 중학교 팀이 경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광주를 농락했죠.”

그러나 대전 축구의 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경기장에 가서 볼만큼 재미가 없다’는 말이 주위에서 들렸다. 그러더니 성적 역시 다시 과거로 돌아가 탈꼴찌 다툼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팀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은 포백(Back 4)이 무너졌기 때문이에요. 당시 우리 포백의 중앙이 (김)성근이와 (장)철우 형이었거든요. 근데 성근이가 빠져나간 거에요. 그래서 (최)윤열이 형이 들어왔는데 윤열이 형하고 철우 형이 비슷한 스타일이에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비슷하면 안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스리백(Back 3)으로 바뀌고 안전한 축구를 하고 ‘뻥축구’가 될 수도 있었던 거죠.”

대전은 매년 동계훈련에서 포백을 준비했다. 그러나 선수층이 얇다 보니 준비한 포백에 결원이 생기기 일수였고, 그때마다 매번 준비하지 않았던 스리백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대전의 축구 팬들은 경기장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대전월드컵경기장은 비어만 갔다. 그러나 대전이 어려운 순간에도 강정훈은 그라운드에 있었다.
팀 동료 이관우와 함께~
레전드가 낯선 K-리그, 아쉬운 마지막 큰 절

강정훈은 대전의 실질적인 살림꾼이었다. 대전의 주장은 최은성이었지만 부주장이었던 강정훈은 최은성을 도와 대전 선수들을 이끌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미소와 진실된 인간성, 그리고 깊은 정이었다.

“2003년에 부주장, 2005, 2006년에도 부주장이었어요. 2007년엔 주장이었고요. 저는 나서는 게 싫어요. 사실 뒤에서 다 하는 게 더 좋거든요. 제가 항상 웃으면서 하니까 동생들이 잘 따랐어요. (축구 팀에서) 중요한 건 형들이 아니라 동생들이거든요.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못하면 팀 워크가 안 맞잖아요. 저는 단합대회를 많이 했어요. 선-후배 관계를 떠나서 격식 차리지 않고 하니까 그런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최윤겸 감독님도 방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까 들어오라고 하셨고요.”

“사실 최윤겸 감독님이 오시기 전에는 대전 선수들이 서로 뭉치지 못했어요. 말로는 가족적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죠. 그런데 최 감독님이 그것을 바꾸셨어요. 단합대회도 많이 하고 ‘형이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속 마음도 얘기를 하고 그러니까 속으로만 갖고 있던 악감정들이 다 풀어지는 거에요. 그러면서 ‘운동장에서 열심히 하자’고 단합하면서 경기를 뛰었죠.”

최윤겸 감독과 최은성의 강한 요구로 주장을 맡은 강정훈은 2007년 중순 최윤겸 감독이 물러나고 김호 감독이 부임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김호 감독의 선수단 변혁으로 주전에서 밀려난 것. 대전의 레전드라 불리던 정신적 지주는 그렇게 벤치로 물러났다. 여기에 더해 2008년에는 방출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통보했다. 한 팀에서 10년을 뛴 선수인 걸 감안한다면 다소 가혹한 처사였다.

“당연히 야속한 마음도 있었죠. (송별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많이 했어요. 임영주와 최윤열은 자존심이 상해서 안 했고요. 저는 팬들한테 인사도 할 겸 고민 끝에 한다고 했죠. 한편으로는 구단에서 나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는데...”

“전에 K리그 상위팀에서 P감독이 더블베팅도 했었거든요. 대전하고는 금액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났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축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최 감독님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당시 최 감독님도 제의가 있었는데 선수들과 팬들을 위해서 다른 팀으로 안 갔어요. 그래서 저도 안 간 거에요.”

“그래도 후회는 절대 없어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했으니까요. 어디를 가든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르는 거니까요. 팬들도 워낙 가족 같고, 고마웠고요. 뿌리도 여기서 내리고 싶었어요.”

대전에서 송별식을 가진 강정훈은 코칭수업을 경험하기 위해 내셔널리그의 김해시청에서 5개월간 플레잉코치로 생활했다. 그러나 그는 유소년 육성의 꿈을 꾸고 있었고, 다시 대전 축구의 중흥을 위해 대전으로 돌아왔다.
대전 지역의 유소년 축구를 위해 축구클럽을 개설한 강정훈 ⓒ손춘근
여전히 짝사랑 중인 강정훈, 그가 보여주는 레전드의 조건

그는 현재 ‘강정훈 축구클럽’이라는 유소년 축구팀을 이끌고 초등리그와 중등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그의 꿈은 대전에 축구센터를 건립해 대전을 위해서 뛸 축구 선수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꿈은 조금씩 여물어가고 있다. 클럽 축구를 접하는 선수들이 조금씩 기량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관우는 ‘형, 그때 다른 팀으로 갔어야 해’라고 말을 하죠.(웃음) 집사람도 가끔씩 후회를 하는데 저는 항상 긍정적이에요. 왜냐하면 지금이 더 잘 됐으니까요. 만약에 제가 다른 팀을 갔다면, 아니면 지금까지 뛰었다면 지금처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더 늦어지겠죠.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요. 지금 이 생활이 너무나 행복해요.”

“이렇게 자리잡기가 힘든 건데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꿈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저는 고등학교 클럽까지 만들건데, 더 잘되면 대학교까지 만들 거에요. 이 아이들을 육성해서 대전으로 보내고 싶어요. 이게 현실적으로 제가 꾸는 꿈이에요. (웃음)”

자신이 애정을 갖고 10년 동안 희생했던 팀. 끝까지 남고 싶었던 그 팀에서 방출된 강정훈이지만 여전히 대전을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커다란 챔피언 트로피를 들 수도 있었던, 더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항상 대전을 선택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애정은 그가 레전드로 기억되는 가장 첫 번째 요소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긍정적인 생각과 참된 인간성은 강정훈을 레전드로 만든 두 번째 요소다.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강정훈은 먼저 고개를 숙여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간다. 기량이 뛰어나지만 언제나 도도한 축구 선수들이 있지만, 강정훈은 그렇지 않다.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인성이기도 하다.

“레전드로 평가해주시니 감사하죠. 제가 그 정도의 사람인가 생각도 해보고요. 저를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감사해요. 고맙고. 저도 팬들이 워낙 가족 같았고 정이 많이 가더라고요. 뿌리도 여기서 내리고 싶었고요.”

축구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추가시간까지 더해야 겨우 100분 정도다. 동계훈련부터 시작해 거의 한 시즌을 함께 생활하는 선수들은 경기장 위에서보다 경기장 밖에서 호흡을 맞출 일이 더 많다. 여기에서 강정훈이 보여주는 인격은 100분간의 특출난 활약보다 팀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인성을 더욱 중요시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대전 팬이 아니라면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축구 팬도 있다. 그렇지만 대전에서 그는 레전드로 통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언제나 팀을 위해 몸을 던졌던 미드필더 강정훈. 우리에게 레전드의 표본을 보여준 그가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길 기대한다.


인터뷰=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4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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