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례 월드컵 무대를 밟았던 수비수 이민성 ⓒ이상헌
역대 한일전 중에서도 1997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승부였다. 그리고 수비수 이민성(37)은 일명 ‘도쿄대첩’으로 불렸던 이 경기에서 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심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역전골을 터트려 2-1 승리를 견인,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민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골은 그의 A매치 데뷔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성을 단순히 ‘도쿄대첩 결승골의 주인공’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는 95년부터 2004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두 번의 월드컵(98년, 2002년)을 비롯해 A매치를 66경기나 나설 정도로 대표팀에서 꾸준히 활약을 펼쳤고, K-리그 통산 247경기에 출장한 대형 수비수였다.

공격수로 축구 시작

이민성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시기는 시흥초 5학년 때였다. 누나들만 3명 있었던 그에게 아버지가 축구를 권유했던 것. 스트라이커로 축구를 시작한 이민성은 대회 득점상도 차지하는 등 감각을 뽐냈다. 그러나 이민성은 문일중, 문일고를 거치면서 발전 속도가 더뎠고, 청소년대표팀에도 선발되지 못한 채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집에 누나들만 있어서 여성스러워진다고 아버지가 축구를 시키셨어요.(웃음) 시작할 때부터 문일고 시절까지 줄곧 공격수였죠. 초등학교 때는 득점상도 받곤 했는데, 중-고로 올라오면서 제자리 걸음이었죠.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그러나 아주대에 진학해 김희태 감독(현 김희태축구센터장)을 만나면서 이민성은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단 포지션 자체가 스트라이커에서 센터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민성은 명진영, 김재영, 우성용, 최월규 등의 동료들과 함께 아주대를 대학 최강으로 이끄는데 한 축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대우(현 부산)가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너무 가고 싶었던 팀인데, 아주대가 대우 계열이었거든요. 그래서 거기로 가면 대우에 입단할 기회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싶어 진학했습니다.(웃음)"

"김희태 감독님이 계실 때였는데, 선배들이나 동료들의 기량이 워낙 좋았어요. 아주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김 감독님이 원하시는 공격수는 스피드가 뛰어나야 했어요. 그 조건에 제가 조금 못 미쳤죠. 어느 날 감독님께서 수비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공격수를 보다가 수비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니 처음에는 싫었는데, 감독님께서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더 오래 축구를 할 수 있고, 경쟁력도 있다고 설득하셨어요. 저도 생각해보니까 일리가 있더라고요."

아주대에서의 활약으로 대표팀 발탁

아주대에서 수비수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이민성은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러나 아시아예선에 참가했던 그는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비쇼베츠 감독의 엄격한 팀 운영 스타일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이유였다.

"당시에는 대표팀의 중요성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여기 안 뽑혀도 축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무엇보다 비쇼베츠 감독님의 스타일과 잘 맞지 않는 점이 있었어요. 제가 여러 외국인 감독들을 겪었지만, 비쇼베츠 감독님은 너무 억압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에 반발하면서 운동을 조금 소홀히 했던 것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발전할 수 있는 단계였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한편 이민성은 1995년 2월 19일에 다이너스티컵 중국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도 치렀다. A매치이긴 했지만, 당시 올림픽대표팀을 중심으로 고정운, 홍명보, 유상철 등 몇 선수를 보강한 형태로 대회에 참가했던 터라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고.

"특별히 남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했지 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물론 다른 경기보다 긴장감이 더 크긴 했지만, 나름대로 여유 있게 데뷔전을 치렀던 것 같아요."

꿈이었던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다

아주대를 졸업한 이민성은 1996년, 자신의 꿈이었던 대우 로얄즈(현 부산)에 입단하게 되었다. 축구를 하면서 항상 꿈꿔왔던 팀에 입단한 그는 첫 시즌에 29경기에 출장하며 단숨에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 당시 대우는 드래프트를 포기하고, 연고 대학인 아주대 출신 선수들을 지명했어요. 그래서 저도 대우로 가게 되었는데, 항상 입고 싶었던 대우 유니폼을 입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김주성, 하석주 선배 등과 같이 축구를 하니까 정말 꿈만 같더군요.(웃음)"

"더군다나 운 좋게도 그 무렵에 대우가 성적이 좋지 않아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어요. 거의 무혈입성이었죠."

세대교체의 풍랑 속에서 휘청거리던 대우는 다음 해인 1997년, 팀을 완전히 재정비했다. 김주성을 축으로 이민성과 김학철, 류웅렬, 윤희준 등이 철벽 수비진을 형성했고, 마니치와 샤샤, 우성용, 정재권 등이 공격을 이끌며 K-리그 3관왕(정규리그,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을 달성했다.

"대우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자는 각오들이 대단했습니다. 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고, 합숙도 55일간 했을 정도로 정말 힘들게 한 해를 보냈죠. 그래서인지 경기장에 들어가면 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워낙 뛰어난 선배들이 많았으니까 저는 제 몫만 충실히 하면 나머지는 형들이 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뛰었죠. 제 입장에서는 (김)주성 선배가 워낙 리드를 잘해주셨기 때문에 항상 즐겁게 경기를 뛰었던 것 같아요."
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 일본전에서 역전골을 터뜨리는 순간 ⓒKFA 홍석균
도쿄대첩,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

어찌 보면 이 시기는 이민성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1997년 9월 28일,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과의 원정 경기. 일명 '도쿄대첩'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에서 전 국민의 뇌리 속에 '이민성'이라는 이름 석자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야마구치에게 선제골을 내줘 끌려가던 한국은 후반 38분 서정원의 극적인 헤딩 동점골에 이어 41분 이민성의 대포알 같은 왼발 중거리 슛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이민성은 A매치 데뷔골이었던 이 한 방으로 일약 영웅으로 발돋음했다.

"경기 자체는 정말 극적이었고, 제 골로 인해 일본에 승리할 수 있었기에 너무나 기뻤던 순간이었죠. 그 당시의 희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웃음)"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골로 인해 제 인생이 결정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있어요. 저를 평가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한일전에서의 그 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죠. 그리고 한일전 골 때문에 대표팀에 계속 뽑힌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저에게는 선수 생활 내내 큰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만약 그 골을 제가 넣지 않았다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좀 더 여유롭게, 더 오래 뛰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도쿄대첩의 상승세를 이어가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순조롭게 통과한 이민성은 드디어 세계와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됐다. 96 아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 이민성으로서는 각오가 남달랐고, 결국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전에 모두 풀타임 출장했다. 그러나 이민성은 월드컵을 통해 좌절감도 맛봐야 했다. 멕시코전 1-3패에 이어 네덜란드전에서의 0-5패는 충격적이었다. 특히 네덜란드 선수들의 플레이에 이민성은 넋을 잃었다.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이 선수들이야말로 정말 축구 선수구나, 같은 두 발로 축구하면서 이렇게 차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심지어 계속 축구를 해야 하는지 회의감까지 들었어요."

"네덜란드전이 특히 그랬죠. 그 선수들은 제가 볼을 빼앗지 못하도록 정말 얄밉게 볼을 차더라고요. 패스의 속도나 질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5골을 넣은 이후에는 골 넣을 생각을 하지 않고 볼을 돌린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네덜란드전을 통해 기본기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죠."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바로 베르캄프였어요. 축구를 해오면서 그만한 공격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볼 컨트롤이나 패스 타이밍, 움직임 등 공격수가 갖춰야할 모든 것을 갖췄죠. 정말 막기 힘든 공격수였어요.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저런 공격수를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KFA 홍석균
2패를 당한 대표팀과 이민성은 마지막 벨기에전에 사활을 걸었다. 상대에 비해 부족한 실력은 투혼으로 메우면서 온 몸을 던져 맞섰다. 결국 1-1 무승부로 승점 1점을 획득할 수 있었다.

"처음 2게임을 맥없이 지고 나니까 마지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 된다, 그냥 자신 있게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모두 나섰고, 그런 부분이 무승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선수들이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몸싸움이나 신경전이라고 해도 뒷다리 걷어차고 그런 것 밖에 없었죠.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처럼 영리하게, 정말 얄밉게 신경전을 벌이지 못했어요. 그냥 바보처럼 당했다고 해야 할까요. 스태프 역시 2002 월드컵처럼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죠. 그런 면에서 준비가 부족했던 면도 있었어요."

2002 월드컵의 영광을 함께 느끼다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뼈아픈 경험을 한 이민성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당당히 23명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러나 '김태영-홍명보-최진철'로 이어지는 '철벽 3백(Back 3)' 라인에 밀려 주전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그래도 독일과의 4강전에서 후반 12분 교체투입되어 역사적인 무대를 밟았고, 터키와의 3-4위전에서는 풀타임 출장했다.

"히딩크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감독으로 우리와 맞붙었다는 것도 잘 몰랐었어요.(웃음) 어쨌든 당시만 해도 우리는 볼 없이 뛰는 훈련도 많이 했는데, 그런 것 없이 재미있게 훈련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잘 컨트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2002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나서지 못한 점에 대해서 큰 아쉬움은 없었어요. 당시 대표팀은 정말 모두가 하나였거든요. 우리가 계속 이겨나가는 것이 좋았을 뿐 제가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어요. 히딩크 감독님도 그런 부분을 중요시해서 경기에 뛰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해서도 많이 배려해주셨죠. 훈련 과정에서는 강하게 하셨지만, 대회 기간에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위로와 격려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독일과의 4강전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되었는데, 98년 네덜란드전보다 더 경직되더군요. 지금까지 잘 올라왔는데, 저 때문에 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부담감이 들더군요. 그런데 후반 30분에 실점을 내줬고, 그 과정에서 제 실수가 있었죠. 아쉽다면 이런 거예요. 한 선수를 지목해서 집중적으로 비난하는 것...축구는 팀이고, 전체로 봐야 하는데, 특정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봐요."
20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이 끝난 뒤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이민성(노랑 조끼) ⓒKFA 홍석균
K-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이민성은 2003시즌을 앞두고 포항으로 이적했다. 친정팀 부산을 떠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욕망이 더 컸다. 그리고 2004시즌, 포항은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울산을 꺾고 수원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났다. 이민성은 시즌 내내 센터백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많이 나섰고, 이 위치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며 팀을 이끌었다. 아쉽게도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1-2차전 모두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을 정도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부산에서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죠. 포항에 와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많이 나섰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았어요. 사실 센터백을 보면서 부담을 많이 느꼈거든요. 결국 실점을 내주면 욕 먹는 것은 수비수니까요. 특히 대표팀에서는 그런 부담이 더욱 컸죠. 그 부분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포지션을 옮기고 싶었어요. 마침 포항에서 최순호 감독님이 저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려줬고, 원했던 포지션에서 부담 없이 정말 즐겁게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비기고 2차전을 수원에서 했는데, 경기 중에 제 중거리 슛이 골대 맞고 나왔어요. 그리고 승부차기에서도 또 골대를 맞혔죠.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어요. 한 시즌 동안 즐겁게 축구를 했거든요.(웃음)"

포항에서 다시 한번 불꽃을 피운 이민성은 2005년 서울로 이적했다. 당시 서울의 사령탑이었던 이장수 감독의 적극적인 러브콜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젊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서울에서 베테랑으로서 중심을 잡아주길 기대했고, 이민성도 흔쾌히 응했다.

"밖에서 볼 때 서울은 너무 젊은 선수들 위주라 다들 제각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장수 감독님도 그런 점을 말씀하시면서 함께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팀에 합류하니 전에 있었던 부산, 포항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요. 부산은 선수들끼리 정말 한 식구보다 더 친밀할 정도였고, 포항 역시 부산만큼은 아니어도 가족 같은 분위기였죠. 그런데 서울은 그런 면이 전혀 없었어요."

"물론 세대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긴 한데, 문제는 그런 분위기가 경기장 안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었죠. 그런 분위기를 바꿔주길 감독님이나 구단에서도 기대했던 것 같아요. 저나 (김)병지 형, (김)한윤이 등이 노력해서 어느 정도 변화는 줬다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그이지만, 마지막은 아쉬움이 남는다. 2008년 들어 이민성은 서서히 서울의 주전 라인업에서 자취를 감췄고, 플레이오프를 앞두고는 팀에서 사실상 방출 통고를 받았다. 그 충격 속에서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대로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서울이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저에게 이제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른 팀을 알아보라고 그러더군요. 내 팀이라고 생각하고 고생해서 왔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멍했어요. 시즌을 마치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무릎 꿇고 빌 수는 없잖아요. 이게 프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왔죠."

"그리고 그날 교통사고가 났어요. 만약 그런 충격적인 통보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겠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터뷰 중인 이민성 ⓒ이상헌
용인시청에서 새로운 시작

그렇게 서울에서 나온 이민성은 휴식을 취하다가 2009년 들어 분당에서 유소년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2010년부터 새롭게 내셔널리그에 뛰어들 용인시청에서 플레잉 코치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이제는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아주대 선배이신 정광석 감독님에게서 할 마음이 있냐고 연락이 왔어요.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선수로서보다는 코치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 제가 가진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요."

"앞서 말했지만 솔직히 축구를 계속 하면 할수록 수비수는 하기 싫었어요. 제가 좋아해서 시작한 축구인데, 왜 욕을 먹으면서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저는 수비수들을 가르치면 '실점을 허용해도 네 실수가 아니다. 공격수부터 연대 책임이다. 그것에 개의치 말고 자신 있게 해라.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너는 당당하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 지도자로서 첫 발을 내딛었는데, 어린 선수들부터 차근차근 지도하면서 밟아 올라가고 싶어요. 유소년 대표팀 감독도 한번 해보고 싶고, 언젠가는 서울 감독으로 떳떳하게 들어가 K-리그 우승도 한번 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웃음)"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2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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