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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함과 성실함의 대명사 윤덕여 코치 ⓒ스포탈코리아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이번에 소개할 윤덕여 경남 FC 수석코치(46세,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참가선수)는 한국축구계의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선수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들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축구를 시작하는 것과 달리 윤 코치는 중학교 3학년에야 정식으로 축구의 세계에 입문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일 뿐이었던 윤 코치는 교내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었고, 결국 축구부에 입문하게 됐다. 마침 윤 코치가 다니던 학교는 축구명문 서울 경신중.

“그 때가 1976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축구만 좋아했지 정식으로 축구를 배운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제가 뛰는 것을 보고 체육선생님이자 축구부 감독님이셨던 김호택 선생님께서 스카웃하신거죠.”

동료 선수들보다 5-6년 정도 축구를 늦게 시작한 셈인 윤 코치는 당연히 초창기에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본기를 다져온 동료들 틈에서 윤 코치는 모든 것을 새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흘리는 땀의 곱절 이상을 흘려야 했음은 당연하다.

“늦게 시작한 만큼 동료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어요.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배 이상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기술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번, 수만번의 반복훈련을 통해서 숙련되죠. 시작이 늦었던 저로서는 남들과 똑같이 훈련해서는 성공할 수 없었어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늦게나마 축구를 시작하면서 축구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연습하고, 팀 훈련을 마친 뒤에도 남아서 저녁까지 개인훈련을 했어요. 피곤하고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사치일 뿐이라고 여겼어요. 그런 노력이 동료들과의 차이를 조금씩 좁힐 수 있는 요인이었죠.”

경신고 진학 후에도 끊임없는 노력 이어져

경신중을 졸업한 윤 코치는 경신고로 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실맨’ 윤 코치의 쉼 없는 노력은 계속됐다. 팀 훈련은 물론이고,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으로 강도 높은 개인훈련을 통해 기량 향상을 꾀했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축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본기가 떨어지다 보니 남들보다 기술적인 부분을 더 많이 연습했어요. 밤에도 몰래 나와서 훈련하고 그랬죠. 지금은 학교에도 나이트 시설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는데, 마침 경신고에 야간부가 있어서 불이 켜진 교실들이 있었어요. 그 아래가 그 중에서는 환했던 편이라 거기서 연습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이런 노력 때문일까.
윤 코치는 1학년 시절부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고, 3학년까지 줄곧 주전으로 활약했다. 중3때 축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평가전에서(왼쪽)ⓒ월간축구
센터백으로 살아남기 위해

윤 코치는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축구부에 들어온 뒤 첫 동계훈련에서는 미드필더를 비롯해 여러 포지션에서 테스트를 받았지만, 곧이어 센터백이 적격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로는 포지션의 변경 없이 센터백 외길 인생을 걸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여기저기 많이 시켜보셨죠. 축구를 모르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 포지션에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했어요.(웃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선생님께서는 센터백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셨나 봐요. 제가 승부근성이 남달랐고, 또 중3이었던 당시에 키가 173cm로 제법 큰 편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단 중앙수비는 키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죠.”

센터백으로 보직을 임명받은 윤 코치의 다음 과제는 그 포지션에서 어떤 장점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배워나가는 것이었다. 축구에 대한 센스가 있었던 윤 코치는 상대 공격수와의 수싸움에서 이기는 법과 미리 볼의 흐름을 끊는 법을 빨리 터득했다.

그리고 센터백으로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헤딩력과 태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헤딩에 필요한 점프력을 키우기 위해 근력훈련에 열중했고, 태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철봉대의 모래밭을 이용하기도 했다.

“나만의 특징을 갖춰야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헤딩을 잘하기 위해 공중에 볼 매달고 하는 훈련이 있는데 거기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훈련했고, 맨땅에서는 부상당하니까 철봉대 모래밭에서 태클훈련을 했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많이 얻은 것 같습니다.”

외모와는 다른 터프한 수비수

윤덕여 코치의 외모를 보면 축구선수 출신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실제로 경기장 밖에서 만나는 윤 코치는 매우 부드럽고 예의바르다. 학자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경기장 안에서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현역 선수 시절 윤덕여는 터프하고, 상대 공격수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유명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윤 코치가 오랜 기간 꾸준하게 활약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가 운동장에 와서 제 경기를 보고 깜짝 놀라하더군요. 밖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이죠.(웃음)”

“거머리 같다고 해야 할까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죠. 지금도 선수들에게 이야기해요. 밖에서는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상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줄 알아야 한다고...”

철저한 자기관리, 장수의 비결

윤 코치를 떠올릴 때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관리이다. 1984년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2년간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윤 코치는 1986년에 프로팀 현대(현 울산현대)에 입단했고, 92년 포항에서 은퇴할 때까지 성실한 몸 관리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프로 데뷔 첫 해에 5경기 출장에 그치며 힘든 시기를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항상 꾸준한 기량을 선보였다.

“1984년에 한일은행에 들어갔는데, 당시만 해도 은행이 최고였죠. 좋은 직장이고, 보너스도 많이 줬어요.(웃음) 2년 동안 있었는데, 슈퍼리그에 참가해 프로팀들과도 좋은 경기를 했어요. 동료들과 즐기면서 축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은행에 있으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훈련하고, 서로 격의 없이 지내다가 프로에 들어왔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더군요. 친구라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했죠. 처음에는 너무 개인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경기 자체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듬해부터는 프로의 생리를 이해하고, 적응해나갈 수 있었죠. 무엇보다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프로의식이 투철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단명 하는 선수들도 여럿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자신을 컨트롤할 줄 아는 선수만이 냉혹한 프로세계에서 끝까지 견뎌낼 수 있었다. 윤 코치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자기 관리에 달려 있어요. 본인이 경기에 뛸 준비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죠. 항상 경기에 뛸 수 있는 몸을 만들어놓는 것은 프로의 기본입니다. 운동선수에게는 리듬이 중요하기 때문에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해요. 모든 생활을 꾸준하게 계획대로 해야만 신체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죠.”
1989년 5월 한일정기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앞줄 왼쪽 2번째)ⓒ월간축구
늦깎이 국가대표, 대기만성의 표본을 보여주다.

프로무대에서의 꾸준한 활약은 결국 윤 코치에게 국가대표팀 발탁의 기쁨을 안겨줬다. 1989년 벽두에 소집된 한국 대표팀 명단에는 ‘윤덕여’라는 이름 석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축구였고, 그저 묵묵히 자기 할 몫만 충실히 해왔던 윤 코치에게는 이것 이상의 기쁨은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누구나 축구선수라면 대표팀에서 뛰는 것이 최고의 목표 아니겠어요. 제가 뒤늦게나마 그런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기쁘죠.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했는데, 그것을 주위에서 좋게 봐줬구나 하는 뿌듯함도 있었고...”

윤 코치의 첫 A매치는 89년 5월 5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던 한일전이었다. 그리고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주전을 꿰차며 단숨에 국가대표팀의 중심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그 기세를 몰아 축구선수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월드컵 무대에도 섰다.

“예선에서 계속 주전으로 뛰었는데, 막상 본선 벨기에전을 앞두고 밀렸던 기억이 납니다. 경기를 앞둔 최종훈련에서 자체 연습게임을 하는데 저는 주전팀이었죠. 그런데 (이)태호 형이 리저브팀 공격수였는데, 그날따라 몸이 너무나 좋더군요. 제가 태호 형을 몇 번 놓쳤죠. 감독님이 불안하셨는지 주전팀 멤버 중에서 저만 빠지게 됐어요.(웃음)”

벨기에전을 벤치에서 지켜봐야했던 윤 코치는 다음 경기인 스페인전부터는 다시 주전으로 복귀했다. 상대팀에 대한 정보도 전무했고, 세계축구와의 기량 차이도 실감했다는 것이 윤 코치의 회상.

더군다나 우루과이전에서는 후반 중반에 퇴장을 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시간을 지연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한 윤 코치로서는 다소 억울했던 판정.

“당시 전반에 남미 최고의 선수라는 프란세스콜리가 팔꿈치로 저를 치길래 태클을 해서 경고를 하나 받았어요. 그리고 후반 중반에 골킥 상황에서 (최)인영이와 사인이 잘 맞지 않아서 시간이 지체됐고, 2번째 경고를 받았죠. 월드컵에서 퇴장을 당하니 너무 아쉬움이 컸습니다.”
울산현대 코치 시절의 윤덕여 코치 ⓒ스포탈코리아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지도자로서도 인정 받아

1993년, 포철중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윤 코치는 현역 때와 마찬가지로 성실하고 공부하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의 타고난 성실함은 지도자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었다. 윤 코치는 포철중 감독을 거쳐 96년부터는 포항의 수석코치로, 그리고 2001년부터는 U-17 대표팀 감독으로 세계 청소년대회에도 참가하며 경험을 쌓았다. 2004년 울산의 코치를 거쳐 지난 해부터는 신생팀 경남의 수석코치로서 활동하고 있다.

꾸준하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지도자로서도 대기만성의 길을 걷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느덧 축구를 시작한 지도 30년이 됐어요. 성실함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제가 겪었던 많은 지도자 분들의 장점들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고, 이것을 토대로 언젠가 저 역시 프로팀 감독으로서 제 축구를 선보이고 싶습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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