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 조긍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남 이상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황금기, 후보선수라는 침체기, 다시 득점왕이라는 전성기, 갑작스런 은퇴, 사업 실패 등 많은 삶의 기복들이 그를 지금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위, ‘남다른 삶’을 통해 남의 이상이 되려 자신을 채찍질해온 포항스틸러스의 원년 스타 조긍연(현 선문대 축구감독)을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만나보았다.
포항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그는 현재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써 올해 초 자신의 팀을 대학정상( 대학춘계연맹전 1, 2학년 경기)에 올려놓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써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조긍연의 현재가 있기까지, 축구인생에 있어 큰 장면들을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개구리의 힘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주변에는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어려서 운동선수를 한다는 것은 집안사정에서도 쉽지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힘이 주셨죠. 당시에는 학부모들이 축구하는 자녀들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곁에 다니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시고 경기도 봐주셨어요. 정말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는 축구를 위해서 초등학교를 전학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또 5남매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조긍연의 열정이 K리그 한 시절을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각 스포츠계의 선수들의 가장 큰 힘은 선수들보다 더 고생하는 부모들이라는 점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구리 많이 먹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그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자라날 때는 먹을것이 없어서 그랬던것도 있겠지만 개구리를 정말 많이 먹었어요. 저만큼 개구리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걸요.(웃음) 개구리를 잡는다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먹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제 유년시절 축구의 힘은 개구리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구리 많이 있는 철에는 세끼식사 전부를 개구리탕으로 먹었으니 말이죠.”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의 기본이 되는 그의 다리가 ‘개구리의 영양’으로 발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조리법까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80년대 후반 카리스마의 온상 ‘털보’의 이미지는 어느덧 오래 알아온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한장의 졸업장 그리고 상경기.
중학교 졸업식이었어요. 당시 영등포공고 감독님과
그렇게 졸업식날 졸업장도 받지 못한채 상경한 조긍연은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주전 공격수로 기용된다.
그것이 지금 한국축구 정신력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가던 그때를 잠시 그리워하는듯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요즘에는 그런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도 다소 가벼워진게 사실이고요. 지금 선수들 지도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선수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체력은 물론이고 특히 정신력이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좋아요. 자신들이 정신만 바로잡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선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조금만 힘들어도 회피한다거나 말이예요. 그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들이 박지성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는데도, 많이 아쉽죠.”
서울 영등포공고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국졸(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운을 띄우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항상 졸업을 하는 순간에는 졸업식장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때는 갑자기 찾아온 고등학교 감독님 등살에 급하게 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했고요.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에 참석 못했고. 대학교 졸업식때에도 또 다른 이유에서 참석 못했었어요. 그러니 정말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죠.(웃음)”
자신의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비춘 그였지만 사실은 뛰어난 기량으로 갖추어진 그를 여러곳에서 급하게 데려가려던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국가대표 발탁때문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고교생 국가대표와 시련.
1980년 춘계전국고교축구연맹전. 조긍연이 속한 영등포공고는 다름아닌 전년도(79년) 우승팀 이리고등학교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비록 그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뽑은 골은 3골이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으로 레프트윙을 말끔히 소화해 내던 그였다. 그런 모습은 당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그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알려져 있던 선수는
그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뒤 합류하게 된 국가대표팀. 평균 7~8세 연장자인 선배들과 부딪히며 훈련하기란 어린나이에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대표생활 1년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결국 대표팀 밖으로 힘겹게 걸어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슬럼프 과정은 고려대 재학시절 4년동안 그를 꾸준히 힘들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법.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85년. 포항제철로 입단을 하면서 그동안 움츠렸던 그의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다.
“ 85년에 포항제철로 처음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92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1년 뛰기 전까지 계속 포철에 있었죠. 당시의 포철 멤버들이 지금 봐도 베스트 멤버였다고 생각해요. 3년 연속 포철에서 득점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죠.”
프로축구의 황금기, ‘축구선수 조긍연’의 황금기.
80년대 후반 프로축구 최고의 준족을 꼽으라면 단연
인 고교시절의 11초 7보다 더 빨라진 속도를 자랑하며 제 2의 전성기의 시동을 걸었다. 조긍연은 85년부터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에서 통산 153출장 38득점 7도움을 기록한다.
“세번의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어요. 그중 두 개는 제가 득점왕을 받았던 89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지난해인 88년이었어요. ” 그러했던 80년대 후반 그의 전성기에서 그는 총 3번의 해트트릭을 따내며 ‘최고의 스트라이커’ ‘특급소방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뭐랄까. 골을 넣겠다는 투지에 불탔었어요. 무조건 3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회만 찾아냈던 것이죠. 축구에 있어서 슛은 자신이 골을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있을때 할 수있는 거예요. 골을 꼭 뽑아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슛을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안정환선수가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그만큼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슛할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그것이 스트라이커니까요. 아무튼 저 역시도 89년 당시 출장만 하면 무조건 3골을 넣겠다고 이를 악물고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해서 39번 출장에 20골을 넣게 된거죠. 또 그러다 보니 해트트릭도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결국 전성기인 89년에 그는 일을 터트리고 만다. 39출장 20득점 117슛팅. 유럽리그 진출의 가능성까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특급소방수 조긍연’은 당시 축구계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혹자의 말로는 한달동안 스포츠 신문에 ‘조긍연’이라는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전성기는 아니었다. 데뷔첫해인 85년에 그는 89년 득점왕과는 비교될만하게 2골만을 기록한 채 한해를 마감해야했다. 연봉삭감과 질책. 아니 무엇보다 그를 자극했던 것은 가슴속의 또 다른 목표였을까. 86년이 시작하자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최고점인 89년에 드디어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또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녜요. 그냥 한때 득점왕 한번 받은 것이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에는 겸손함이 묻어있었다.
내 인생 축구여. 잠시만 안녕.
축구를 은퇴한 조긍연. 긴 축구인생을 보면 잠깐의 휴식기였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그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은퇴하고 나서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느꼈어요. 제가 프로선수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은 이제 생업에서 물러나시고, 동생들은 이제 시집, 장가갈 나이가 다되어가고. 어쩌겠어요. 제가 동생들 결혼을 시켜야 할 상황인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축구할 때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안 될 일이 뭐있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고생, 정말 많이 했죠. 레스토랑 운영 할 때는 정말 2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만 해봤어요. 그런데 세상은 만만하지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비싼 돈 쓰고 좋은 사회 경험한 것 같아요. 권리금도 모르고 사업을 시작했을 적이니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사람 잘못 만나서 속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게 6년을 축구에서 떨어져 살았어요. 그사이 찾아온 IMF 위기에 제 사업도 기울기 시작해서 그만 정리하고 말았죠. 그 힘든 시기를 1년정도 더 보내다가 당시 포항스틸러스
결국 그는 축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크고 작은 외도는 있듯이 현재 축구 지도자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조긍연에게도 그것은 인생을 다시 보기위한 잠깐의 외도였나 보다. 어딜 갔다가 왔던지 초록색 그라운드에 다시 서있는 그에게 축구란, 삶의 전부이며 미래를 향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3년간 지속된 포항스틸러스의 코치생활. 그는 그에게 다가올 또 하나의 도전을 이미 알고 단단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으리라.
더 큰 세상을 향해, 브라질 지도자과정 연수시절.
“2000년에 포항에서 코치로 들어갔다가 3년 지내고 나와서 그 다음해니 2003년이네요. 그해 초 AFC B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바로 브라질로 축구지도자 연수를 떠났어요. 그곳에 브라질 1부리그 과라니라는 팀에서 선수들과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7개월을 살다가 왔죠. 일부러 교민들이 없는 곳을 찾아서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비장한 각오로 그랬겠죠. 연수차 간 여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넘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축구는 말없이 해도 되지만 생활과 공부는 그렇지 않으니깐 말이죠. 통역을 해주는 학생이 일주일에 한번정도 구단에 찾아왔었는데 그 외의 시간에는 거의 혼자서 의사소통을 해결해야 했어요. 그래서 저는 팔뚝에다가 ‘밥먹는 시간 몇시입니까.’ 등의 회화를 적어놓고 그때그때 물어보곤 했어요. 또 갈 때 가져간 사전도 큰 몫을 했고요. 교민이 없어 일단 저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라도 대화를 했어야 했어요. 답답하잖아요.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한달여쯤 지나서는 어느정도 의사소통도 되고 하니 나중엔 거의 코치, 감독처럼 선수들과 생활했어요. 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니깐 그쪽에서도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
그렇게 약 7개월간의 국외생활을 마친 조긍연은 고국으로 돌아와 인생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는데, 그 팀이 2006년 춘계대학연맹전 1,2학년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문대학교 이다. 그는 브라질 축구유학시절 체득한 4-4-2 시스템을 첫 그의 팀인 선문대 축구부에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취임 2년 5개월 뒤 춘계대학연맹전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왕년 득점왕 지도자.
아니, 그보다 현재에 충실한 생각하는 지도자.
“주는 공만 가지고 축구를 하는 선수는 필요가 없어요. 아무리 센터포워드라고 할지라도 똑같이 수비수인거죠. 인원이 11명인 팀이 실제로는 10명이 뛰는 팀일수도 있는것 처럼 협력수비를 저는 강조해요. 자기만 편하게 하려는 축구선수는 팀전체를 힘들게 하니까요.”
현재 선문대 축구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감독이라는 자리만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는, 또 배운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작년 KFA 1급, 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한달여간 합숙玖庸?따낸 성과였죠. 그리고 현재는 스포츠 심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요. 석사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고요. 스포츠에 있어서, 좁게는 축구에 있어서 선수들의 심리를 활용할 수 있다면 팀은 팀 자체 그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실제 저희 팀에 적용해서 여러 가지 시도도 해보고 있어요. 그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공부가 아닐까하네요.”
“많은 학원축구 관계자 분들께는 항상 죄송스럽지만..” 이라고 말을 꺼낸 그는 한국 축구의 학연과 지연을 벗어난 실력위주의 선수선발을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선수들 스카웃 해오는 것이 제가 하는 일중에 가장 힘든일 같아요. 그 스트레스 때문에 실신해 쓰러진적도 있고 말이죠. 또 좋은 선수만을 선발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그 선수들을 조직력으로 엮는 작업 또한 저의 몫이예요.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기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굳이 감독이 필요가 없더라고요. 제가 할 일은 아마 거기까지 인가봐요. 이번 우승한 것도 몇 번의 고비만 제가 잘 넘겨주면 그다음부터는 선수들끼리 하나가 되어서 스스로 하더라고요. 마지막에는 우승까지 말이죠.”
이미 늦어버린 유럽진출의 꿈. 하지만..
“전성기 때
지금은
“조금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국가대표는 한번씩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해외 빅리그의 그 함성안에서 뛴다는 것은 나라를 대표하는 것 이상의 일이거든요. 얼마전 대학춘계연맹전 전에 포메이션 분석을 위해서 영국에 잠시 갔다 온 적이 있어요. (박)지성이가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가 있는 날이었는데 직접 가서 봤죠. 가득 메워진 관중석, 녹색 그라운드, 하프라인에 꾸며놓은 문양들을 보니 제 옛날 꿈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더라고요. ‘아..내가 진정 뛰고 싶었던 곳은 저기였는데..’ 라면서요. 하지만 이제는 이미 지도자의 길을 왔으니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야죠. 다행히도 저는 K리그 관중들의 함성안에서, K리그 녹색 그라운드에서 아름다운 전성기를 만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꿈 반쯤은 이룬 것 아닌가요.”
조긍연은 지금 제 3의 전성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유럽리그에서의 축구 지도자’ 어쩌면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며 혀를 찰지 모르지만 이미 그의 질주는 시작되었다.
‘최연소’란 수식어를 붙이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국가대표 발탁. 하지만 쉽지 않았던 국가대표팀 생활과 마음껏 펼치지 못한 날개가 못내 아쉬운 듯, 조긍연은 대학생활 동안 긴 침묵을 지켜왔다. 그리고 드디어 과감히 거추장스럽던 ‘최연소’란 수식어를 과감히 떼어버리며 새로운 축구인생을 위해 K리거로써 그는 1985년 포항제철 프로축구단에 입단하게 된다.
“포철로 가면 주전으로 뛸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때 생각으로는 제가 다른 팀에서 후보선수로 있는 것보다 처음부터 스타팅으로 뛸 수 있는 포철로 입단해 제 능력을 펼쳐 보이고 싶었거든요. 그런 제 나름대로의 결정으로 포철에 입단했죠.”
그러나 득점왕으로 등극한 89년 이전까지 그는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려야만 했다.
입단해인 85년. 4월 21일의 데뷔전은 화려했으나 스트라이커로써 14회 출장에 한해 2골만을 뽑아낸 조긍연은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는 듯 했다. 더군다나 그의 활약에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아닌 근육통. 근육에 과부하가 가해지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이 계속되었는데 신체활동이 주를 이루는 선수로서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경기를 오래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14회 출장 중 8번이나 교체 아웃되어서 나오고 말았다. 재기를 위한 의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력문제가 대두되었던 것. 충분히 좌절감에 시달릴만한 시기였으나 쉽게 좌절감을 가질 조긍연은 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86년이 되면서 그는 동계훈련에서 체력관리에 집중했던 것 일까. 85년에 여러사람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던 약한 몸싸움에 대비해 상체훈련을 강화했고 또 ‘부진하면 유니폼을 벗겠다’는 각오로 86년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86년 그의 플레이는 살아나기 시작한다. 시즌 초반 5경기에서 4골을 뽑아내며 득점선두에 올라섰던 것. 여러 언론에서는 ‘6년간의 긴 슬럼프에서 벗어난..’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며 열을 올렸고, 조긍연 그 역시 자신의 슬럼프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뿐한 몸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왠지 모르게 무뎌지는 느낌이었다. 86년 통산 27경기 출장 8득점. 86년 통산 득점 4위에 올랐지만 그중 절반이 초반 5경기에서 나왔었는데 초반의 득점선두에 빗대자면 뒷심이 부족했다는 판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결과였다. 결국 시즌이 종료되었고 다시 찾아올 전성기를 위해 자신을 재차 담금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1000호골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K리그 통산 1000호골은 럭키금성의
“1000호 골을
결국 그는 럭키금성의
다시 시작이다
데뷔이후 꾸준히 시즌 초반강세를 보여주었던 그는 88년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여러 언론을 달구며 ‘이번에는 그 강세가 이어질까.’라는 의문을 갖게 했었지만 조긍연은 여전히 아쉬워해야만 했다.
88년에 15번 정도의 출장 기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해트트릭을 제외한 득점은 단 2골뿐이었다. 그런 난기류 속에서도 끈기로 다시 축구화를 동여맨 조긍연이었다. 88년 역시 예전과 같은 페이스를 보여준 조긍연이 그 이듬해에 골폭풍을 휘몰아치며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89년 그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89년을 시작하는 조긍연에게 동계훈련은 황금과도 같은 디딤돌이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던 것이, 그동안 제 기량 발휘에 걸림돌이 되었던 허벅지 근육통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수영과 마사지를 병행한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더 이상 찢어질 듯한 다리근육통증은 없어졌는데 그런 최고의 컨디션으로 89년 시즌을 시작한 조긍연은,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골 폭풍’을 일으키며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득점왕 털보
‘조긍연’이라는 이름 석자보다 ‘털보’라는 두자의 별칭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특별한 의미는 없었어요.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길렀었는데, 처음에는 귀찮아서 안깎았어요. 운동에 더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안깎다 보니까 머리도 기르게 되더군요. 유럽 선수들은 머리도 참 멋있게 기르고 했었을 때인데 그것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조금 기르다 보니 제 캐릭터에 특징을 주고 싶기도 했고, 또 힘차게 달려 나갈때 긴머리가 목뒤를 치는 느낌이 좋기도 해서 계속 길렀죠. 수염도 역시 계속 길렀고요. 그러다보니 털보라는 별명이 생기더군요.”
털보 조긍연은 성적이 부진하면 턱수염을 깎아버리겠다는 각오로 처음부터 득점왕을 바라보고 89년을 시작했다.
“ 일단 경기에 들어가면 최소한 3골을 다짐하고 들어갔었죠. 그것 때문에 (이)기근이와 같이 출장할 때이면 골 욕심 때문에 다툼아닌 다툼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기근이도 저만큼이나 골욕심이 엄청났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이회택 감독님으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죠. 두 명에게 중앙공격수의 임무를 부여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둘 중 한명이 사이드백에서 공을 잡으면 중앙공격수는 옆으로 빠져 줘야하거든요. 그렇게 해야 슛을 하던지 크로스를 올리던지 하는데 서로가 안빠져 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빠져주면 크로싱, 즉 도움밖에는 기록을 올리지 못하니까요. 서로 ‘도움’이 아니라 ‘득점’을 갖고 싶었던 것이죠. 기근이같은 경우 득점왕을 두 번 할 정도로 골 욕심이 엄청나고 위치선정도 좋아서 저와 득점을 두고 자주 경합했었어요. ”
그런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콤비였다고 생각해요. (이)흥실이가 제 득점의 절반 이상을 어시스트했었죠. 보통 마음이 잘 맞는 콤비를 보고 ‘호흡이 잘 맞다.’ 라고 하잖아요. 저희식으로 하자면 ‘눈’이 잘 맞았어요. 흥실이가 미드필더 진영에서 공을 잡고나면 저를 한번 보면서 눈빛을 보내요. 그러면 제가 위쪽에서 돌아서 들어간다던지 바로 들어가던지 결정을 하고 움직이면 거의 대부분 제 발 바로 앞에 공을 내려놔 줬어요. 그 공을 그대로 차면 바로 골로 연결될 수 있게끔 말이죠. 그 패스가 너무나도 정확해서 저는 따로 컨트롤 할 필요도 없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렇게 공을 패스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인데도 흥실이는 그 기술에 탁월했었죠. 인사이드, 아웃사이드처럼 휘는 공이 아니라 인스텝으로 강약조절만 된 패스였는데 정말 대단했죠. 덕분에 제가 득점왕도 할 수 있었고요.”
물론 이흥실 뿐만아니라 당시 포철의 막강한 팀구성과 더불어 조긍연의 전성기가 꽃필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든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내리 20골을 뽑아낸 조긍연. 그 중에는 K리그 통산 1300호골과 1400호골이 그의 발에서 나왔다. 비록 아깝게 1000호골의 영광을 잡지는 못하였으나 그에게 있어 1300, 1400호 골들은 그보다 더 값지다고 한다.
1300호골은 동시에 그의 시즌 10번째 골이기도 했다. 8월 23일에 펼쳐진 이 경기는 대우와의 홈경기. 전반 9분 대우의 공을 가로챈 이흥실로부터 시작된 공이
“1300호, 1400호골을 제가 성공하게 된 것에 대해 정말 기뻤어요. 비록 1000호골을 눈앞에서 놓치긴 했지만요. 1300호골 경우, 제가 그 경기에서 비록 한 골밖에 득점하지 못했지만 그 골로 인해 제가 프로데뷔 후 처음으로 10골을 기록했었고요.”
개인 10호골, K리그 통산 1300호골. 86년에 8골로 통산 4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두자리 수를 기록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조긍연이 아니었다. 데뷔이후 계속해서 부진의 눈총을 받았던 조긍연은 거친숨소리를 다시한번 가다듬고 득점왕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9월 MVP
조긍연은
시즌 종료가 한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유력한 득점왕 후보로 올라선 그는 마지막까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결과가 또 한번의 해트트릭, 그리고 K리그 통산 1400호골.
“ 10월 21일. 시즌 종료 두경기 남은 날이었어요. 그날 만들어진 1400호골은 제가 시즌 두 번째, 개인 세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골이기도 했고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그날 해트트릭 중 두 번째 골이 1400호였어요. ”
드디어 득점왕
시즌 40경기중 39경기 출장 20득점 (경기당 0.51득점). 이와 같은 기록으로 조긍연은 득점왕에 오르게 된다. 이 기록은 프로축구 출범으로부터 그 해까지 득점왕 기록 중 가장 많은 골이었으며 이 기록은 5년 뒤인 94년 LG의
“당시 포철의 멤버가 상당히 우수했죠. 88년에 우승한 것을 비롯해 득점왕뿐만아니라 도움왕도 3년 연속 포철에서 나왔어요. 87년
당시 팀의 화려한 선수층과 득점왕기록 20골 중 절반 이상은 이흥실의 발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조긍연의 말에서 ‘최고의 기록’이란 것이 단 한 사람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며 또 단 한사람만의 영광도 아니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화려했던 89년의 해가 저물고 조긍연이 다시 축구화끈을 다시 질끈 맨 90년이 시작된다. 89년 득점왕이라는 화려한 장식에 뒤따른 핫이슈는 조긍연의 ‘유럽진출’이었다. 그것은 ‘진출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서독에 대한 정보와 소식통이 있는
“조긍연의 분데스리가 입단이 무산된것은 실력보다 오히려 나이와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은것. 조긍연은 서독프로구단 스카우터가 지켜보는 연습경기서 최악의 컨디션을 보였다. 하필이면 유럽전지훈련기간중 지독한 몸살을 앓아 특유의 스피드, 슈팅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긍연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던 서독 1부리그 레베르쿠젠 소속 담당매니져 칼 문트는 ‘선수로서의 자질은 서독프로 1급선수들에 비해 손색이 없다. 그러나 우선 나이가 많다. 독일 적응및 팀전술 숙지기간등을 감안할 때 너무 늦은감이 있다.’ 며 2년정도 일찍 서독진출을 시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은 조긍연의 진로는 그의 프로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록 서독진출 실패후 프로리그에서 최고가 되리라는 다짐을 해보았지만 전(前)해에 너무 사력을 다했던 탓일까. 아니면 툴툴 털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유럽진출 실패의 좌절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예년같은 활약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만다. 축구를 시작하던 어린시절부터 항상 유럽리그에서 뛸 것이라는 조긍연의 꿈이 계속해서 진출 실패의 아쉬움을 잡아두었고 결국 91년에는 선수계약과정에서 유럽진출을 염두에 두고 포철과 재계약을 한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득점왕, 유럽진출설, 유럽진출실패, 국내프로리그에서 재도약 실패, 허리디스크. 그리고 선수생활은퇴. 그의 황금같던 전성기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급하강하고 있었고 조긍연은 이미 약해졌던 것일까. 그 하강의 기류속에 그저 흘러가고 말았고 결국 프로축구선수 은퇴까지 이어지게 된다.
제 3의 전성기
고교생 국가대표, 89년 역대 최다득점의 득점왕. 흔히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고 한다. 그런 말이 조긍연에게는 전혀 쉬운말로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전성기와 후퇴기가 그와 비슷하기 때문. 89년 득점왕 이후 은퇴, 개인 사업시작과 IMF사태. 다시 축구계로의 복귀와 축구지도자로의 재도약. 은퇴 후 개인사업 당시 인생에 대해 많이 보고 배웠다는 그의 말처럼 다시 축구계로 돌아온 모습에는 전과 무엇인가 다른 ‘연륜’이 묻어났다.
포항 스틸러스의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길에 나선 조긍연은 KFA 2급 지도자 자격을 따고 브라질 지도자 연수를 거쳐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써 그라운드에 선 조긍연은 KFA 1급, AFC A급 지도자 자격을 따내는 등 피나는 노력을 보여준다.
“ 제가 선문대 감독으로 오고나서 계속해서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일주일에 두 번씩 강사를 초빙해서 우리 선수들과 함께 A부터 공부하고 있죠. 그러다가 그 선수들이 졸업하면 다시 처음부터 함께 신입선수들과 시작하려고 하고요. 재미있어요. 선수들도 열심히 하려하고 말이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스포츠 심리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또 실제로 적용해보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도 하고 있어요.”
그런 성장 가운데 있는 선문대 축구팀. 자신만의 스카웃 철학을 가지고 선수선발에 가장 큰 중점을 두었고 브라질에서 보고 배운 축구스타일을 자신의 팀인 선문대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부임 2년 5개월만에 선문대를 ‘춘계대학연맹전’ 1, 2학년 경기에서 우승에 올려놓으며 그의 지도자로써의 전성기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얼마전인 7월 31일. 조긍연이 감독으로 부임되고 그가 직접 선수선발을 해 화재를 모았던 대학축구선발팀이 일본대학축구선발팀을 3대1로 가볍게 누르며 승리를 따냈다. 2년 5개월이라는 긴나긴 팀만들기에서 발휘된 그의 지도자로써 기질이 이번 국제경기에서도 빛을 발한것이다.
황금발
‘골든슈’라는 이미지를 떠올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 이 ‘황금발’이란 ‘역대 K리그 득점왕’ 모임이다. 83년 득점왕
“일년에 한 두 번씩 모이는 모임이예요. 뚜렷한 활동을 보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어요. 해당 해에 득점왕이 나오면 금으로 제작된 축구화 모양의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어요. 친목도 성격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지금부터 시도하게 될 여러가지일들을 보면 모임의 의미는 더 광범위 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끔 득점을 하는 기술에 대해 강연을 하기도 하고요. 고교선수 득점왕 시상식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시도하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 공격진이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진게 현실이잖아요. 아무래도 토종 한국선수들이 득점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할텐데요. ”
현재 조긍연은 후진양성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다. 그의 축구인생이 항상 맑았던 것은 아니었고 혹독한 비바람이 몰아치며 끊임없이 움츠려야 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 그는 우수한 선수뿐만 아니라 날개를 펴지 못하고 조금 부족한 선수들의 눈높이에도 설수가 있는 것이다.
조긍연은 말한다. 자신은 그리 유명하고 엄청난 선수가 아니었다고. 그저 한해 득점왕 한번 차지한 평범한 선수였다고. 그래서 자신은 ‘K리그의 전설’이 아닐 것 같다고.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득점왕 딱 한번 차지한 평범한 선수가 아니라 득점왕을 위해 수년간의 시련에서 끈질기게 버텨 낸 지독한 선수’라고 말이다. 또 그가 K리그의 전설이 아닐 손 치더라도 지금 그는 K리그의 전설을 양성하고 있다고.
이제는 ‘선수’에서 ‘감독’으로 호칭을 바꾼 조긍연 감독. 그 지독한 끈기로 ‘남 다른 삶’을 고수하며, 정말 유럽리그에서 지도자로써 제 3의 전성기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K리그의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레전드 - 한문배 (0) | 2012.01.07 |
---|---|
K리그 레전드 - 함현기 (0) | 2012.01.07 |
K리그 레전드 - 조긍연 (0) | 2012.01.07 |
K리그 레전드 - 호성호 (0) | 2010.08.26 |
K리그 레전드 - 최영일 (0) | 2010.08.26 |
K리그 레전드 - 노수진 (0) | 2010.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