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후반 K-리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이흥실 ⓒ스포탈코리아
80년대 중후반 한국축구, 그리고 K-리그를 대표했던 공격형 미드필더를 꼽는다면 누가 생각이 나는가?

여러 선수들이 후보에 오를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선수는 이흥실(47세, 현 전북 코치)이다. 1985년에 포철(현 포항)에 입단한 이흥실은 그 해 K-리그 베스트11과 신인왕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 해인 1986년에는 포철의 우승을 이끌며 K-리그 MVP를, 89년에는 도움왕을 수상했다. 또한 K-리그 최초로 ‘30-30 클럽(30골-30도움 이상)’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3년 은퇴할 때까지 총 182경기에 출장해 48골-35도움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고, K-리그 베스트11에만 5번 선정(85-86-87-89-90년)되는 등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다.

미드필더이면서도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많은 득점을 올렸으며, 특히 빠르고 강한 킥력을 바탕으로 좌우로 넓게 벌려주는 패스의 정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수비가담능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이를 만회하는,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축구를 위해 초등학교를 1년 더 다녀

축구를 너무나 좋아했던 이흥실은 4학년 시절부터 5~6학년 형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곤 했다. 이흥실이 다녔던 진해 덕산초는 정식 축구부가 없어 취미로 축구를 했었지만, 그 실력을 인정받아 6학년 때는 진해시장기 등의 축구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 때는 축구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축구가 너무 좋아서 재미로 했을 뿐인데, 진해시장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그랬어요.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려고 하는데, 마산 합포초 감독님께서 집으로 찾아오셔서 계속 권유를 하셔서 결국 축구를 하게 된 겁니다. 그 때문에 졸업하고도 합포초에서 1년 더 다녔어요. 초등학교 졸업장만 2장이 생겼지요.(웃음)”

합포초를 졸업하고 마산중앙중에 입학한 이흥실은 당시에도 체구가 왜소했지만, 자신의 특기인 개인기와 날카로운 킥으로 약점을 상쇄하고 팀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특징적인 것은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줄곧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만 뛰었다는 점.

“처음 축구를 할 때부터 공격형 미드필더였어요. 처음에는 개념이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는데, 점점 공격형 미드필더, 그리고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지요. 제가 너무 좋아하고 만족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다른 위치에서 뛴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최고의 키커, 무한연습으로 만들어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던 이흥실은 특히 킥 능력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였다. 이흥실은 어린 시절부터 킥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것은 피나는 연습의 결과였다. 신체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일궈낸 성과였다.

“그 무렵에도 신체조건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약점을 메우기 위해 킥과 드리블 연습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합포초 시절 소년체전에 나가면서 코너킥과 프리킥을 전담으로 차기 시작했지요. 그 이후부터는 줄곧 킥은 제가 찼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킥을 전담하다보니까 정확성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킥 연습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일단 운동장에 나가면 킥 연습부터 했고, 팀 훈련 외에 개인훈련을 은퇴할 때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했습니다.”

“마산공고 다닐 때는 이런 일도 있었죠. 서울에서 대회가 있어 올라왔는데, 숙소 근처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더라고요. 아침 일찍 나가서 개인훈련을 하는데,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들과 경기를 하곤 했는데, 저 혼자 상대를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5명 정도와 붙다가 나중에는 상대가 10명까지 늘어나요. 그 속에서 나름대로 훈련을 한 것이죠. 대략 승률은 비슷했는데, 상대가 10명 정도 되니까 이기는 게 쉽지 않더군요.(웃음)”

“재미있었던 것은 마산중앙중 3학년 시절에 6개월 정도 감독님이 안 계셨을 때가 있었어요. 소년체전 예선이 10월경에 있었는데, 감독님이 안 계셔서 제가 대신 1-2학년 후배들을 데리고 감독 역할을 하면서 대회를 준비한 적이 있었죠. 그 때부터 지도자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 같습니다.”
포항제철 시절의 이흥실 ⓒ월간축구
마산공고에서 최고로 올라서다.

마산공고에 진학한 이흥실은 고교 1학년 시절부터 청소년대표상비군에 선발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2학년 시절, 대통령금배는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 중에 하나이다. 당시 이흥실은 마산공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진출했고, 결승전 상대는 변병주-박경훈-백종철 등이 포진해 있던 최강 청구고였다.

“결국 청구고의 벽을 넘지는 못했어요. 변병주-박경훈이라는 준족의 날개들과 백종철이라는 확실한 득점포가 있었던 청구고였거든요. 0-1로 패하고 말았죠. 그런데 보통 우승팀 선수에게 주는 MVP를 저에게 주더군요. 저도 놀랐죠. 아마 청구고에 좋은 선수들이 많다보니까 누구 하나에게 주기가 고민스러웠고, 그래서 저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고3 때는 U-19 아시아선수권에 참가하는 청소년대표팀에도 최종선발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해당연도 7월 이후생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고, 생일이 7월 15일이었던 이흥실은 결국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해당연도까지를 기준으로 삼지만, 당시에는 이상하게 7월까지로 설정해놨더라고요. 그 나이에 아시아선수권이나 세계대회를 경험해봤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은 있죠. 그 이후로 이상하게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은택 감독과의 만남, 새로운 전기 마련

마산공고를 졸업한 이흥실은 한양대로 진학한다. 당초 지역 학교인 동아대로 가길 원했던 이흥실이었지만, 여러 상황으로 인해 한양대로 가게 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행운이었다. 한양대에서 최은택 감독(작고)을 만나면서 이흥실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는 동아대에 가고 싶었어요. 마산공고가 동아대와 훈련이나 연습게임도 많이 하면서 선배들과도 친해지고 학교 분위기도 좋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반면 한양대는 청소년대표상비군 시절에 한양대 숙소를 사용했었는데 선배들이 좀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꺼렸었죠.(웃음)”

“그래도 감독님이나 부모님 등 주위에서 서울로 가는 것이 낫다라고 말씀하셔서 결국 한양대로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최은택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인연이었어요. 그 분 밑에서 축구를 더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대표팀까지 선발될 수 있었죠.”

이흥실이 밝혔듯 최은택 감독과의 만남은 그의 축구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시대를 앞서갔던 최은택 감독의 지도는 이흥실이 최고의 미드필더가 될 수 있게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최 선생님한테 지도를 받았던 것이 81-82년 무렵이었는데, 그 때 훈련 내용이 90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사용하던 3-5-2 전술과 매우 유사했어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제가 90 월드컵을 갔다오면서 최 선생님이 10년을 앞서가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었죠.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십니다.”

“어쨌든 최 선생님에게서 축구를 정말 많이 배웠어요. 당시에는 저에게 지구력이나 슈팅력 등을 많이 주문하셨어요. 그리고 드리블을 좀 더 줄이면서 효율적인 플레이를 하라고도 조언해주셨고요. 제가 미드필더로서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최 선생님의 영향이 크죠. 나중에 포철에 입단했을 때, 최 선생님이 감독으로 부임하시면서 다시 인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1990년 무렵 이흥실을 비롯한 포항제철 선수들 ⓒ월간축구
포철에 입단, 신인왕으로 화려하게 데뷔

이흥실은 한양대 4학년 시절, 전국대회 2개와 태국 퀸스컵 우승 등 3관왕을 차지하는 맹위를 떨쳤다. 그리고 1985년 드래프트를 통해서 포철에 입단하게 됐다. 스타급 선수들로 구성된 포철에서 이흥실은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도약했고, 21경기에 나서 10골-2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등극했다.

“국가대표로 뛰는 것과 프로무대에서 뛰는 것은 축구선수들의 2가지 목표였습니다. 당연히 포철 입단이 결정됐을 때 정말 기뻤죠. 더군다나 명문클럽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입단했을 때 최은택 선생님이 포철 감독으로 부임하셨어요. 여러 가지로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웃음)”

이흥실은 데뷔 2번째 경기였던 대우(현 부산)전에서 프로 데뷔골을 터트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꾸준히 기용됐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5경기에서 연속골을 터트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인왕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포철은 특급 스타들이 즐비했어요. 과연 여기서 자리잡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나 시즌을 앞두고 브라질 전지훈련을 가서 거기 선수들과 부딪치고 훈련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프로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면서 자신감이 생겼고요.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경기가 잘 풀리면서 신인왕까지 받게 되었고, 이후에도 잘 풀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아마추어 때는 토너먼트 대회이다보니 단기간에 집중해서 여러 게임을 소화하고, 한 달 넘게 쉬고 그러니까 몸 상태를 조절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나 프로는 주말마다 경기가 있으니까 훈련하기도 편하고, 자기가 집중력을 갖고 몸 관리를 잘하면 오히려 더 쉽게 경기를 치를 수 있죠. 더군다나 좋은 동료들과 경기를 하니까 더 편하기도 하고요.”

K-리그 MVP와 도움왕, 베스트11 5차례의 성과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했던 이흥실의 상승세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프로 2년차였던 86년에 K-리그 MVP를 수상했고, 89년에는 도움왕도 차지했다. 86년부터 89년, 그리고 89년과 90년에는 K-리그 베스트11에도 선정됐다. 또한 ‘30-30클럽’을 최초로 달성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프로에 와서 좀 더 공격적인 스타일로 바뀌었어요. 수비 부담도 적었고, 주위에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까 상대의 집중마크도 분산됐고요. 그런 요소 때문에 더욱 편하게 공격적으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죠. 미드필더면서도 골을 많이 넣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제가 직접 골을 넣는 것보다는 경기를 운영하고 조율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어요. 플레이메이커라는 역할을 좋아했죠.”

“사실 MVP를 받았던 86년보다는 85년이 더 몸이 좋았어요. 86년에는 발목 부상도 약간 있고 해서 경기에 나가지 못한 적도 있었고, 팀마다 저에게 전담마크를 붙이다보니까 더 힘들기도 했죠. 신인 때 성공하다보니까 집중력 등이 떨어지면서 조금 나태해진 면도 있었고..”

이흥실 본인이 최고의 경기력이었다고 꼽는 해는 1987년이었다. 당시 이흥실은 29경기에 나와 12골-6도움의 맹위를 떨쳤다. 2경기에 공격포인트 하나씩은 기록한 셈이다. 이 해에 그는 득점 2위-도움 2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87년은 정말 몸이 좋았죠. 경기력이 최고였어요. 당시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2연전을 하고 그랬어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방식이었죠.(웃음)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잘 뛰었고, 득점-도움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과를 올렸습니다. 89년에도 도움 11개를 기록하면서 도움왕을 받았어요. 플레이메이커로서 한번쯤은 받아야하는 상이어서 기뻤죠.”

당시 이흥실은 최상국(현 호원대 감독), 조긍연(현 선문대 감독) 등의 공격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포철은 공격력 최강의 팀으로 만들었다.

“최상국, 조긍연과의 호흡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두 선수는 스타일이 달랐죠. 최상국은 순간 스피드나 슈팅력,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페인팅이 굉장히 좋았어요. 미드필더로서 패스를 쉽게 넣어줄 수 있었죠. 반면 조긍연은 움직임이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슈팅이나 결정력이 굉장했어요. 좀 더 세밀하게 패스를 넣어줘야 했죠. 어쨌든 셋이서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여서 같이 어울리고 지내다보니까 경기장에서도 눈만 보면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뷰 중인 이흥실 ⓒ스포탈코리아
아쉬웠던 대표팀 생활

K-리그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은 모두 맛보며,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았던 이흥실이지만,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한양대 1학년 시절부터 대표팀에 선발되는 등 꾸준히 대표팀을 노크했지만, 리그에서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던 것.

“한양대 1학년 시절에 처음 대표가 되었어요. 당시 화랑의 마지막 멤버였죠. 82년이었는데, 대표팀에 뽑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무릎을 다쳐서 나와야 했고, 2학년때 다시 뽑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대표팀에 들어가서 좋은 기억이 없어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83년 한일정기전 때도 비기고..”

이후 이흥실은 85년부터 87년까지 잠깐씩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바로 직전에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극적으로 월드컵 출전을 확정지은 셈이다.

“리그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어요. 그 무렵부터 축구에서는 수비력을 강조하기 시작했죠. 저에게는 계속 공격력은 좋은데, 수비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따라다녔어요. 이탈리아 월드컵 직전까지도 선발되지 못했었는데, 막판에 이흥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면서 뽑혔죠. 17전 18기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웃음)”

“아쉬움이나 야속함, 섭섭함 등은 없었어요. 이상하게 저 스스로도 대표팀에서는 경기내용이나 결과가 좋지 않았었거든요. 프로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대표팀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월드컵에는 꼭 한번 나가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가게 됐으니 소원성취한 셈이죠.”

“다만 이런 생각은 듭니다. 당시에는 수비가 많이 강조되었고, 2002년 이후에는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으로 역시 모든 것을 다 잘해야하는 풍토가 되었어요. 그러나 멀티 플레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멀티 플레이어라고 불리우는 선수들은 모든 것을 조금씩 잘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뛰어난 특기는 없어요.”

“프로,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통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특기를 확실히 갖고 있어야 해요. 메시나 호날두, 리켈메 같은 선수들을 봐요. 확실한 장점을 갖고 있잖아요. 예전 최순호나 변병주 같은 선수들도 개개인의 확실한 특기를 갖고 있었어요. 공격력이 강한 선수가 있으면 뒤에서 수비력을 갖춘 선수들이 받쳐주면 됩니다.”

“지금 축구는 수비수부터 미드필더, 공격수까지 볼 잡은 사람이 경기를 운영할 줄 알고 플레이메이커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팀이 같이 움직이면서 협력수비나 협력공격을 하면 개개인의 수비력보다 오히려 짜임새있게 조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선수들은 고른 기량을 가진 괜찮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은 더 떨어질 수도 있어요. 확실한 특기를 갖춘 선수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멀티 플레이어도 필요하고, 스페셜리스트도 필요한 건데 너무 한쪽으로만 몰리는 경향은 좋지 않습니다.”

특징있는 선수가 필요하다는 주제로 열변을 토한 이흥실은 다시 이탈리아 월드컵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벨기에와의 1차전, 스페인과의 2차전 모두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이흥실은 마지막 우루과이전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특유의 빠르고 정확한 좌우 전개 패스를 바탕으로 한국의 미드필드를 이끌었다. 그를 기용하라고 부르짖었던 축구팬들에게 이흥실은 경기력으로 보답을 한 셈이었다.

“사실 이탈리아 월드컵은 대회 1주일 전에 현지에 도착하면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대회였어요. 결국 우루과이와의 3차전에서야 선수들의 몸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죠. 1-2차전을 벤치에서 지켜보면서 저도 나름대로 내가 뛰면 잘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죠.”

이흥실이 상대한 우루과이에는 같은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란세스콜리가 뛰고 있었다. 둘의 맞대결은 나름 재미있는 비교 포인트일 수도 있었다.

“우루과이전을 하루 앞두고 제가 선발출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덕분에 잠도 설쳤죠.(웃음) 당시 우루과이 경기를 조금 봤는데, 프란세스콜리나 루벤 소사 같은 선수들이 무척 뛰어났었어요. 그러나 경기에 들어가서는 선수 개개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이겨서 1승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87년 포철 시절 태국 킹스컵에서 북한과 경기했던 것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인 것 같습니다.”
전북에서 감독과 코치로 다시 만난 최강희 감독과 이흥실 코치 ⓒ스포탈코리아
FA제도에 대한 희생양으로 은퇴

이탈리아 월드컵을 다녀온 이후에도 이흥실은 좋은 경기력으로 K-리그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당시 처음 시행되었던 FA제도는 이흥실에게 오히려 독이 됐다. 당시 프로 6년차 선수들에게 FA로 풀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이로 인해 이태호, 최강희 등 첫 번째 해당자들에게 파격적인 계약금을 받고 재계약하는 등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구단들 사이에서는 FA제도로 인한 재정적인 출혈이 크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이후에는 결국 담합을 통해 선수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이흥실은 같이 FA 권리를 얻은 후배 선수들과 함께 개선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구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것은 결국 이흥실의 은퇴로까지 이어졌다.

“처음으로 FA로 풀린 선수들이 큰 혜택을 받자 구단들이 담합을 했어요. 우리는 동계훈련까지 포기하면서 싸웠지만, 구단을 이길 수가 없었죠. 구단끼리 담합해버리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후배들도 다 계약을 하게 됐고, 제가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어쩔 수 없었죠. 제가 월드컵 갔다와서 몸이 좋았고, 91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거든요. 만약 이런 문제가 잘 해결되어 동계훈련도 착실히 하고 그랬으면 2~3년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거예요. 결국 92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됐죠.”

지도자로서의 출발

1993년 은퇴한 이흥실은 그 해 7월부터 모교인 마산공고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최강희 감독이 전북에 부임한 2005년 7월부터 수석코치로서 전북을 지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전북에서 함께 하고 있는 최강희 감독과 최인영 GK코치는 90 월드컵 동료들이기도 하다.

“지도자를 시작할 때는 모교에서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산공고를 갔었습니다. 이후에 최강희 감독님의 부름으로 전북에 오게 됐죠. 최 감독님과는 87년 대표생활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고, 90 월드컵에서는 룸메이트이기도 했어요. 제가 마산공고 감독으로 있고, 최 감독님이 수원 코치로 있을 때에도 서로 축구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브라질도 같이 다녀오고 그랬습니다. 서로 장단점과 성향을 잘 아니까 편하게 스태프를 이루고 있어요.”

“언젠가는 프로팀 감독을 한번 해보고 싶죠. 내 축구 스타일이나 내가 원하는 축구를 프로에서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그 때를 위해 차근차근 나아가야죠.”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11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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