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박대통령배 축구대회 미국전에서 드리블하는 김재한

김재한(58살, 현 대한축구협회 이사)은 1970년대에 활약한 우리나라 최초의 키다리 스트라이커이자, 한국 축구에서 포스트 플레이를 처음 시작한 헤딩왕이다.

키 191cm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신장을 가졌던 그는 1972년 25살에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33살되던 1979년까지 8년동안 대표선수로 활약했다. 김재한 덕분에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공격 트리오는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좌 김진국, 우 차범근, 센터포워드 김재한은 1970년대를 주름잡은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김재한 씨의 회고.

“레프트 윙 김진국은 기술과 정확성이 장점이어서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센터링을 올렸는데 아주 정확했습니다. 라이트 윙 차범근은 스피드가 특기라 빈 공간을 만들고 빠르게 질주하여 저에게 센터링을 올렸죠. 저는 양쪽에서 올라오는 공을 받아 헤딩슛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주로 맡았죠”

김재한은 대표시절 A매치에서 통산 33골을 기록했는데, 박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나 재팬컵 같은 대회에는 외국프로 클럽이 많이 참가했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한 경기까지 포함하면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51골을 넣었다.

김재한은 키가 큰 덕도 많이 봤지만 공의 낙하 위치를 선점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골도 많이 넣었고, 문전에서 헤딩으로 절묘한 어시스트도 많이 했다. 박이천, 이회택, 차범근, 허정무 등 공격수들 앞에 정확히 공을 떨어뜨려 주어서 그들이 득점하도록 도왔다.

“세계 축구가 4년 주기로 해서 월드컵의 우승팀을 따라 유행을 타죠. 포메이션이나 전술이 특히 그래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은 3위를 했지만, 그 팀의 에우제비오는 9골로 득점왕을 했어요. 그때 포르투갈에는 장신 포워드 토레스가 있었는데, 토레스의 도움으로 에우제비오가 많은 득점을 올릴수 있었죠.”

토레스는 골 에어리어에서 헤딩 패스로 에우제비오에게 떨어뜨려 어시스트를 했고, 자신도 그 대회에서 3골을 넣었다.

“그 이후로 각팀에서 장신 센터포워드가 유행했죠. 일본에도 저보다는 작지만 키가 큰 가마모토가 있었어요. 제가 소속됐던 주택은행의 민병대 감독님도 저를 그렇게 활용했죠. 민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이 된 이후에 저를 대표팀의 장신 포워드로 기용했어요.”

꺽다리 센터포워드 김재한은 이렇게 세계 축구의 흐름에 맞춰 한국 축구에 필요한 공격수가 되었다.

1973년 5월 서울 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서독 월드컵 예선 태국 경기에서 그는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처음으로 골을 터트린다. 월드컵 예선 라운드 첫 경기였는데 전반을 0-0으로 마치자 민병대 감독은 김재한을 교체 투입했고, 그는 헤딩으로 2골 2어시스트를 해 4-0 승리로 보답했다.

"축구도 테니스 경기처럼 공이 양 진영을 오가며 랠리가 계속되죠. 득점은 그 균형이 깨지는 순간에 이뤄져요. 급하게 몰아부치면 허점이 나타납니다.”

김재한은 1976년부터 2년동안 홍콩의 세이코팀에서 프로선수로 뛰기도 했다.
1977년 7월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에서는 한 경기에서 4골을 넣은 등 이 대회에서 7득점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77년과 1978년 한국 대표팀 화랑이 아시아 무대를 석권할 때 김재한, 차범근 투톱은 각국으로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키가 작은 동남 아시아 수비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호주나 이스라엘, 이란처럼 큰 선수들도 그와의 헤딩 경합을 이길수 없었다.


1978년 박대통령배 우승후 김호곤과 함께

공격수는 골을 넣으려고 하고, 골키퍼는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려고 한다. 골 에어리어 안에서 그들의 싸움이 언제나 치열하게 펼쳐진다. 마음속에 투쟁심이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강하느냐에 따라 공격수로서 성패가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

"골을 넣으려면 투쟁심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센터포워드(스트라이커)라면 골문 앞에서 투쟁심이 강해야 돼요. 나는 헤딩을 하기 위해 늘 골 에어리어에서 골키퍼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습니다. 골키퍼도 마찬가지였겠죠. 상대 골키퍼의 주먹질에 코뼈가 세 번이나 무너졌습니다.”

김재한의 코뼈가 처음 부러진 것은 1960년대 후반 실업팀 제일모직에 있을 때. 상대 골키퍼의 펀칭에 맞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1978년 10월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동료 선수와 부딪쳐서였다. 방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페루의 스포팅크리스탈 클럽을 초청해 친선경기를 했는데, 환상의 콤비였던 김진국과 함께 헤딩을 위해 점프했다. 그런데 키작은 김진국의 머리가 그만 김재한의 코를 강타하고 말았다.

"세 번째는 1979년인가 연세대와 연습경기를 할 때였는데 역시 골키퍼의 펀칭에 맞았어요. 부분 마취를 하고 기계로 코뼈를 들어올리는 수술까지 받았는데 어찌나 아팠던지…. 지금도 그때 후유증으로 얼굴의 한쪽 광대뼈가 다른쪽보다 조금 더 튀어나왔어요. 비염기도 약간 있지요. 그 뒤로는 헤딩하기를 조심했죠.”

김재한의 투쟁심을 말해주는데는 골키퍼 이세연과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73년 1월에 진주에서 국가대표팀이 청백전 연습경기를 할 때였다. 이세연 골키퍼는 상대팀이었는데 김재한에게 한 골을 허용하자, 다음 센터링 때부터 한쪽 주먹은 공을 향하고, 다른 주먹은 김재한의 얼굴을 향해 펀칭을 했다.

이 때문에 김재한의 왼쪽 어금니가 부러졌다. 김재한은 땅에 떨어진 어금니를 주워들고 이세연 골키퍼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다른 동료에게 다시 센터링을 올리라고 주문하자, 오히려 이세연이 움찔해서 그 다음부터는 김재한을 건드리지 못하고 순해졌다.

헤딩왕이 스스로 생각하는 최고의 골은 흥미롭게도 발로 찬 슈팅이었다. 1978년 7월의 메르데카컵 말레이시아전이었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차범근이 센터링했죠. 페널티에어리어 아크에서 받아 오른발로 그대로 논스톱 발리슛을 했어요. 골문 오른쪽 구석에 꽂혔죠. 개막전 첫 골이었어요. 현지 신문에 나는 새가 먹이를 물었다고 기사가 났습니다."

김재한은 경북 김천 출신으로 김천고에서 축구를 하다가 대구고로 옮겨서는 야구를 했고, 대구 성광고로 전학해 다시 축구를 했다. 축구 시작이 늦고, 대표팀에도 늦게 선발됐으나 부단한 노력으로 발기술도 헤딩력만큼 끌어올렸다.

김진국 KFA 기획실장의 회고다.

“키가 워낙 커서 높이가 다른 선수들과 차이가 있으니까 그에 맞춰 센터링을 해줘야 했어요. 공이 포물선을 그려서 재한이 형이 낙하 지점을 잘 잡고 헤딩하도록 '김재한용 크로스를' 따로 연습했지요. 처음에는 김재한 선배의 발 기술이 서툴러서 관중들이 많이 웃었지만 나중에는 발 기술로도 관중의 환호를 크게 받았어요.”

김재한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 축구는 포스트 플레이를 시작했다. 바로 뒤이은 포스트 플레이 스타는 조동현(현 울산미포조선 감독), 그리고 오석재가 있었다. 그 뒤로는 뚜렷히 장신 스트라이커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어젯밤(5월 25일) 수원 삼성이 중국 선전팀에게 져서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탈락했잖아요. 수원의 김동현은 좋은 선수인데 아쉽게 스탠딩 헤딩만 하더라고요. 골을 넣는 슛은 러닝 헤딩(달려가며 한 발 점프후에 헤딩)이어야 해요. 그래야 위력이 있죠. 제자리에서 양발로 점프하는 스탠딩 헤딩은 위력이 없어요 스탠딩 헤딩은 떨어뜨려 어시스트하는 데는 효과적이죠.”

김재한의 헤딩슛은 방아를 찧듯 내리 꽂혀 위력이 있었다. 헤딩 슛이 공중으로 어이없이 날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난해 아테네 올림픽 말리와의 경기에서 김동진의 어시스트를 받아 조재진이 달려가며 점프 헤딩 골을 꽂아넣었던 것처럼 스피드와 강도가 셌다.

"지금 20세 청소년대표팀의 심우연이 장신이던데 앞으로 활약을 기대해 봐야겠어요.”

한국 축구에 제2의 김재한이 나타나 그가 왕년에 했던 것처럼 시원한 헤딩슛 골을 터뜨려 주기를 기대해 보자.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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