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자 멈추지 않는다 - K리그 100호 골의 주인공
경신중-경신고-건국대를 거쳐 1988년 럭키금성(현 FC 서울)에 입단한
1990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득점왕에 올랐으며, 두 번의 득점왕은
마치 축구공과 하나가 된 듯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언제나 공격의 마무리는
1997년 100호골 달성과 300 경기 출장을 끝으로 K리그에서 은퇴한 뒤 호주에서의 2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친
“사실 건국대 축구부가 이전에도 (김)재한 선배나 (김)진국 선배 등 대스타들을 간간이 배출하긴 했지만, 대학 강호는 아니었죠. 프로에 진출한 선배들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그런데 내가 입학한 80년대 중반부터 건국대 축구부의 성적이 많이 좋아졌어요. 내가 2,3학년이었을 때는 2관왕도 하는 등 거의 매년 정상권에 진입했으니깐요. 개인적으로 기회가 와서 재학 중에 대표선수도 해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실제 당시 건국대는 대학선수권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권 대회를 휩쓰는 돌풍의 주역으로 명성을 떨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내 바로 밑이었던
“제가 대학 다닐 때 상철이가 중학생이었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가르쳐줬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만 해도 상철이는 개인 기량은 좋았지만 신체조건이 굉장히 왜소해서 상철이 부모님이 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도 꾸준히 대학축구에서 상위권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죠. 더욱이 그 출발점이 우리 동기들부터였다는 점이 더욱 기쁘고, 자부심이 있어요.“
건국대 시절 그는 어떤 선수였을까.
“ 후배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같이 이야기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후배들과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어요. 문제점이 있으면 후배들과 상의도 많이 하고. 지금도 경신고를 맡으면서 아이들과 대화하고, 아이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 당시에는 (고)정운이가 무서운 선배로 알려졌는데, 팀 훈련이든 개인훈련이든 정말 열심히 하는 선수인데다 자기 주장도 강하다보니까 대충대충 하는 것을 못 봐줬었죠.“
럭키금성.. 화려한 선수로의 비상
“1987년 대학 4학년 때 무릎수술을 하면서 거의 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쉬다가 1988년 드래프트
에 참가했는데, 전체 1순위로 럭키금성에 지명되는 기쁨을 누렸죠.”
당시 그는 무릎수술로 인해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그가 입단할 무렵에는 체중이 10kg이 불어있었다. 동계훈련 기간 동안 체중감량하고, 무릎치료 하는 바람에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몸이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시즌 개막전에 반 게임 정도 뛰고, 몇 경기를 계속 결장해야만 했다.
“5월 말경 에야 후반에 교체 투입되었는데, 그때 내가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1-0으로 승리했고 이후 계속 경기에 나서게 됐었죠. 첫 시즌에 결국 4골을 넣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굉장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
대학 4학년때 다친 무릎으로 수술을 하고서 프로에 입단한 그에게 실제로 무릎은 선수생활 내내 그를 따라다녔었던 문제였다. 이로 인해 매년 동계훈련 때마다 무리한 훈련은 가급적 피했지만 끝까지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학수준이 지금보다 많이 낮았기 때문에 물리치료나 재활 등에 있어서 체계적 치료가 어려웠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악재를 이겨내고 프로 데뷔 2년차였던 1989년 17골로 확실한 골잡이로 자리 잡았고, 1990년에는 첫 득점왕까지 오르게 된다.
“1989년에는 17골로 득점 2위까지 했었죠. 사실 팀도 우승할 수 있었는데 승점 2점차로 유공(현 제주)에게 아깝게 밀려 2위를 기록했어요. 저 역시 득점왕을 노려볼 수 있었는데 조긍연 선배에게 2골 차로 1위를 내줬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던 한해였었죠. 1990년은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기억에 남는 시즌이었어요. 팀도 우승을 차지했고, 득점왕도 받고, 각종 시상식에서도 상을 여러 개 받았었죠.”
당시 같이 뛰었던 팀원들의 이력도 화려했다. 당시 팀의 주축을 이뤘던 선수들은 일단 골키퍼에 차상광, 수비진에
“(최)진한 선배가 특히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줬어요. 이밖에도 1990년 도움왕에 올랐던 최대식이나
1993년부터 팀이 안정되면서 저 역시 페이스를 되찾았었죠. 팀도 준우승을 차지했고, 저 역시 도움왕(8개)과 함께 득점 2위(9골)를 하는 등 만족스런 한해였어요.
그 기세를 계속 이어가 1994년에는 24골로 당시 한 시즌 최다 득점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도 고비가 있었는데, 초반 7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해 오랜만에 교체 멤버로 밀리기도 했었죠. 오기가 생겨서 더 이를 악물고 뛰었고, 결국 시즌 최다골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
1994년 그는 24골을 기록하며 한 시즌 최다 득점기록을 세우게 되고 93년 8도움으로 도움상, 감투상, 베스트11 FW 등을 받고, 94년에는 득점상과 베스트 11 FW 등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이룩한다.
“97년은 가장 힘들었어요. 시즌 내내 부상으로 인해서 고생했고 팀 또한 침체에 빠졌었죠.”
97년 럭키금성은 19연속 무승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기록을 세우며 곤두박질쳤고 동시에 부상으로 그도 2군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1군으로의 부활은 그리 오래지 않았고
“100호골을 기록했을 때 너무 감사했어요. 부상인데다가 2군으로 처음 내려갔고 마음 고생이 심했었거든요. 헤딩슛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을 때까지 눈을 못 땠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날의 골을 마지막으로 그는 영예로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연평균 10.89골을 기록하였으며 아울러 경기당 0.35골을 터뜨리는 득점포를 선보였다. 포항은 가장 많은 24골을 그에게 허용했고 수원은 1골만을 그에게 허용했다. 은퇴이후 호주에서 2년간 선수로 활약을 하다가 지도자 수업을 받고서 화려한 그의 인생의 2막?그의 모교인 경신고에서 열어가게 된다.
1997년 300게임 출장 기록과 최초 100호 골을 기록하며 화려한 이력을 마감한
학생으로서 꿈을 꿨던 모교에 다시 지도자로서 돌아왔다. 그 느낌이 궁금하다.
축구 지도자의 길로 나서겠다고 선언했을 때 모교인 경신고에서 처음 제안이 왔었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었어요. 모교이기도 했고 축구명문 경신고의 이름을 먹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내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통해서 좋은 선수들을 발굴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또한 프로에서 은퇴한 제 자신에게도 나태해짐 없이 계속해서 채찍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부임할 당시에 지난 대회에서 경신고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부담이 많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그 당시에 좋은 선수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놓고 밤을 새며 고민했었고 어린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함께 땀 흘리며 연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납니다. 무엇보다도 축구를 했던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친구들의 진로는 이것으로 결정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더욱 이들의 장점을 살려줄 방법들이 필요했었죠. 결국 함께 생활하며 팀에 대해 알게 해주었고 축구협회 지도자 강습회 등에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축구계 지도자들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며 꿈나무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인식시켜주었어요. 결국 그 다음부터는 좋은 성적들이 나오기 시작했구요. 현재에는 후배이자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
지도자 흔히 말하는 리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잖아요. 가령 유비와 같은 덕장, 관우나 장비와 같은 맹장, 제갈공명과 같은 지장이 있다면 조금은 욕심이지만 세 가지의 색깔 모두를 겸비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왜냐하면 선수생활을 해보고 지도자의 길을 걷다보니깐 선수들 개개인마다의 색깔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요. 개인플레이를 잘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팀을 아우를 수 있는 선수도 있고 격려를 잘해주는 선수도 있어요.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색깔에 맞게 감독이 곳곳에 적절하게 선수들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이들을 각자가 갖고 있는 색깔을 최대한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도자 생활을 통해서 느꼈죠. 이를 위해서 축구협회와 AFC등에서 실시하는 각종 지도자 세미나와 강습회 그리고 지도자 양성과정들을 빼놓지 않고 밟은 것이에요. 왜냐하면 다양한 선수들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입장에 서 있는 제가 더 많이 더 폭넓게 경험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죠. 지도자는 선수와 다른 영역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운동장에 공을 만지지 않을 뿐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며 더욱 더 많이 생각하고 뛰어야 하는 사람이 지도자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세 가지의 모든 색깔을 갖춘 지도자가 꼭 되고 싶어요.
축구 없이는 못사는 인생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 축구이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축구를 하면서 후회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들 중 대부분을 축구와 관련된 일을 통해서 였던 것 같아요. 지난 날의 선수시절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300경기와 100골을 넣었는지 싶어요. 도중에 부상도 있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축구를 사랑했고 축구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인생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축구는 인생의 활력소이자 나의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일을 위한 자신만의 삶의 목표가 있다면
한국축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요. AFC에서 주관하는 지도자 세미나를 보고서 많이 느꼈던 것이 아시아지역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 이렇게 높은데 이른 바 선진축구라고 불리 우는 유럽축구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장점을 우리나라에도 많이 접목시켜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우리나라의 축구를 발전시켜야 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답니다. 현재 경신고 감독을 맡으면서 대한민국의 축구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옥석을 골라내는 일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좋은 옥석을 발굴해내고 옥석을 갈고 닦아서 프로나 대학에 보내고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죠. 아직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조금씩 그런 옥석을 골라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있는 느낌이 조금씩 느껴져요. 더욱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그들에게 많은 지식을 물려주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주고 싶어요. 또한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축구의 선진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현재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항상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은 아직도 진행 중 이라구요.
마지막으로 K리그 팬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2002년을 기점으로 한국축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성장을 해왔어요. K리그 또한 현재 14개 팀으로 이루어져 좋은 경기와 좋은 경쟁을 통해서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팬들의 힘인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100호골을 넣은 것보다 100호골에 박수로 화답해주셨던 팬들의 환호와 격려였어요. 무엇보다도 팬들이 없으면 K리그는 물론 한국축구는 발전할 수 없잖아요. 비록 지금이 선진 축구로 도약하는 과도기적인 시기인지라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차가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힘이 더 많이 필요하듯이 K리그의 힘인 팬들의 성원과 격려가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항상 희망을 가지고 애정 어린 시각으로 건설적인 비판과 칭찬으로 함께 K리그와 한국축구의 발전을 이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울러 항상 관심 있게 지켜봐주셔서 감사드리고 그 성원과 열정에 부족함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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