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대표팀 코치 시절의 강철 ⓒ스포탈코리아
2007년 캐나다 U-20 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 U-20 대표팀 선수들의 인상적인 경기력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 새로운 U-19 대표팀이 오는 31일부터 U-19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한다. 만약 이들이 아시아선수권에서 4강에 들면 내년에는 또다시 U-20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청소년대표팀이 모일 때마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해 축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곤 한다.

1990년 11월, U-19 아시아선수권에서 남북의 U-19 대표팀은 각각 아시아 강팀을 모두 물리치고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연장까지 득점없이 비기고 120분을 뛴 양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으며, 우리나라가 4-3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U-20 월드컵 출전권을 얻은 남북 청소년팀은 이듬해 2월 단일팀을 구성했다. 1991년 포르투갈 U-20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올랐던 남북 단일팀에는 성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4명의 선수가 있었다. 그들을 모두 이름이 철이었고, 그래서 주위에서는 ‘사철’, ‘철 4총사’라고 불렀다. 북한의 최철과 윤철, 대한민국의 박철, 그리고 바로 강철이 그 주인공이었다.

추억, 잊을 수 없는 경험

“남북 단일팀 때의 기억입니다. 아시아청소년대회 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났던 선수들인데 막 소집했을 때는 북한 선수와 서먹서먹했습니다. 포르투갈에 갈 때는 마음이 들떴고 대화도 하고 싶었는데 서로 벽을 느꼈어요. 우리는 훈련 끝나면 말 걸어 보려고 복도를 서성거렸는데 북측 선수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에 수영도 하곤 했는데 북측 선수는 나오지 않았어요.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지만 말이죠.”
91년 U-20 월드컵에 참가했던 남북단일팀(3번이 강철) ⓒ한국사진기자회
아르헨티나에 승리, 8강의 비결

“그러다가 아르헨티나와 첫 경기를 앞두고 북한의 정강성 선수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말했습니다. 형, 남조선 아이들한테 말 좀 잘 해줘. 우리 아르헨티나한테 한 번 이겨보자. 어색하던 팀 분위기가 한 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하면서 한결 나아졌고 갑자기 의욕이 생겼습니다. 결국 북한 조인철의 멋진 중거리 슛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어요. 아, 그때 정말 감격적이었습니다.”

단일팀은 그 뒤로 아일랜드와 무승부, 홈팀 포르투갈에게 0-1로 패하고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으며, 8강에서 브라질에게 패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그 대회 우승, 준우승 팀이었으니 강팀과 경기하며 남북의 형제들은 한 팀으로서 진한 우정을 나눴을 것이다.

뜨거운 재회

“1993년에 카타르에서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를 하면서 다시 만났습니다.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북한에 3-0으로 이기고, 일본이 이라크와 2-2로 비기면서 극적으로 본선 진출을 결정됐죠. 그 때 정강성, 최영선, 조인철, 그리고 또 한 명은 누구였더라. U-20 월드컵 때 같이 뛰었던 선수 4명이 와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웠는데 표현할 방법은 없고 해서 100달러 4장을 한 장씩 작게 접어서 악수하는 척 전달했어요. 감독님도 와 있어서 신발을 선물했고요.”

한국에서 상봉

“북한에서도 감독과 코치 한 명씩 왔는데 코치였던 문기남 선생님이 넘어오셔서 지금 울산대 감독을 맡고 계십니다. 얼마 전 조진호, 이임생 등 우리 선수 6명이 모여 감독님을 모시고 식사도 했습니다. 같이 만나니까 그때 기억이 생생해지더라고요.”

문 감독은 1994년 스웨덴 여자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북한여자대표팀을 2위로 올려놨고, 1998년 U-16 아시아선수권 감독, 2000년 아시안컵에서 북한대표팀을 이끌었다. 2004년 8월 북한을 떠나 중국 베이징을 거쳐 2005년 1월 귀순했고, 그해 2월부터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화려했던 부천 시절(뒷줄 맨 오른쪽 주장완장을 찬 선수가 강철) ⓒ피치포토
명수비수의 비결
“글쎄요. 특별히 말할 만한 것은 없는데...(웃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수비를 잘 한다는 것은 연습과 경기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시키고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비 잘 하는 선수를 보면 팀이 무엇을 원하는지, 감독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영리하게 플레이합니다. 그런 선수가 대표팀까지 오르더라고요. 실수는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보완하고 꾸준히 연습하고 경기에서 발전시켜야죠.”

단점을 보완하는 적극적인 연습

“난 스피드가 없고 좀 느렸습니다. 약점을 극복하려고 산을 타기로 했죠. 서울 상계동에 살았는데, 불암산을 처음에는 오르다 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언덕은 좀더 빠르게 뛰었죠. 부모님이 새벽마다 깨워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약수터로 올라가셨는데 내가 뛰어 올라가 만났죠. 1년 365일 동안 빠지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공터에서 아버지가 연습을 시켜주셨죠.”

“ 그렇게 했더니 중고등학교 때 체력과 실력이 부쩍 향상했어요. 스스로 남들보다 한 단계 위라는 자신감을 가졌죠. 학교에 늦지 않게 일찍 일어나서 남들보다 2시간 반은 더 연습했습니다. 지금 선수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중학교 때 작아서 일 년을 쉬었다가 부모님 허락을 받고 다시 하는 축구였기 때문에 열 바퀴 선착순 할 때도 지기 싫어서 1등으로 뛰었어요. 승부욕을 가지고 울면서도 이 악물고 맨 앞에서 뛰었습니다.”

결국 그는 강철 체력과 스피드를 소유했다. 단점을 보완해서 장점으로 만든 것이다. 강철은 부천SK(현 제주)에서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뛰었다.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하재훈 전 KFA 기술부장은 수비 능력, 공격 기술도 좋고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칭찬했다.

크로스 올라올 때는 골문을 향하지 말고 등져라.

“경기 중 상대 공격 때 크로스가 날아옵니다. 초보 수비수는 허겁지겁 골문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좋은 움직임이 아니에요. 재빨리 골문을 등지고 공을 차단하기 위해 동작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선수 때는 깨닫기 어렵더라고요.”

“수비 훈련은 따로 없습니다. 공격 훈련은 공을 잡고(keeping) 수비를 등지고 슈팅하는 동작이 있고 개인적으로 무수히 반복합니다. 잉글랜드에서도 공격 훈련은 많지만 수비 훈련 동작은 따로 없어요. 조직적인 움직임 속에서 만들기 때문에 부족한 것은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보다 노력하는 선수는 나아지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출전 기회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2000년 4월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 스타팅. 뒷줄 왼쪽 세번째가 강철 ⓒ피치포토
연습경기 1-10 패..그러나 축구부로 스카우트

“내가 다니던 신상계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는데, 옆 학교에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축구 잘 하는 15명을 데리고 가서 감독님에게 그랬죠. 우리가 이길 것 같으니 한 판 붙자고요. 그런데 연습경기에서 1-10으로 졌습니다.”

“상계초등학교 이범준 감독님이었는데 그날 저녁에 집으로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작은 녀석이지만 재주가 있으니 축구를 시켜보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공부를 잘 해서 부모님이 축구를 시작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설득 한 달 넘게 계속 됐습니다. 드디어 상계초등학교로 전학가고 본격적으로 축구를 했습니다.”

수비수로 뛴 공격수..그리고 국가대표로 선발

“재현중, 대신고까지 센터포워드로 뛰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해서 수비수로 처음 뛰었죠. 1989년 3월, 연세대에 입학하자마자 대통령배 직전에 왼쪽 풀백 형이 부상을 당했어요. 정병탁 감독님이 한 번 수비를 해보라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1학년이라 뛰지도 못했을 텐데...”

그는 경기마다 활약이 대단했다. 골도 넣고 어시스트도 했는데, 특히 결승전에서 포철을 만나 4:1로 이겨 우승할 때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국가대표팀 이회택 감독에게도 발탁돼 17세 6개월의 어린 나이로 소집(데뷔는 1992년)되기도 했다. 이듬해 1990년 남대식 감독이 이끄는 U-19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며 U-19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맛본다.

축구협회장 헬기 타고 격려

“1989년 봄 어느 토요일 대표팀 훈련 중 외박 나가는 날이었어요. 김우중 당시 회장께서 헬리콥터를 타고 격려를 오셨는데 정해원 주장에게 뭐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습니다. 용돈을 좀 달라고 대답했어요. 누가 2백만 원 주세요 했는데 잠시 후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금일봉을 주고 가셨어요. 20명이었으니까 십만 원씩 돌아오겠다 싶었습니다. 용돈도 귀한 때라 집에는 알리지 않으려고 했지요. 외박이니까 학교에 가서 박카스도 사서 돌리고 이것저것 사는 즐거운 상상을 했습니다.”

“봉투를 받아들었는데 2장(2백만원)이었습니다.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와야 하는데 잘못해서 두 장이 들어왔나 보다 여겼습니다. 잘못 들어온 건 돌려줘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직전의 씀씀이가 두 배로 부풀었습니다. 고민 끝에 나 때문에 못 받은 사람이 있을 거란 염려가 들어서 주장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삼촌, 제게 좀 많은데요. 그땐 주장 나이가 많아서 삼촌이라 불렀어요. 그래? 더 넣어줬나. 정해원이 얼른 받아서 들여다 보았습니다. 뭐야! 2백만 원 맞잖아, 임마. 너무 큰 금액이라 곧바로 집에 가서 부모님께 드렸죠. 그래도 용돈으로 이십만 원은 받을 줄 알았는데, 하하 3만 원 주시더라고요.”

(강철 : 1971년 출생. 1992~2001년 국가대표 선수. A매치 54경기 1득점. 1993~2003년 K리그 207경기 10득점 15도움. 현 부산 아이파크 코치.)


글=손성삼(KFA 기획실 과장)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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