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정용환 생년월일 1960-02-10 키 177 Cm 몸무게 72 Kg 포지션 DF 연도 구단 출장수 골 도움 1984-1994 대우 168 9 4 계 168 9 4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골 1983-1993 성인 대표팀 77 3 1979 U-20 대표팀 ? ?
기본 프로필
클럽 통산 기록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클럽 주요 경력 |
|
K리그 우승 |
1984, 1987, 1991 |
K리그 준우승 |
1983, 1990 |
K리그 MVP |
1991 |
K리그 베스트11 |
1984, 1987, 1991 |
K리그 모범상 |
1991 |
K리그 감투상 |
1984 |
아시안클럽 |
1986 |
아프로-아시안클럽 |
1986 |
|
|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
|
월드컵 본선 |
1986, 1990 |
올림픽 본선 |
1988 |
U-20 월드컵 본선 |
1979 |
아시안컵 본선 |
1984, 1988 |
아시안게임 본선 |
1986, 1990 |
80년대를 대표하는 철벽 수비수 - 정용환
K리그 Old & New
요즘 모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는 동명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한국말임에도 불구하고 단어에 따라 어떤 세대는 아주 친숙하게 사용하기도 혹은 일부 세대에서는 그 말의 뜻조차 모르기도 하는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대가 거듭되며 그 단어의 의미가 생소해 지는 이유는 분명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빈도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여기 K리그에도 그런 선수가 있다.
‘철벽 수비수’
오직 ‘노력’이라는 이름 아래 8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철벽 수비수’
“정 감독님, 우리 후원회가 발전을 해야 더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텐데요.”
부산의 조그만 한 음식점에서
“주변에서 지켜보시던 저의 열렬한 팬 분들이 제가 팀을 맡으니까 정감독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결성을 하셨습니다. 큰 단체는 아니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조금씩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조그만 후원금을 내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지금까지 3명의 선수에게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규모로 봤을 때는 조그맣지만 축구를 사랑하시는 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을 같이 나누는 장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달에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고 도움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 사랑을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이력과 각종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 했음에도 양지로 나가지 않고 묵묵히 유소년 축구를 지키고 있는 이 사람.
“신체 조건이 다른 선수보다 좋다 보니까 축구와 육상을 동시에 5학년 때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6학년 때, 축구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핸드볼부로 가서 핸드볼 하고 또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 이런저런 운동을 다했죠.”
축구에 가장 흥미를 느낀
부산진 중학교에서 팀을 대한축구협회장배 정상에 올려놓은
“운대가 맞았다고 할까요. 제가 입학하는데
“제가 지금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치냐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느끼고 깨우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많이 해요. 감독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 중에 영어단어를 좀 외우라고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때는 예. 대답만 하고 거의 외우지 않았거든요. 근데 영국 유학을 가니 그 것이 그렇게 후회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먼저 인생을 깨우친
“저는 어렸을 때 나름대로 ‘고진감래’ 라는 좌우명을 정했습니다. 고통을 인내하고 노력하다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지요. 저를 위해 묵묵히 도와주시는 부모님과 주변분들께 실망을 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분들께 보답하는 차원에서 내가 고생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중에 잘 되었을 때 고마운 분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운동을 했어요.”
정용환하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주특기는 그의 헤딩일 것이다. 큰 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싸움과 헤딩의 대명사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된 그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나와 운동을 하고 남들이 운동을 끝낸 이후에도 홀로 개인운동을 했던 그의 ‘노력’을 누가 따라갈 수 있었을까.
“팬듈볼이라고 높은 곳에 줄로 공이 매달아져 있는 기구가 있었는데 정말 연습을 많이 했어요. 쉽게 말하면 학교에 제가 연습이 있으면 다른 애들보다 30분씩 먼저 나와서 하고 또 연습 끝나고 나면 혼자 한 시간씩 더 하고 그랬어요. 동래고등학교 건물이 운동장 보다 언덕 위쪽에 있어서 교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이 다 보이는데 일반 학생들도 연습하는 건 용환이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교 때 고대와 와세다대학교가 정기전을 하는데 어떤 선배가 저보고 2중 점프를 한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들어봤더니 제가 워낙 점프 연습을 많이 해서 체공시간이 길다 보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점프를 했는데 공중에서 한 번 더 점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에요. 하루, 이틀 연습할 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보이지만 365일 누적되다 보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 헤딩 연습을 대학교에 가서 까지도 똑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것만이 아니었다. 이미 축구의 재미에 푹 빠져버린
“운동에 미쳤었죠. 운동장 옆에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가운데 있는 네트를 항상 점프하면서 넘었어요. 네트를 보면 가운데가 살짝 내려가 있어요. 그래서 가장 높은 부분인 줄이 매달려 있는 부분쪽에서 이리저리 뛰어넘곤 했습니다. 평소에 길을 걸을 때도 뒤꿈치를 들고 걷고 나뭇잎이라도 위에 매달려 있으면 점프해서 탁! 치고, 울타리 있으면 괜히 점프해서 넘고 그랬었지요.”
나중의 얘기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청소년 대표로 차출되어서 동두천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동래고가 부산 지역 대회 결승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그 경기를 뛰려고 서울역 까지 갔었는데 협회에서 선수들은 연습을 해야 되니 안 되고
청소년 대표팀에서 활약한
“제가 스토퍼를 봤는데 당시에는 잘 한번 막아보겠다고 로메로를 샌드위치 마크를 했어요. 그런데 잘하는 선수는 샌드위치 마크를 하면 안되죠.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서서 앞의 수비가 뚫렸을 경우 뒤에서 커버 플레이를 해주고 그 사이에 다시 돌아오는 그런 수비를 했어야 되는데 양쪽에서 막았으니 한 번 뚫리면 그냥 노마크 찬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3골 먹고 졌지요. 물론 로메로 선수가 잘 하는 선수지만 저희가 경험의 차이만 극복했어도 많이 해볼 만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잘 하면 예선 통과도 할 뻔 했어요. 쉽게 말하면 연습만 많이 했지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경험을 많이 못 쌓아 봤다는 겁니다. 투자라고 해야 될까요. 그 때는 그런 면에서 많이 부족했습니다.”
동래고와 청소년 대표팀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낸
“그 당시는 정말 구타가 엄청 심했을 때죠. 선배들 기분 따라 고학년이라는 이유로 기분이 언짢으면 애들 모아놓고 때리고 심지어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맞았을 정도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맞기 시작해서 유일하게 맞지 않는 때가 그 곳에서 고참 되었을 때에요. 초등학교 6학년, 중3, 고3, 대학교 4학년 그 때만 유일하게 안 맞는 거에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아무리 단체경기라고 해도 이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해서 그만둘 결심을 했죠.”
하지만 축구에 미쳐있던
“대학교 때 미팅을 하잖아요. 근데 저는 촌놈이라서 그런 걸 잘 몰랐어요. 미팅을 하게 되면 다들 짝을 한명씩 데리고 나가는데 저는 여자 앞에서 얼굴 빨개져서 말도 잘 못했어요. 근데 현태는 말을 참 잘했어요. 현태랑 제 앞에 여자가 앉으면 현태는 재미있게 노는데 저는 여자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그래서 그 때 제 별명이 사춘기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때 동기들을 만나면 사춘기라고 놀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에요.”
83년 고려대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 12회 마라하림컵쟁탈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독일, 일본등을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큰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기쁨에 취해있기도 잠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우연히 신문을 보는데 국가대표 명단이 발표 되었더라구요. 생각 없이 명단을 보고 있는데 거기 제 이름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물론 국가대표에 뽑혀서 좋지만 이 많은 고대 선수 중에서 저만 선발된 것이 미안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선수들이 신문을 안 봤으면 좋겠더라구요.”
정용환은 5월 1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브라질 포르투게사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해 데뷔 골까지 뽑아내게 된다. 태극마크를 달고 뛴 첫 경기에서의 활약과 결승골은 향후 11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의 출발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11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11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갑갑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함을 뜻한다.
“83년도 11월, 12월이죠.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훈련 다 끝나고 나니까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키더라구요. 그리고 독일 레버쿠젠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와서 크리스마스 때 잠깐 쉬고 다시 진해 합숙훈련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선수들이 다방가고 당구 칠 때 저는 가방 하나 메고 헬스장으로 향했습니다. 합숙 끝날 때까지 한 달 동안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몸이 좋아지는 거에요. 저야 제 몸을 잘 모르지만 당시
“우리가 평상시 운동장에서 뛰는 운동은 기본적인 근육밖에 발달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헬스는 짧은 시간에 강한 운동을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도 단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부상당할 위험도 줄어듭니다. 헬스를 하면서 가장 도움을 받은 것도 부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죠. 몸의 탄력적인 부분. 그래서 바른 자세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83년 겨울, 대우 입단이 확정 된
단일리그로 치러졌던 83년 수퍼리그에서 할렐루야에 승점 1점이 뒤져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던 대우는 84년 전기리그에서도 유공에 1점 뒤진 2위에 머무른다. 두 번이나 1점차 2위에 울어야 했던 대우는 덕분에 ‘2위 징크스’ 라는 오명까지 얻게 되고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후기리그에서도 현대와 쉽지 않은 순위 경쟁을 펼친다.
드디어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리는 대망의 11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를 가지게 된 대우는 전날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현대에 2점 뒤져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피아퐁, 조영증,
그러나 대우에게는 한 번의 고비가 더 남아있었다. 전기리그 우승팀과 최종 우승을 가리는 챔피언 결정전. 이번 경기에서 지면 또 다시 2위 징크스에 발목 잡히게 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결전이었다. 챔피언 결정전에 맞붙을 팀은 전기리그 득점왕
“유공은 우리보다 프로팀도 먼저 되었고 선수자원도 풍부했기 때문에 사실 우리보다 강한 상대였지요. 하지만 우리도 초년 멤버로서 당시만 해도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지요. 결국 우리 선수들이 일치단결이 더 잘 되어서 우승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태목,
대우는 결국 1차전
85년과 86년
그 중 가장 으뜸은 32년만의 본선 진출을 이룩한 86 멕시코 월드컵 본선.
“32년 동안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세계의 흐름에서 많이 뒤쳐져 있었습니다. 월드컵 무대의 감을 몰랐기 때문에 월드컵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껴본 시기였지요. 마라도나가 있는 아르헨티나 같은 팀하고 붙었을 때 우리가 또 선배들처럼 9골 먹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 긴장까지 하면서 월드컵 무대에 처음 나가서 우리 실력을 100% 발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촌놈이었던 셈이죠. 다행히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남길 수 있었어요. 지고도 좋은 결과라 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멕시코 대회 우승팀한테 3-1로 졌다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와 2-2까지 갔던 상황, 불가리아와 1-1로 비겼다는 것은 다른 국가들과 대등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탈리아 하고 경기를 할 때는 2-2 상황에서 이기려고 욕심을 냈었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니 비기기만 해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정보 부족의 이유도 컸지요.”
“외부에서는 한국이 태권도 축구를 한다는 말도 했는데 우리로서 상대 강팀을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강한 몸싸움이라던지 태클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팀한테는 좋지 않게 비췄을지 모르지만 당시 선수들의 투혼은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특히 86년 월드컵 이후로 우리나라가 계속 월드컵에 진출하고 있기 때문에 그 때 경험했던 부분이 지금까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6년을 화려하게 수놓은
하지만 감히 적수가 없을 것 같던
“선수 생활을 할 당시에는 (최)순호가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죠. 순호가 창이고 내가 방패고. 신문에 항상 ‘창이 이기느냐 방패가 이기느냐’ 이런 식으로 기사가 많이 나왔었지요. 제주도 가면 둘이 같이 불러서 사진도 찍고. (최)순호는 나름대로 축구를 할 줄 아는 선수에요. 두뇌적인 플레이도 잘 하고 두루 잘 갖춘 선수에요. 키만 큰 것이 아니고 보는 시야라던지 볼을 차는 센스 등등 두루두루 잘 갖춘 선수에요.”
87년 대우에게는 프로축구대회 우승 외에 한 가지 경사가 더 있었다. 제1회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전년도에 열린 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둔 대우는 아시아 대표로 출전해 아프리카 대표로 나온 모로코 육군 팀을
“그때는 홍콩이나 동남아 클럽 그리고 사우디나 카타르 중동지역이 많이 강했는데 중동지역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점이 매우 뜻 깊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클럽 중에서도 최초일뿐더러 최초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통합 챔피언이라는 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소속팀에게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이듬해인 91년. 32세의 나이에 접어든
이듬해인 91년. 32세의 나이에 접어든
“축구선수가 축구에 눈을 뜨게 되는 나이가 있다고 하는데 30대를 넘어서는 그때가 가장 축구를 잘 알게 되는 나이인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축구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체력이 부족해서 못 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력이 남으니까 공격에 가담해서 헤딩슛도 날리고. 밸런스 조절 이라던지 이런 부분에서 자신이 있어지니까 앞으로 3, 4년은 충분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91년에는 아무도 모르게 납 조끼를 입고 연습을 했어요.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납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땀복을 또 입으면 다른 선수들이 부딪쳐 보지 않고는 몰라요. 내 딴에는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몸 만든다고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파르티잔과 연습경기 할 일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는데 (김)주성이가 비츠게이 감독님한테 용환이 형은 꼭 가야 한다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나는 몸 더 망가지니까 안 된다고 그랬는데 결국 파르티잔에 가서 연습경기 하고 이기고 온 기억도 있습니다.”
“보통 수비는 공격 선수한테 끌려가면 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측을 해서 움직임을 먼저 따라잡아야만 하지요. 그런데 계속 경기를 하다 보니 선수들을 다 알잖아요. 나는 보통 자신이 있으니까 공격수보다 먼저 헛 모션을 취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반대로 걸려드니까.
그래서 먼저 등을 졌는데 심판이 와서 진로방해라고 경고를 주는 겁니다. 혹여 파울이라도 경고를 줄 일은 절대 아니었는데. 그 일 때문에 그 심판이 많이 애를 먹었습니다. 왜 몇 년 동안 경고 한 번도 없던 선수한테 경고를 주냐고 말이 많았었지요.”
축구 엘리트 코스와 최고의 자리를 걸어오던
“87년 초반 10경기 정도를 못 뛰었는데 그 때 벌써 아킬레스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다가 94년 미국월드컵까지 선발되었었는데 아킬레스건 수술로 인해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94년 프로축구 개막경기인가에서 아킬레스 부상을 또 당했는데 참고 뛰다가 더 악화되어서 결국 수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수술을 하러 일본으로 갔는데 의사가 아킬레스를 열어 보더니 이 사람이 도대체 인간이냐고 하는 거에요. 반 정도가 끊어진 상태로 말려 올라가 있는데 이미 끊어진지가 오래 되었는데 참고 뛰다 보니 점점 말려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도 반은 붙어있으니까 힘은 못주지만 뒤꿈치를 항상 들고 있었던거에요. 저야 물론 심각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참고 계속 뛰다 보니 너무 악화되었던 것이지요.”
은퇴 결정 이후
“제가 고등학교 때 축구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듯이 그 시기가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성실이 노력하는 선수를 제가 좋아해요. 노력하는 과정이 말이 쉬워 노력이지 쉬운 것은 분명 아닙니다. 눈만 뜨면 모든 것이 유혹인데 그 것을 이겨내고 노력하는 선수만이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에 늘 습관화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 노력이 몸에 배면 프로팀에 가건 어디를 가던 자기 관리를 할 줄 안다. 이런 말을 제가 자주 합니다. 이런 생활 습관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고등학교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정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가보면 유소년 프로그램,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있어요. 한국 축구가 미래가 밝으려고 하면 지금이라도 이런 유소년 쪽에 투자를 하고 무엇인가가 정립되어야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축구가 가능해 집니다. 꼭 성적이 좋아야만 축구를 잘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나이에 맞게끔 훈련을 해야 축구 선수의 성장에도 보탬이 됩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우리나라와 같이 너무 과하게 훈련 하는 것이 아니라 브라질 같은 경우 일주일에 두 세 번 밖에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그 나이에 맞게끔, 성작 발육에 맞게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부상당한 선수는 절대 참고 뛰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쳤을 경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의사의 진단에 따라 완벽히 뛰어도 된다는 진단이 나왔을 때 다시 훈련을 하게끔 하고 있지요. 부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선수는 저 하나로 끝났으면 합니다. 참고 뛰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완벽히 치료를 하고 다시 경기장에 나서야 그 선수의 선수 생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K리그 1호 골의 주인공
“앞으로 목표가 주어진다면 처음 생각과 똑같이 한발 한발 나아갈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도자의 길로 가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내 꿈을 위해서 열심히 전진하려고 합니다.”
시골 초등학교의 키 큰 소년이었던 그가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와 맞붙게 되기까지는 피나는 땀과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타고난 센스가 있었던 것도 공격수를 제압할 큰 키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말없이 테니스 네트를 뛰어넘고 남몰래 납 조끼를 입고 뛰던 그가 한발 한발 최고 선수의 반열에 올랐듯이 최고 지도자로 도약한 그의 모습을 볼 날도 머지않았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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