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한국축구의 풍운아 이회택 ⓒ베스트일레븐

그라운드의 표범, 60~70년대 한국 축구 풍운아 이회택

풍운아, 이회택. 그는 1965년에 청소년대표팀에 등장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이듬해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1979년까지 대한민국의 그라운드를 주름잡았다. 풍운아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원래 풍운아란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활약했던 15년간은 그리 좋은 때가 아니었다. 그가 청소년대표팀에 있을 때 우리나라는 아시아청소년대회 결승전에도 오르지 못했고, 국가대표팀에 있을 동안 월드컵이나 올림픽 본선 같은 세계대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회택은 좋은 때를 타고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말할 때마다 첫손 꼽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1969년 킹스컵 우승,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 1972년 아시안컵 준우승, 1972년 말레이시아 메르데카배 우승, 1971년과 1974년 박스컵에서 우승하는 등 아시아 무대를 휩쓸었다. 그는 한국 축구가 아시아에서 강팀으로 자존심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그라운드의 표범이었다.

그의 공격 X파일, 순간 동작이 빨라야 골 넣는다

A매치 32골. 그가 한창 활약했던 동안 득점자를 알 수 없는 기록이 14골이니, 사실 더 될 수도 있다. 그가 공격수로 성공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회택 플레이의 키워드는 ‘날렵함’이다.

그의 경기를 보았던 사람의 한결같은 평가는 매우 날렵했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날렵했던가를 독자가 알기 쉽도록 최근 선수의 활약으로 비유하면 이렇다. 발재간은 2004년 3월 최성국이 중국 경기에서 59미터를 드리블하며 조재진에게 어시스트해 1:0 승리를 이끌었던 때와 같고, 스피드는 2005년 1월 미국 LA에서 정경호가 콜롬비아와 스웨덴을 상대로 골을 넣을 때처럼 빨랐다.

대가를 설명하면서 젊은 선수를 예로 들어 안타깝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던 독자가 다수이니 어쩔 수 없다. “나보고 시원시원하게 공을 찬다고들 했지.” 그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축구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다.

조정수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회택이는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서 수비수를 피해 빠져나가 번개처럼 날리는 슈팅이 일품이었지. 축구 공격수에게 중요한 스피드는 100미터가 아니라 20~30m 순간 속도야.”

자, 그렇게 날렵하게 달려가서 어떻게 골을 넣었단 말인가. 이회택 부회장은 입을 열었다.

“골 넣는 비결이 따로 있나. 가르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그래도 말해보라고? 굳이 말하자면, 감각이 있어야지. 매가 사냥을 할 때 먹이를 확 채듯이 동물적인 감각이 있어야돼. 스피드도 있어야 해. 그래야 골을 넣을 수 있지. 그리고 결정력이 있어야 해. 결정력이 뛰어나려면 순발력과 판단력이 필요하지. 순간 포착을 잘 하는 감각, 스피드, 순발력 덕분에 골을 넣을 수 있었지. 1:1에도 자신이 있었고, 골 넣는 자리만 찾아간다는 소리도 들었어.”

“축구는 골프처럼 혼자서 연습한다고 될 일은 아니야. 같이 뛰는 선수들과 호흡을 잘 맞춰야지. 그래야 골을 많이 넣을 수 있어.”

실제로 이이우, 박수일, 정병탁, 김기복 등 주위 선배의 어시스트도 좋았고 호흡이 잘 맞았다. 1970년은 이회택 전성기였다. 얼마만큼 많이 넣었냐 하면 4월에 브라질 플라멩고에게 2골을 넣어 2:1 승리했고, 8월부터 11월까지 A매치 5경기 연속골을 넣었을 정도다.

TV중계가 없던 그 시절 라디오 중계에 국내 축구팬은 귀를 기울였다. 말레이시아 메르데카배 4강에서 장신의 인도를 만났다. 전반에 0:2로 지다가 후반에 2골을 넣어 동점이 됐는데, 이회택의 헤딩 결승골로 역전승하고 결승에 올랐다. 라디오 중계 아나운서는 이회택 선수가 공과 함께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결승전에서도 이회택의 한 골로 1:0으로 승리해 우리나라는 공동우승 세 번 뒤에 첫 단독우승을 차지했다. 동대문운동장에 포르투갈 벤피카가 왔을 때는 에우제비오와 맞서 한 골을 넣었고, 태국 킹스컵까지 A매치 다섯 경기 연속골을 성공시켰다.

효창운동장의 스타, 축구에 미쳐야 축구선수다

“이회택, 내보내라!” “이회택 보러 왔다.” “빨리 출전시켜라!”

1970년대에 효창운동장에서 들렸던 관중의 외침이다. 평일이라 썰렁했던 관중석도 포항제철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만원을 이뤘고, 대낮에 경기를 해도 많은 관중이 찾아와 이회택의 플레이에 열광했다. 이른바 ‘이회택 마니아’들이었다. 이회택은 효창운동장의 최고 스타였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었더라면 이회택 팬클럽 홈페이지는 늘 다운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팬들의 애정이 대단했었지. 선수의 진가를 알아주는 것은 팬이야. 팬을 통해서 그 선수의 실력도 입증되는 것 아니겠어?”

열성팬들을 생각하면 플레이도 진지해지고, 지금도 평소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고 한다.

열심히 연습하는 꿈나무, 한창 뛰고 있는 선수를 위해 조언을 구했다.

“나는 잘 놀러 다녔지만 그래도 술은 마시지 않았어.”
풍운아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지만, 당시 후배들은 이회택 선배의 비결을 자기 관리에서도 찾았다. 대가가 공개하는 마지막 비결이다.

“나는 축구에 미쳤다는 말을 들었어. 다니던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었는데, 김포에서 대회가 열리면 열흘 정도 연습을 하지. 선배나 체육선생님이 지도했는데, 축구에 미쳐있는 나를 당할 수 있나. 동네에서, 산에서, 논두렁에서 내내 공을 찼지. 우리 어렸을 때 놀이가 축구하고 병정놀이 뿐이었으니까. 축구공하고 살았고 공차는 어른들 쫓아다녔어.”

“중학교 1학년 때 기계체조를 했는데 그때도 축구에 미쳐있었지. 고등학교 때 처음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서 교육을 받았어. 우리끼리 만든 축구부 말고 말이야. 어느 분야든 그 사람이 미쳐 있어야 진정한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을 거야.”


(이회택 : 1946년 출생. 1965-1966년 청소년대표팀. 1966-1974년, 1977년 국가대표팀. 1970년 A매치 5경기 연속골, A매치 통산 32득점. 현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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