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 ||||
성명 |
최영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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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6-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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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
181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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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 |
76 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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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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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통산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장수 |
골 |
도움 |
1989-1995 |
현대 |
206 |
1 |
3 |
1996 |
울산 현대 |
31 |
2 |
2 |
1997-1998 |
부산 대우 |
24 |
0 |
1 |
2000 |
안양 LG |
5 |
0 |
0 |
계 |
266 |
3 |
6 | |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 ||||
연도 |
각급 대표팀 |
출장수 |
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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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8 |
성인 대표팀 |
55 |
0 |
K리그 우승 1996, 1997, 2000 리그컵 우승 1995,1997, 1998 K리그 베스트11 1993, 1995 월드컵 본선 1994, 1998 아시안게임 본선 1994
클럽 주요 경력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월드컵 특집 K리그의 전설 그 세 번째 순서는 94년 미국월드컵과 98년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던 90년대 최고의 스토퍼
90년대, 홍명보와 함께 한국의 수비라인을 담당하며 최고의 스토퍼로 이름을 날린
앞서도 말했지만
“하지만 제가 그래도 철은 있었는지 신문배달도 하면서 어린 나이 때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었어요. 그 어린 시절의 부지런함, 그 습관들이 결국은 제 인생의 지지대가 되어 주었죠. 학창시절 축구를 배워 오면서도, 프로팀에 입단하고 대표팀에 발탁되고 나서도, 은퇴 후 감독이 되고서도 언제나 성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지칠 때 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저 스스로를 다잡을 수가 있었어요.”
“제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축구하고 운동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좋아서 이고, 두 번째는 제가 당시만 해도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서 애들의 놀림을 많이 당했는데 축구를 하면서 살을 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이유는 營?축구부원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던 우유 때문입니다.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삼각형 팩으로 포장된 우유가 있는데 그걸 운동 마치고 매번 먹을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다른 이유보다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 축구를 했었습니다.”
이 후
하지만 1988년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비록 큰 주목도 받지 못했고 당시 구단 위치도 집에서 먼 강원도였지만 저는 프로팀에 입단했다는 것이 마냥 기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다고 다 프로팀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축구선수로서 더 큰 무대에 나서고 더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점은 벅찬 감격이었어요.”
하지만 입단과 함께 참가한 첫 동계훈련에서 불행이 찾아왔다. 바로 발목부상을 당하며 두 달 동안 깁스를 하게 된 것. 입단과 함께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야 할 신인에게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당한 부상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참가한 동계훈련에서 바로 부상을 당하니 참 난감했죠. 불안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시 감독이셨던
“다행히 그러한 감독님의 배려 속에 무리하게 몸을 쓰지 않아도 됐고 저도 마음을 놓고 재활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두 달 만에 후유증 없이 부상에서 회복할 수 있었죠. 선수생활을 해 오면서 많은 감독님을 겪어 왔고 감독님들마다 다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선수 개개인에 대한 배려나 보살핌은
비록 팀 동계훈련은 부상으로 걸렀지만
그 시즌 팀의 다섯 번째 경기인 유공과의 강릉경기에서 선발출장하며 프로데뷔전을 치른 뒤 줄곧 주전 자리를 지키며 1989년 시즌동안 29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던
하지만 어지러운 팀 분위기 속에서도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대표팀유니폼을 입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지금껏 청소년대표 한번 뽑혀본 적 없이 그저 평범한 선수로 뛰어 온 제가 비록 2군이지만 대표팀에 뽑혔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어요. 그만큼 감격적이었고 기뻤죠. 그 때 대표팀 발탁을 계기로 정말 축구선수를 하는데 있어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뭔가 이뤄지는 것이 있다 보니 더 큰 꿈에 대한 동기부여도 되었구요. 비록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거나 상을 탄다거나 이런 업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프로리그에서 꾸준히 활약을 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구나’라는 것도 깨달았죠.”
프로리그에서도
그리고 이듬해인 1994년,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 월드컵 예선은 지금까지도 많은 축구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극적인 드라마다. 우리에게는 ‘도하의 기적’을, 일본에게는 ‘도하의 비극’을 안겨주었던 이라크의 극적인 대 일본전 동점골은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인상 깊은 사건이다. 하지만 그런 극적인 순간에
“2월 미국전지훈련을 앞두고 였습니다. 축구협회에서 대표팀에 발탁이 되었으니 미국전훈을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정말 놀랐죠. 하지만 앞서 대표팀 주전 수비수였던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어요. ‘너는 잠깐 훈련 파트너 해 주는 것일 뿐이다.’, ‘따라가 봤자 박힌 돌 빼지 못한다.’이런 이야기에 심지어는 ‘괜히 나중에 아쉬워하지 말고 전지훈련 가지 마라.’이런 말까지 들리는 겁니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고 비참해지더군요. 분명 기술위원회에서는 제 가능성과 능력을 보고 판단한 것일 텐데 말이죠. 출국을 하면서 다짐했습니다. 절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줘서 충분히 뛰어난 선수임을 증명하겠다고... 결국 오기로 가득 찼던 제 자신을 다잡으면서 후회 없는 활약을 펼쳤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2월 20일부터 3월 19일까지 약 한 달간 진행된 전지훈련에서 한국대표팀은 총 6차례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 기간 동안 콜롬비아, 미국대표팀과 비기고 미국 클럽팀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나름대로 긍정적인 성과를 이뤄냈고
월드컵을 앞둔 1994년 5월, 대표팀은 카메룬 대표팀, 브라질의 인터나치오날 클럽, 독일의 레버쿠젠과 각각 두 차례씩 6번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 가운데서
“그냥 제가 박힌 돌 다 빼버린 거죠. 하하.”
기존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갑작스런 대표팀 승선, 월드컵 엔트리는 물론 주전 수비수로의 도약. 끝없이 질주하던 상승세를 안고
1994년 미국 월드컵, 86년 대회에 이어 3회 연속 진출이자 통산 네 번째로 밟아보는 월드컵 무대였다. 좌절을 맛보며 경험도 쌓았고 볼리비아라는 확실한 1승 제물도 있었던 만큼 내심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본선무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찾은 것만큼은 소중한 성과였다.
조별예선 첫 번째 상대인 스페인, 지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맞붙어
“경기에 나서기 전 라커룸에서 마지막으로 경기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의 기를 팍 죽여 놓는 소리가 들려왔죠. 반대편 스페인 라커룸에서 울려 퍼지는 기합소리가 그렇게 클 수가 없는 겁니다.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으니까요. 같이 줄을 서서 경기장에 입장하는데 완전히 압도당한 느낌이었죠.”
“경기 초반은 그렇게 수월하지가 못했습니다. 긴장도 많이 되고 주눅이 들어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경기 중반이 넘어서며 상대의 발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거 잘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전반 말미에 나달이
하지만 스페인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개인기술과 전술능력으로 한국을 압도했다. 후반 초반에 내준 두 골. 순식간에 점수는
“남은 시간은 제가 굳이 이야기를 안 해도 되겠죠? 홍명보의 프리킥과
스페인과의 경기를 무승부로 마치며 대표팀의 16강 진출에는 청신호가 켜졌다. 두 번째 상대인 볼리비아만 잡는다면 와일드카드제도가 있었던 당시 16강 진출은 거의 확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의 사기도 충천했다.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며 얻은 심리적 상승세였다. 하지만 볼리비아전, 8분이나 주어진 로스타임 동안에도 득점은 터지지 않았고 땅을 치는 아쉬움만이 남겨졌다.
“난타전이었습니다. 전후반 통틀어 두 팀 모두 정신없는 공격을 주고받았죠. 우리는 다음 경기가 독일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볼리비아를 잡아야 했고 볼리비아는 이미 독일에 1패를 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에 치열한 난타전은 이미 예고돼 있었던 승부였습니다.”
“저는 그 경기에서는 선발로 나서지 않았어요. 공격에 집중하기 위한 감독님의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많은 찬스를 잡으면서도 수비에서 문제가 드러났고 결국 제가 후반 26분
마지막 독일전, 벼랑 끝 승부였다. 승리하지 않는다면 16강 진출의 가능성은 없었다. 3무승부로는 16강 진출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년도 우승팀 독일. 부담감은 상당했고 곧 경기력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전반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세 골을 내주고 라커룸에 들어오는데 정말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 그렇게 제가 못나보였을 때가 없었어요. 선수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왔고 코칭스태프도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본래
“전반전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경기를 마쳤건만 저희 선수들이 독이 오를 데로 올라 있었나봐요. 후반전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죽기살기로 달려들었고 독일은 전반전 세 골을 넣은 뒤 정신적으로 안이해졌죠. 특히 명보가 두 번째 골을 넣고 후반 중반이 넘어서자 독일 선수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후반전부터 제가 클린스만을 전담마크 했는데 전반전에 그렇게 무섭던 선수가 후반전에는 한 발 떼기도 힘들어 하더라구요.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몰아 붙였습니다.”
“후반전은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골을 넣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진으로 공을 보내줬고 상대편 골키퍼가 무수한 선방을 했다는 것. 그리고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경기를 치르면서 충분히 역전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속상했죠.”
2002년 월드컵, 우리대표팀의 전력을 설명하는 아이콘은 압박과 체력이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이 압박을 휘한 전제요소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체력이 바로 월드컵4강 성과의 결정적 요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94년 월드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 독일전의 인상적인 승부와 함께 94년 월드컵에 참가한 우리 대표팀이 남겨준 기억은 지치지 않는 체력이었다. 체감온도가 40도를 훌쩍 넘어서는 당시의 더위에서 체력 없이 버텨낼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스페인전과 독일전을 치른 댈러스 구장은 그라운드가 지표면보다 아래에 있는 구장이었습니다. 땅을 파서 그라운드를 만들고 그 주위로 스탠드를 올린 형식이었지요. 문제는 경기장의 구조가 그렇다 보니 바람이 전혀 안 불고 뜨거운 열기가 그라운드 안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사우나에 온 듯 한 기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관중석에서도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을 정도니 말 다했죠“
“자연히 승부의 관건은 체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그 무더위를 더 참고 견뎌낼 수 있느냐가 승부의 분수령이었죠. 결국 체력의 승자는 우리 한국이더군요. 아무래도 사계절이 뚜렷하고 비슷한 무더위를 많이 경험해 본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지 않았나 싶네요. 유럽 같은 경유에는 그런 날씨가 잘 없으니 훨씬 적응하기 힘들었을 테고 그런 환경적 요인이 심리적, 체력적인 우위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월드컵에 참가하기 직전,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님이 큰돈을 들여서 저희한테 보양식을 마련해 주셨어요. 어찌 보면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그 약을 먹었던 것이 좋은 체력 갖출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하하.”
94년 월드컵, 비록 아쉬움이 남았지만
“사실 컵대회 우승은 크게 감회가 남지는 않습니다. 단기전 승부였고 딱히 분위기를 느낄 것도 없었죠. 하지만 이듬해에 수원삼성을 꺾고 차지한 정규리그 우승은 정말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제 축구인생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순간 중 하나죠.”
96시즌 울산의 행보는 기복이 매우 심했었다. 당시 리그제도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최종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는 양대리그 형태. 울산은 전기리그에서 11승 3무 2패 승점 36점을 기록, 2위 포항에 승점 1점을 앞서며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사실 후기리그에 최하위를 하면서 팀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잃어버렸었구요. 하지만 정작 챔피언 결정전이 다가오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울산현대가 84년에 창단한 이후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만큼 절박했고 구단 관계자들의 기대도 컸고... 더구나 상대가 재계 라이벌인 삼성이었지 않습니까.”
11월 9일, 울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울산과 수원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 하지만 울산현대의 생각대로 경기가 풀리지는 않았고 전반 21분에 터진 수원
“2차전을 앞두고 분위기는 비장했습니다. 신생팀에게 우승컵을 내준다는 것은 기존팀의 체면상으로도 말이 아니었고 삼성에게 진다는 것도 구단측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었죠. 감독님께서 ‘물러설 곳은 없다.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붙여라’라는 주문을 하셨습니다. 함께 ‘신생팀이니만큼 경험이 부족하니 우리가 몰아붙이면 당황해서 경기운영의 리듬을 잃어버릴 것이다’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기내용은 그렇게 추억할 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이어진 거친 경기 가운데 두 팀 합쳐 5명의 선수가 퇴장을 당했고 계속해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부끄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엄청난 혈투였습니다. 퇴장도 많이 나왔고 몸싸움도 속출했죠. 그런 경기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두 팀 선수들 모두 너무 흥분해 있었습니다. 수원은 수원대로 창단 원년우승이라는 꿈에, 우리는 우리대로 청단 첫 우승이라는 꿈에 욕심이 컸죠. 그런 경기가 벌어진 것만큼은 죄송스럽지만 우승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뒷이야기 하나 하자면 우승을 차지한 다음에 저희 직원들을 故
96년 우승을 차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공만 잡으면 아유가 들리고 네덜란드가 공격만 하면 터질듯 한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데 주눅이 안 들 수 없었죠. 더구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역전패를 한 터라 팀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는 상태였는데...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죠. 두 골을 넣고 세 골을 넣고 그래도 네덜란드는 지난 월드컵 독일처럼 헤이 해 지지가 않았습니다. 결국엔 다섯 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기죠. 제가 마크했던 베르캄프가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것만을 느낀 채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지금도 오랜지색만 보면 그 때의 악몽이 떠올라요.”
98월드컵을 치렀을 당시
1989년부터 2000년까지 K리그 11시즌을 소화하는 동안
“저 스스로도 자부하는 거지만 철저한 자기관리가 부상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부상을 당하기 쉬운 부위는 훈련이 끝난 후 개인적인 시간에 따로 근력을 길렀었거든요. 선수로서 부상 없이 은퇴를 한 다는 것이 정말이지 어렵고 힘든 일인데 돌이켜 보면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어느덧 은퇴를 하고 동아대감독 지휘봉을 잡은 지 6년차. 선수보다는 감독의 자리가 더 익숙해지고 그 책임감도 더 커졌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철학은 선수시절과 변함이 없다. ‘성실함’ 그 명제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분명 좋은 결실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프로에서 은퇴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백이 크지 않았던 것이 애들을 가르치면서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선수생활을 해 오면서 가졌던 성실함과 꾸준함, 그 속에 녹아있는 체계와 과정을 선수들의 몸에 배도록 하는데 지도의 역점을 두고 있어요. 대학생이지만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어린 나이거든요. 이 시기에라도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다면 축구 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지방대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동아대 축구부는 명문입니다.
“올해가 끝나면 다시 몇 달 동안 해외로 나가 지도자에 대한 여러 공부를 더 할 계획입니다. 아직은 부족한 게 많아요. 비록 선수생활을 끝났지만 지도자로서는 갈 길이 멉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져왔던 ‘성실함’이라는 좌우명을 지도자생활을 해 오면서도 지켜나간다면 좋은 모습으로 여러분들 앞에 다시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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