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의 대모 유영실 ⓒ손춘근
한국 여자축구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 전에 시작됐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해 하키나 핸드볼 선수들을 모아 급조된 팀이 한국 여자대표팀의 출발이다. 우리나라의 축구사가 100년이 넘는 것과 비교할 때, 여자축구의 시작은 상당히 늦은 편. 게다가 여자축구가 체계적으로 시작된 것이 1991년이니 실제 여자축구의 역사는 20년이 채 안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 19일, 동산정보고에서 만난 유영실(35) 감독의 축구 경력은 18년이다. 은퇴 후 이어가고 있는 지도자 생활까지 더하면 그녀의 축구 경력은 무려 19년.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유영실이 바로 한국 여자축구의 시작, 1991년에 축구를 시작한 1세대 여자축구 선수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축구를 이끌고 월드컵까지 출전했던 ‘여자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유영실의 파란만장한 현역 시절을 소개한다.

‘거친 성격’의 유영실, 축구를 위해 광양여고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남녀 구분 없이 다 함께 몰려다니며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며 뛰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유영실의 유년시절도 우리의 기억 속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그녀는 남자 아이들과 같이 축구를 하면서 거친 성격이 몸에 베었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그녀가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사실 유영실은 배드민턴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던 유영실은 배드민턴부가 해체되자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 생활했다. 그러나 어린 여학생에게 타지 생활은 괴로움이었고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배드민턴을 그만 뒀다.

“힘든 게 부담스러워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하고 싶다는 후회를 한 거죠. 고등학교 때는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었어요. 마침 여자축구가 활성화 될 때였는데, 광양여고 축구부가 창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축구를 하고 싶습니다’ 했죠. 그리고 테스트를 한 달 받고 시작했어요.”

“제가 거친 것을 좋아해요. 구기 종목도 좋아하고요. 축구 같은 경우는 항상 남자친구들과 많이 해왔고 너무 하고 싶었던 운동이었어요. 축구가 쉽기도 했고요.”

한국 여자축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유영실이 광양여고로 전학 갔을 때, 한국에는 여자축구를 위한 환경적, 교육적인 여건이 갖춰졌을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여자 운동선수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편견은 감내하기 힘든 요소.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나도 여자축구에 어느 정도 편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운동장은 좀 작냐? 가슴 컨트롤은 어떻게 하냐? 그럴 때는 손을 써도 되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남자축구와 여자축구를 판이하게 다르게 생각하더라고요. 그런 질문에는 어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편견이 싫었어요.”

“게다가 합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는데,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집에서 통학까지 해야 하는 것들도 힘들었죠. 그리고 당시에는 기술 축구보다는 80~90분을 뛰어야 되니까 그런 체력 훈련들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1999년 여자대표팀 시절의 유영실(아랫줄 오른쪽에서 3번째) ⓒKFA 홍석균
1년 만에 국가대표로, 당시 여자축구의 현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광양여고에서 축구를 시작한 유영실은 이듬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요즘 같으면 농담처럼 받아들여지겠지만 당시 유영실은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축구를 시작한지 1년도 채 안 되는 어린 고등학생을 국가대표로 선발할 만큼 당시의 여자축구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게다가 유영실은 국가대표팀에서 주전이기까지 했다.

“선수층이 얇기도 했지만 거친 성격 때문에 축구에 더 잘 적응했던 것 같아요. 지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늘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거든요. 당시에는 태클이 위협적인 시대였으니까 저의 거친 플레이가 돋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작은 키(171cm)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에도 체격이 좋은 편이었어요. 성격도 거칠다 보니까 제공권 싸움, 몸 싸움에 능했어요.”

“저는 항상 베스트 11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1, 2, 3학년이 거의 같이 창단을 했기 때문에 실력은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저희 학년이 거의 주축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여자축구부가 거의 없었다. 여자 선수들을 지도해본 지도자도 전무한 상태였고, 연습할만한 상대를 찾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남자축구를 가르치던 지도자들이 그대로 여자축구를 가르치다 보니 한국의 여자축구는 스스로의 색깔을 만들지 못하고 남자축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연습도 남자 고등학생, 중학생과 해야 했으니 플레이 스타일이 남자 선수들과 비슷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파워와 스피드도 중요하지만 일본 축구를 보면 패스워크를 가장 중요시 하거든요. 일본은 ‘여자축구=패스워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남자 선생님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남자축구에 맞는 색깔이 드러나더라고요. 파워, 스피드, 큰 스케일, 거칠게. 일본과 경기를 해보면 기술 차이가 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근데 알고 보면 일본 선수들이 정말 여자축구에 걸맞은 축구를 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남자축구 흉내 내고 있고.”

시작이 늦기도 했지만 선 굵은 남자축구를 주입시킨 우리 여자축구는 아시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웠다. 매번 중국-북한-일본-대만에 대패하기 일수였다. 여자축구의 현실에 맞는 장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무작정 남자축구를 따라 한 결과였다. 대회 또한 성적보다는 말 그대로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초창기에 우리나라는 대만 밑이었어요. 중국, 북한, 일본, 대만 다음으로 아시아 5위였죠. 약한 팀과는 나름대로 자신 있게 경기했지만, 강 팀과 할 때는 방심하면 수십골씩 먹었어요. 전반전은 정신력으로 버티는데, 후반전에 체력에 한계가 오면 수십골씩 먹어요. 그럴 때는 빨리 게임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나 교체돼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너무 많은 골을 먹으니까 피하고 싶은 경기를 여러 번 했던 것 같아요.”

한곳을 응시하며 과거를 회상하던 유영실은 지옥 같았던 대량실점 경기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골을 실점하면 순간 놀림거리로 전락했다는 느낌과 함께 몸이 굳어지고 표정관리도 어렵다. 모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이랄까? 유영실은 국가대표팀간 경기에서 그런 경험을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간다. 또한 대량 실점할 줄 알면서 경기에 나가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축구를 왜 했을까’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언제 한 번 이겨보나’, 아직 멀었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빨리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희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좌절하지는 않았어요. 저희는 발전하는 과정이었잖아요.”
2001년 일본과의 경기 모습 ⓒKFA 홍석균
수 많은 국제대회에서의 좌절에도 유영실은 여자축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희대학교를 졸업할 당시 유영실은 잠시 축구를 떠나게 된다. 주먹구구식의 스위퍼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상과 ‘스위퍼가 대세’인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찰라 였다.

“저 나름대로 하고 싶은 축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저희가 스위퍼 시스템을 썼거든요. 감독님이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자리가 스위퍼니까 저한테 시키셨는데, 사실 스위퍼가 청소부 역할이잖아요. 스케일이 커야 되고, 공 오면 항상 쓸어야 되고, 길게 클리어링하고 이런 단순한 플레이가 싫은 거에요. 한번 실수하면 모든 책임이 저한테 오니까 너무 부담스러웠고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생각하는 축구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 벽에 부딪히다가 저도 모르게 ‘내 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대표팀에도 들어가지 않고 임용고시 준비를 했어요. 체육 선생님이 돼야겠다면서 운동을 그만 뒀죠.”

결국 유영실은 대학 졸업 후 당연시되던 실업팀 입단을 포기했다. 대신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새로운 인생을 대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임용고시는 결코 쉬운 게 아니었고, 그녀는 다시 그라운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개월의 일탈 끝에 유영실은 1998년 12월 현대제철(현 INI스틸)에 느지막이 입단했다. 대신 이번에는 좀 더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미드필더로 보직을 옮겼다.

“막상 그만두니까 제가 느꼈던 부분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죠. 세상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요. 그라운드에 있을 때 가장 존재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다시 정신차리고 운동을 재기했죠. 그때 감독 선생님도 많이 바뀌면서 포지션에 변화가 생겼어요. 제가 좋아하는 축구는 조금 아기자기한 축구거든요. 그래서 공수 전환을 다 할 수 있는 미드필더를 봤어요."
2003년 여자월드컵에 참가한 유영실 ⓒKFA 홍석균
안정 찾은 유영실, 당당히 세계 무대에 서다

일련의 방황을 마치고 실업팀에 자리잡은 유영실은 급속도로 안정을 찾고 축구에 몰입했다. 그 사이 한국 대표팀에는 유기흥 감독에 이어 안종관 감독이 선임되며 깜짝 놀랄 도약의 초석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3년, 한국 여자축구는 드디어 대변혁의 시대를 맞았다. 미국에서 열린 제4회 FIFA 여자월드컵에 당당히 출전권을 획득한 것이다. 여자축구 사상 최초로 일본을 꺾고 따낸 기적 같은 월드컵 진출이었다.

“일본전만 이기면 저희가 월드컵 진출 티켓을 따는 게임이었는데 전반전에 한 골을 넣어 1-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후반전 들어가자마자 (박)은선이가 욱하는 성질에 실수로 퇴장을 당해버렸어요. 그래서 40분 동안 10 대 11로 싸웠거든요. 저희가 (선제골을) 못 지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4백(back 4) 라인의 리드자, 그리고 주장으로써 전체적인 조율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어요. 근데 뭐가 씌었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날 우리가 그랬나 봐요. 상대가 저희보다 한 수 위고, 선수도 저희가 한 명 적은 10:11인데도 그날따라 저희를 무너트리지 못하더라고요.”

“측면 크로싱도 날카롭게 수 없이 날아오고 중앙돌파도 수 없이 들어왔는데도 그날은 진짜 모든 게 차단이 되더라고요. 저희가 힘겹게 후반을 버텨서 1-0으로 이겼거든요. 사실 11:11로 싸워도 저희가 역전패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인데, 10:11로 이겨서 인상이 깊어요.”

당시 얘기를 꺼내자 유영실은 다짜고짜 일본전 승리를 설명하느라 싱글벙글이었다. 사실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겸했던 당시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다. ‘아시아 빅3’라 할 수 있는 북한(2-2 무승부)을 상대로도 거의 이길 뻔했고, 일본에게는 사상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 이때가 한국 여자축구 1차 전성기의 시작이었고, 주장이었던 유영실에게도 전성기였다.

“그 당시에는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 강했어요. 다른 대회보다 그 대회에서는 응집력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훈련도 충실히 했었고, 선수들 나름대로도 개인 준비를 많이 했어요.”

“코칭스태프가 바뀐 것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던 이유였어요. 당시 수석코치 선생님이 김상진 선생님인데, 그 선생님이 오시면서 공격적인 축구가 적용이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공격력이 강화되고 수비도 안정감을 찾게 됐죠. 그런 전술들이 시합 때 잘 먹혔던 거 같아요.”

아시아에 3.5장이 배정되었던 월드컵 본선 행 티켓은 북한,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배달됐다. 3, 4위 전에서 우리나라에 패한 일본은 북중미의 멕시코와 플레이오프를 치러 천신만고 끝에 월드컵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인해 월드컵 개최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변경된 상황이었고, 아시아 지역 예선전도 연기를 거듭한 끝에 2003년 6월에 열렸다. 9월에 열릴 본선까지는 겨우 2개월 밖에 준비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북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 여자대표팀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소식. 아시아에서의 상승세를 그대로 세계 무대로 잇는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월드컵 직전 가진 인터뷰에서 유영실은 4강 신화를 쓰겠다며 자신감을 표출한 바 있다.

“정말 설렜어요. 꿈꿔왔던 월드컵 무대잖아요. 근데 자신감은 있었어요. 일본전 기억도 있었고 좋은 성적으로 월드컵에 진출했기 때문에 세계 무대도 저희가 정신무장만 잘 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까 세계 무대에서의 경험 부족이 확연히 차이가 나더라고요. 물론 상대들이 저희보다 모든 부분에서 월등했겠지만 막상 부딪혀보니까 정신 없이 휘말렸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는 죽음의 조라 불리던 B조에 편성됐다. 우리와 같은 조에는 세계 랭킹 2위인 노르웨이, 6위 브라질, 9위 프랑스가 속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계 랭킹은 25위. 객관적인 수치로 봐도 결코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노르웨이와의 첫 경기를 피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경기 상대는 브라질.

“첫 경기는 많은 관중과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제가 아무리 ‘콜 플레이(Call Play)’를 해도 아이들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에요. 저도 당황했지만 아이들은 더 당황한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플레이를 했는지도 모르고 게임을 끝냈다니까요.”

“브라질전 0-3은 세계 무대를 경험한 선수들과 우리의 차이였어요. 조직적인 부분은 우리가 더 나아요. 근데 개인능력이 워낙 좋은 선수들이니까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기를 했거든요. 한 번 걸렸다 하면 그 스피드를 못 쫓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당황스러워서 얼떨결에 세 골을 줬어요.”

1패를 안고 두 번째 경기에 임한 대표팀은 월드컵 1승을 향한 목마름으로 투지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매번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좋은 경기를 하고도 골 결정력과 사소한 실수로 눈 앞에 왔던 승리가 패배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전의 패배는 노르웨이전 재앙과 연결됐다.

“프랑스전은 우리가 0-1로 졌는데 경기를 정말 잘 했어요. 득점기회도 있었지만 골을 못넣어서 그렇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경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경기 종료 15분을 남기고 근육 경련이 일어난 거에요. ‘이 경기를 내가 망쳐야 되나, 팀을 위해서 교체가 낫나, 숨기고 뛰어야 되나’ 이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때 저희가 굉장히 밀리는 상태였거든요.”

“후배 동료들한테도 ‘언니가 경련이 일어났으니까 네가 더 뛰어줘야 된다’ 하면서 뛰었는데 이제 도저히 안 되겠는 거에요. 제 딴에는 팀을 생각하고 교체 표시를 보냈는데 마침 프리킥 상황에 교체가 된 거에요. 안 나가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이 교체를 하러 나갔죠. 그런데 바로 그 프리킥에서 골을 먹은 거에요. 이기지는 못해도 비길 수는 있는 경기였는데...”

“그 다음 경기(노르웨이전)를 뛰는데 뒤에서 누가 잡는 것 같더라고요. 근육이 올라온 상태라 이게 한 3~4일은 가거든요. 몸이 제일 안 좋을 때 게임을 뛴 거고, 프랑스전을 비겼으면 나았을 텐데 좋은 경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다 보니까 심리적인 것이 무너진 상태였죠. 노르웨이전은 조금 힘들었어요.”

우리 여자대표팀은 노르웨이에 1-7로 패했다. 이것이 한국 여자축구의 현실이었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프랑스전 패배가 아쉬움이 남는다.

“(노르웨이전에서) 우리는 한 골만 넣는 게 목표였어요. 어차피 골은 많이 먹었거든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월드컵에서 득점하는 것과 무득점은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한 골이라도 넣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노르웨이는 저희보다 한 발 빠르더라고요. 수준 차이를 느꼈죠.”
2003년 여자월드컵 노르웨이전에서 ⓒKFA 홍석균
은퇴 번복과 아시아 제패

사실 유영실은 2003년 FIFA 여자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 은퇴를 계획했다. 당시에도 30세였던 그녀는 여자축구 선수로써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은퇴 결정은 수긍이 갔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의 은퇴는 2008년 10월. 월드컵 이후 은퇴를 뒤로 미루며 5년이나 더 뛴 것이다.

“안주한 우리 여자축구의 실태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항상 지는 경기만 해야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선수 생명이 짧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었거든요. 근데 월드컵을 진출하면서 다시 자신감이 생겼고 앞으로의 미래가 보였어요. 그래서 다시 재정비를 한 것 같아요. ‘어쨌든 아시아 제패는 해봐야지’하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월드컵에서 세계 수준을 경험한 유영실은 그 자신감으로 계속해서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2004년 올림픽 예선전을 4위로 마친 여자대표팀은 이듬해 국내에서 열린 동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당시 참가팀은 중국, 북한,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이 대회까지가 유영실 축구 인생의 클라이맥스였다.

“한참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을 하는데 기자님들이 인터뷰를 하러 많이 왔어요. 제가 주장이니까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사실 기자님들은 저희가 어느 정도 전력인지 다 아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승은 바라지도 않고 와요. 인터뷰도 형식상 하는 거에요. 근데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히려 반문을 했어요. ‘우리도 많이 발전을 했다. 우리가 우승을 못할 것 같냐. 준비 잘하고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우승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했더니 그 분이 웃는 거에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못할 것 같아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한번 보여드릴게요. 직접 보세요’라고 말했죠. 준비를 잘 했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는 상태였고, 우리나라에서 하니까 홈 이점도 있었거든요.”

한 기자로 인해 오기가 발동해 의기양양하게 말은 뱉었지만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아시아 빅3’인 중국, 북한, 일본이 모두 출전하는 대회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대표팀 내에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제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는 박은선(24, 서울시청)이었다.

“(박)은선이가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시도 때도 없이 나가서 PC방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시간 맞춰서 밥 먹으러 오고 그랬거든요. 당연히 운동장에 나가면 그 아이가 갖고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저보고 은선이를 잡아달라고 하면서 방을 같이 쓰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은선이를 나름대로 챙겨주고 관리하면서 같이 훈련했죠. 은선이가 사고도 치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동아시아 대회 첫 경기는 ‘아시아 빅3’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중국이었다. 그러나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도 유영실의 관리를 받은 정상 컨디션의 박은선을 막지 못했다. 박은선은 후반 20분 쐐기골을 박으며 중국의 만리장성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북한과의 2차전. 북한은 중국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박은선을 경계하며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다.

“북한은 2~3명이 항상 은선이를 사정권에 두고 수비를 했어요. 북한도 우리한테 쉽게 공격을 하기에는 부담이 컸을 거에요. 북한이 절대 내려서서 플레이를 안 하는 팀이거든요. 그런 팀이 갑자기 내려서서 플레이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한 골을 넣었어요. 그러니까 북한은 난리가 나서 전원수비, 전원공격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희가 많이 실점할 뻔 했는데 잘 지켜서 1-0으로 이겼죠.”

“사실 일본전은 거의 지는 경기였는데요. 3:7인가로 일방적으로 밀렸어요. 근데 우리는 버티면 우승이니까 또 버텨지더라고요. 좋은 경기는 못했지만 간신히 버텨서 0-0으로 비겼죠. 그래서 2승 1무로 동아시아 대회에서 우승을 한 거에요. (웃음)”

한국 여자축구는 이 대회를 통해 결코 얕봐서는 안될 상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회 이후 한국 여자축구의 아시아 대회 성적은 좋지 않다. 전에 없던 견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유영실은 2008년 동아시아 대회에도 출전했으나 팀의 3패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영실이 은퇴한 2010년, 한국 여자축구는 동아시아 대회에서 대만에 승리를 기록하며 1승 2패를 기록했다.
2008년 유영실(꽃다발 든 이)을 위해 마련한 공로패 수여식ⓒKFA 홍석균
여자축구의 움직이는 보물, 한국 여자축구를 위해

대학 졸업과 함께 방황의 나날이 있기는 했지만 유영실의 축구 인생은 비교적 평탄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시작했고 1년 만에 국가대표에 선발, 나아가서는 주장으로서 월드컵까지 경험했다. 이만하면 평탄하기보다는 승승장구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유영실의 축구 인생은 대교로 이적한 2007년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축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대교였어요.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몰라서 빨리 은퇴한 거예요.”

대교에서의 힘들었던 은퇴 과정을 설명하면서 유영실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물론 그녀가 늦은 나이까지 축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녀의 욕심은 축구를 더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지도자가 되어서 우리 여자축구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수정해서 여자축구 수준을 좀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교에서 은퇴를 선언한 유영실은 팀의 배려로 일본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대한축구협회(KFA)는 16년간 여자대표팀을 지켜온 유영실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A매치 70경기가 넘은 선수에게만 은퇴식을 치러주는 KFA의 방침상 65회의 A매치를 치른 유영실에게는 은퇴식을 선사하지 못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우리 여자축구에 대한 무관심으로 누락된 A매치가 아주 많다는 것. 유영실 역시 수 많은 A매치 기록이 누락돼 마땅히 받아야 할 은퇴식을 받지 못한 느낌이다.

“(몇 경기나 뛰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니까요.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남자축구처럼 구색을 갖춰서 이런 저런 절차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부분은 조금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후배들을 보면 많은 이야기를 해요. 국제시합을 나가도 그라운드만 밟고 오는 추억이 아니라 최소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머물렀는지 주위도 살펴보고 경기도 즐기고 돌아오라고 해요. 호텔에 처박혀서 시합 준비에 매달린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한국 여자축구의 1세대 유영실. 그녀의 자취는 이미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로 새겨졌고, 앞으로의 행보는 모든 여자축구 선수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짊어진 짐보다 앞으로 짊어질 책임감이 더 무겁다. 수 많은 시행착오를 몸소 경험하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축구 인생을 살아온 그녀. 한국 여자축구의 집약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영실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여자축구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 자신의 축구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것 같아요. 축구를 안 했으면 아주 평범하게 묻혀갔을 텐데 축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어요. 사실 축구를 오래하다 보니까 많은 스트레스로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에요.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그냥 제가 열심히 살아왔고, 제가 부딪히고 이겨내야 할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걸 즐기고 좋아했기 때문에요.”


인터뷰=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3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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