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호성호 생년월일 1962-11-04 키 187 Cm 몸무게 85 Kg 포지션 GK 연도 구단 출장수 골 도움 1986-1989 현대 38 0 0 계 38 0 0 리그컵 우승 1986 리그컵 우수GK상 1986
기본 프로필
클럽 통산 기록
클럽 주요 경력
자신감, 내 삶의 원동력- 호성호
“정말 착실한 선수였어요. 그 당시에 골키퍼로써 모든 능력을 갖췄고, 대형 선수로 성장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지만. 크게 성공 하지 못 한 것이 많이 아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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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골키퍼로써 타고 났죠. 키와 재능 그리고 노력. 어느 하나 모자람 없는 선수였어요. 하지만 프로에 가서 좋은 선수로 성장 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일찍 그만 둔 것이 의아했죠. 한편으로는 많이 안타깝고요. 정말로 실력은 뛰어난 선수 였는데...”
-대전 시티즌 최윤겸 감독
이 두 코멘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좋은 재능을 가졌으나. 아쉽게 좋은 선수로 성장하지 못한, 그렇기에 올드 K리그 팬들에게는 아쉬움의 존재로 다가서는 단 한 선수. 바로 1986년부터 89년까지 4시즌 동안 울산의 골문을 지킨 골키퍼
부모님 몰래 시작한 축구. 하지만 축구 선수
“성호야 놀자’ 라고 친구들이 밖에서 외치면 전 자연스럽게 나갔어요. 나가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축구였죠. 당시에는 다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장비가 많은 야구나 따로 공을 사야 되는 농구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해본 시절 이었죠. 하지만 동네 문방구에서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고무공 하나면, 그리고 축구 하나면 누구나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잖아요.”
그렇게 축구의 재미에 푹 빠지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골키퍼를 안했어요. 제가 한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와 스위퍼였어요. 지금 보면 멀티 플레이어죠. 수비수이자 공격수잖아요. 초등학교 시절은 아마도 저에게는 축구라는 것을 제 가슴속에 새겨 둔 시절이었어요.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단지 그저 축구가 좋아서 축구부에 들었고 웃으면서 운동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축구를 가슴에 숨겨둔 채,
“정말로 축구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부모님께 말 안하고, 당시 배재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축구부 코치를 하셨던 이세화 선생님을 찾아갔죠. 그래서 이세화 선생님이 ‘너 뭐하고 싶냐’ 라는 말씀에 저는 그 당시에 키가 컸기 때문에 골키퍼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골키퍼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골키퍼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진짜 운이 좋았던 것은 이세화 선생님이 동생분이 당시 우리나라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였던
부모님 몰래 시작한 축구. 하지만 부모님이 아신 후로는 축구 선수
“한 학기 동안 부모님을 속였어요. 그런데 축구부에 들어가니 부모님을 또 한 번 속여야 했어요. 축구 용품을 사느라고 제가 등록금을 못 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전과 사야한다고 돈 받고, 책 사야 한다고 돈 받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돈을 모았고, 늦게나마 간신히 등록금을 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부모님을 한 학기 속이고 2학기 시작해서 어느 날 이었습니다. 제가 선배들에게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엄청 맞고 난 뒤, 집에서 자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저의 퉁퉁 부은 엉덩이를 보신 거예요. 그 다음날, 저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있는 거예요. 바로 어머니였죠. 어머니께서 저 몰래 학교에 찾아오셔서, 제가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아신 것예요. 전 그 날 ‘죽었다’ 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절 보시더니 ‘성호야, 그렇게 축구 하고 싶어?’ 라는 말을 먼저 꺼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엄마. 나 정말로 축구가 하고 싶어’ 라고 대답했죠. 이후 부모님은 많이 달라 지셨어요. 반찬도 명절 때나 먹던 계란을 자주 주실 정도로 제가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와 주셨죠.”
골키퍼
“아무리 좋은 지도자가 하나를 가르쳐 줘도 선수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훈련하는 것에 따라서 습득 정도가 차이가 있습니다. 즉 지도자가 하나를 가르쳐 줘도 자신에게 맞도록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제가 덩치와는 안 맞게 영리했죠. 저는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시면 생각을 많이 했고, 제 몸에 익히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죠. 다이빙 할 때도, 제자리 뛰기를 할 때도 있고, 무릎을 높여서 뛰어 보기도 하고, 낮춰서 뛰어 보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면서 연구했죠. 결국 그런 훈련들은 제가 빠르게 반응 하고 움직일 수 있는 몸 상태를 찾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제가 민첩성이 뛰어난 부분은 바로 저희 부모님 때문이죠. 제가 중학교 때 집에서 쉬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성호야, 너 가 좋다고 한 축구 아니냐? 이렇게 쉬지 말고 나가서 뛰거나 줄넘기나 하고 와라’ 라고 꼭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중학교 때 줄넘기 하나는 진짜 많이 했죠. 그 결과 제가 민첩성과 순발력 하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시절 골키퍼의 토대를 다지면서 좋은 선수로 성장할 기질을 보였던
“제가 고등학교로 갈 때 키가 173cm 이었어요. 중학교 때 골키퍼로써 키가 컸었는데. 성장이 더디면서, 중학교 졸업 할 때쯤에는 골키퍼 하기에 조금 부족한 키가 되었죠. 그래서 동기들은 배재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저만 한영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막상 간 한영고등학교는 구타도 너무 심했고, 제가 사춘기를 겪게 되면서 방황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저는 학교는 1년 동안 거의 다니지 않고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노는 것에 젖어 있었어요.”
“제 고등학교 은사님 이었던 고(故)
“그 말을 듣고 난 후, 저는 바로 머리를 깎고, 저 자신에게 후회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거짓말 안보태서 아침, 오전, 오후, 밤 이렇게 하루에 4번 운동했고, 다이빙도 500-600번 정도 했었죠. 다이빙 같은 경우는 지금 선수들 아무리 많이 해도 100-200개 정도인데, 저는 하루에 500개를 넘었으니, 정말로 남들이 봤을 때, 미쳤다고 할 정도로 했어요. 그렇게 훈련 하고 난 뒤, 제 팔을 보면 훈련을 하도 많이 해서, 팔에 혹이 생기고 물이 찼죠. 그래서 잘 때 파스 바르고 자고, 다음 날 훈련 할 때는 안 아픈 쪽으로만 다이빙 하고. 안 아픈 쪽 다치면 다른 쪽 하고, 그렇게 훈련을 했었죠. 정말 그때 당시는 선생님의 말씀은 가슴 속 깊숙이 박혀서, 그런 아픔도, 힘들다는 것도 못 느낄 정도로 훈련밖에 몰랐어요.”
훈련이 계속 될수록, 팔의 아픔이 계속 될수록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자신감이 생기니까, 저는 공이 막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간의 시합 보다는 한양대와 연습 시합 할 때가 제일 재미있었죠. 특히
“국가대표 되었을 때 부모님께 생애 첫 효도를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았죠. 제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부모님께 보여 드렸는데, 부모님께서 아무 말도 없으시면서 절 꼭 안아주셨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죠. 그동안의 고생의 대가를 받으셨다는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죠. 그 이후 아버지께서는 다니신 회사를 그만 두시고, 제 관리에 전적으로 매달리셨습니다. 골키퍼 장갑도 아는 분들을 통해서 외국에서 공수해 주시고, 밥도 잘 챙겨 주시는 등 저를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죠. 저는 부모님께 갚아야 되는 빚이 참 많은 사람이네요”
“19세 이하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저는 경험이라는 측면을 배운 대회였죠. 그 때 당시
“그 다음 해,
“그 때 잊을 수 없는 것이 독일에서의 골키퍼 훈련이었어요. 훈련시간은 긴 것이 아닌데 40분 동안 골키퍼 트레이너와 1대1로 붙어서 순간적인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 훈련을 한 번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질 정도로 힘든 훈련 이었죠. 결국은 국내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훈련을 많이 했다고 자부 했던 저도 3일 만에 힘들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파죽지세가 어울릴 정도로
“85년 추계 대학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주장인 제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 불렀어요. 그리고 제가 동기들한테 야구 방망이로 5대 맞은 뒤, ‘우리 4학년이 잘못한 게 많다. 그래서 지금 내가 대표로 맞았잖니. 그리고 나 정말로 학교 졸업하기 전에 유종의 미 멋지게 거두고 싶다. 우리 이번 대회에서 한번 제대로 열심히 해보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제 말이 아이들 가슴 속에 전달되었는지, 그 뒤로부터 아이들이 정말 열심히 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경기 하나하나가 다 기억이 나고, 결국 저희가 10년 만에 우승이라는 좋은 추억을 가지게 되었죠.”
“고려대 경기에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제가 당시 고려대 공격수였던 박양하 선수와 친했어요.) 고려대의 코너킥 찬스였는데, 제가 장난 반, 신경전 반으로 박양하 선수의 엉덩이를 걷어찼죠. 그런데 공은 날라 오는 상황에서 박양하 선수도 저의 엉덩이를 차는 거예요. 공은 날라 오는데, 공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일단 넘어졌죠, 결국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고, 저희 둘에게 다가와서 경고를 주고 끝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결승전 때 보슬보슬 가을비가 내렸어요. 그 가을비가 저에겐 너무나도 슬픈 비였죠. 유종의 미를 멋지게 거두면서 ‘학교를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좋은 선물을 하나 했구나!’ 라는 뿌듯한 마음이 생길 찰나, 아버지께서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고, 병원에 입원 하시게 되었어요. 저를 위해서 헌신적인 노력하신 아버지께 이제 호강 시켜 드릴 차례였는데...”
추계 대학 선수권 대회 우승 이후
“추계 우승 한 뒤 3개의 팀에서 제의가 왔고,
그렇게
K리그라는 새로운 도전에 앞서
“대학 선수권 대회가 끝난 뒤에 무릎이 너무 아팠어요. 그 때 제가 선택 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죠. 팀 합류가 늦더라도 수술을 받는 방법과 수술을 하지 않고 물리 치료를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저는 무릎이 너무 아파서 합류가 늦어지더라도 수술을 하는 방법을 택했죠. 그래서
프로에서의 첫 동계훈련을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프로에 들어가기 전에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일단 제가 수술로 인해 경기 감각도 없었고, 일반은행 팀도 아니고 프로팀이었죠. 더군다나 현대에는 국가대표 선수인 김황호 선배와
“하지만 프로는 경쟁의 세계고, 이겨야 제가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노력했어요. 힘을 기르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최인영선배가 한 번 다이빙하면 전 두 번 다이빙 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제 노력을 유심히 보던 (당시 플레잉 코치였던) 김황호 선배가 코칭스텝에게 열심히 한다고 전해주셨나 봐요. 그 결과 저는 생각보다 빨리 출전 기회를 잡았고, 86년 축구대제전 2라운드인 한일은행 전을 통해서 프로경기 첫 출전하게 되었죠.”
“한일은행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네요. 프로 데뷔 첫 경기라서 긴장도 많이 들었지만, 저는 제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단 잘했습니다. 비록 1대 0으로 패배했지만 제가 선방도 많이 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니깐, 그 이후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통해서
“그 때 제 투지는 제가 봐도 대단했어요.
86년 축구대제전에서 부진한 성적으로 출발한 현대는,
“그 때 당시 저희 팀과 대우는 라이벌 관계였어요. 지금의 수원과 서울의 라이벌 관계보다 더 심했었죠. 대우와 경기를 할 때는 구단자체에서도 출전수당과 승리수당을 더 높게 걸면서 선수들에게 더 많은 파이팅을 요구했죠. 정말로 현대와 대우와의 게임은 선수들이 축구 유니폼만 입었을 뿐 전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우와의 경기에서 선방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때 당시 대우의 공격을 이끌던
“포항과의 경기는 너무 재미가 있었어요. 포항에는
“저는 상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저는 단지 기회를 주실 때, 저는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선방도 많이 했고, 자연스럽게 팀의 우승이라는 결과가 이어지면서 상을 받게 되었죠. 저는 상을 받고 난 뒤, ‘나도 이제 인정을 받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국가대표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목표를 대표선수로 잡고 더욱 열심히 했었죠.”
“제가 성적이 좋아지고, 언론에도 많이 알려지면서,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팬이 생겼어요. 저한테 매일 편지도 써주고, 경기장에서 선물 같은 거도 주고 참 열성적으로 절 응원하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죠. 그런데 그 여학생에게는 미안한 이야기 이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되어서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저도 그 여학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답장도 써주고, 한번은 밥 한 끼 사준 기억도 나네요.”
2골 이상 실점한 경기가 없을 정도로 기복이 없었던
“골키퍼 능력에서 부족했던 것은 하이볼과 킥이었어요. 제가 큰 키치고는 하이볼에 약했죠. 그래서 김황호 선배에게 이야기해서 하이볼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킥의 정확도가 미흡했어요. 그래서 역습 시, 팀원들에게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을 못해주었던 부분이 아쉬운 부분이죠.”
“하지만 제가 제일 부족했던 부분은 바로 자기관리였어요. 팀 이탈도 많이 했고, 제가 자제했어야 하는 부분에서 자제를 못 했습니다. 제가 정신적 의지가 약했기 때문에 선수생활을 오래 못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 선수들에게 꼭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자기 관리 철저히 하고, 주변 사람들과 항상 부족한 점에 대해서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네요.”
프로 첫해, 승승장구를 달리던 그가 지금까지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던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게 되는 슬픈 현실을 받아들어야 했었다.
“목요일 아침이었어요. 저는 강릉에서 토요일 날 경기가 있어서,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께 ‘ 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라면 인사를 드렸죠. 아버지께서는 말을 잘 못하시고 눈빛으로 저한테 잘 다녀오라고 이야기를 하신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히 나네요. 그렇게 해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숙소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단 프론트가 ‘
희로애락이 공존했던 86년을 뒤로 한 채, 87년 한국프로축구대회가 시작했다. 하지만 수비진의 노쇠화가 진행되면서,
“제가 제일 재미있게 한 대회라면, 자그레브에서 했던 유니버시아드 대회였어요. 특히 유고와의 경기는 제일 재미있게 한 경기였죠. 그 경기에서 제가 페널티킥을 막아내고
“제가 그 대회를 통해서 스캔들이 난 적이 있었어요. 농구팀 가이드를 하던 코라나 라는 여자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축구를 좋아해서 저희들이랑 조금 친하게 지냈었죠. 그게 오해가 되어서 ‘
K리그와 자그레브에서의 맹활약은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제가 K리그를 통해서 생긴 자신감이 국가대표로 이어져서 너무나도 기뻤죠. 제가 국가대표 되자마자 찾아 간 곳이 있다면 바로 아버지 산소였어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버지께 ‘저, 대표선수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씀 드리니깐, 아버지도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은 그 전에도 자주 찾아 갔었지만, 제가 외롭거나 힘들 때 찾아 갔었거든요.”
“제가 비록 메르데카 컵에서 뛴 적은 없었지만, 제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은퇴를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많이 위안이 되고 가슴 뿌듯한 일이죠.”
그가 그토록 바라던 국가대표. 그 목표 달성은 앞으로 그의 인생은 좋은 일만이 펼쳐질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국가대표 선발 이후 그의 인생은 실패의 나날이 계속 되었다.
“89년도 4월 말에 펼쳐진 대우와 경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무릎부상이 재발했어요. 이번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술을 택했죠. 그러나 수술은 잘 되었는데 이번에는 재활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방황도 많이 했고, 사생활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저는 젊기에 축구 아니더라도 사회에 나가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죠. 그래서 제가 은퇴를 이른 시기에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체격조건이 좋아서 그 때 꾹 참고 더 열심히 했더라면 40살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는데, 제 관리와 정신적인 부분이 많이 부족해서 일찍 그만 둔 것이 많이 안타깝죠.”
그렇게
“현대 구단에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제안에 다시 한 번 도전했죠. 그래서 10월 21일 포항과의 경기에 투입되었죠. 그러나 저는 경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골키퍼는 디딤 발이 중요한데, 디딤 발에서 지끈지끈 너무 아팠죠. 그래서 잘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제가 막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실점을 하게 되었죠. 결국 제가 후반 44분에 실점하면서 팀은 지게 되었죠.”
“그 경기 이 후 제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를 해봤어요. 제가 평가하는 저는 무릎이 안 좋기 때문에 순발력도 부족하고 좋은 골키퍼가 아니었죠. 몸이 이런 상태인데, 월급만 받는 하찮은 선수가 되지는 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축구를 잊고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선수생활을 오래해서 저를 위해서 고생하신 부모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이른 은퇴에 많이 죄송했어요.”
K리그를 떠난
“사업이 계속 실패만 했었죠. 그래서 몇 년 쉬면서 효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특기적성 교육으로 축구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죠. 이후 제 은사님이신
“서울시청 트레이너 시절인 96년도에 제가 7년 만에 경기를 뛴 적이 있어요. 그 때 당시 저희 팀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골키퍼를 뛸 사람이 없어서 제가 임시로 선수등록을 해서 한경기를 뛰었습니다. 저희 팀이 1대0으로 패배를 했는데, 그 경기를 통해서 잠시나마 선수생활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러나 제 욕심에 커가는 후배들을 죽이는 결과가 나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꿈은 일찍 접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서울시청에서 첫 지도자 생활을 거치면서, 선수
선수시절
“아이들을 가르치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아이들이 부족했던 부분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실력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보람도 많이 느끼고요. 특히 제가 고등학교 때 느꼈던 자신감이 아이들을 통해서 다시 볼 수 있을 때의 감동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죠. 그리고 제가 축구 인생에 있어서 실력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슴으로 전달해 줄 수 있어서 그 때의 안타까운 기억들이 지금에 와서 많이 위로가 되네요.”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는 선수시절 나쁜 경험들이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선수생활을 일찍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실패의 경험이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후배들이 좋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선수 생활을 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말로 끝을 내고 싶네요. 이제 저는 제 아이들과 함께하러 가야죠.”
통진 고등학교 훈련 중에 플레이가 잘 풀리지 않아서 주눅이 들던 제자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지. 너가 자신감을 갖지 않는 다면 발전할 수 없어. 실수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고 다시 열심히 뛰어야지.” 골키퍼 트레이너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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