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을 100% 발휘하지 못했던 비운의 공격수 최철우 ⓒ이상헌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의 공격진은 이동국과 최태욱, 와일드카드로 합류한 김도훈까지 매우 화려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공격진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스트라이커가 바로 최철우(32)다. 185cm, 80kg의 당당한 체격을 지닌 최철우는 2000년대 초반에 혜성처럼 등장해 대형 스트라이커 재목감으로 큰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최철우는 기대만큼의 파괴력은 보여주지 못하면서 아쉬움을 안겼다.

최철우는 2000년 울산 소속으로 K-리그 무대에 데뷔해 통산 143경기에 출장, 24골-4도움을 기록했으며, A매치는 10경기에 출장해 2골을 기록했다. 2008년 부산에서 울산미포조선으로 팀을 옮긴 그는 현재 KFA 2급 지도자 교육을 이수하는 등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에서 성장한 토박이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최철우는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전주에서 성장했다. 육상과 태권도를 먼저 배웠던 그는 둘째 형의 권유로 축구의 길로 들어섰다. 결국 축구부가 있는 전주 우전초로 전학간 최철우는 이후 해성중과 전주공고를 거치면서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육상이나 태권도 등 이것저것 많은 운동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둘째 형님이 강력하게 축구를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그렇게 시작했는데, 해보니까 중독성이 있더라고요.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요."

"처음부터 공격수로 시작했는데, 중 1때 키가 안 크는 바람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내려왔어요. 그러다가 중 2때 갑자기 20cm가 크면서 다시 공격수로 올라갔죠. 너무 갑자기 크는 바람에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어요. 신체 밸런스가 맞지 않다보니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붙고 균형이 잡히면서 점점 좋아졌어요."

고마웠던 친구들 덕분에 고려대 진학

이후 전주공고에 입학한 최철우는 처음에는 전국무대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시작했다. 전주공고는 눈에 띄는 강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한 팀도 아니었다. 항상 끈질긴 승부를 연출했던 전주공고와 함께 팀의 중심으로 활약한 최철우에게도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전주공고는 어디와 붙어도 쉽게 지지 않는 팀이었어요.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졸업할 무렵에는 수원 삼성에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즈음에 청소년대표팀에도 잠시 선발됐고요. 여러 대학들이 입학 제의를 했었죠."

"여러 제의 중에서 솔직히 저는 고려대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고려대는 저 혼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다른 대학에 가게 되면 동기들 여러 명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죠. 너무 고민스런 상황이라서 동기들에게 털어놨어요. 그랬더니 1~2명은 저를 욕했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전부 저에게 가고 싶은 학교로 가라고 했죠. 자기들은 '친구 등에 업혀서 대학 가는 것 싫다, 네가 훌륭하게 성공하면 나중에 최철우와 같이 축구했던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면서요. 너무 고마웠어요.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모임을 갖고 1년에 한번 이상은 꼭 만나곤 해요.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죠."

1998년말, 시드니 올림픽대표상비군에 뽑히다

꿈에 그리던 고려대에 입학한 최철우였지만, 처음 맛보는 캠퍼스의 자유는 그를 나태하게 만들었다. 건실한 노력파였던 그는 대학 새내기의 기분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다.

"전주공고 시절에는 정말 노력파였는데, 대학 들어오면서 많이 놀았어요.(웃음) 나중에 돌이켜보니 너무나 쉽게 시간을 허비했더군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하루에 4번씩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 3학년 시절, 최철우에게 기회가 왔다. FA컵 본선 1회전에서 수원과 대결을 펼치게 된 것. 이 경기에서 고려대는 선전을 펼치면서 2-2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탈락했다. 최철우 역시 맹활약을 펼쳤고, 마침 이 경기를 보러 온 올림픽대표팀 코칭스태프의 눈에 들었다.

"고3에서 대학 올라갈 때 청소년대표팀에 한번 발탁됐다가 떨어진 이후 이제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수원전에서는 코칭스태프가 온 지도 몰랐는데, 제 모습을 좋게 보셨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최철우는 98년 말에 올림픽대표팀상비군에 선발됐다. 최철우는 다시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이러한 최철우의 집념은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까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죠. 당시 25명 정도가 뽑혔는데, 소문에는 이 멤버 중에서 절반도 뽑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당시 아시안게임에 참가했던 선수들 중에 10명 정도가 같은 연령대였거든요. 더 절박했기 때문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런 노력이 허정무 감독님에게 어필했던 것 같아요. 그 무렵부터 시드니 올림픽까지 한번도 탈락하지 않고 계속 뽑혔던 선수가 저랑 김도균, 박진섭 이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저로서는 정말 열심히 축구를 했던 시기였습니다."
시드니올림픽 칠레전에서 플레이하는 최철우 ⓒKFA 홍석균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의 공격진에는 이동국과 김은중, 설기현 등 U-19 대표팀 시절부터 화려함을 뽐냈던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경쟁 속에서도 최철우는 결코 실력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훈련에 임했다. 결국 김은중과 설기현이 아닌 최철우라는 이름 석자가 시드니로 떠날 올림픽대표팀의 최종명단에 포함되었다.

"처음부터 무조건 살아남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다른 선수들에게 주눅들 여유도 없었던 거죠. 그리고 그 선수들이 대표팀 경험이 풍부하긴 하지만, 실력 면에서는 제가 떨어질 것이 없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원하시는 플레이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은 골도 골이지만, 열심히 뛰면서 공간을 창출해주는 공격수를 원하셨어요. 당시 저는 골 욕심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료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하기 위해 노력했죠. 감독님께서 '골 넣은 선수보다 이렇게 움직여준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다. 만약 같이 욕심을 냈으면 팀이 잘못됐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주셔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난관도 있었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나 정해성 코치는 매우 엄한 지도자로 유명했고, 특히 최철우는 가끔은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본보기로 야단을 많이 맞았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 억울한 면이 있긴 했어요.(웃음) 당시에는 50일 이상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다보면 훈련 막판에 선수들이 나태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 제가 본보기로 많이 혼났죠. 극약처방이 필요했으니까요. 속상해서 대표를 반납할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면담을 하고 그 분들의 생각을 알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어요. 그 분들이 뒤끝 없고 화끈한 분들이라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죠."

"지금 생각나는 것이 허 감독님은 정말 승부욕이 강하셨거든요. 훈련 때 5:5 게임을 해도 감독님이 들어오시면 엄청난 혈전이 되죠.(웃음) 원래 그 게임은 약간 땀이 나는 정도의 강도인데, 감독님이 합류하는 순간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그런 승부욕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정상의 자리에 계신 게 아닌가 싶어요."

'노력과 성실'의 대명사인 박지성, 이영표의 존재 역시 최철우에게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최철우 역시 그들만큼의 노력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결국 최후에 살아남은 선수는 재능이 더 뛰어났던 다른 선수들이 이들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낸 후에야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시절부터 지성이나 영표는 정말 엄청난 노력파였어요. 팀 훈련의 강도도 엄청 높았는데, 그 선수들은 개인훈련도 하는 거였어요. 솔직히 우리는 쉬고 있는데, 훈련하는걸 보니까 얄밉기도 했을 정도였죠.(웃음) 그런데 결국 가장 성공한 선수는 지성이와 영표였죠. 저만 해도 대표팀에 계속 머무르다보니까 나태해지고 건방진 마음도 들고 그랬어요. 그 시절에 왜 그들만큼 노력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도 많이 들죠. 그랬다면 훨씬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텐데..."

"나이가 든 뒤에야 이런 걸 느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선수들에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런데 제대로 듣지를 않아요.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배로서 안타까워서 조언해주는 것인데, 주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군요. 어쩔 수 없죠. 그 이상 이야기하면 거부반응이 나오기 때문에 저도 그 정도로 하고 포기하죠. 사실 실력의 차이는 크지 않아요. 어떤 마인드로 임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나눠진다는 것을 어린 선수들은 모르죠."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아쉬움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은 스페인, 모로코, 칠레와 한 조에 속했다.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0-3으로 패했지만, 모로코-칠레를 연파하며 2승 1패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조 3위로 밀리며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최철우는 모로코와의 2차전에서 후반 35분에 교체투입되었고, 칠레와의 3차전에서는 선발 출장해 61분간 피치를 밟았다.

"대회 전에 조금 어수선한 면이 있었어요. 와일드카드로 왔던 선배님들이 부상으로 다시 교체되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호흡 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스페인전에 나타났던 거죠. 그래도 2차전부터는 연승을 하면서 2승 1패를 기록했는데, 탈락하더군요. 대회 끝나고 쫑파티를 하는데 많이 울었어요. 억울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여러 마음이 교차했죠."
부천 시절의 최철우
시련 많았던 프로 생활

올림픽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등에 업은 최철우는 2000년 K-리그 무대에 뛰어들었다. 당시 최철우는 드래프트를 통해 전체 1순위 3번으로 울산 유니폼을 입게 됐다. 첫 시즌 성적은 12경기에서 5골이었다.

"처음 프로무대를 접하면서 벽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도 고재욱 감독님이 저를 믿고 기회를 꾸준히 주셨기 때문에 조금씩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프로 2년째를 맞이해 최철우는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8경기 출장-무득점. 김정남 감독이 새로 부임한 울산에서 최철우가 설 곳은 없었다.

"2년차 징크스를 제대로 겪었죠. 기회를 달라고 감독님 방으로 찾아가기도 했고, 2~3kg짜리 볼을 갖고 슈팅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미칠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했었거든요. 덕분에 무릎만 더 안 좋아졌지만 말이죠.(웃음) 중간에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차출되어 동메달을 따고 오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팀에 돌아오니 현실은 또 그게 아니었어요."

결국 최철우는 2002년에 포항으로 이적한다. 포항에서의 두 시즌 동안 48게임에 나서 8골-2도움. 꾸준한 출장을 기록했다. 포항에서 안정을 찾은 그였지만, 올림픽대표팀 시절의 은사 정해성 코치가 부천(현 제주)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러브콜을 보냈고,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팀을 옮겼다.

"울산에서 워낙 힘들었기 때문에 포항에서는 잘 적응했어요. 당시 동국이도 있었고요. 최순호 감독님께서 공격수 훈련도 따로 시켜주시는 등 많은 관심을 보여주시기도 했죠. 그러다가 2004년에 정해성 선생님이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최순호 감독님께서는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예전부터 약속했던 것이고, 정 선생님께 힘을 실어주고 싶었기에 부천으로 옮겼죠."

그러나 최철우의 불운은 부천에서도 계속 됐다. 팀을 옮기자마자 십자인대가 끊어지면서 5경기 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1년여의 재활 끝에 2005시즌, 최철우는 25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팀도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플레이오프를 노릴 정도로 좋은 성과를 올렸다.

"1년여간 재활을 했어요. 정말 힘들었던 기간이었어요. 그래도 밖에서 축구를 보다보니 이미지 트레이닝도 되고, 보는 눈은 좋아진 것 같아요. 복귀한 이후 처음 4~5경기는 제가 생각해도 정말 못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계속 믿고 기용해주셨죠. 그러면서 몸 상태가 점점 올라왔고, 2005년 후반기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정 감독님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죠."

"돌이켜보면 이 무렵이 가장 행복하게 축구를 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대표팀 시절보다 더 행복했었죠. 다만 아쉬움도 있는 것이 2005년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대전과의 홈 경기에서 1-1로 비기면서 탈락하고 말았어요. 선수들도 울고, 감독님도 울었죠."
제주에서 활약할 당시의 최철우 ⓒ이상헌
이후 최철우는 축구 외적인 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전북(2007년)과 부산(2008년)으로 계속 팀을 옮겨 다녀야 했다. 30을 넘어선 나이에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팀 컬러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2009년에는 내셔널리그 울산미포조선으로 다시 옮겨야 했다.

“프로 입단 이후 여러 팀을 옮겼어요.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여러 지도자들 밑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울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지금 지도자 공부를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고요. 그러나 부천까지가 딱 좋았던 것 같아요. 이후부터는 시간에 쫓겨서 사는 것 같고, 축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의무처럼 하게 되더군요.”

“솔직히 부산에서 나왔을 때는 은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만류했죠. 지도자 교육도 안 받은 상태에서 은퇴하면 뭐 할거냐라는 말이었죠. 가정을 꾸린 입장에서 맞는 말이었어요. 다행히 고려대 은사이신 조민국 감독님이 울산미포조선으로 오라고 권유하셨죠. 시즌 중간 휴식기에는 저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에게 지도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주셨고요.”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제 2의 축구 인생 맞이하고 싶어

대형 스트라이커로 촉망받았으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최철우. 그러나 지도자 교육을 받고 있는 그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선수로서의 인생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지도자로서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였다. 7월에 KFA 3급 지도자 자격을 획득한 그는 11월에 2급 지도자 자격증도 땄다.

“제가 선수로서 100%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것은 확실해요. 선수 시절을 굳이 말한다면 실패였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역전승을 해보고 싶어요. 선수 시절 느꼈던 경험과 지도자 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을 잘 접목시키고 싶어요. 사실 지금은 포지션별 전담 코치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저는 공격수 전담 코치와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제가 공격수로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은 거죠.”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에 저에게 시집 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죠. 얼마 전 둘째까지 태어났는데, 제가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요. 아내가 많은 힘을 주기 때문에 함께 웃으면서, 즐겁게 제 2의 축구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12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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