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하고 있는 최강희 감독 ⓒ스포탈코리아
최강희 감독(48세)은 팬들로부터‘강희대제’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고 있다. 작년 전북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팬들은 친근함과 존경심을 담아 이런 애칭을 지어줬다. 선수 시절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스태미너로 경기장을 휘저었던 그는 이제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본격적인 시작은 고교 때부터

최강희 감독의 축구 이력은 독특하다. 어린 시절 축구를 좋아하던 최 감독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서울 용두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냥 시골에서 축구만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논에서 볼 차고 그러다가 전학 온 용두초에 축구부가 있더군요. 당장 가입해서 축구를 시작했죠.”

그러나 여기서부터 최 감독의 축구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추첨을 통해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선택된 서울 대광중은 축구부가 없는 학교였다. 결국 최 감독은 3년간 축구를 그만두고 공부만 해야 했다. 머리 속에는 축구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던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세월이었다. 결국 고등학교를 한양공고로 택해 다시 한번 축구의 길로 들어섰다.

“집에서는 반대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웃음) 그렇지만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3년 동안 축구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결국 고등학교를 한양공고로 갔는데, 돌아가신 우상권 선생님이 감독으로 계셨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축구부에 들어가니 역시 3년의 공백은 너무 컸어요. 당시 축구부원이 80명 정도 됐는데, 제 백넘버가 68번이었습니다.(웃음)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1년 유급하기로 결정하고 6월경에 다시 중학교로 들어갔어요. 요즘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남대문중학교로 가서 기초부터 다시 배운 뒤에 우신고로 진학했습니다.”

어울려 노는데 한 눈 팔기도

우여곡절 끝에 우신고에서 본격적으로 축구에 입문한 최 감독이었지만, 여전히 순탄하지는 않았다. 한창 사춘기의 열병을 앓고 있던 최 감독은 오롯이 축구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노는 데 한눈을 팔기도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최 감독의 얼굴에 겸연쩍은 웃음이 번진다.

“그때 우신고는 장원직 선생님(현 KFA 부회장)이 감독이었는데, 축구에 눈을 떴어요. 그렇지만 사실 친구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웃음) 축구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기 살기로 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우신고 시절의 최 감독은 미드필더로서 좋은 선수였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고 밝히듯이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교 2학년 때 이미 명지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팀이 좋지 않은 일로 징계를 받으면서 그 여파가 최 감독에게까지 미쳤다. 결국 대학 진학도 물거품이 됐고, 축구인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고비를 맞이하게 됐다.

“축구를 그만둘 위기였죠. 그래도 축구가 운명이었는지 길이 나타났어요. 동기 7명과 함께 실업팀이었던 한일은행에 갈 수 있었죠. 거기서 김호 감독님을 만나고, 포지션도 윙백으로 바꿨습니다. 1년 반 정도 뛰다가 충의(육군)팀에서 복무를 한 뒤에 다시 한일은행에 복귀했는데, 그 때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죠.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10년 만에 실업리그 우승도 하고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프로축구 현대에서 활약하던 최강희(맨 오른쪽) ⓒ대우로얄즈
현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다

한일은행을 거쳐 1984년 현대(현 울산 현대)의 창단멤버로 입단한 최 감독은 데뷔연도에 26게임을 소화하며, 팀의 중심 수비수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에도 매년 20경기 이상씩 꾸준히 출전하며 프로무대에서 입지를 구축했다.

“사실은 1983년에 포철(현 포항) 소속으로 프로에서 3경기를 뛴 적도 있어요. 당시 포철의 한홍기 감독님이 한일은행에 임대를 요청했고, 그래서 뛰게 된 것이죠. 더 뛸 수 있었는데,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3경기밖에 못 뛰었어요.”

“현대 창단과 함께 입단했는데, 확실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있지요. 한일은행에 처음 갔을 때 선배들은 매일 술이었어요.(웃음) 몸 관리라는 개념이 없었지요. 프로가 만들어지면서 선수들도 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추어는 대충 하다가 은행업무로 이동해서 대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프로는 축구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어요. 열심히 해야 연봉도 많이 받는 거니까..”

결혼이 선수 인생의 전환점

현대 입단 이후 꾸준한 활약을 펼쳤지만, 진정한 전성기는 28세 이후부터였다. 그 계기는 결혼이었다. 1986년 결혼한 뒤 오직 축구에만 매진했다. 철저한 몸 관리와 개인훈련을 통해 기량이 한 단계 성숙했다.

“처음 프로에 와서 열심히 하긴 했지만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도 하고, 담배도 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다 끊고 축구에만 전념하게 됐어요. 그때가 축구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축구화 신는 것이 행복하고, 훈련이 즐겁고, 경기가 기다려지고 그랬지요. 휴가를 받아도 이틀 이상 쉬어본 적이 없어요.(웃음)”

“매일 훈련해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체력이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선천적으로 강했던 것도 있었고, 체력훈련을 많이 했어요. 남들보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더 많이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프로 선수라면 하나씩 장기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경기운영을 잘한다든지, 슛을 잘한다든지...저는 많이 뛰면서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29세 때인 1988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88 서울 올림픽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전까지 청소년대표를 비롯한 어떤 대표팀에도 선발되지 못했던 그로서는 새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선수들은 누구나 대표선수를 꿈꾸며 운동한다고 할 수 있지요. 월드컵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무대고...사실 저는 처음에 대표팀에 뽑혔을 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나게 기쁘지는 않았어요. 나이도 있고 하니까 국가대표가 되어 이름을 날리기보다는 팀에서 꾸준히 인정받기를 원했지요. 한창 축구의 맛을 느끼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오래 선수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저보다는 주위에서 더 기뻐했던 것 같아요. 대표팀에 들어가 생활하다보니 늦었지만 어렵게 들어온 만큼 살아남아 꾸준히 뛰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아마도 28살 이전에 저를 만난 사람과 그 이후에 저를 만난 사람은 ‘최강희’라는 사람을 전혀 다른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웃음) 나중에 대표 선수가 되니까 책임감이 커지면서 몸 관리와 훈련에 더 집중하게 됐지요. 30세가 넘어서도 축구가 많이 늘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고, 요즘 선수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둔 훈련 중에 한 컷 ⓒ월간축구
90 이탈리아 월드컵을 경험

뒤늦게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지만, 88 서울 올림픽, 88 아시안컵, 90 이탈리아 월드컵 등 굵직굵직하고 알짜배기 대회에는 모두 참가했다. 특히 이탈리아 월드컵은 잊지 못할 대회였다. 그 시절을 회고하는 최 감독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자신의 100%를 다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

“월드컵 예선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기대가 높았지요. 그런데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던 것 같아요. 대회 1주일 전에 현지에 도착하다보니까 시차 적응이나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장을 기록했다. 오른쪽 윙백으로 주로 활약했고, 상황에 따라서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뛰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에 차례로 패하고 말았다.

“첫 경기 상대였던 벨기에는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워낙 몸이 무겁다보니 공을 잡으면 줄 선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피했지요. 얼마나 몸이 좋지 않았으면 서로 볼을 안받으려고 했겠습니까. 마지막 경기였던 우루과이전 때가 그나마 컨디션이 좋았어요. 2년을 준비했는데 그렇게 맥없이 물러나게 되니 억울했지요.”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33세의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한 뒤 92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92시즌의 플레이를 보면 몇 시즌 더 뛰는 것이 가능해보였지만, 주변 여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 94년 정도까지는 현역 생활을 할 생각이었어요.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없었지요. 그런데 92시즌이 끝나면서 팀이 개편되면서 젊은 선수들 위주로 운영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선수들은 아무래도 눈치를 봐야했고, 결국 은퇴를 했던 겁니다.”

은퇴 이후 가족과 함께 1년간 독일로 떠났다. 축구 공부와 함께 현역 시절에는 맛볼 수 없었던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서였다.

“독일에서의 1년은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축구 공부도 많이 했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어요. 선수 시절 못해줬던 서비스를 그 때 많이 했지요.(웃음)”

선수 시절처럼 마지막에 영광을 맛보고 싶다

그렇게 1년을 보낸 후 1995년 은사였던 김호 감독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신생팀 수원에 트레이너로 들어갔다. 2001년까지 트레이너와 코치를 맡으며 수많은 우승을 일궈냈다. 2002년에는 아시안게임 대표팀 코치로, 이후에는 쿠엘류 감독 밑에서 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5년 7월부터 전북 현대의 감독을 맡아 그 해 FA컵 우승을 차지했고, 2006년에는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거머쥐며, FIFA 클럽 월드컵까지 참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최 감독은 전북을 K리그 최고 수준의 팀으로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역 시절 꾸준한 노력으로 마지막에 큰 영광을 맛봤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발전시키겠다는 각오다.

“항상 리그 선두권에 있는 경쟁력 갖춘 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계기로 전북은 새로 태어난 상태라 할 수 있는데 진정한 명문으로 만들어야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7년 8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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