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투맨 수비의 1인자였던 김평석 감독 ⓒ김유석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 코치로서 차범근 감독을 보좌했던 김평석(48).
그는 1980년대 국가대표팀과 현대(84~88년), 유공(89~90년)에서 맨투맨 수비의 1인자로 명성을 날린 수비수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서 최강팀 아르헨티나를 맞아 수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의 전담 마크맨으로 기용된 것도 어김없이 '족쇄' 김평석이었다. 상대팀에 골치 아픈 공격수가 있을 때 감독들은 언제나 김평석에게 수비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김평석의 축구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축구부가 없었던 여의도 고등학교 출신이고, 게다가 ‘조기 축구회 출신’이란 설(說)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어떻게 축구를 하게 됐고, 어떻게 국가대표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현재 천안 중앙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 고등학교 감독으로 재직 중인 김평석을 팀 숙소가 있는 조치원에서 만나 선수 시절 이야기, 대표팀 코치 시절 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반갑습니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근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차범근 축구교실 총감독으로 활동하다가, 독립해서 김평석 축구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축구 클럽하면서 광운공고 감독을 2년간 했고, 충북 제천의 의림공고(현 제천산업고)와 부산의 대양 전자정보고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올 7월에 천안 중앙 고등학교 부설 방송 통신 고등학교 축구부를 창단시켰지요. 방송통신고는 내년부터 대회에 출전하게 됩니다.

- 고등학교 축구부를 많이 창단하셨군요.

제가 창단하는 팀은 클럽 스타일의 축구부입니다. 저 혼자 이리뛰고, 저리뛰고 또 감독까지 하느라 힘은 많이 들지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 선수 시절 이야기부터 해보죠.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하셨다면서요?

예. 서울 구로 초등학교-영도 중학교-여의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정식으로 축구를 하질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구로 초등학교 때 부모님 몰래 잠깐 축구를 한 게 전부였지요. 어릴 때 부모님이 운동을 못하게 하셨거든요. 현재 고려대 감독인 조민국이가 저의 구로 초등학교 후배입니다.

- ‘조기 축구회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하, 틀린 말은 아닙니다.(웃음)
제가 축구를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 집 근처인 구로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볼을 찼습니다. 당시 여의도 고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조기 축구팀들도 자체적으로 대회가 있질 않습니까. 제가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구로 조기축구팀 소속으로 서울 양평동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을 했는데, 그 대회에서 저희 팀이 우승을 했어요. 저는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그때 광운공고 축구부 감독으로 막 부임을 하신 박승옥이라는 분이 그날 제가 뛰는 걸 보셨나봐요(박승옥 선생은 후에 광운대 감독 역임). 경기가 끝난 후에 박승옥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너 광운공고에 와서 축구할 생각 없냐?”고 하시면서 이것저것 물으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희 집 형편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어릴 때는 괜찮았는데 그 무렵에 아버님께서 사기를 당하시는 바람에 가족들이 몹시 힘든 상태였어요. 그래서 대학 진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축구 선수를 하게 되면 특기자로 대학에 갈 기회가 있잖아요. 그래서 여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광운공고로 다시 편입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정식으로 축구를 하게 된 거지요.


98 프랑스 월드컵 코치 시절의 김평석 ⓒ베스트일레븐

- 고등학교 감독 눈에 띈 걸 보면 실력이 대단했나 보네요.

글쎄요. 저는 제 축구 실력이 좋은지, 나쁜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축구가 좋아서 조기회에 나가서 볼을 찬 것 뿐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박승옥 감독님 눈에 든 것 같습니다.

- 편입 후 다른 선수들과의 실력 차는 나질 않았나요? 다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한 선수들일텐데.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실력 차는 그다지 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그때 광운공고 축구부가 창단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강팀은 아니었습니다.

- 졸업 후 목표대로 대학 진학은 하셨습니까?

그 얘길 하자면 굉장히 길기 때문에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순 없고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결국 대학 진학을 못했어요.

대신에 실업팀인 농협에 입단을 했습니다. 지금은 해체되어 없어졌지만 그 당시 농협 축구팀은 전력도 강하고 시설도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어요. 연습장이 천연 잔디구장이었는데 당시로는 흔치 않은거죠.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당시 농협 감독님이 길경수 선생님이셨는데 저를 무척 이뻐하셨습니다.

- 프로필을 보니까 해군팀에서 활동한 걸로 되어있네요.

농협 입단 후 1~2년인가 뒤에 군대 영장이 나왔어요. 대학에 진학을 했더라면 영장이 안나왔을텐데 진학을 못했기 때문에 영장이 나온 거지요. 군대 갈 나이가 됐으니까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서울 후암동에 있는 병무청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공군 헌병 시험에 응시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입대를 하는 게 아니라 6개월 정도 후에 입대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6개월간은 다른 시도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군 헌병 시험에 응시를 해서 합격을 했습니다. 일단 6개월은 연기가 된 거지요.

그래서 그 시간에 제가 해군(해병대) 축구팀에 테스트를 받으러 갔어요. 당시 해군 감독님이 박세학 감독님이셨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제가 참 맹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해군에는 허정무, 조영증, 김황호, 박병철, 유건수, 김강남, 김성남 등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계셨거든요. 그런 팀에 이름도 없는 제가 무턱대고 가서 테스트를 받게 해달라고 했으니 박세학 감독님께서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겠습니까.

- 박세학 감독님 반응이 어땠나요?

처음엔 당연히 안된다고 하셨지요. 아마 저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계속 부탁을 드렸더니 “그러면 딱 한번만 기회를 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해군 축구팀에서 며칠 머물면서 테스트를 받게 된 건데 훌륭한 선배님들하고 같이 뛰니까 긴장은 많이 됐어도 나름대로 좋은 플레이를 했어요. 그걸 보시고 박세학 감독님께서 허락하셔서, 제가 날짜도 기억합니다 79년 4월 24일 해군 축구팀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박세학 감독님이 저의 은인이시지요.


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 우승후. 왼쪽에 조광래, 박창선의 모습도 보인다. ⓒ베스트일레븐

- 입대 후 바로 주전으로 뛰셨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웃음) 그때 해군에는 대표급 선수들도 벤치에 앉아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주전으로 뛸 수 있었겠습니까. 입대 초기엔 연습게임조차 출전을 못했어요.

그 후 시간이 조금 지나서 제가 박세학 감독님께 “감독님! 제발 저 좀 뛰게 해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실 선수가 감독에게 ‘출전시켜달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당시에 너무너무 뛰고 싶어서 간곡히 부탁을 드렸지요.

처음엔 박세학 감독님께서 들은 척도 안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후보였지만 정말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단체 훈련 끝나고 나서도 운동장에 혼자 남아서 개인 훈련을 했거든요. 당시 해군 축구팀 선수들이 헌병감대 소속이었는데 헌병들 사이에서 ‘어떤 놈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같이 단체 훈련 끝난 후, 혼자 남아서 개인 훈련을 한다‘는 입소문이 난 거예요. 그 소문이 박세학 감독님 귀에도 들어간 것 같더라고요.
어느 날 박세학 감독님이 ‘도대체 그 놈이 누구야?‘ 하면서 퇴근을 안하고 지켜보셨다고 하더군요. 그게 저인 걸 아신 후 감독님이 다음부터 저를 경기에 내보내 주셨습니다.

- 그렇게 해서 경기에 뛰게 되면 엄청나게 부담이 됐겠는데요.

하루는 실업팀하고 연습 경기를 하는데 박 감독님이 저한테 “평석아! 오늘 들어가서 상대팀 스타플레이어를 확실하게 묶어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축구화 끈을 매는데 덜덜덜 떨리더라고요. 너무 긴장이 돼서요. 그 선수가 누구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꽤 볼을 잘 차는 선수였거든요. 그런데 그 선수가 볼을 몇번 잡질 못했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해군 축구팀 엔트리 18명 안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해군팀 선수들이 30명이 넘었는데, 이 가운데 18명만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나머지 선수들은 다른 곳에서 묵었거든요. 해군에서는 제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 박세학 감독님은 정말 은인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박세학 감독님이 안계셨다면 제가 해군에 입대도 못했고, 국가대표도 되질 못했을 거고, 제 축구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죽을 때까지 박세학 감독님에 대한 은혜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 제대 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81년 10월에 제대했는데, 기업은행하고 농협 같은 몇몇 실업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명지대 유판순 감독님이 저를 명지대로 데려가시겠다고 했어요.

故 유판순 감독님은 무척 엄한 스타일인데, 선수 보는 안목이 대단히 뛰어난 걸로 소문난 분이죠. 그런데 그 무렵에 제가 B형 간염에 걸려서 입원을 하게 됐고, 사정으로 인해 명지대에 가질 못하고 광운대로 가게 됐어요. 당시 광운대 감독님이 저를 광운공고에 편입시켜 주신 박승옥 선생님이셨거든요.

제가 2학년 때 광운대가 대학선수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우승을 했기 때문에 제 몫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중퇴하고 84년에 현대 프로축구단에 창단 멤버로 입단을 한 겁니다.


현대 시절의 김평석(오른쪽). 대우 소속이었던 박창선과 변병주도 보인다.
맨왼쪽 선수는 현재 울산 현대 코치인 이상철 ⓒ베스트일레븐


- 당시 현대도 호화 멤버였지요?

그렇죠. 허정무, 김황호, 이상철 선배님 그리고 노인호, 최강희, 진장상곤, 백종철 등이 창단 멤버고 그 후에 김종환, 함현기, 김삼수가 입단을 했지요. 문정식 선생님이 감독을 하고, 코치는 조중연 선생님이셨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엔 럭키금성에 가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럭키금성 감독님이 저의 은인이신 박세학 감독이셨거든요. 그런데 프로팀 입단이란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잖아요.

- 그 당시 현대 구단의 외국인 선수 중에 렌스베르겐과 알 하산 선수가 있었죠?

아, 그 선수들을 기억하십니까?(웃음) 렌스베르겐은 허정무 선배님과 PSV 아인트호벤에서 함께 뛰다 한국으로 온 선수였는데 키가 굉장히 컸죠. 알 하산은 가나 출신의 공격수였는데 발재간이 대단히 좋았지요. 오랜만에 그 선수들 이름 들으니까 반갑네요.

- 명지대 출신 스트라이커 노인호도 당시 기대를 모으고 현대에 입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노인호가 명지대 시절 대통령배 전국 축구대회에서 맹활약하면서 스타가 됐지요. 그래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프로에 입단해서는 크게 성장을 못했습니다. 체격도 좋고 힘이 참 좋은 센터포워드였는데 말입니다.

- 감독님과 같은 또래 동기 선수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팀은 달랐지만 알려진 선수로는 조병득, 이용수, 신문선, 진장상곤이 있죠.

- 현대 입단 뒤 프로축구에서 최고의 맨투맨 수비수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기억이 납니다. ‘족쇄’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누가 지어준 별명인가요?

아마 축구 기자 분들이 지어준 별명일 겁니다. 제가 맨투맨 수비에 강하고 끈질기니까 그런 별명을 지어준 것 같아요. 그 외에 ‘인민군’이란 별명도 있었습니다.(웃음)

- 현역 시절 준족으로도 유명하셨지요?

전성기 때는 100m를 11초대에 뛰었습니다. 수비수도 발이 빠른 게 유리해요. 특히 측면 수비수들은요.
그래야 상대팀의 발빠른 측면 공격수들을 잡을 수 있고, 제가 오버래핑도 들어갈 수 있거든요. 수비수가 스피드에 자신이 있으면 어떤 스타일의 공격수를 만나도 두려움을 느끼질 않습니다. 공격수에게 벗겨지더라도(뚫리더라도) 스피드를 이용해 다시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제가 스피드와 힘 그리고 몸싸움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힘 얘기 나오니까 조영증 선배님 생각이 나는군요. ‘힘’하면 조영증 선배님이 최고지요. 마치 코끼리 같았습니다. 박성화 선배님도 힘이 장사셨고요.

- 국내 체육계에선 소위 ‘족보(출신교)’가 없으면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현역 시절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전통 있는 학교를 졸업하면 유리한 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질 않았어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죠.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그저 죽기살기로 연습만 했어요. 대표팀 시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태능 선수촌에 입촌을 하게 되면 일주일에 한번 1박2일로 외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다들 집에 가서 쉰다던가, 아니면 친구를 만나다던가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웬만해선 외출을 안하고 선수촌에 남아서 개인 훈련을 했습니다. 언제라도 경기에 투입이 되면 바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몸을 만들어 놓았지요. 그 때문에 여러 감독님들께서 잘 봐주신 것 같습니다.


87년 대통령배 우승뒤 호주팀과 유니폼 바꿔입고. 왼쪽에서 트로피 든 선수가 김평석

- 국가대표에는 언제 발탁이 됐습니까?

해군 시절에 처음으로 뽑혔습니다. 하지만 그땐 붙박이는 아니었지요. 83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참가 대표팀에 뽑힌 이후 잠시 빠졌다가 84년 현대에 입단한 뒤부터는 계속 선발됐습니다.

- 역대 한국 축구 최강의 멤버로 불리는 86년 월드컵대표팀에서 왼쪽 풀백으로 활약하셨죠.

네. 현대와 대표팀에서 왼쪽 풀백으로 많이 뛰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로도 뛴 적이 있습니다. 특히 상대팀에 요주의 인물이 있을 때는 제가 주로 맨투맨 마크를 했지요.

- 85년 가을에 있었던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과의 1, 2차전이 모두 명승부였습니다. 특히 도쿄에서 벌어진 1차전이 압권이었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경기죠. 정용환, 이태호의 연속골로 우리가 일본을 2-1로 이겼지요.
그 때 저희 수비진의 조직력이 참 좋았습니다. 스위퍼 조민국, 스토퍼 정용환, 오른쪽 풀백 박경훈 그리고 제가 왼쪽 풀백을 맡았는데, 일본의 장신 스트라이커 하라를 정용환이 꽁꽁 묶었지요. 당시 정용환-하라 뿐 아니라 일본 공격수들과 저희 수비진이 거의 1대1로 맞붙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선수들보다 저희가 스피드도 앞섰고, 파워도 한수 위였기 때문에 멋지게 이길 수 있었지요.

경기 장소가 요요기 국립경기장이었는데 일본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 교민 여러분들이 와주셔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을 해주셨어요. 교민 여러분들의 그 응원이 저희한테는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잠실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도 우리가 1-0으로 이기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지은 거지요.

당시 일본 라이트윙 이름이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그 선수가 나중에 은퇴한 뒤 일본의 방송 리포터로 태능 선수촌에 와서 저를 취재해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선수가 “당신(김평석)을 그 경기에서 단 한번도 뚫지 못했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지었는데 그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얼떨떨했지요. 저희 선수들은 일본과의 1,2차전 모두 미친 듯이 뛰었기 때문에 다들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웃음) 그래서 경기가 끝난 후에도 큰 실감을 못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 많은 파티에 초대되면서 선수들이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아! 우리가 진짜 월드컵에 나가는구나!’란 걸 실감할 수 있었지요.


1986 멕시코 월드컵 예선 도쿄 원정 경기 라인업. 뒷줄 중앙이 김평석

- 86년 월드컵 본선 첫 게임 상대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감독님이 마라도나 전담 마크맨으로 기용됐는데 멕시코 입성하기 전부터 그렇게 결정이 된 건가요?

미리 정해진 건 아니었고, 경기 며칠 앞두고 결정이 됐습니다. 제가 발이 빠른 편이고 몸싸움에도 강하니까 김정남 감독님이 저를 지명하신 것 같더라고요. 당시 우리 언론에서도 ‘마라도나는 족쇄 김평석이 마크해야 된다’는 보도가 자주 나왔다고 하더군요.

- 마라도나를 마크해 보니까 어떻던가요?

뭐, 한마디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웃음) 드리블해서 나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더라고요. 볼을 툭툭 치고 나가는데, 제가 어느 순간에 발을 집어넣어야 될지 도저히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스타일로 드리블 하는 선수를 그 때 처음 봤거든요.

제가 마라도나보다 발은 더 빠를 겁니다. 그런데 쫓아가질 못하겠는 거예요. 결국 힘 한번 못쓰고 전반 20분쯤에 조광래 선배님과 교체되어 나왔지요.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몸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교체되어 나온 거니까요. 그 후 불가리아, 이탈리아전에도 출전을 못했으니까 그 경기 하나로 저의 월드컵 역사는 끝났죠.

- 월드컵은 확실히 다릅니까?

네. 분위기가 달라요. 긴장이 되는 게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죠. 당시 저희 대표팀이 월드컵 개막 직전에 잉글랜드 대표팀과 연습 게임을 했는데 0-5로 완패를 했습니다. 우선 겁부터 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잉글랜드가 코너킥이나 프리킥을 하게 되면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이거 골 먹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당당히 맞서질 못했다는 거지요.
역시 그런데서 국제 경험 부족이 여실히 들어나더군요. 당시 대표팀에서 유럽 선수들과 자주 부딪혀 본 선수가 차범근, 허정무 두 선배 밖에 없었잖아요.

- 멕시코 월드컵 끝난 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도 출전을 하셨지요?

월드컵 끝난 후 차범근 선배님은 다시 서독으로 갔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대로 아시안게임에 출전을 했습니다. 비록 저희가 월드컵에서는 1무 2패로 예선 탈락을 했지만 그게 선수들한테는 엄청나게 큰 경험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시안게임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지요.

- 88년까지 현대에서 뛰고 89년에 유공으로 이적하셨네요.

그렇습니다. 89년에 김호 감독님이 현대 감독으로 오셨는데 저는 유공으로 옮겼죠. 이적한 89년 시즌에 유공이 우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90년에 은퇴를 했지요. 체력적으로는 좀 더 뛸 수 있었는데 미련을 버리고 은퇴를 했습니다.

- 현역 시절 절친했던 선수는 누구였습니까?

후배인 함현기하고 가깝게 지냈지요. 현기하고는 현대 시절에 룸메이트였습니다. 참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예요.


유공 시절의 김평석 ⓒ베스트일레븐

- 은퇴하신 후 현대 코치를 하셨지요?

네. 고재욱 감독님께서 현대 감독으로 계실 때 이상철 선배님하고 같이 코치로 있었습니다.
코치하면서 단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 3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과정도 마쳤고요. 덕분에 정교사 자격증도 갖고 있습니다. 그 후 인천제철 여자 축구팀 감독을 했지요. 당시 인천제철에 이미애, 이명화 같은 스타급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 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코치셨는데 차범근 감독님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우셨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해군에 있을 때 차 감독님은 서독 분데스리가에 있었거든요. 그때까지 차 감독님은 무명인 저를 전혀 모르셨을 거예요. 86년 멕시코 월드컵 개막 한 달 전에 차범근 선배가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처음 만났죠.

그 때 대표팀이 미국 콜로라도에서 고지 적응 훈련을 한 후 멕시코에 들어갔는데 그 기간 동안에 차범근 선배님이 저를 잘 보셨나 봐요. 서독에서 은퇴하고 귀국한 후에도 저를 계속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차 감독님이 저를 월드컵 대표팀 스태프로 불러주셨을 때 개인적으로 무척 기뻤고 고마웠습니다. 원래는 코치에 조병득, 저는 트레이너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조병득이 당시 할렐루야 감독이었기 때문에 팀을 비우고 나올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코치가 됐고, 정성진이가 GK 코치로 합류를 하게 된 거지요.

-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때 온 나라가 축구 열기로 들끓었습니다. 특히 9월 28일 일본과의 1차전 경기가 백미였는데요.

그렇지요. 일본의 야마구치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후, 후반 막판에 서정원, 이민성이 연속골을 터뜨리면서 2-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거 아닙니까. 사실 저희가 그날 경기에서 후반전 중반 이후를 노렸어요. 일본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길 기다렸는데, 그게 그대로 적중됐습니다. 더구나 저는 현역 시절 같은 장소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일본을 2-1로 이긴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도 월드컵 예선전이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컸습니다.

- 본선에 대비한 준비하면서 차 감독님과 호흡은 잘 맞았습니까?

준비는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차범근 감독님이 워낙 철두철미한 분이거든요. 축구 밖에 모르는 분이예요. 근면, 성실한 건 축구인이라면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차 감독님은 팀 운영을 대단히 치밀하게 하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차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차 감독님처럼 술, 담배를 하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과일 같은 걸 먹으면서 코칭스태프 회의를 했지요.

- 그런데 막상 프랑스에 가서는 결과가 안 좋았습니다.

출국 전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부상을 당하면서 꼬이기 시작한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중국과 평가전을 하지 말고, 차라리 월드컵 본선 출전국과 하는 게 나을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쪽 선수들도 무리를 하지 않고 조심하면서 경기를 했을 테니까요. 역시 선홍이가 빠진 공백이 너무 컸어요. 공격의 중심이 없어진 거니까요. 황선홍을 축으로 공격 전술을 짰는데 선홍이가 못 뛰게 됐으니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 멕시코전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이상윤 선수가 기절을 했다면서요?

운도 따라주질 않더라고요. 스타디움에 도착한 후,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몸을 풀지 않습니까. 그 때 김태영이가 슈팅 연습하면서 강하게 때린 볼이 하필이면 상윤이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상윤이가 그 충격에 잠시 실신을 했어요. 볼이 관자놀이 부근에 맞은 것 같더라고요.

상윤이가 곧 일어나긴 했는데 멍멍한 상태였을 겁니다. 그 후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고 양국 국가가 나올 때 상윤이가 벤치를 향해 계속 얼음과 물을 달라고 손짓을 하더라고요. 그날 상윤이가 제 컨디션으로 뛰었다면 아마 좋은 경기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상윤이 같은 타입의 공격수가 수비수로서는 매우 짜증나거든요. 뱅글뱅글 돌고, 왔다갔다 하니까요.

- 하석주 퇴장도 영향이 컸지요?

사실 그 위치에서는 굳이 태클을 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게 바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들뜬 기분을 컨트롤 못한 거지요. 석주가 레드카드를 받는 순간 저희 코칭 스태프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무엇보다 석주가 퇴장당한 시간대가 너무 좋질 않았어요. 후반전 중반이 넘어서 퇴장을 당했다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었는데 전반 종반에 퇴장 당한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버티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한국보다 약한 팀이라면 버틸 수 있어도요.


김평석 코치가 보좌했던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차범근 감독

- 네덜란드에게 대패한 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됐습니다. 코치로서 심경이 어떠셨습니까?

충격이 컸지요. 사실 저와 정성진 트레이너도 함께 사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코치들도 같이 책임이 있는데, 감독님 혼자서 책임을 다 질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차 감독님이 저희를 자제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현지에 남아 있게 된 거지요.

- 감독 대행으로 마지막 벨기에전을 치렀는데 각오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죠 뭐.(웃음)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거니까요. 현지에서 한국 신문을 구해서 보니까 네덜란드전 때문에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해 있더군요. 그래서 벨기에전을 앞두고 홍명보를 비롯해 경험 많은 선수 몇몇을 불러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했고, 나머지 선수들에게도 “마지막이니까 죽기 살기로 하자!”고 말을 했습니다.

그 날 저희가 벨기에를 이길 수도 있었다고 봐요.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 중반부터는 저희가 밀어붙였거든요. 그런데 이상헌이를 비롯한 몇몇 선수가 다리에 쥐도 나고 부상을 당하고 해서 선수 교체를 계획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게임에 이동국이도 투입을 하고 싶었어요. 한 골이라도 더 넣어보려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질 못했죠.

- 감독님께서 수비수 출신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 지도할 때 수비수들에게 더 신경 쓸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웃음) 중, 고등학교 감독은 모든 포지션의 선수들을 똑같이 신경 써서 지도해야 되거든요. 물론 수비수들에게 기술적인 부분은 자세하게 지도하고 있지요.

- 흔히 ‘한국 수비수들은 포백이 어렵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뭐라고 단정 지어서 말씀드릴 순 없겠네요. 제 생각엔 어릴 적부터 수비 선수들은 수비수 출신 코치가 지도를 하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골키퍼는 골키퍼 출신 코치가 지도를 하지 않습니까. 수비 선수들도 수비수 출신 코치에게 지도를 받게 되면 성장 속도가 굉장히 빠를 겁니다.

축구가 전, 후반 90분 아닙니까. 90분 뛰면서 쓰리백이 포백이 될 수도 있고, 포백이 쓰리백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여러 차례 옵니다. 즉, 존디펜스를 하다가 맨투맨을 하게 될 때가 있고, 맨투맨 수비를 하다가 존디펜스를 할 때가 있다는 거지요. 이걸 수비수들이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해 나가야 돼요.

그런데 이것은 나이가 먹은 후에 배우려고 하면 무척 어렵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시켜줘야 경기 중에 수비수들이 당황하지 않고 대처를 할 수가 있거든요. 한국 수비수들이 이 부분이 많이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수비수들은 수비수 출신의 코치가 지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코치들도 책임감을 더 강하게 느끼고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지요. 선진국에선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국내 축구계 사정이 그렇게까지는 되어 있질 않지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 한국도 이런 방향으로 갈 걸로 예상됩니다.

- 본프레레 감독도 그랬고, 아드보카트 감독도 프랑스 월드컵 본선(프랑스, 스위스전)에서 좌 동진-우 영표를 썼는데 사이드백 경험이 많은 감독님이 보기에는 어땠습니까?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감독 두 분은 좌동진-우영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포메이션을 쓴 것 같아요. 이에 관해서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수 기용에 대한 판단은 절대적으로 감독의 권한이거든요. 만일 저라면 이영표를 왼쪽에 세우고 오른쪽에 송종국이나 조원희를 기용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이라고 볼 순 없어요. 감독들 나름대로 선호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요.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고맙습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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