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활동량과 성실한 플레이로 70년대 큰 사랑을 받았던 이영무 ⓒ스포탈코리아
‘2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은 한국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박지성에 앞서 이미 2개의 심장을 가진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영무다.
이영무는 1970년대 한국 대표팀의 중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성실한 플레이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천재’의 이미지는 아니었고 몸집 또한 왜소했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100%를 모두 발휘하는 강인함으로 축구팬들을 감동시켰다.

물론 이영무가 단순히 활동량과 성실함만으로 1970년대 한국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영무는 독특한 훼이크 동작에 이은 드리블과 재치있는 플레이로 상대를 농락했다. 또한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기 힘든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몸을 돌려 크로스를 올려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기도 했다.

축구를 위해 2년간의 재수도 마다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경기도 능곡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영무는 처음부터 축구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능곡초 5학년 시절,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축구부 코치의 권유로 능곡초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능곡초 축구부는 본격적인 축구팀이라기보다는 클럽에 가까웠다.

“5학년 때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잘했던 아이들을 모아서 축구부와 경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코치님이 보고 축구부를 권유했고, 저도 축구를 좋아했기에 가입했죠. 그런데 6학년에 올라간 다음에는 어머니의 반대가 심해서 축구부를 그만둬야했어요.”

“그래도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교실 창가에서 축구하는 친구들만 바라봤고, 그 때문에 선생님이 제 자리를 복도 쪽으로 옮기는 일도 있었죠. 마음은 축구부에 있어서 몰래 수업시간에 창문 열고 나가서 같이 축구하다가 들어오곤 하다가 혼도 많이 났습니다.(웃음) 결국 선생님이 부모님을 만나시더니 얘는 아무래도 축구를 시켜야겠다고 말씀하셔서 공부와 축구를 같이 하게 됐습니다.”

현역 시절 줄곧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이영무는 초등학교 때도 미드필더였다. 그 당시에도 키가 작아서 ‘라이터돌 같다’는 놀림도 들었던 그는 많이 뛰고, 열심히, 투지있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축구선수 이영무’의 특징이 이때부터 드러난 것이었다.

능곡중에 진학한 이후에도 공부하면서 축구를 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능곡초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축구부가 아니었던 능곡중은 당시 경희대 체육학과에 다니던 이중구 씨(현 고양시 생활체육협의회 전무)가 기본기 위주로 지도를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축구를 클럽활동 정도로 생각하면서 만족하고 있었던 이영무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주위의 권유로 경희중 축구부에 입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능곡중 시절에는 매일 훈련하지는 않고, 기본기 훈련에만 충실했어요. 리프팅을 떨어트리지 않고 500개 이상 하고 그랬죠. 그 때만 해도 서울에 가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당시 경희중 축구부에 계시던 방계학 선배님이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기회를 주셨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선수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축구선수로의 길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은 이영무는 2년간 경희중에서 재수를 하며 절치부심했다.

“그 무렵 저는 체구 자체가 너무 작았고 체력도 약했어요. 곧바로 고등학교로 가기는 힘들다는 평가가 내려져서 2년을 더 경희중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 사실상 1년 재수한 셈이 됐지만 말이죠. 2년째 재수하게 됐을 때는 집에 이야기도 못했어요. 저야 축구를 너무 좋아하기에 감수할 수 있었지만, 집에 이야기하면 당장 축구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요.”

“결국 집에는 고등학교 진학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걸리겠어요? 부모님이 고교 시합을 보러가셨는데 제가 없었던 거예요. 딱 걸렸죠.(웃음) 부모님은 운동하려면 잘 먹고 잘 해줘야 하는데 집안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까 그만뒀으면 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어요.”
경희대 시절 볼 트래핑 훈련을 하고 있는 이영무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초중 시절, 오히려 큰 도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늦었지만, 능곡초-중 시절의 기본기 위주 훈련은 이영무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훈련량 부족으로 힘든 시기도 보냈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에 기본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이 된 이후 이영무에게 플러스로 작용했다.

“제가 축구선수로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기가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초-중-고를 지나면서 발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뛰어넘는 마지막이 바로 기초에 있어요.”

“그 시절에는 대회에 나갔던 것이 아니라 기초만 닦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중에 경희중, 경희고에 가서 체격이 왜소한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나중에 힘이 붙으니까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거고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죠.”

“저는 그 무렵에 하루에 볼 리프팅을 천개씩 하곤 했습니다. 무릎, 머리,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로...계속했죠. 익숙해지다보니까 실수가 없어지더군요. 저에게 볼이 올 경우 1m 밖으로 나가지 않고 컨트롤이 됐어요. 결국 위기 대처능력과 볼 키핑 능력이 향상된 거죠. 그런 기본에 충실하다보니 대표 선수로도 오래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영표나 박지성, 김두현, 박주영 같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이영표와 박지성은 초등학교 때 김철수라는 선생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죠. 이 분은 당시 아약스에서 만든 유소년 훈련 프로그램 비디오를 보고 아이들에게 접목했었어요. 1번부터 40번까지 페인팅 기술을, 드리블 패턴만 20가지를 만들어서 계속 반복해 가르쳤죠. 이영표가 있던 안양초 시절에는 번호만 이야기하면 거기에 맞춰 아이들이 드리블하고, 동계훈련에도 그런 기본기만 가르쳤어요. 그 선생이 수원 세류초에 가서는 박지성을 또 그렇게 가르쳤고요. 이영표가 이야기하길 대회에 나가면 봄-여름 대회에서는 지기만 하는데, 가을대회쯤 되면 전국을 석권할 정도로 성장해버린다고 하더군요. 결국 기본기, 기술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예입니다.”

노력, 노력, 끊임없는 노력

무엇보다 이영무의 성공요인은 단연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는 축구선수가 된 이후, 오직 ‘노력’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믿고 전진했다. 기숙사에서 지낼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 집에서 통학하던 경희중-고 시절에는 새벽 6시에 고양에서 서울로 가는 첫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가서 저녁 9시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팀 훈련 뿐 아니라 개인훈련을 꼬박꼬박 하는 성실함은 여전했다.

“사실 통학하면서 운동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부모님이 계속 반대를 하셨기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새 유니폼이나 트레이닝복을 사달라는 이야기도 못하고 선배들이 입고 떨어지는 옷을 물려받아서 꿰매입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신앙에 더 의지하게 되었고, 기도를 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인내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됐습니다. 경희대에 진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에도 새벽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서 산을 뛰고, 밤 10시에 남들 잘 때 화장실 가는 척 나와서 계단도 뛰고, 줄넘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드리블 훈련하고 그랬어요. 팀에서 1주일이나 2주일 휴가를 줄 때도 혼자 도시락 두 개 싸서 학교에 와서 오전-오후로 훈련을 했습니다. 저라고 놀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늘 제 마음에는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죠.”

“축구일지도 꼬박꼬박 썼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훈련했고, 내가 잘한 것과 부족했던 것, 칭찬받은 것과 지적받은 것을 상세하게 쓰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곤 했어요. 그 때부터 지도자에 대한 준비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나중에 내가 지도자가 되면 이런 부분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다는 것을 메모하곤 했었죠. 그리고 술,담배를 비롯해 운동하는데 해로운 것은 절대 하지 않았죠.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고, 커피나 인스턴트 음식, 콜라 등도 절대 먹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축구를 잘할 수 있는 길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했었어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영무의 엄청난 활동량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지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약 12km를 뛰어 양 팀 통틀어 가장 많이 뛰면서 언론과 팬들의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영무는 비공식적으로 한 경기에 20km 가까이 뛴 적도 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에게 매번 패하던 일본에서 한국 타도를 위해 각 선수별로 분석을 했고, 그 중 이영무에 대한 분석에서 이러한 수치가 나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

그리고 이러한 강철체력에 대해 이영무는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처절할 정도의 노력, 그리고 신앙심에 기반한 정신력을 이유로 꼽았다.

“지금은 J리그 우라와 레즈의 스카우터로 활동하는 오치아이라는 선수가 현역 시절 제 전담 마크맨이었습니다. 최근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신이 하도 많이 뛰어다녀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실제로 전반 끝나고 제 마크맨이 힘들어서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죠.(웃음) 저는 90분을 뛰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움직였어요.”

“사실 제가 오래달리기를 남들보다 잘하긴 했지만, 폐활량 자체는 다른 선수들과 비슷했어요. 일단 엄청나게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훈련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뛸 수 있었겠어요? 고교 때나 대학 때 산에 올라가서 인터벌 훈련을 혼자 했습니다. 한번 그렇게 산을 타면 맥박이 200에서 240까지 올라가죠. 맥박이 200만 넘어가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그런 훈련을 새벽이고 저녁이고 계속 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근육훈련도 되고, 내려올 때는 스텝을 잔발로 만드는데 적합하죠. 그랬더니 어느 순간 경기장에서 웃으면서 뛸 수 있었어요.”

“국가대표팀에서 뛸 때는 이런 일도 있었죠. 저나 차범근 선배나 막 국가대표에 뽑힐 무렵이었는데, 둘다 팀 훈련이 끝나고나면 개인훈련을 하곤 했어요. 저도 그렇지만 차 선배도 항상 자신은 부족하다면서 아침 저녁으로 개인훈련을 했죠. 어느날 팀 훈련이 끝나고 둘다 부족하다면서 개인훈련을 하는데, 저는 이쪽 골대에서, 차 선배는 저쪽 골대에서 훈련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하고 나서 서로 ‘저쪽에서 훈련마치고 들어가면 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던 거예요. 서로 눈치만 보면서 계속 훈련을 했죠. 결국 한참 지났는데도 우리 둘이 숙소에 안오니까 당시 감독이셨던 함흥철 선생님이 오셔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또 하나는 신앙의 힘이에요. 저도 체력의 한계는 분명 있고,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면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거죠. 제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상 도전했습니다.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던 요인이죠. 어떤 경기에서는 후반 끝나고도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어요. 그럴 때는 운동장이 정말 작게 느껴지죠. 종횡무진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어요.(웃음)”
1979년 한일 정기전에서 이영무의 경기 모습
고교 2학년때 처음 태극마크의 기쁨을 맛보다.

이영무가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것은 경희고 2학년 말이었다. 그리고 3학년에 올라가서는 1972년 태국에서 열린 U-20 아시아선수권에 참가하는 기쁨도 맛봤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영무는 이듬 해인 73년 이란 대회에도 참가해 3위를 기록했다.

“2학년 말에 4차 선발까지 거쳐서 최종 25명에 뽑혀 합숙훈련을 했고, 이듬 해에 아시아선수권에 나갈 최종 18명에 선발됐죠. 당시 차범근 선배와 황재만 선배가 계셨고, 저와 신현호, 유동춘 이 세 명이 고3으로 뽑혔어요. 대표에 선발됐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감격해서 엉엉 울면서 기도했어요. 축구하는 걸 반대하시던 부모님들도 정말 좋아하셨고요. 당시 대표팀 발표 뉴스를 라디오에서 해줬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은 처음 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뒤늦게 급부상한 이영무를 두고 여러 대학에서 쟁탈전을 벌였고, 승자는 경희대였다. 이영무는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경희대행을 선택했다.

“학창 시절에 체육교사를 하면서 감독을 하는 분들이 너무 보기 좋더군요. 저도 공부하면서 축구를 하고 싶었고, 당시 경희대가 그런 점을 강조했었어요. 오전에 수업받고, 오후에 훈련하고 그랬죠. 물론 개인적으로 새벽훈련과 저녁훈련을 하면서 축구에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결국 대학 마치고 대학원 공부를 계속한 것도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경희대 4년 동안 이영무는 11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고려대와 연세대, 한양대 등에 비해 전력상 떨어지는 경희대였지만, 이영무를 필두로 한 건실한 축구는 화려한 축구를 제압했고, 그 무렵 가장 많이 우승을 차지하며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최초로 기도 세러머니를 펼치다.

박주영을 비롯해 여러 선수들이 골을 넣은 뒤 펼치는 기도 세러머니. 이것의 원조도 이영무이다. 청소년대표를 거쳐 1974년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이영무는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며 국가대표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197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에 참가한 이영무는 한국 최초의 기도 세러머니를 펼쳤다. 심리학 박사 겸 목사였던 조셉 머피가 쓴 ‘승리의 길은 열린다’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이영무는 매 경기 기도를 하면서 경기에 나섰고,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홈팀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이영무는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린 뒤, 역사적인 첫 기도 세러머니를 펼쳤다.

“그 책을 읽으면서 긍정적인 마음, 상상력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는 축구에 적용했죠. 제가 골을 넣고 팀이 이기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결승전 전날 밤이었어요. 긴장하다보니까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성경 구절을 읽었는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하는 구절이 순간적으로 가슴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사실 저는 체격이 작기 때문에 빠르고 신체조건이 좋은 선수들을 만나면 위축되었고, 성격이 소심해서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었죠. 그런데 그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고, 경기 당일에도 몸이 가볍더군요.”

“결승전에서 이상할 정도로 실수도 없이 잘 뛰었고, 전반이 끝날 무렵에 몸을 돌면서 터닝슛을 한 것이 그대로 골로 연결되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골 넣으면 기쁨에 도취되어 손들고 그랬을 텐데, 그날은 골을 넣고 신현호에게 붙잡혀서 넘어진 뒤에 동료들이 올라타는 바람에 숨도 쉬기 어려우면서도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골을 넣을 때마다 기도 세러머니를 하게 됐죠.”

이 경기를 시초로 해서 이영무는 다음 A매치였던 한일정기전(1975년 9월)에서도 팀의 세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이영무는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미드필더임에도 골을 많이 넣었고, 그 때마다 기도 세러머니는 어김없이 이뤄졌다.

“기도 세러머니 때문에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죠. 특히 중동 원정을 갔을 때가 문제였어요. 한번은 사우디 원정으로 기억하는데, 그 무렵에는 석유 수급 문제로 인해 우리가 중동권의 눈치를 많이 봤었습니다. 외교를 위해서도 축구팀이 원정을 많이 갔는데, 그럴 때마다 정부에서는 ‘비겨도 좋고, 이기더라도 1골 차 이내로 아슬아슬하게 이겨야 한다’고 주문하곤 했어요.”

“그러면서 정부가 염려했던 것이 제가 기도 세러머니를 하는데, 그 쪽이 이슬람권이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경기 전에 저에게 와서 기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알겠습니다’ 하고만 대답했죠. 기도하겠다고 하면 경기를 못 뛰게 할 것 같아서 애매하게 이야기한 것이었어요.(웃음)”

“그런 뒤에 경기장에 들어서 동료들끼리 파이팅을 외친 다음에 저는 무릎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료들이 관중석, 특히 사우디 왕자가 보지 못하게 제 주위를 둘러싸서 가려줬죠.(웃음) 별 일은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너무 민감하게 대처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궁금한 점. 70년대에는 이스라엘이 아시아에 소속되어 있어 함께 경기를 치르곤 했다. 과연 이영무의 기도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을 상대로도 통했을까.

“하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들은 구약성서만을 믿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전에서 제가 골 넣고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젊은 시절의 이영무
내 생애 최고의 경기

1981년까지 국가대표로, 그리고 86년까지 선수 겸 코치로 활약한 이영무는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는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이란에서 열렸던 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이란과의 경기였다. 원정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장소인 이란 테헤란의 아지디 스타디움에는 11만명의 관중이 들어찼고, 한국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월드컵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이영무는 선제골을 비롯해 2골을 뽑아내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한국은 이란과 2-2로 비겼고, 월드컵 티켓은 이란의 몫이 되었다.

“경기 전부터 이란은 우리한테 2골 차 이상으로 이긴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어요. 우리도 오기가 생겼죠. 당시 저는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전반에 제 앞으로 볼이 굴절되어 왔어요. 30m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그대로 슛을 시도했고, 득점에 성공했죠. 제 생애에 그런 중거리슛 골이 별로 없었는데 중요할 때 하나 터트렸어요.”

“얼마 전에 외국 인터넷 사이트에 가봤더니 이 경기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봤더니 골 넣고 기도 세러머니하는 것까지 나오더군요.(웃음) 그 골이 들어간 순간 이란 관중 11만명이 일순간에 조용해졌어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죠. 그러나 후반에 2골을 내주면서 역전을 허용했고, 나중에 조광래가 올려준 크로스를 김재한 선배가 헤딩으로 떨궈주자 제가 쇄도하며 골로 연결시켜 2-2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 이란전 골 동영상 보러가기

1975년 킹스컵 역시 이영무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이영무는 해트트릭을 비롯해 6골을 폭발시키며 대회 MVP에도 뽑혔다. 귀국하자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영무에게 집중되었고, TV에도 출연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6골을 넣으면서 MVP를 받고 귀국하니까 모든 기자 분들이 저에게 오더군요. 그 전에는 차범근, 김재한, 김호곤 선배 등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어요. 자고나니 스타가 됐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했던 순간이었죠. 당시 MBC에서 ‘스타쇼’라는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거기에도 나가게 됐어요.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축구인으로는 이회택 선배님에 이어 두번째였습니다. 새로운 경험이었죠.”
1975년 박대통령배(박스컵)에서 우승한 후 한국대표팀(아랫줄 왼쪽 두번째가 이영무)
환상호흡을 자랑했던 동료들

8년여에 걸친 대표팀 생활 동안 이영무와 환상호흡을 자랑했던 선수들은 여럿 있다. 기본적으로 이영무는 워낙 많이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위해 헌신했던 선수이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호흡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영무 본인이 최고의 파트너로 꼽았던 선수는 신현호와 차범근, 김재한 등이었다.

“일단 신현호 감독과는 국가대표 시절 줄곧 한방을 쓰면서 가장 가깝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요. 사실 저는 경희중-고, 신현호 감독은 한양중-고를 나왔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국가대표에서 계속 함께 지내면서 절친한 사이가 됐죠.”

“경기장 안에서는 차범근 선배와 김재한 선배, 김진국 선배, 허정무 감독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일단 차범근 선배가 돌파해서 연결해주면 제가 쇄도해서 골을 넣곤 했습니다. 또 김재한 선배가 헤딩으로 떨궈주는 볼을 제가 잘 주워먹기도 했고..(웃음) 왼쪽의 김진국 선배, 허정무 감독과도 호흡이 잘 이뤄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1980년대 초반 할렐루야에서 뛸 당시의 이영무
할렐루야 축구팀에 축구인생을 걸다.

1980년 이후 이영무의 삶에는 오직 할렐루야 축구팀만이 존재한다. 경희대 졸업 후 한홍기 감독의 가르침을 받고자 포항제철에 입단한 이영무는 77년과 78년, 2년 동안 포철에서 활약한 뒤 군 복무를 위해 육군 충의팀에서 뛰게 됐다. 80년 제대한 이영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롭게 창단한 할렐루야였다. 한국축구의 전설인 故김용식 선생을 초대 감독으로 모신 할렐루야에서 그는 선수겸 트레이너로 활약했다.

“김용식 선생님을 모시면서 축구에 대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그 분은 항상 기술만이 한국축구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하셨어요. 그리고 연세가 있으신데도 매일 새벽마다 나가셔서 볼 리프팅 훈련을 하시는 등 매사에 모범이 되셨죠. 또 영어를 홀로 독학하셔서 기회될 때마다 해외에 나가셔서 선진기술을 배워오곤 하셨고요. 제 모델이 되었던 분이십니다.”

이영무는 할렐루야 축구팀을 프로로 전환시켜 1983년 원년 슈퍼리그에 참가시키는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의 프로팀이 만들어지는데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김용식 선생님도 항상 ‘아마추어는 한계가 있다. 프로화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비록 선교 목적이 있는 팀이지만, 당시 최순영 KFA 회장님께서 허락해주시고, 스폰서를 받아서 한국 최초의 프로팀으로 출범할 수 있었죠.”

비록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할렐루야가 해체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후에도 이영무는 임마누엘과 이랜드 축구팀에서 축구와 선교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할렐루야가 재창단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 결국 1998년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

“현재 내셔널리그에 소속되어 있는데, 2년 후에는 할렐루야 축구팀이 생긴 지 30주년이 됩니다. 그 때를 즈음해서 다시 할렐루야가 K-리그에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영무는 자신의 축구인생이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 제 기도 세러머니 때문에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고,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신앙적인 면을 떠나서 그 누구에게도 ‘이영무는 정말 열심히 한다. 결코 포기할 줄 모르고 최선을 다한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평가가 좋습니다. 볼을 잘 찬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어느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영무의 모습으로 기억되었으면 했고, 또 그렇게 했다고 자부합니다.”

“제 별명도 다 그런 것들이었어요. 상대가 볼을 잡으면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뛰어다닌다고 해서 ‘악바리’라는 별명을, 엄청나게 뛴다고 해서 ‘3개의 폐를 가진 사나이’, ‘달리는 기관차’, ‘발바리’라는 별명을, 맹수와 같이 달려든다고 해서 ‘그라운드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죠. 물론 경기하다보면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런 경우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수의 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매너를 가진 선수로도 기억되고 싶네요. 골 넣고 박수받는 것보다 나에게 거칠게 태클이 들어온 선수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는 모습이 더 박수를 받을 수도 있거든요. 좋은 매너로 최선을 다하는 선수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12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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