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조광래 생년월일 1954-03-19 키 169 Cm 몸무게 65 Kg 포지션 MF 연도 구단 출장수 골 도움 1983-1987 대우 46 3 4 계 46 3 4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골 1975-1986 성인 대표팀 80 12 K리그 우승 1984, 1987 K리그 베스트11 1983 아시안클럽 1986 아프로-아시안클럽 1986 월드컵 본선 1986 아시안컵 본선 1980 아시안게임 본선 1978, 1982, 1986
기본 프로필
클럽 통산 기록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클럽 주요 경력
챔피언십
챔피언십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월드컵이란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껏 6번의 대회에 참가하면서 숱한 희망과 좌절을 함께 느껴왔었고 끝내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의 도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6회 연속 본선진출이라는, 전 세계에서 8개의 나라밖에 해 내지 못한 업적을 일궈내며 다시 한 번 희망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월드컵에 대한 벅찬 기대에 하루하루를 설레며 보내는 우리네들입니다.
저희 K리그 명예기자단은 눈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맞이해 'K리그의 전설'코너를 월드컵 특집으로 준비했습니다. 83년 수퍼리그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K리그는 우리의 월드컵 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여러 훌륭한 선수들이 K리그 무대를 통해 기량을 쌓아왔고 그들을 통해 월드컵의 꿈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 국토를 빨간색으로 물들게 했던 붉은악마의 열정적인 응원도 각 프로구단의 서포터가 그 모태였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또 화합하며 발전시킨 성숙한 응원 문화가 없었다면 영광의 순간도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수와 팬이 한데 어우러져 이끌어온 이 소중한 경험의 자산과 땀 한 방울까지도 결코 가벼이 넘길 수가 없습니다.
'월드컵 특집 K리그의 전설'을 통해 저희는 K리그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의 활약과 그들이 어떻게 월드컵이라는 무대를 밟게 되었고 어떤 경험을 쌓아 왔는지를 조명해 볼 것입니다. 월드컵 무대를 준비하는 현재의 대표선수들에게는 좋은 충고가, 앞으로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할 K리그에는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월드컵 특집 K리그의 전설 그 첫 번째 순서는 미드필더로 86 월드컵에 출전했던
알아주는 모범생, 그러나 축구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선수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중학교 때는 축구를 안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축구 시작은 남보다 늦었지요. 물론 초등학교 때는 축구를 좋아했고 잘했어요. 경남 지역에서는 최우수 선수상도 받았구요.”
진주봉래국민학교에 다니던
그런데 축구만큼 잘하는 것이 또 있었다.
‘공부.’
이럴 수가! 의외였다. 보통은 예체능에 관련된 특기가 뒤따라오기 마련인데 축구 선수가 가장 게을리 한다는 그 ‘공부’를
“제가 어렸을 적에는 중학교를 시험 봐서 갔었어요. 저희 동네에 진주중학교와 진주남중학교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진주중학교가 경남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학교로 소문난 학교였죠. 어디를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보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들이 진주중학교 시험을 치러 간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그런데서 지기 싫은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진주남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있고 진주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다는 거죠. 축구는 하고 싶은데 좋은 학교도 가고 싶고. 결국 시험을 봐서 진주 중학교에 가게 되었죠. 그래서 3년간은 축구를 안했어요.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다시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진주고등학교에 갔더니 축구 특기자로 진주남중학교로 진학했던 친구들이 다시 진주고등학교로 왔더라구요. 중학교에서도 선수 생활을 하다가 진주고등학교로 스카우트 되어서 온 거죠.
고등학교에 가서도 1년 동안은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축구를 같이 했던 친구들이 감독님하고 교장 선생님께 저를 추천한거에요. 초등학교 때 자기들 보다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축구를 안 한다고. 그래서 제 기량을 탐색해 볼 목적으로 1학년 말에 반대항 축구 대회가 열렸죠.
어렸을 때부터 기술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축구 시합을 하니까 대번에 표시가 나죠. 감독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왜 축구안하냐고 친구들도 너 잘한다고 추천하고 내가 봐도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축구를 안 하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도 일단은 안 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근데 축구부 애들이 축구하는걸 보거나 TV에서 국가대표 축구를 하는걸 보면 어린 마음에 ‘내가 하면 저 애들 보다 더 잘할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결국은 참지 못하고 2학년 때부터 축구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4년 만에 축구를 다시 하게 된
“줄넘기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진주고등학교 뒤에 비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봉우리 세 개를 넘으면 제가 다니던 봉래국민학교가 나와요. 이 봉우리를 뛰어서 넘으려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매일
자다가 옷 주워 입고 나와서 뛰기 시작하면 어쩔 때는
“3개월 정도를 뛰다 보니까 체력이 보강되더라구요.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 뛰기는 했지만 3개월 정도 지난 후부터는 운동장 돌고 선착순 달리기 같은걸 하면 선두권에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축구를 다시 시작하고 5개월 만에 게임을 뛰기 시작하고 3학년 때는 주장을 달고 진주고등학교 사상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하기 시작해서 4개 대회 우승까지 달성 했었습니다.”
85년 대통령배 우승.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즐거웠던, 하지만 섬뜩했던 결승전의 추억
진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입학한
“분단 이후 첫 대결이라 온 나라가 긴장을 했습니다. 길거리에 차 한대 안다닐 정도로 관심이 대단했어요. 월드컵 때처럼 응원을 열광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첫 대결이다 보니 관심이 높았던 거죠. 경기 전에 대통령 전문도 오고 이래저래 긴장을 많이 시켰어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호텔을 나가는데 평소에는 음악을 듣고 간다던지 조용히 가는데 서로들 너무 긴장을 한거에요. 그러는 와중에 어디서부턴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긴장을 풀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거죠. 그러니까 웃기게도 전부 다들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기자 대한건아 뭐 이런 노래 부르면서 전부다 으?X으?X! 하면서 긴장을 풀었죠. 지금 생각하면 영화 같은 얘기죠.”
“경기를 시작했는데 그 때는 서로 말도 없었어요. 지금처럼 도와주고 챙겨주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 자존심 싸움이 대단했죠. 경기를 하는 도중에 자기네들 끼리 옆에서 ‘동무! 동무!’ 부르기도 하고 ‘동무! 빨리 뛰라 우야!’ 이렇게 소리치는 걸 들으니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영화에서나 듣던 걸 바로 옆에서 들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뛰다가 0-0으로 비기고 공동 우승을 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대 앞에 두 줄로 양 팀이 서있었는데 여기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시상을 하려고 양 팀 주장이 시상대 위로 올라갔는데 저쪽 팀에서 우리팀 주장이었던
1983년, 수퍼리그 개막!
포항제철과 충의팀을 거친
“수퍼리그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 내용이나 관중들 호응도 면에서 상당히 취약했기 때문에 아마추어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었죠. 그에 비해 83년 수퍼리그는 지금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경기 내용과 좋은 장면을 많이 선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관중의 호응도 지금보다 더 좋았구요.”
“대표 선수를 거치지 않은 선수들은 긴장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수퍼리그 원년에는 경기장마다 관중석이 꽉 차는 것도 모자라 아래 트랙까지 꽉 차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한테는 연습하는 것처럼 긴장 풀고 하라는 충고를 자주 해주었죠. 긴장을 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단순한 플레이를 하게 되니까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하곤 했었죠.”
평균 관중이 2만 명을 넘었을 정도로 인기와 관심이 하늘을 찔렀던 수퍼리그 원년.
그리고 이듬해 대우는 본격적으로 프로팀으로의 전환을 선언. 할렐루야와 유공에 이은 세 번째 프로팀이 되었고 후기리그 우승을 거두며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 유공과의 맞대결을 승리로 장식하며 84년 수퍼리그의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32년 만의 진출! 86 멕시코 월드컵
그간 본선 진출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한국이 드디어 32년 만의 본선 진출을 이룩해낸다. 아시아지역 1차 예선에서 3그룹 A조에 네팔, 말레이시아와 함께 속했던 한국은 3승 1패로 2차 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3그룹 B조 1위로 올라온 팀은 인도네시아.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잠실 운동장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당시 아시아에 주어졌던 월드컵 본선행 티켓은 단 두장 뿐이었다. 4그룹으로 나뉘어져 치른 예선에서 3그룹 1위에 오른 한국은 4그룹 1위인 일본과 한 장의 티켓을 놓고 겨뤄야 했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예선전이 열린 10월 26일. 한국은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일본을 2-1로 통쾌하게 꺾으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고 11월 3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그렇게 어렵사리 본선에 진출했지만 사실상 첫 본선진출과 다름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32년간의 공백은 한국을 세계축구의 흐름에서 멀어지게 한 뒤였다. 비록 선수들의 면면은 2002년 4강 진출 당시의 선수 구성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질 것이 없었지만 세계축구의 흐름과 상대 국가의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멕시코가 워낙 고산지대다 보니 현지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은 훈련하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멕시코에 도착하고 3~4일 정도는 너무 힘들어서 훈련도 하지 못했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건 기본이고 코피가 터질 정도였으니까요. 겨우겨우 훈련을 시작했는데 몸이 붕 떠있는 것 같고 바운드가 심하다 보니까 볼 컨트롤 할 때, 패스나 킥 할 때 정확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구요. 한 번 뻥! 차면 붕~ 하고 평소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고. 2주 정도가 지나서야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어요.”
어렵게 현지 적응은 마쳤지만 한국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국제 경험의 부족이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번번이 실패하며 세계 축구의 흐름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국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상대라고는 아시아 국가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전년도 겨울, 멕시코 4개국 친선대회를 통해 부랴부랴 국제 경험을 쌓았지만 오히려 저조한 성적으로 자신감만 잃었을 뿐 큰 소득은 없었다. 본선 경기가 다가올수록 한국의 경험 부족은 불안감이 되어 선수와 코칭스텝을 위축시켰다.
“한국을 떠날 때 예상되던 베스트 멤버와 전술이 계속 바뀌어져 갔어요. 근데 문제는 월드컵이 가까워져 갈수록 베스트11에서 수비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가는 거예요. 경기를 앞두고 밸런스를 찾아야 했지만 오히려 하루 전에는 수비수가 한 명 더 많아졌죠.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코칭스텝도 갈피를 못 잡았던 겁니다.”
한국은 축구신동 마라도나를 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김평석을 투입해 전문 마크맨으로 붙여놓기로 결정짓고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때는 한국에서 대규모 원정 응원단이 오거나 하는 경우가 드물었죠. 더구나 아르헨티나에 세계적인 선수인 마라도나가 있다 보니까 경기장 분위기는 거의 일방적인 아르헨티나의 응원이었습니다. 멕시코에 거주 하시는 교민 분들께서 도움도 많이 주시고 연습 때는 매일 같이 찾아와서 열정적으로 응원도 해주셨지만 아무래도 규모면에서 많이 부족했어요.
마라도나가 움직일 때마다 일방적인 성원이 쏠리니까 선수들도 상당히 위축이 많이 됐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반 초반에 두 골을 먹고 나서 하프타임이 되니까 ‘이왕 질꺼면 우리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나 지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후반전에는 월드컵 본선 첫 골도 넣고 전반 보다 훨씬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죠.
첫 경기를 마치고 나서
절치부심 마음을 다잡은 한국 대표팀은 다음 경기에서 당시 강호로 평가받던 불가리아와 싸워 1-1로 비기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경기 내용에서도 오히려 불가리아를 능가할 정도로 자신감을 찾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얻은 첫 승점이었다.
본선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대결이었다. 디노조프, 파올로 로시 등을 내세워 82 스페인 월드컵을 제패한 이탈리아는 비록 지난 대회만큼은 아니었으나 변함없이 강한 전력으로 불가리아, 아르헨티나와 2무승부를 기록하고 있었다.
“불가리아하고 맞붙어 봤더니 어느 정도 통하는 것을 느꼈죠. 자신감을 얻으니 확실히 할만하더라구요. 이탈리아가 물론 전대회 우승팀이고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경기에 들어갔어요.
결국 3-2로 지긴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그렇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보다 무언가 한 수 뛰어나다는 건 느꼈어요. 정신없이 뛰긴 했지만 조금 벅찼죠. 아무래도 템포가 빠르다 보니까 그 템포를 70분 정도까지는 따라 갈 수 있는데 마지막 20분 동안은 따라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사전에 경험이 있어서 피부로 느끼며 경기를 해왔더라면 커버가 가능할 텐데 몸에 배어있지가 않으니 많이 힘들었죠.”
1-0으로 뒤지던 한국은 후반 17분
그렇게 첫 본선 진출 무대의 도전은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의 시발점이 되었고 세계적인 팀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희망과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큰 과제를 남긴 채 끝을 맺었다.
10년 만의 우승! 안양 LG의 감독
87년, 대우에서 선수 은퇴를 선언한
“전에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97년에는 영국에 가서 1년 정도 유학을 했어요. 그 이후에는 밀라노로 가서 인터밀란과 AC밀란의 경기를 지켜봤지요. 4백 수비에 대한 개념과 밸런스를 배우기 위해서였죠. 브라질에도 6개월 정도 가있었는데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를 수료했어요. 근데 마침 제가 거기에 있을 때 중국의 프로축구 감독 12명이 전부 거기에 연수를 받으러 온 거에요. 마침 선수생활 할 때 다 봤던 친구들이라 반갑게 인사도 하고 같이 수업을 받았죠. 총 14명이 수료장을 받아 나왔는데 그 곳 교수와 토론도 많이 하고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쌓은
“99년에 감독을 맡으면서 구단에 약속을 했어요. 올해는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내년, 내후년을 위해서 올해는 선수들이 내 스타일로 따라 와주기만 하면 된다. 성적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을 했지요.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짜임새 있는 축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연습할 때는 무조건 볼을 띄우면 반칙이라고 볼을 띄우지 말라고 주문했지요. 선수들이 그 때는 공을 잡기만 하면 롱킥을 해버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절대 롱킥 하지 말고 패스 게임을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라운드의 1/4 정도의 좁은 지역에서 하는 훈련을 주로 시켰지요. 축구라는 경기가 따지고 보면 좁은 지역에서 두 세 명의 선수가 볼을 잡고 이동하면서 하는 스포츠거든요. 좁은 지역에서 완벽하게 할 줄 알기만 한다면 넓은 공간에서는 더 잘 할 수 있다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원터치, 투터치 패스를 몸에 익히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프레싱에 대한 중요성도 많이 상기 시켰지요. 수비와 공격은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수비 하고 싶지 않으면 경기에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도 강조했습니다. 전방에서 수비를 해 줄 경우 후방에서는 훨씬 쉽게 플레이를 할 수 있거든요. 특히 먹을 수 있는 골은 먹어도 되지만 쉽게 골을 먹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도 했구요.
또, 의미 없는 운동장 달리기도 금지시켰습니다. 그 전에는 체력단련이라는 명목아래 운동장을 20바퀴씩 뛰고 그랬어요. 그런데 축구 선수는 육상 선수가 아니거든요. 워밍업을 하기 위해 2~3바퀴 달리는 것은 좋지만 그 이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기를 하는데 필요한 스프린트 훈련이라든지 짧은 거리를 왕복하는 훈련을 통해서 지구력을 키우는데 주력 했지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도 의미 없이 무거운 기구를 계속 드는 것보다는 근력에 스피드를 붙게 하기 위해 시간을 계속 단축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하는 훈련을 반복했구요.”
“수원에 있었을 때도
그리고 꼭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안양LG를 지도하던 시절 열정적으로 팀을 응원해줬던 서포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아직 팀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힘내길 바라고 언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행을 결심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 시즌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이제는 한국 축구의 영웅이 되어버린
“사실 이전까지는 지성이와 직접적인 친분이 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성이의 매니저가 제 제자기도 하고 친하다 보니 이런 저런 일에 대해 저에게 의논을 자주 해왔었지요.
2005년 세계청소년 대회 때문에 네덜란드를 갔을 때 지성이와 같이 있었는데 그 때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가야 하는지 아니면 첼시나 리버풀을 가야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근데 감독의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봤는데 젊은 선수들이 많고 감독의 성격이 급한 첼시보다는 전통적인 명문 팀이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퍼거슨 감독이 있는 맨유가 낫겠다는 판단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맨유쪽으로 권유를 했지요.
‘물론 첼시가 더 많은 돈을 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년에 우승도 한 좋은 팀이지만 첫 째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독의 스타일이나 성격을 파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젊은 선수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줄 수 있는 퍼거슨 감독이 낫지 않겠느냐. 퍼거슨 감독 같은 경우는 너한테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는데 뭔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감독이 직접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네가 올해는 베스트로 못 뛰고 50%만 뛰어도 내년에는 얼마든지 베스트 멤버로 뛸 수 있다. 게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명문팀 입단은 너 이전에도 없었을 뿐더러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맨유를 권유 했는데 지성이하고 부모님하고 매니저하고 상의를 해서 결국은 맨유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레알 마드리드를 보러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있다가 결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맨체스터로 따라 갔죠.”
“지성이가 팀에 합류하자마자 2부 팀하고 지방에서 경기를 했는데 적응을 못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지성이를 불러서 조용히 얘기를 했어요.
‘너 장기 둘 줄 아느냐.’고 하니까 둘 줄 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장기에서 보면 옆에서 훈수 하는 사람이 더 수를 잘 보지? 내가 훈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들어라.’고 말하고 플레이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니가 지금 왼쪽에서 라인 따라 앞뒤로만 움직이고 있는데 감독의 지시가 있었냐?’ 라고 물어보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른쪽에 있는 호나우도 움직임을 봐라. 쟤는 중앙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다양하게 움직이는데 너는 왜 수비가 막고 있는데 왼쪽에서 볼을 올려주면 앞으로 뛰려고만 하느냐. 니가 특별히 스피드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힘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움직임을 다양하게 해야 한다. 만약 뛰면서 볼을 받고 싶으면 그 공이 미드필드를 거쳤을 때 뛴다던지 해야지 왜 공이 뒤쪽에 있는데 자꾸 무리하게 뛰냐.
그리고 수비가 뒤에 있으면 볼이 들어올 때 중앙 쪽으로 나와 주면 수비가 혹 따라오면 그 쪽으로 공간이 나서 순간적으로 파고들 수도 있는 것이고 수비가 따라 오지 않으면 여유 있게 볼을 잡아서 돌아설 수도 있는 것이니 다양한 움직임을 해야 너가 편해진다.’고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성이가 역시 영리한 것이 그 다음날 연습을 하는데 벌써 움직임이 달라져 있더라구요. 지금은 현지에서도 움직임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너무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하구요.”
새로운 도전을 향해 떠나는 태극전사와 K리거 들에게...
“요즘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될 점은 2002년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얻고 게임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 감안해서 준비를 해야 되고 마음가짐을 바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심한 파울에 대한 부분이 가장 걱정이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옐로우카드가 나올 상황에서도 바로 레드카드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 동안 국내 프로 경기에서도 팬들에게 축구의 진정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자세를 항상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세우는 플레이 보다는 매 장면마다 팬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하는데 좀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한국축구가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서 앞으로는 후배들이 세계 대회 나가는 데도 세계 진출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현재 대표선수 여러분들은 그런 사명감을 갖고 국내 리그를 할 때나 독일 월드컵에서나 늘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한국 축구 파이팅! K리그 파이팅!”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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