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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에서 코치로 활동중인 이영진 ⓒKFA
조연의 가치

이영진(44, FC서울 코치)이 경기장에서 주연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체격조건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화려한 개인기나 인상적인 골폭풍으로 눈길을 잡아 끌었던 적도 없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허전했다. 크지 않은 체구로 그라운드 구석구석을 자신의 영역인양 헤집고 다녔다. 전방으로 송곳 같은 패스를 보내는가 싶으면 자신보다 더 큰 상대에게도 밀리지 않는 투지와 승부근성으로 악착 같은 수비력을 보였다.

감칠맛 나는 연기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조연처럼, 그의 존재로 팀은 공격과 수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의 키는 169cm에서 자라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주저앉았던 적은 없다. 순간적인 폭발력과 빠른 판단력으로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 프로 무대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축구화를 벗을 때까지 한결 같은 모습이었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한 발짝 비켜 서 있는 조연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윤기를 낼 줄 아는 선수였다.

어긋난 파이팅

유감스럽지만, 이영진이 처음부터 축구에 대한 간절함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축구부 코치의 권유로 축구부에 들긴 했지만 방학 기간 소집 훈련에 응하지 않았을 정도로 태평했다.
“우리집이 학교랑 30분 거리에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축구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더라고요. 코치님이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면서. 그래서 끌려가다시피 했던 게 시작이었죠.(웃음)”

자의반 타의반 축구화를 신었지만 일단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축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까지 별 탈 없이 축구를 즐기던 그가 처음으로 시련을 겪은 것은 경희고 3학년 때. 대회 도중 소속팀 감독과 주심 사이에 판정 시비가 붙었고, 이를 참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어린 마음에 자제력을 잃고 심판에게 대들었죠.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옳지 않죠. 지금도 잘못을 반성합니다. 그 사건으로 1년간 선수 자격을 박탈 당했어요.”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그를 불러준 곳은 축구부 창단을 준비하고 있던 인천대였다. 그에게는 선수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행운의 팀이었다.
“고인이 되신 차경복 감독님을 대학 때 만났습니다. 제가 선수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눈을 틔워준 분이죠. 프로에 입단해서 대표선수가 되고 또 지금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건 차 감독님 덕분입니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에서 일본에 3-2 역전승을 거둔 뒤. 앞쪽 6번 선수 ⓒ문화관광부
찾아온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

기적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신생팀 인천대에서 그의 기량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대학 4학년 때 이미 럭키금성(현 서울)과 가계약이 이뤄질 정도였다.
1986년 프로무대에 첫 발을 내딛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팀내에는 조영증, 박항서, 정해성, 한문배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는 상태였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백업 요원으로 벤치를 달구던 그의 생각은 ‘이럴 바에는 실업팀에서 뛰는 게 낫겠다’는 데까지 미쳤다.

흔들리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당시 2군 코치로 있던 고재욱 감독(현 관동대). ‘속단하지 말고 6개월만 더 기다려보라’고 한 것이 위안이 됐다. 마침 같은 포지션에서 뛰던 선배 강득수가 86월드컵 멤버로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다시 그에게 선발 출장 기회가 났다. 결국 10월 12일 포항전에서 2골을 터트리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후기리그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고재욱 감독님이 매일 밤마다 따로 개인훈련을 시킬 정도로 챙겨주셨죠. 결국 포항전에서 2골을 넣고 후기 우승의 감격을 맛보게 됐어요.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하면서 우승컵은 포항에 넘겨줬지만 그 때를 계기로 제 생각도 변했습니다.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면서 기다리면 분명히 기회는 오는 법이거든요. 그걸 놓치지 말아야죠. 저도 한 3년쯤 이후부터는 완전히 입지를 굳혀서 주전 자리를 뺏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반딧불이처럼 서서히 점화된 그의 축구인생은 1989년 생애 첫 국가대표 발탁으로 이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청소년대표팀이나 올림픽 대표팀을 거친 적도 없었고 특별히 주목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프로 무대에서 보인 꾸준함의 대가는 실로 달콤한 열매로 돌아왔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대비한 아시아 예선 경기에서 추가 선발로 대표팀에 합류했어요. 동남아 팀을 상대로 했던 것이어서 작고 빠른 선수들에게 맞붙을 놓을 만한 선수로 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의 저력은 이때도 빛을 발했다. 후반에 교체 투입돼 김주성의 골을 어시스트하면서 이회택 감독의 눈도장을 받은 것.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멤버로 합류하게 된 이영진은 축구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꿈의 무대’를 밟게 되는 영광도 안았다. 큰 대회를 경험하고 돌아온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해있었다.

“엔조 시포(벨기에)랑 맞섰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크지도 빠르지도 않은 선수 같은데 속수무책이었죠.” 축구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속고 속이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90년 월드컵으로 축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94 월드컵 대표팀에도 무난히 승선했다. 사실 1992년에 당한 무릎 부상으로 오랫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다. 아시아 예선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큰 대회를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한결 여유있게 경기할 수 있었죠. 90년 월드컵 때는 앞이 하나도 안보여서 나한테 공이 오는 게 두려웠어요. 공이 오자마자 다른 사람들한테 보내주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94년에는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다렸다가 줄 수 있는 정도로 여유가 생기더군요. 경험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 조금만 더 힘을 냈더라면, 그때 만약 16강에 진출했더라면, 우리축구의 경쟁력이 더 빨리 강화될 수 있지 않았을까.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하다.
럭키금성 황소(현 FC 서울) 선수로 뛰던 현역 시절의 이영진 ⓒFC서울
지고는 못살아

현역 시절 이영진의 K리그 기록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220경기 출장에 11골-28도움이라는 화려한 기록과 더불어 37회의 경고와 3회의 퇴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다. 매년 빠짐없이 2~3개의 옐로 카드를 받았고, 퇴장 기록은 역대통산으로도 박광현(전 성남, 은퇴), 송주석(전 울산, 은퇴), 호제리오(전 대구) 등에 이어 공동 4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여진(?)이 강력하다.
한때 그는 K리거들 사이에 가장 피하고 싶은 선수 1순위로 지목되기도 했다. 수비수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오명을 쓰게 된 것일까?
“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어였습니다. 경기할 때 누가 나를 건드리면 반드시 따라가서 복수를 한 것이죠. 워낙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거든요. 경기에서 지면 밥도 안먹을 정도로 지는 게 분했어요. 그건 선수끼리 일대일로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죠.”

이런 성격은 경기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본업이지만 수비에도 큰 매력을 느꼈다. “상대 공격수와의 머리싸움이 재미 있었어요. 내가 방향을 잡고 예측한대로 상대가 움직일 때, 그래서 내가 막게 될 때 굉장히 짜릿했죠.”

그렇다고 본업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니다.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빠른 움직임과 넓은 시야, 송곳 같은 패스로 팀의 공격에 숨통을 틔웠던 그다. 골보다 어시스트 기록이 더 많은 것도 인상적이다. 공격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어시스트에서 더 큰 묘미를 느꼈다는 설명이다.

“물론 우리팀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지 않으면 마무리로 연결이 되지 않았겠죠. 당시 스피드가 뛰어나고 스크린 플레이에 능한 윤상철, 임근재 같은 선수들이 전방에 있었어요. 선수들의 동선, 특정 구역에서 빠른지 느린지, 어떤 성향의 패스를 좋아하는지 등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볼 배급이 가능했습니다.”

작은 힘을 100% 끌어올릴 수 있는 집중력

그는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8할이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타고난 것이라고는 남들보다 좀더 예민했던 운동신경과 근성밖에 없었다. 작은 키 때문에 좌절할 것이었다면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을 축구였다.

“키 때문에 좌절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대신 신체적 조건이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선수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했죠. 판단을 빨리 하려면 경기장 전체를 내 시야에 두고 있어야 해요. 패스를 주고 빠지기를 제대로 하려면 먼저 생각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죠.”

“저보다 덩치 큰 선수들이 경기 내내 자신의 힘을 70% 정도 썼다면, 저는 작은 힘을 100%로 끌어내는 집중력이 좋았어요. 몸싸움은 덩치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리와 집중력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97년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어느덧 10년 남짓이다. FC서울에서만 코치 생활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프로에 오는 많은 선수들이 가능성을 꽃피우기도 전에 낙마하는 것을 보면서 ‘투자한 만큼 성장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죽어라 운동만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성 교육이 반드시 겸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수들이 단순히 운동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인드 콘트롤도 강화하고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해요. 그래서 축구를 통해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컨텐츠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유년기부터 단 30분이라도 여가 시간에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좋은 습관을 들인다면, 그게 나중에는 기량 향상의 밑받침이 될 수 있다는 얘기죠. 하다못해 감독의 전술 전략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고요.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법입니다.”

“귀네슈 감독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유럽의 축구 문화를 맛보고 있습니다. 시야가 확장되는 셈이죠. 전임 감독으로 모셨던 조광래 감독님으로부터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배웠어요. 이분들께 배운 리더십을 잘 접목시키고 더 많이 공부해서, 언제든 때가 되면 좋은 경기를 보이는 감독으로 팬들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7년 7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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