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계의 멀티 플레이어 -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흔히, 사회적으로 성공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이 말을 한다. 그만큼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공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수코스라 할 수 있다.
축구계에서도 축구에 관해서라면 정말 안 해본 일이 없는 분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現 천안시청
그가 해 본 일은 축구선수, 스카우터, 트레이너, 2군코치, 1군코치, 수석코치, 프로팀 기술고문, 전력분석가, 감독대행, 감독,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축구해설가, 축구 칼럼리스트, 대학교수 등. 모두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고 화려하다. 게다가 그는 축구 선수시절에도 안 해본 포지션이 없다. 아마추어시절뿐만이 아니라 프로선수 시절에도 골키퍼를 제외한 수비에서부터 공격까지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냈다. 이처럼 많은 경험을 해 본 그가 지금의 천안시청 감독의 자리에 올라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축구에 관해서라면 어느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축구
축구인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게 되면 통과의례처럼 물어보는 것이 '축구를 하게 된 계기'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네에서 축구를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들이 골키퍼를 시켜서 골키퍼부터 했죠. 그렇게 축구를 하면서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본격적인 축구선수의 길로 가게 되었어요. 마침, 제가 다니던 신석초등학교에 축구부도 있었고요."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
신석초등학교의 정식 축구부원이 된
"마포 신석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축구를 처음 배우게 되었는데 그때 축구를 정식으로 처음 가르쳐준
맑음 뒤의 흐림, 중, 고등학교 시절의
초등학교 시절의
"저희 신석초등학교 축구선수 졸업생 13명이 모두 잘 했었기 때문에 한성중학교로 모두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중학교로 진학을 해보니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해야 했어요. 시험을 치면 점수가 그대로 나오고 또, 축구부라고 봐주는 것 없이 평균 이하의 성적이 나오면 체벌도 받았어요. 그래서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도 해야 했죠."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까지 해야 하는 상황.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공부를 포기하고 축구만 할 법도 했지만
"월요일이 시험이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일요일에 훈련하러 나오라는 거예요. 바로 다음 날이 시험인데 훈련하러 나오라니 정말 고민이 많이 됐죠. 결국, 친구들이랑 시험공부 때문에 훈련을 안 나갔어요. 그래서 월요일에 시험 끝나고 선배들한테 엄청 많이 혼났어요. (웃음)"
어릴 때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에게서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학창시절 때의 그는 공부를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운동선수 출신 학생들이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도 열심히 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졸업할 때 80명 중에 11등을 했었어요. 그 당시에는 10등까지 학력우수상을 주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넌 11등이라서 아깝게 못 준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힘든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 본격적으로 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학교 때 체벌이 문제가 되어서 축구부가 아예 해체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한성중학교의 축구부원들이 대신중학교나 용문중학교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저는 대신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죠."
대신중학교는 그 당시 전통있는 축구명문이었다. 하지만
"제가 진학했을 무렵에 제 동기들이 많이 활성화 되지 못했을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중학교때 성적을 별로 못 냈었어요. 제일 잘했던 것이 3위정도였을 거예요. 게다가 초등학교때 까지만 해도 잘했었던 제가 중학교에 진학을 하자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결정적으로 키가 안 자라는 거예요. 기술은 있고 재간은 있는데 몸이 작다보니 탄력이 없고 힘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경기를 뛰다가도 못 뛰게 되고, 암울한 시기였죠."
대신고로 진학하게 된
"고1때 160이 안됐으니까 축구를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서 '축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기에도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암기과목을 그냥 외우면 되지만 영어, 수학은 기초가 없으니까 자신도 없고. 정말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죠."
많은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중학생 때의
"남들처럼 운동도 열심히 했어요.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운동을 했어요. 그리고 시험 때는 잠 안오는 약을 먹으면서 밤새도록 공부도 했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못 견디겠는거예요.(웃음) 그렇게 하다 보니 더 지치고 다시 고민에 빠졌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때까지 축구를 한 것이 아까운 거예요. 나름 초등학교때는 잘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축구에만 전념하기로 다시 마음을 먹었죠."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그렇게 축구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자 그때부터(2학년) 키가 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탄력도 붙고 힘도 붙게 되었죠."
뒤늦게 키가 자라게 되면서 그의 앞날에는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뼈아픈 추억이 생긴다.
"고3때였어요. 그 당시에도 4강제도가 있었는데 8강전에서 우신고와의 경기였어요. 연장전 접전 끝에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었는데
내리막길에서 다시 오르막길로
4강 혜택을 받지 못한 하재훈이였지만 워낙 축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그였기에 조선대학교 축구부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조선대의 고기선 감독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 고기선 감독님이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그래서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입학시키셨어요. 선수구성이 대단히 좋았죠. 그때 동기가
조선대로 진학을 하게 된 그는 그 후 키도 많이 크고 몸에 탄력도 붙으며 축구선수로서의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대학 동기
"청소년 대표 시절에는
그 당시에는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으로 프로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공맨으로서의 프로 첫 해, 절반의 성공
유공에서 첫 프로생활을 하게 된
"프로에 갔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선배들이 있는 거예요. 예전 같았으면 공을 같이 차지도 못 했을 법한 선배들이었죠.
열심히 준비했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열심히 준비를 했지만 시즌 시작과 함께 베스트 멤버에 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으면 기회는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묵묵히 준비를 했고 마침내 감독님으로부터 첫 데뷔전을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경기 하루 전 날
첫 경기를 치르고 그가 느낀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추어일 때는 때로는 적당히 요령을 피워도 됐지만 프로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첫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그는 그 이후 많은 출전기회를 잡았다. 그는 줄곧 성실하면서도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많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크로스 능력이 뛰어나고 왼발이 뛰어난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만약 당시에도 에이전트라는 것이 있었더라면 더 나은 무대로 발돋움 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프로 첫 시즌을 평가해 달라는 말에 그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한 해였지만 선두 경쟁을 하다 막판에 부진했던 팀의 모습에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성적보다는 팀을 더 우선시 하는 헌신적인 선수였다. 첫 공격포인트를 기록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던 당시에 관한 질문에서도 "제 개인적인 기록보다는 팀이 이겨서 굉장히 기뻤습니다."라고 말해 팀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을 엿볼 수 있었다.
열심히 하면 방출 당한다.
열심히 하면 뭐든지 잘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던 기자는 뜻밖의 그의 말에 잠시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그는 제자들(프로 선수들 또는 프로를 희망하는 선수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라며 잠시 운을 뗀 후 말을 이었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다 열심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선수들은 죽으라고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방출당합니다. 살아남으려면 정말 죽으라고 해야 합니다. 프로는 하루하루가 나를 보여주는 장이고 항상 평가가 됩니다. 하루정도 게으름을 피우면 그 다음날 바로 적용이 되어버려요. 하루하루, 한 순간 순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성실함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성실함이 저의 무기였습니다. 경기에 뛰지 못하더라도 항상 준비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회는(행운은) 항상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지도자분들은 안 보는 것 같아도 항상 지켜보고 계세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이지만 프로 선수들은 항상 성실하게 준비를 해야해요. 2군에 떨어졌다고 해서 좌절하면 그대로 추락하는 겁니다. 저는 공을 화려하게 차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기회가 왔고, 또 매년 마다 2/3경기정도씩 꾸준히 뛸 수 있게 되었어요"
멀티 플레이어는 나의 운명, 그리고 긍정의 힘
"대학교 시절 때는 스토퍼도 봤어요. 고려대와의 경기였는데 고려대
원조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과 같은 축구흐름에서는 그 것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의 뚜렷한 장점을 내보이기가 힘든 거죠."
"하지만 그 때의 다양한 경험이 지도자 생활을 할 때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각 포지션마다의 입장과 심정을 잘 아니까 전술을 세우거나 지도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죠."
프로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지만 두 번째 시즌에도 처음부터 베스트 멤버에 뽑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그는 성실함으로 무장해 기회가 올 날을 그리며 묵묵히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준비가 되면 기회는 오거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오늘은 내가 넘지 못할 산이지만 내일은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 성실함과 긍정의 힘 덕분에 그는 프로3년차가 되던 1989년에 프로 첫 우승을 맛보게 된다. 프로 3년차가 되던 해에는 그 전의 시즌들과는 달리 시즌 초반부터 주전멤버로 경기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의미있는 한 해였다. 또 프로 4년차가 되던 해에는 공격수로 전향을 해 멀티 골을 넣기도 하며 한 시즌 3골 4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멀티골을 넣었다고 특별히 기뻐하지는 않았어요. 계속해서 꾸준히 활약을 해서 저의 입지를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또 그는 프로 5년차가 되어서는 한 시즌을 풀타임 출전하며 유공선수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게다가 그는 공격수와 수비수를 넘나들며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진가도 함께 나타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꾸준히 경기에 나서며 '유공맨'으로서의 평탄한 프로 생활을 해 나갔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 부상으로 인한 은퇴
꾸준하고 성실한 플레이의 멀티 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치며 남부럽지 않은 프로 생활을 하던 그. 하지만 그에게도 불운이 다가오고 만다.
" 94년도에 선수 은퇴하게 되었는데 그해 4월에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울산에서 경기를 하는데 코너킥이 나서 수비 맞고 흘러나오는 걸 바로 왼발로 올리려고 하는데 상대 수비수가 와서 발 앞을 짚더라고요. 그 바로 전 경기 눈을 다쳐서 시야가 좁아진 상태였었는데 뒤에서 태클을 들어오는 선수를 피하지도 못하고 정강이 뼈 두 개가 부러졌어요. 그 날 중계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 시즌을 못 뛰게 되었어요."
축구 선수로서 아주 큰 부상을 당한 그는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해온 축구를 선수로서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어 아쉬움이 매우 컸지만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당시
아쉬움이 컸지만 좌절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 당시
축구선수로서 서서히 정점에 오르려던 찰나에 큰 부상을 입은
축구 인생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다.
"제가 프로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성실성 덕분이었는데 선수시절 성실하게 훈련하는 것을 눈여겨보신 지도자분들이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축구선수시절부터 부천SK에 몸담아 왔던
'부천맨'으로 유명한데다 선수시절부터 지혜롭게 축구를 할 줄 아는 그였기에 감독을 하는데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에 프로 축구팀 감독을 하게 되어 굉장히 뜻 깊은 경험이었을 것이라는 질문에 그는 " 어린 나이에 할 수 있어서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는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을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상처를 많이 받을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미리 화살을 많이 받으면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팀을 이끌려고 했다고 한다. 승부에만 너무 연연하기 보다는 재미있는 축구, 관중을 끌 수 있는 축구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성적은 좋지 않았고 경기를 지배하고 재밌는 경기를 하면서도 좋은 성적이 나오질 않았다.
"처음부터 6개월만하고 그만하라고 했으면 성적부터 내려고 했을 텐데 저는 장기적으로 팀을 구상했습니다. 프로경기는 좋은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을만한 가치가 있는 경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성적이 좋지 않았고 팀이 꼴지를 했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제가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거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렇게 사임 하면서 느낀 건 못 다한 공부를 좀 할 수 있지 않나. 지금보다 나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공부를 하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공부하는 지도자,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을 4강으로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경기분석 시스템을 활용해 축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트피쉬(Dartfish)라는 경기분석 프로그램인데 구단에서 흔쾌히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그 회사에서 직접 와서 설명도 해주었어요. 그런 시스템들을 다룰 줄 모르면 누군가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데 분석관이 외국인이면 통역을 통해 전해 듣기까지 해야 되니 왠지 잘 못 전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의 축구철학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누군가를 통해 전달이 되면 정확성이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시작하게 되었죠."
낯선 프로그램을 하는데 힘든 점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특별히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것이 부러지지는 않으니까 이것저것 많이 해봤죠. 그러다 보니 워드와 같은 다른 컴퓨터 활동도 익숙해지고 멀티미디어에 관해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경기분석능력을 습득한
"처음에는 구단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어요. 같이 훈련을 해도 좋고 구경을 해도 좋다고 했죠. 그래서 비디오를 찍게 해달라고 했죠. 구단에서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더군요. 그곳에는 7세부터 성인까지 모두 한 군데서 훈련을 하는데 그곳에서 비디오를 찍은 뒤 팀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었죠. 그 사람들이 아무리 축구 선진국의 사람들이라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처음에는 저를 조금 등한시하던 사람들도 그런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많은 지원을 해주었어요."
축구 선진국 독일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며 현대 축구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전술들이 등장하고 발달된 과학기술을 축구에 활용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지도자들도 그에 따라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일을 하다
독일 유학을 다녀와 그는 2005년 5월부터 대한축구협회 기술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KFA 기술부 상근 기술위원, 기술부장을 맡았던 그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2005년 5월부터 대표팀 경기분석을 맡았습니다. 행정적인 문제도 맡았었고 교육쪽 분야도 맡았었습니다. 특히, 축구 지도자들을 위한 DVD를 제작했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보람이 남았습니다. DVD에는 축구기술, 축구심리, 축구생리, 전술 등 축구에 관한 많은 부분이 들어있는데 우리나라 최로로 제작을 했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었습니다."
그는 DVD제작을 할 시 사소한 것에서부터 많은 것을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프로덕션 회사가 있긴 했지만 그 분들이 축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어느 곳에 어떤 편집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거의 두 달간 밤을 새면서 직접 다 했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일을 하며 수많은 업무들을 직접 맡아온 그는 2007년 말부터 2008년 중순까지는 대한축구협회 기술부장을 맡으며 경기분석과 더불어 대표팀 선수들의 기술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하재훈
K리그 홈페이지에는 '
"처음에는 글로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독자층도 범위가 넓으니 어느 분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지도 고민이었고 1주일마다 하나씩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딱 100개만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었습니다. 힘든 순간도 꽤 있었는데 최선을 다해서 하다 보니 좋은 경험이 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2년여간
"연재를 끝내고 난 후에도 주위에서 잘 봤다는 말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천안 시청
"특별한 비결은 없는데 다만 훈련을 할 때, 축구에 관한 것에서만큼은 나와 수평적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저는 선수들에게 축구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든 저와 토론 하자고 합니다. 축구에 관한 것이라면 언성 높이고 이야기하고 토론하자고 말이죠. 지도자를 이용하고 나를 귀찮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 부분이 팀에게 좋았던 점인 것 같습니다."
K리그에 익숙해진
하재훈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지금은 굉장히 유명해진 이 유행어는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무릎팍 도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시청자들에게 화제가 될 만한(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사람)사람들이 출연을 한다. 그래서 그들의 프로필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이 말을 덧붙이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되어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비꼬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묘하게 상대를 치켜 세워주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이번 'K리그 전설'의 주인공인
선수시절의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며 그는 모든 분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더 높기에 그는 그렇게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천안시청 감독을 하고 있는 지금도 그는 감독역할만 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축구 지도자를 가르칠 수 있는 'P Instructor License'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중이다. 또 그는 천안시 지역시민들을 위한 일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천안시청은 시청팀이기 때문에 공익사업에도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주민들이 많은데 그 자녀들이나 영세민들을 대상으로 축구교실을 열어 축구를 통한 자신감을 키워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감독으로서 팀에 대해 신경쓰는 것 뿐만이 아니라 연고지역에 대한 관심까지 가지는
끝으로 인터뷰 말미에 축구 감독으로서 젊은 나이인 그에게 앞으로 많이 남은 축구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는 축구에 관한 일을 하면서 축구에 관한 5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게 목표입니다. 감독을 하면서도 강단에도 서고 축구교실도 하면서 해설도 하고 글도 쓰면 벌써 5가지네요(웃음)"
선수시절부터 계속되었던 그의 멀티플레이어 본능은 지금까지도 멀출 줄을 몰랐다. 축구에 대한 강한 열정, 긍정적인 사고방식, 끊임없이 배우려는 의지, 풍부한 경험 등. 이런 많은 장점을 가졌기에 축구 지도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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