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화 감독 ⓒKFA

유공-포항-청소년 대표팀 감독 그리고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코엘류 감독 시절)를 역임한 박성화(52).
그는 고려대 2학년 때인 1975년에 국가대표에 선발된 뒤 8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가까이 국가대표팀 부동의 스토퍼로 맹활약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프로축구 원년(1983년) 할렐루야의 우승 주역이자 시즌 MVP 수상자이기도 한 박성화는 김호 감독과 더불어 역대 한국 최고의 스토퍼로 평가되고 있다.
듬직한 체구의 그는 현역 시절 탁월한 점프력으로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공격수들과의 헤딩 경합에서도 늘 우위를 점했고, 몸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수비뿐 아니라 공격수로서의 능력도 출중해 1979년 일본과의 정기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말 그대로 진정한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러나 박성화의 현역 시절이 결코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1980년엔 간염으로 1년여를 고생했고, 고질적인 양쪽 무릎 부상은 은퇴하는 그날까지 그를 괴롭혔다. 무릎 부상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것 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는 사실을 이번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공부하는 지도자’, ‘팬들보다 지도자들에게 인정받는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박성화 기술위원을 만나 함께 과거로 돌아가 봤다.

- 새해 첫 인터뷰를 감독님과 하게 돼 영광입니다. 감독님 선수 시절에 효창구장에서 사인 받으려고 한참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김유석의 올드보이]가 어떤 코너인지 대략 알고 있습니다. 축구협회 홈페이지에서 몇 차례 읽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옛날 일을 다 기억해낼 지 모르겠습니다.(웃음)

- 축구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요?

중학교 때부터 했습니다. 제 고향이 울산, 정확히 말하면 경남 울주군입니다. 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청량중학교를 다녔는데 처음엔 핸드볼을 했어요. 정식 핸드볼 선수는 아니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운동 신경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학교 핸드볼 대표를 한 겁니다. 군(郡)대표로 선발돼서 도(道)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습니다. 그래서 핸드볼 특기자로 울산공고에 입학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중3학년 말 어느날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고 있는데 체육 선생님께서 제가 축구하는 걸 보시더니 ‘성화야! 너 축구해 볼 생각 없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 말씀 듣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지요.(웃음)

당시에는 시골에서 스포츠 인재를 발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인근 학교 체육 교사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재직중인 학교에 운동에 소질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서로 소개해 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학교 체육 선생님이 저를 이웃에 있는 축구부가 있는 남창중학교 체육 선생님께 추천을 해주신 겁니다.

남창중학교에 가서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테스트라고 해 봤자 달리기였지요 뭐. 테스트에 합격한 후 바로 전학을 갔어요. 청량중학교 졸업을 며칠 남겨두지 않구요. 전학가서 중학교 1년을 더 다녔어요. 그 시절엔 그런 경우가 많았거든요.
남창이 당시 축구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70년대 국가대표도 지낸 박병철, 유건수 선배가 남창 출신이었습니다.

- 남창 중학교 졸업하신 후 동래 고등학교에 입학하신 거군요.

네. 사실 남창 중학교를 또 1년 더 다닐 뻔 했어요.(웃음) 축구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밖에 안됐기 때문에 그 상태로 고등학교에 가면 다른 선수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1년 더 다니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바로 동래고에 진학할 수 있었지요.

- 동래고야말로 축구 명문 아닙니까?

명문 중의 명문이지요. 김호 감독님이 저보다 10년 선배이시고, 축구협회 김호곤 전무님이 5년 선배, 그리고 박상인 부산교통공사 감독님이 1년 선배입니다. 현 실업연맹 사무처장인 전훈 씨가 저하고 동기예요. 후배 중엔 정용환, 최용수가 동래를 나왔죠.
저 있을 때는 동래고 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는데 김호 감독님 시절에 강했고, 특히 김호곤 전무님 시절에 대단히 강했어요. 그때는 동래고에 청소년 대표가 6~7명 정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동래 다닐 때 교장이 정사용 선생님이셨고 감독이 안종수 선생님이셨는데, 안종수 선생님은 수원 삼성 안기헌 단장의 아버님이십니다. 두 분이 친구 사이신데 저를 비롯한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게 지도해 주셨어요. 저한테는 인생의 은인이죠.
당시에 저희 선수들은 일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자습을 하고 6시간 수업을 받고 나서 축구 연습을 했어요. 학교 방침이 그랬습니다. 두 분은 항상 선수들에게 ‘너희는 축구 선수 이전에 학생이다.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라고 강조하셨거든요.

더구나 경기를 마치고 나면 선수들에게 ‘오늘 했던 플레이 중에 좋았던 점은 무엇이고, 나빴던 점은 무엇인지 리포트를 작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축구 용어는 한글이 아닌 영어로요. 그러니 저희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그걸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축구를 그만 둔 친구들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웃음). 너무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당시 그렇게 공부하면서 운동을 했던 게 지금 와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두 분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고려대 선수 시절.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성화. 뒷줄 맨왼쪽이 조중연 당시 코치.

- 감독님이 동래고 시절 때 영등포공고에는 허정무, 경신고에는 박종원, 김강남, 김성남이 유명했고, 진주고에는 조광래, 중앙고에는 최종덕 등 실력파 동갑내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과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셨습니까?

저희 학교가 지방에 있기 때문에 다른 학교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을 직접 알지는 못했고, 간혹 전국대회에 나갔을 때 보거나 혹은 신문을 통해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지요.

- 청소년 대표팀엔 언제 발탁이 되셨나요?

제가 고2 때 청소년대표 1,2차 선발전을 거친후 최종 선발전에 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정사용 교장 선생님과 안종수 감독님께서 저를 청소년 대표팀에 보내주질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청소년 대표팀 들어가서 훈련을 받게 되면 학교를 떠나있어야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학교수업도 받을 수 없고, 또 겉멋이 들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드셨던 모양이에요.

저희 동래고 선배님 중에 천재우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김호곤 전무님과 동기분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선배님이 동래고 시절에 국가대표 양지팀에 선발돼서 킹스컵까지 출전을 하셨어요. 고등학교 때 양지에 선발될 정도면 축구를 얼마나 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선배님이 국가대표팀에 선발이 되니까 학교에 오질 못했대요. 그래서 그후부터 교장 선생님과 감독님이 ‘우리 동래 선수들은 청소년 대표팀에 안보낸다’는 방침을 세우신 거지요.
그 때문에 저도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이 됐는데도 나가질 못한 겁니다. 솔직히 그 때는 너무 섭섭했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두분이 현명한 판단을 하신 것 같아요.
1년뒤 고3 때인 1973년에 대한축구협회에서 ‘축구 유망주를 키우자!’는 취지로 고교 상비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장덕진 축구협회 회장님 시절이었을 거예요. 그때 전국 고등학교에서 33명의 선수를 선발했는데 그 안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고교 상비군 1기인거죠.

- 축구 시작할 때부터 수비를 보셨나요?

예. 저는 처음부터 중앙 수비수였어요. 스위퍼, 스토퍼를 왔다갔다 했는데 주로 스토퍼를 많이 했습니다.

- 1974년에 고려대에 입학하셨는데, 다른 학교에서 스카웃 제의는 없었습니까?

사실 고2 때 이미 고려대 입학이 결정됐습니다. 그래서 다른 학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구요. 저는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스타일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감독님께 그렇게 교육을 받았거든요.

고 3때 동래고 7~8년 선배이신 이갑수라는 분이 서울에서 저를 만나러 일부러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이 연세대 출신이거든요. 저를 설득하러 오신 거지요. 예상했던대로 ‘성화야! 너 연세대로 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 듣고 제가 ‘형님도 정사용 선생님과 안종수 감독님이 신의를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알지 않느냐!‘고 말씀드렸더니 그 선배님도 수긍을 하시더라구요.

- 그 해에 연세대에도 실력있는 선수들이 많이 들어갔지요?

그렇습니다. 고려대에는 저하고 최종덕, 김강남, 김성남, 그리고 한양공고 출신의 전인석, 하만욱이 입학했고, 연세대에는 조광래, 허정무, 박종원, 이강민, 신우성이 입학했지요.

- 대학 입학해서도 주전으로 뛰었습니까?

저하고 같이 입학한 최종덕(현 서산시민 감독), 김강남, 김성남, 전인석, 하만욱 모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특히 종덕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했어요. 스위퍼도 보고 풀백도 했는데 정말 축구를 잘 했습니다. 그때 저희 고대 멤버가 무척 좋았지요. 차범근, 황재만 같은 선배님들이 있었으니까요. 박대종 감독님이셨고, 현재 축구협회의 장원직, 조중연 부회장님이 코치를 하셨죠.


1979년 열린 서독 함부르크 초청 경기때의 모습 ⓒ 월간축구

- 요즘에는 관심이 적어졌지만 그 무렵 고려대 : 연세대 축구 경기는 열기나 수준이 대단했었죠?

그렇지요. 당시로서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모여있는데다 최고 수준의 경기를 보여주었으니까요. 제가 입학하고 나서 잠깐 동안은 연대한테 밀렸는데 그 후부터는 고대가 앞섰던 걸로 기억돼요. 정기전에서 패한 기억은 없습니다.
제가 고려대 4년 있을 동안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두 차례(74, 76년), 준우승 한차례(75년)를 했어요. 당시 전국선수권대회는 실업, 대학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대회였거든요. 그 정도로 고대가 막강했던 시절이었죠.

- 고대 재학 시절 다른 종목 선수 가운데 친하게 지낸 분이 계십니까?

프로야구 롯데 감독했던 김용희하고 절친했습니다. 같은 행정학과였어요. 용희는 경남고등학교 출신인데 키가 190cm이 넘는 장신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했죠.

- 국가대표팀에는 언제 뽑혔나요?

대학교 2학년 때니까 1975년일 겁니다. 먼저 대표 2진인 충무에 선발됐다가 얼마 후에 1진인 화랑으로 올라갔습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성적이 좋질 않아서 대표팀 세대교체바람이 불던 때였죠. 동기들인 최종덕, 조광래, 김강남, 허정무, 박종원도 함께 대표팀에 선발됐지요.

- 제 개인적으로 한국 축구 황금세대 1기가 73학번~74학번 선수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희 세대 이전에 김정남, 김호, 박수덕, 임국찬, 정규풍, 이회택, 박이천 선배님 등이 활약하셨던 6~70년대 초 멤버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 당시 대표팀 전력이 매우 강했거든요.
그 이후에 저희 74학번 선수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국가대표에 선발이 되면서 1년 위인 신현호, 이영무, 조영증 선배님, 그리고 2년 위인 (차)범근이 형 등과 함께 대표 생활을 한 거지요.
저희 때도 전력이 강했습니다. 언제나 아시아 최강이었으니까요. 비록 월드컵 본선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요.

- 말씀하신대로 월드컵 생각만 하면 아쉬운데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호주에게 당한 1패 때문에 아쉽게 본선 진출이 좌절됐습니다.

당시 호주는 큰 장벽이었습니다. 호주 선수들이 워낙 체격 조건이 좋았거든요. 지금이야 우리 선수들 체격이 좋아져서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지만, 그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선수들의 체격이 유럽이나 호주 선수들에 비해 약했습니다.
저희가 말레이시아, 태국 이런 나라들은 쉽게 이겼지만 호주는 굉장히 버거운 상대였어요. 이란도 마찬가지였구요.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은 언제나 가볍게 통과했는데 최종 예선에서 호주나 이란,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을 꼭 만났어요. 그때마다 번번히 고배를 마셨습니다.

-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북한과 0 대 0으로 비기면서 공동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경기에서 주전 수비수로 뛰셨지요?

국가대표팀이 처음 맞붙는 남북대결이었지요. 당시 남북 경기는 사생결단의 분위기였어요.
어찌나 떨리던지 저는 북한과의 결승전 전날 밤에 정말 한숨도 못 잤습니다(웃음). 너무 긴장돼서 새벽에 화장실에 가서 기도를 했다니까요. 그때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경기에 들어가니까 의외로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 ‘축구선수 박성화’ 하면 역시 1979년 6월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한-일 정기전에서 4 : 1로 이길 때 센터포워드로 출전해 해트트릭 기록한 것을 올드팬들은 기억할텐데요.

그럴겁니다. 그 이전까지 대표팀 스트라이커가 김재한-차범근 선배였는데, 김재한 형님은 그해 초에 은퇴를 하셨고, 범근이 형은 분데스리가 진출 때문에 대표팀을 떠나게 됐지요. 그 때문에 대표팀 공격 라인에 큰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장경환 감독님이 그날 저를 갑자기 센터포워드로 기용을 하신 거예요. 감독님이 저에게 기대를 한 건 ‘헤딩’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세 골을 모두 발로 넣었습니다.(웃음)


1982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결승전에 앞서 페넌트를 교환하는 박성화.

- 1980년은 몸이 아파 대표팀에서도 제외되고 힘든 시기였죠?

네. 그때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1월쯤에 대표팀이 사우디-이탈리아-미국을 돌며 전지 훈련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무릎이 안좋아서 원래는 전지 훈련에 참가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 빠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따라 가긴 했는데 현지에 가서 훈련을 거의 못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더라구요. 훈련을 안하는데도 심하게 피곤한 거예요.

이탈리아에 갔을 때 하루는 선수들과 쇼핑을 하는데 그냥 길거리에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몸이 안좋더라구요. 소화도 안되구요. 소변 색깔을 보니까 붉은빛이 나요. 그러나 저도 그렇고 대표팀 팀닥터도 그렇고 그땐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 후 전지 훈련 장소를 미국으로 옮겼는데 몸이 더 안좋은 거예요. 그제서야 한홍기 단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놀라시면서 미국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병원 가서 검사를 했더니 간염이라고 진단을 내리더군요. 그런데 미국 병원에서는 약 처방은 안해주고 무조건 쉬라고 하더라구요. 간염은 자연 치유가 되는 병이라면서요.

귀국해서 서울대 병원에서 2개월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원래 제 몸무게가 72kg쯤이었는데 간염에 걸린 후 62kg이 나가더라구요. 아주 심각한 상태였어요. 의사 선생님이 본격적인 운동은 1년 후부터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봄에 있었던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출전을 못했죠.

- 무릎 부상도 심했나요?

사실 간염보다 무릎 때문에 더 고생을 했습니다. 오른쪽 무릎은 대학교 3학년때 아프기 시작했고, 그후 왼쪽 무릎도 다쳤는데 뛸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하지만 그때까진 정밀 검사를 받아보질 않았습니다.

간염 때문에 몇 개월 쉴 때 기왕이면 무릎 검사도 받아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정밀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양쪽 무릎 연골이 다 찢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충격적이었지요. 고재욱 선배님이 연골 파열로 일찍 은퇴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현재 LG농구단의 신선우 감독 아시죠? 저하고 친구 사이인데, 선우도 무릎 연골 파열로 일찍 은퇴했습니다. 은퇴하기 전까지 무릎에 투박한 특수 보호대를 하고 뛰었지요.

그런 선수들을 봐왔기 때문에 운동 선수에게 무릎 연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제 무릎 연골이 다 찢어져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저를 진찰한 의사 선생님이 “축구 그만두고 가볍게 테니스나 하라”고 권하더라구요. 그 말 듣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원래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는데, 79년에 결혼한 뒤 집사람을 따라 교회에 나갔지요. 아내가 모태 신앙이거든요. 그때까지는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무릎 연골이 찢어졌다는 걸 알고나서부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제발 낫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기도(하나님과의 약속기도)를 했어요.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제가 육군 제대 후에 할렐루야에 입단을 할수 있었지요.

- 수술할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못했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외국에 가서 수술을 받았겠지요.

- 80년대 초반까지 대표팀에서는 스위퍼인 조영증(현 파주 트레이닝 센터장) 선수와 수비에서 콤비였죠?

정말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영증이 형이 스피드는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대단히 영리한 수비수였어요. 태클도 좋았고, 특히 힘이 좋았습니다. 별명이 ‘히프’잖아요.(웃음) 함께 중앙 수비를 보면 참 편했습니다.

- 프로축구 원년(1983년)에 할렐루야가 우승을 차지했고, 감독님이 MVP를 수상하셨는데, 제 기억에 당시 할렐루야는 대표팀과 다름없는 전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대표팀 감독 하셨던 함흥철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으셨고 골키퍼에 조병득, 수비는 저하고 홍성호-최종덕-황정연, 미드필드에는 박창선, 박상인, 공격진에는 신현호, 이정일, 오석재가 있었지요. 모두 다 국가대표 출신들이었죠.


83년 프로축구 우승 후(가운데). 왼쪽은 대우의 강신우, 오른쪽은 유공 김용세.ⓒKFA

- 1984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감독님이 스위퍼를 맡고, 정용환 선수(현 신흥고 감독)가 스토퍼를 봤던 게 기억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조별리그 탈락하고 말았죠. 이상하게 팀웍이 안맞았고, 전체적으로 우리 선수들이 기량 발휘를 전혀 못했어요.

- 1985년은 멕시코 월드컵 예선이 있던 중요한 해였는데 대표팀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릎 부상이 재발해서 그랬어요. 문정식 감독님이 대표팀을 맡고 계실 때인데 도저히 뛸수가 없을 것 같아 제가 스스로 물러나왔습니다.
할 수 없이 경찰병원 하권익 박사님한테 가서 무릎 수술을 받았어요. 미루다 미루다 그제서야 받은 거지요. 그 당시 운동 선수들 대부분은 하권익 박사님께 수술을 받았지요. 수술은 잘 돼서 통증은 많이 줄어들었는데 완전하진 않더군요.
사실 수술을 하지 않고 진통제를 맞아가며 뛸 수는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그랬다면 86년 멕시코 월드컵에도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1986년 월드컵 때 한국 중앙 수비진이 조영증-정용환-조민국-유병옥으로 구성이 됐었는데 감독님이 포함됐더라면 훨씬 더 무게가 실렸을텐데요. 아쉬움은 없으십니까?

왜 없겠습니까. 축구 선수라면 월드컵 무대에 서보는 게 가장 큰 꿈이잖아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 할렐루야를 나온 후에 다시 포철로 팀을 옮기셨지요?

네. 1986년 쯤인가 할렐루야가 아마추어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포철로 옮기게 됐지요. 87년 시즌까지 뛴 후에 은퇴를 했습니다.

- 외국 클럽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까?

1981년에 대표팀이 미국 LA에서 우루과이의 나시오날과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 후에 미국 클럽팀으로부터 오퍼가 들어왔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그 몇개월 뒤에는 대통령배 국제축구 대회에 서독의 어느 클럽팀이 참가를 했는데 저한테 흥미가 있다면서 꽤 적극적으로 나오더라구요. 그때도 거절을 했습니다. 거절이라기보다는 포기라고 해야지요. 무릎 부상 때문에요.

외국 클럽에 가게 되면 그쪽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무릎이 정상이라면 모르겠는데 아닌 상태에서는 그쪽 선수들과 경쟁하기가 어렵잖아요. 제 몸은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10년 동안 무릎 부상을 달고 살았습니다. 무릎이 안 아픈 상태에서 뛴 적이 거의 없어요.

- 현역 시절 별명이 ‘쌀장수’였는데 누가 지어준 별명인가요?

대표팀 화랑 시절 권이운 골키퍼가 지어준 별명입니다. 당시 겨울이 되면 대표팀이 따뜻한 진해로 전지훈련을 자주 갔는데 저희가 묵고 있는 숙소 근처에 쌀가게가 있었습니다. 그 쌀가게 주인 아저씨 차림이 저와 비슷하다고 권이운 형이 지어준 거예요. 그때 제가 쌀가게 아저씨처럼 두터운 자켓에 모자를 자주 썼거든요. 당시 언론에서는 제가 힘이 좋아서 ‘쌀장수’라고 부르는 거라고 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예요.(웃음)

고등학교 때 별명은 조 프레이져였어요. 70년대에 무하마드 알리와 맞붙었던 힘 좋은 복서 있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때 제가 볼을 잡으면 상대 선수들이 ‘조 프레이져 막아!’ 하고 소리쳤습니다.(웃음)
조프레이저 - 쌀장수 이후에는 ‘돌고래’라고도 불렸지요. 돌고래처럼 솟구쳐서 헤딩을 잘한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 현역 시절 중앙 수비수로서 마크하기 어려웠던 국내 공격수는 누구였나요?

딱 한 선수를 집어서 말하긴 어렵고요. 발이 빠르고 많이 움직이는 공격수가 마크하기 까다로웠습니다. 수비수들마다 제각기 다른데 저는 힘 좋고, 헤딩력 좋은 공격수는 별로 두렵질 않았어요. 그런데 작고 빠르고 재치넘치는 공격수가 부담되더라구요.

- 일본의 유명한 공격수 가마모토를 마크해 보신 적 있으시지요?

몇 차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표팀에서 마크했을 때는 가마모토의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어요. 그래도 참 잘하더군요. 일본 대표팀이 다른 나라와 경기할 때 가마모토의 모습을 보면 그의 진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세계 수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마모토에 대해서는 김호 감독님이 선수 시절 자주 부딪혔기 때문에 잘 아실 겁니다.


83년 프로축구 수퍼리그 개막전의 박성화(왼쪽).ⓒKFA

- 현역 시절 백넘버가 6번이었는데 학창 시절부터 6번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고대 다닐 때는 20번이었어요. 6번은 대표팀에 선발되고나서 달게 된 건데 이후 제 고유의 백넘버가 된 거지요. 은퇴할 때까지 계속 6번을 달고 뛰었으니까요.

- 지도자 생활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포철에서 은퇴하고 88년에 포철공고를 맡아서 1년 정도 감독을 했습니다. 그 때 제자로 이진행, 백기홍, 박지호가 있었죠.
그 후에 프로팀 현대로 가서 김호 감독님 밑에서 코치로서 3년 정도 보좌했습니다. 다시 현대 2군 감독을 조금 하다가, 유공으로 옮겨 코치 1년 하고 감독을 했죠. 그리고나서 96년부터 2000년까지 포항 감독했고, 그 후에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하게 된 거지요.

- ‘공부하는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도자가 공부하고 또 연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자기 경험 하나만 갖고 선수들을 가르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포철공고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 뵌 분이 최은택 선생님입니다. 아까 제가 고교 상비군 1기 이야기 해드렸지요? 그때 고교 상비군 감독이 최은택 선생님이셨어요. 대표팀 코치와 감독도 하신 분이지요. 독일에 축구 유학까지 다녀오신 그야말로 공부하는 축구인이시지요.

최은택 선생님이 저한테 많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성화야! 네가 국가대표 10년을 했으면 국내에서 실력있는 지도자에게는 다 지도를 받아본 거 아니냐. 그건 너한테 큰 힘이 되고 경험이 될 것이다’ 하시면서 선수들 관리나 스포츠 심리학에 관한 책을 권해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 리포트를 쓴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돼서도 늘 노트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팀 코치를 할 때 포철공고 감독하면서 적어놓았던 내용을 보니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더라구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애들을 가르쳤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감독이 되고 나서 프로 코치 시절 때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지도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 잉글랜드, 브라질 연수 경험도 있으신데 많은 도움이 됩니까?

도움이 되지요. 축구 선진국에 직접 가서 체험을 해보면 확실히 달라요. 다만 외국 연수를 한다면 장기간으로 해야 됩니다. 단기 연수는 그다지 큰 도움이 안돼요.
제가 외국 연수를 한 건 훈련이나 전술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가서는 선수들에 대한 관리와 리더십을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어요.

가서 보니까 외국 감독들은 선수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발언을 극도로 삼가더군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런 것 같아요. 흔히 국내 지도자들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를 들어, 경기를 하루 앞두고 자체 연습경기를 할 때 A라는 스타 선수를 무명인 B선수가 무리한 태클로 부상을 입혔다고 칩시다. 그러면 대부분의 감독이 어떻게 나옵니까? B선수 혼을 내지요. ‘왜 그런 무리한 태클을 하냐’고 혼을 냅니다. 그러면 B선수 심정이 어떻겠어요? 사실 B선수는 감독이 말한대로 연습을 실전처럼 한 거 아닙니까? 이런 경우 감독은 B선수한테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외국에 연수 가서 또 하나 느낀 게 그 쪽 선수들의 투철한 승부욕과 프로로서의 자존심입니다. 2001년에 잉글랜드 연수를 갔을 때 아스톤 빌라 연습장에 가서 그들의 연습 장면을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선수들끼리 패싱 게임을 하는데 무스타파 하지(모로코)가 세계적 골키퍼인 피터 슈마이켈(덴마크) 가랑이 사이로 볼을 패스한 거예요. 그리고는 깔깔대고 웃더라구요.
그리고나서 다음 번에도 똑같은 플레이를 하려니까 슈마이켈이 그대로 태클을 들어가 하지를 쓰러뜨리는 겁니다. 한 마디로 ‘나를 약올리지 말아라,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라!’는 거지요.

제가 수비수 출신이라 잘 아는데 자기 가랑이 사이로 볼이 통과되면 상당히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하거든요. 슈마이켈의 태클에 걸려 쓰러진 하지가 실려 나갔는데도 그 때 어느 누구 하나 슈마이켈을 비난하지 않더라구요. 이런 게 바로 자존심이고 또한 승부욕 아니겠습니까.
사실 한국 선수들이 정신력은 강한데 승부욕은 강하질 않습니다. 정신력과 승부욕은 전혀 다른 거거든요. 잉글랜드의 루니를 보면 승부욕 강한 게 눈에 보이질 않습니까.

- 감독님은 포백을 항상 강조하시는데 언제부터 포백에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1993년과 94년 유공 감독할 때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포백을 시도했어요. 당시 저희 유공하고 노정윤이 있던 J리그의 히로시마 산프레체가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 전지훈련을 갔을 때 산프레체가 포백을 멋지게 구사하는 걸 보게 됐습니다. 그때 산프레체 감독이 잉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벅스터 감독이었어요. 물론 그 전에도 포백을 쓰는 팀과 지도자를 많이 봤지만 벅스터 감독의 포백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어요. 그때부터 포백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정윤이한테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료를 많이 보내주었거든요.


인터뷰 중인 박성화 감독 ⓒKFA

- 포백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포백이 어렵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건 편견이에요. 일부 축구인들이나 언론에서 ‘한국 선수들은 포백은 안된다’고들 하는데, 그러면 성남 일화의 김학범 감독은 뭡니까? 김학범 감독이 포백을 사용하면서 좋은 성적 올리고 있잖아요. 그 이전에 김호 감독님도 포백을 구사하셨구요. 박지성하고 이영표도 네덜란드를 거쳐 현재 잉글랜드에서 포백에 잘 적응하며 좋은 플레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지요?

유로 2000에서 프랑스가 4-2-3-1 포메이션으로 우승을 차지했잖아요. 그때 얼마나 인상적이었습니까.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때도 많은 팀들이 4-2-3-1 포메이션을 썼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거든요.

제 말은 ‘무조건 한국도 포백을 써야한다’, ‘스리백 보다 포백이 낫다’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포백을 쓰면서 기왕이면 세계적 추세에 맞춰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선수들이 그 정도 능력은 있거든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한국 선수들은 포백은 안된다’는 말은 정말 틀린 얘기입니다. 제가 청소년 대표팀 감독할 때 보니까 어린 수비수들이 다들 포백을 좋아하더라구요.

- 얼마전 포항의 파리아스 감독이 ‘한국은 너무 네덜란드 축구만을 고집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감독님 개인적인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도 파리아스 감독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유럽 축구를 많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특히 네덜란드 축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남미 축구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남미 지도자는 안돼’라는 말이 있는데 이거 역시 편견입니다. 현재 포항의 파리아스 감독 잘 하고 있지 않나요? 그 사람 브라질 감독이잖아요. 그런데 왜 남미 지도자는 안된다는 겁니까.

- 동감합니다. ‘남미 감독은 안돼가 아니라 남미 감독은 잘 몰라’가 솔직한 표현 아닐까요?

맞아요. 솔직히 우리가 언제 남미 감독 데리고 와서 길게 맡겨본 적 있습니까? 맡겨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된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어요. 흔히 ‘브라질 선수들은 선천적으로 개인기가 좋다’고 하잖아요. 물론 브라질 선수들이 선천적으로 자질이 뛰어난 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게 브라질 선수들의 훈련 과정입니다. 브라질 선수들이 얼마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지 아십니까?

제가 브라질에 연수 가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브라질 선수들도 유럽 못지않게 어릴 적부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브라질 축구가 강한 겁니다.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구요.

한국도 남미 축구를 받아들이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 축구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세밀하고 세련됐잖아요. 그 이유는 여러 국가의 감독들에게 지도를 받기 때문에 다양하고 섬세한 플레이가 나오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포백만 보더라도 네덜란드 포백과 브라질 포백은 많이 다릅니다. 이런 다양성을 우리 선수들이 배워야 돼요. 그래야 월드컵에 나가서 당황을 안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감독님 수제자인 김진규가 예전에는 무척 다혈질적이었는데 이제는 많이 차분해졌던데요?

그렇죠? 많이 침착해지고 차분해졌어요.(웃음) 진규가 참 착한 녀석인데 청소년 대표 시절 한순간 흥분을 하면 자제를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혼도 많이 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저는 경기 중에 진규가 흥분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바로 교체를 시켰어요. 그게 진규한테도 좋고, 팀에도 좋은 거니까요. 그런데 요즘 진규 플레이를 보면 성숙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무척 기쁩니다.

-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이후 선수중에서 최고의 스토퍼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좋은 후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굳이 개인적으로 한 선수를 고르라면 정용환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환이는 스피드도 좋고, 맨투맨 마크와 헤딩력도 좋았어요. 게다가 성실했구요. 월드컵에 두 차례 연속 참가했다는 사실이 용환이의 실력을 말해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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