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최영일

 

 

 

생년월일

1966-04-25

 

 

 

181 Cm

 

 

 

몸무게

76 Kg 

 

 

 

포지션

DF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9-1995

현대

206

1

3

1996

울산 현대

31

2

2

1997-1998

부산 대우

24

0

1

2000

안양 LG

5

0

0

266

3

6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1994-1998

성인 대표팀

55

0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우승

1996, 1997, 2000

리그컵 우승

1995,1997, 1998

K리그 베스트11

1993, 1995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월드컵 본선

1994, 1998

아시안게임 본선

1994


월드컵 특집 K리그의 전설 그 세 번째 순서는 94년 미국월드컵과 98년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던 90년대 최고의 스토퍼 최영일 선수입니다. 1989년부터 2000년까지 12년 간 프로선수 생활을 했으며 두 차례의 K리그 베스트 11과 한 차례의 리그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축구를 시작했던 어린시절의 이야기부터 지도자로 나선 현재의 모습까지, 기억 한 구석에 있던 추억의 책장을 다시금 열어젖힙니다.

새벽 5,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지만 한 번 떠진 눈은 도통 다시 감기질 않는다. 늦잠한 번 푹 자보는 것이 소원이건만 습관이란 것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어느덧 옷을 차려 입고 제자들이 있는 동아대 축구부로 향한다. 어김없이 같이 하는 아침운동, 학생들은 감독의 이러한 부지런함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실함과 꺾이지 않는 의지 하나로만 버텨 온 최영일이었다.


90
년대, 홍명보와 함께 한국의 수비라인을 담당하며 최고의 스토퍼로 이름을 날린 최영일. 그는 현재 동아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2000 5월 현역에서 은퇴 후 바로 공부를 시작해 지도자 자격증을 땄고 2001년부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비록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던 홍명보와 비슷한 세월을 보낸 덕에 팬의 기억 속에 깊이 남겨지진 않았지만 K리그와 대표팀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꾸준한 활약은 전설이 되기에 충분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최영일은 부지런한 선수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 스스로도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원동력이라 이야기한다. 한편으로는 참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런 ‘부지런함’은 그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 였을런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제 아침 기상시간은 4였습니다. 신문배달을 해야 했죠. 실은 저희 집 가정환경이 참 어려웠습니다. 제가 갓난아기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제 위로 누나가 세 명 있었는데 어머니 혼자서 네 명의 자식을 키워야 하셨고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누나들이나 저 역시 풍족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죠. 얼마 전 하인즈워드가 방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지 않습니까? 그 하인즈 워드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어요.


 
“하지만 제가 그래도 철은 있었는지 신문배달도 하면서 어린 나이 때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었어요. 그 어린 시절의 부지런함, 그 습관들이 결국은 제 인생의 지지대가 되어 주었죠. 학창시절 축구를 배워 오면서도, 프로팀에 입단하고 대표팀에 발탁되고 나서도, 은퇴 후 감독이 되고서도 언제나 성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지칠 때 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저 스스로를 다잡을 수가 있었어요.” 

 
최영일이 축구를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터다. 남해가 고향인 그는 두 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건너왔고 장산 초등학교를 다니던 5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그저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뛰고 공차는 것이 좋았던 최영일이었다.


 
“제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축구하고 운동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좋아서 이고, 두 번째는 제가 당시만 해도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서 애들의 놀림을 많이 당했는데 축구를 하면서 살을 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이유는 營?축구부원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던 우유 때문입니다.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삼각형 팩으로 포장된 우유가 있는데 그걸 운동 마치고 매번 먹을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다른 이유보다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 축구를 했었습니다.


 
이 후 최영일은 동래중-동래고-동아대를 거치며 축구선수생활을 계속했다. 점점 축구를 배우면서 그 재미에 빠져들었고 어린 시절부터 습관이 된 ‘성실함’과 ‘오기’는 그 재미가 실력이 되도록 뒷받침 해 주었다. 무엇보다 축구선수만큼 재미있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교까지 진학하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 왔다.


 
하지만 1988년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최영일은 국가대표선수라면 의례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청소년 대표나 대학선발 대표팀 경력 한 번 쌓지 못했다. 그렇게 특출 나거나 부족하지 않은, 평범한 수비수들 중 한명이었던 것. 어릴 때부터 그를 그렇게 주목하던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프로팀 울산현대에 입단하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자신의 진가를 입증시켜나갔다.


1988년 당시 신인드래프트에서 저는 현대팀에 2순위로 지명되었습니다. 전체 2순위 정도 되었으면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을 텐데 그냥 팀 2순위에 불과했죠. 참고로 현대팀 1순위는 지금 광주상무 수석코치로 있는 이수철이었습니다. 공격수였는데 첫 해 4골을 넣으며 괜찮은 활약을 했었어요.


 
“비록 큰 주목도 받지 못했고 당시 구단 위치도 집에서 먼 강원도였지만 저는 프로팀에 입단했다는 것이 마냥 기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다고 다 프로팀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축구선수로서 더 큰 무대에 나서고 더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점은 벅찬 감격이었어요.


 
하지만 입단과 함께 참가한 첫 동계훈련에서 불행이 찾아왔다. 바로 발목부상을 당하며 두 달 동안 깁스를 하게 된 것. 입단과 함께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야 할 신인에게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당한 부상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었다. 최영일 스스로도 조바심이 났었다.


“처음으로 참가한 동계훈련에서 바로 부상을 당하니 참 난감했죠. 불안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시 감독이셨던 김호감독님께서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매번 부상부위 점검해 주시고 ‘조바심 내지 말고 부상회복에만 전념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셨죠. 마치 아버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그러한 감독님의 배려 속에 무리하게 몸을 쓰지 않아도 됐고 저도 마음을 놓고 재활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두 달 만에 후유증 없이 부상에서 회복할 수 있었죠. 선수생활을 해 오면서 많은 감독님을 겪어 왔고 감독님들마다 다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선수 개개인에 대한 배려나 보살핌은 김호감독님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이 드네요. 저에게는 참 고마운 은사님이십니다.


 
비록 팀 동계훈련은 부상으로 걸렀지만 최영일의 프로 첫 시즌은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그 시즌 팀의 다섯 번째 경기인 유공과의 강릉경기에서 선발출장하며 프로데뷔전을 치른 뒤 줄곧 주전 자리를 지키며 1989년 시즌동안 29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던 최영일의 모습과는 달리 소속팀인 현대는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9시즌에서 6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90년에도 5위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최영일에게 큰 힘을 보태주었던 김호 감독은 1990년을 마지막으로 현대의 지휘봉을 내려놓게 되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팀 분위기 속에서도 최영일의 입지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단단해졌다. 팀의 수비-허리라인은 최영일, 정종선, 윤덕여를 중심축으로 신연호등이 합류하며 재편되었고 1991시즌, 울산현대는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 리빌딩의 중심에 바로 최영일이 있었다. 그리고 소속팀에서 다져진 입지는 곧 외부적인 성과로도 드러났다. 바로 1991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된 것이다.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대표팀유니폼을 입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지금껏 청소년대표 한번 뽑혀본 적 없이 그저 평범한 선수로 뛰어 온 제가 비록 2군이지만 대표팀에 뽑혔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어요. 그만큼 감격적이었고 기뻤죠. 그 때 대표팀 발탁을 계기로 정말 축구선수를 하는데 있어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뭔가 이뤄지는 것이 있다 보니 더 큰 꿈에 대한 동기부여도 되었구요. 비록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거나 상을 탄다거나 이런 업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프로리그에서 꾸준히 활약을 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구나’라는 것도 깨달았죠.


 
프로리그에서도 최영일의 상종가는 꾸준히 이어졌다. 1992시즌 9월에는 대우와의 경기에서 프로데뷔골을 뽑아냈고 1993시즌에는 전경기, 35경기0 무교체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첫 베스트 일레븐 수상과 함께 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진 타이틀이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경기에 출전한 선수에게 주는 모범상은 ‘부지런함’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던 최영일에게 특별히 감회가 깊은 상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4, 최영일은 대표팀 상비군이 아닌 대표팀 1진으로 발탁되어 미국 월드컵에 참가하는 영광까지 맛보게 된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큰 주목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모두가 꿈꾸는 그 자리까지 묵묵히 올라선 것이었다.


 1993
10,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 월드컵 예선은 지금까지도 많은 축구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극적인 드라마다. 우리에게는 ‘도하의 기적’을, 일본에게는 ‘도하의 비극’을 안겨주었던 이라크의 극적인 대 일본전 동점골은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인상 깊은 사건이다. 하지만 그런 극적인 순간에 최영일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최영일은 대표선수 1진이 아니었던 것. 이후 12월에 발표한 25명의 개편된 대표팀명단에도 최영일의 이름은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영일의 월드컵 출전은 추측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극적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2월 미국전지훈련을 앞두고 였습니다. 축구협회에서 대표팀에 발탁이 되었으니 미국전훈을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정말 놀랐죠. 하지만 앞서 대표팀 주전 수비수였던 박정배정종선이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해 전지훈련에 같이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궁여지책으로 저를 찾게 된 것 이더라고요. 그 이유야 어찌되었던 저는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정말 기뻤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어요. ‘너는 잠깐 훈련 파트너 해 주는 것일 뿐이다., ‘따라가 봤자 박힌 돌 빼지 못한다.’이런 이야기에 심지어는 ‘괜히 나중에 아쉬워하지 말고 전지훈련 가지 마라.’이런 말까지 들리는 겁니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고 비참해지더군요. 분명 기술위원회에서는 제 가능성과 능력을 보고 판단한 것일 텐데 말이죠. 출국을 하면서 다짐했습니다. 절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줘서 충분히 뛰어난 선수임을 증명하겠다고... 결국 오기로 가득 찼던 제 자신을 다잡으면서 후회 없는 활약을 펼쳤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2
20일부터 3 19일까지 약 한 달간 진행된 전지훈련에서 한국대표팀은 총 6차례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 기간 동안 콜롬비아, 미국대표팀과 비기고 미국 클럽팀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나름대로 긍정적인 성과를 이뤄냈고 최영일은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기간을 거치는 동안 최영일은 어느덧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주축수비수가 되어 있었다.


월드컵을 앞둔 1994 5, 대표팀은 카메룬 대표팀, 브라질의 인터나치오날 클럽, 독일의 레버쿠젠과 각각 두 차례씩 6번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 가운데서 최영일 5경기를 풀타임 출전했다. 홍명보, 정종선, 박정배, 강철, 이종화 등이 버티고 있던 당시 수비라인에서 5경기 출전기록을 세운 이는 최영일을 제외하고는 홍명보 뿐이었다. 불과 4개월 전에는 대표팀 엔트리에도 들지 못하던 선수가 어느덧 주전 수비수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극적인 반전이었다.

 

“그냥 제가 박힌 돌 다 빼버린 거죠. 하하.

 

기존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갑작스런 대표팀 승선, 월드컵 엔트리는 물론 주전 수비수로의 도약. 끝없이 질주하던 상승세를 안고 최영일 94월드컵이 열리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최영일이 대표팀에 승선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기회를 제공한 박정배와 정종선도 그 미국행 비행기에 같이 몸을 실었다는 사실. 아무튼 최영일의 월드컵 참가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함께 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노력하는 최영일이었기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86년 대회에 이어 3회 연속 진출이자 통산 네 번째로 밟아보는 월드컵 무대였다. 좌절을 맛보며 경험도 쌓았고 볼리비아라는 확실한 1승 제물도 있었던 만큼 내심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본선무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찾은 것만큼은 소중한 성과였다.

 

조별예선 첫 번째 상대인 스페인, 지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맞붙어 0:3의 완패를 안겨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물러설 순 없었다. 같은 조에 지난대회 우승팀이 독일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페인전에서는 반드시 무승부 이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명승부가 펼쳐졌다.

 

경기에 나서기 전 라커룸에서 마지막으로 경기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의 기를 팍 죽여 놓는 소리가 들려왔죠. 반대편 스페인 라커룸에서 울려 퍼지는 기합소리가 그렇게 클 수가 없는 겁니다.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으니까요. 같이 줄을 서서 경기장에 입장하는데 완전히 압도당한 느낌이었죠.”

 

경기 초반은 그렇게 수월하지가 못했습니다. 긴장도 많이 되고 주눅이 들어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경기 중반이 넘어서며 상대의 발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 느껴지면서이거 잘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전반 말미에 나달이 고정운을 잡아채며 퇴장 당하자 승리가 눈앞에 온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개인기술과 전술능력으로 한국을 압도했다. 후반 초반에 내준 두 골. 순식간에 점수는 0:2가 되었고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에 대한 꿈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제가 그 경기에서 맡은 선수가 살리나스였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주전 공격수였는데 그 때 참 대단하다고 느낀 것이 제가 아무리 이 선수를 귀찮게 굴고 괴롭혀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모습에 제가 당황했죠. 살리나스는 수비수와의 신경전에서 이기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그 선수에게 첫 골을 내 주었고 우리 수비는 정신없이 흔들리다 다시 고이고에체아에게 두 번째 골을 내주었죠.”

 

남은 시간은 제가 굳이 이야기를 안 해도 되겠죠? 홍명보의 프리킥과 서정원의 동점골,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승부였으니까요. 정말 체력과 정신력으로 일궈낸 승리였습니다. 그 때의 감격 역시 2002년 월드컵 못지않았어요. 유명하고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상대로 그렇게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는 것만 해도 정말 기뻤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감회가 새롭죠.”

 

스페인과의 경기를 무승부로 마치며 대표팀의 16강 진출에는 청신호가 켜졌다. 두 번째 상대인 볼리비아만 잡는다면 와일드카드제도가 있었던 당시 16강 진출은 거의 확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의 사기도 충천했다.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며 얻은 심리적 상승세였다. 하지만 볼리비아전,  8분이나 주어진 로스타임 동안에도 득점은 터지지 않았고 땅을 치는 아쉬움만이 남겨졌다.

 

난타전이었습니다. 전후반 통틀어 두 팀 모두 정신없는 공격을 주고받았죠. 우리는 다음 경기가 독일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볼리비아를 잡아야 했고 볼리비아는 이미 독일에 1패를 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에 치열한 난타전은 이미 예고돼 있었던 승부였습니다.”

 

저는 그 경기에서는 선발로 나서지 않았어요. 공격에 집중하기 위한 감독님의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많은 찬스를 잡으면서도 수비에서 문제가 드러났고 결국 제가 후반 26노정윤과 교체해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김호감독님께서일단 수비가 안정되어야 승리를 노릴 수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에 자리 잡고 흔들린 수비진을 안정시켜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득점이 터지지 않았고 아쉽게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죠.”

 

마지막 독일전, 벼랑 끝 승부였다. 승리하지 않는다면 16강 진출의 가능성은 없었다. 3무승부로는 16강 진출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년도 우승팀 독일. 부담감은 상당했고 곧 경기력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전반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세 골을 내주고 라커룸에 들어오는데 정말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 그렇게 제가 못나보였을 때가 없었어요. 선수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왔고 코칭스태프도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본래 김호 감독님이 말씀이 많은 편은 아니신데 그 날은 특히 더 심했죠. 결국 후반전 나서기 전에 하신 한마디가이왕 여기까지 온 거 부담가지지 말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기량 후회 없이 펼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후반전 경기. 전반전에 뛰었던 한국이 아니었고 역시 전반전에 펄펄 날던 독일은 온데 간데 없었다. 마치 두팀의 전력이 맞바뀌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후반전 45분 동안 한국은 쉴 새 없이 독일을 밀어붙였고 독일은 제대로 된 공격기회 한 번 잡지 못했다. 황선홍 7분 만에 한 골을 따라붙었고 홍명보가 후반 18,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동점골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전반전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경기를 마쳤건만 저희 선수들이 독이 오를 데로 올라 있었나봐요. 후반전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죽기살기로 달려들었고 독일은 전반전 세 골을 넣은 뒤 정신적으로 안이해졌죠. 특히 명보가 두 번째 골을 넣고 후반 중반이 넘어서자 독일 선수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후반전부터 제가 클린스만을 전담마크 했는데 전반전에 그렇게 무섭던 선수가 후반전에는 한 발 떼기도 힘들어  하더라구요.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몰아 붙였습니다.”

 

후반전은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골을 넣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진으로 공을 보내줬고 상대편 골키퍼가 무수한 선방을 했다는 것. 그리고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경기를 치르면서 충분히 역전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속상했죠.”

 

2002년 월드컵, 우리대표팀의 전력을 설명하는 아이콘은 압박과 체력이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이 압박을 휘한 전제요소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체력이 바로 월드컵4강 성과의 결정적 요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94년 월드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 독일전의 인상적인 승부와 함께 94년 월드컵에 참가한 우리 대표팀이 남겨준 기억은 지치지 않는 체력이었다. 체감온도가 40도를 훌쩍 넘어서는 당시의 더위에서 체력 없이 버텨낼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스페인전과 독일전을 치른 댈러스 구장은 그라운드가 지표면보다 아래에 있는 구장이었습니다. 땅을 파서 그라운드를 만들고 그 주위로 스탠드를 올린 형식이었지요. 문제는 경기장의 구조가 그렇다 보니 바람이 전혀 안 불고 뜨거운 열기가 그라운드 안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사우나에 온 듯 한 기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관중석에서도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을 정도니 말 다했죠

 

자연히 승부의 관건은 체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그 무더위를 더 참고 견뎌낼 수 있느냐가 승부의 분수령이었죠. 결국 체력의 승자는 우리 한국이더군요. 아무래도 사계절이 뚜렷하고 비슷한 무더위를 많이 경험해 본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지 않았나 싶네요. 유럽 같은 경유에는 그런 날씨가 잘 없으니 훨씬 적응하기 힘들었을 테고 그런 환경적 요인이 심리적, 체력적인 우위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월드컵에 참가하기 직전,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님이 큰돈을 들여서 저희한테 보양식을 마련해 주셨어요. 어찌 보면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그 약을 먹었던 것이 좋은 체력 갖출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하하.”

 

94년 월드컵, 비록 아쉬움이 남았지만 최영일에게는 국가대표 붙박이 수비수로의 도약을 확인한 대회였다. 이후 98 프랑스월드컵까지 꾸준히 대표팀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프로무대에서도 물오른 기량을 선보였다. 스위퍼 홍명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수비수라는 칭호가 붙었고 대인마크에서는 그를 쉽게 뚫을 자가 나오지 않았다. 묵묵히 걸어왔던 축구인생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던 시절이었다.

 

1995년 울산현대의 유니폼을 입고 최영일은 첫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된다. 비록 정규리그 우승은 아니었지만 정규리그 개막 전에 열린 아디다스컵에서 우승트로피를 차지하며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고 그해 생애 두 번째로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도 맛봤다. 그리고 이듬해, 이번에는 컵대회가 아닌 정규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사실 컵대회 우승은 크게 감회가 남지는 않습니다. 단기전 승부였고 딱히 분위기를 느낄 것도 없었죠. 하지만 이듬해에 수원삼성을 꺾고 차지한 정규리그 우승은 정말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제 축구인생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순간 중 하나죠.”
 
96
시즌 울산의 행보는 기복이 매우 심했었다. 당시 리그제도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최종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는 양대리그 형태. 울산은 전기리그에서 11 3 2패 승점 36점을 기록, 2위 포항에 승점 1점을 앞서며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김현석, 김기남이 이끄는 공격진과 신홍기, 최영일 등이 버티고 있던 수비진의 완벽한 조화가 우승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후기리그에서 울산은 끝없는 부진에 빠졌다. 전기리그 우승으로 목표의식을 상실했고 매 경기 주력을 투입하기 보다는 신진선수들을 테스트 하는 기회를 자주 마련했다. 결국 후기리그에서 울산이 차지한 순위는 최하위인 9. 전후기리그의 어쩔 수 없는 폐해가 단적으로 드러난 울산의 성적이었다.

 

사실 후기리그에 최하위를 하면서 팀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잃어버렸었구요. 하지만 정작 챔피언 결정전이 다가오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울산현대가 84년에 창단한 이후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만큼 절박했고 구단 관계자들의 기대도 컸고... 더구나 상대가 재계 라이벌인 삼성이었지 않습니까.”

 

11 9, 울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울산과 수원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 하지만 울산현대의 생각대로 경기가 풀리지는 않았고 전반 21분에 터진 수원 조현두의 한 골로 승부는 갈렸다. 0:1. 울산으로서는 2차전 수원원정에서 두 골차 이상의 승리를 거두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2차전을 앞두고 분위기는 비장했습니다. 신생팀에게 우승컵을 내준다는 것은 기존팀의 체면상으로도 말이 아니었고 삼성에게 진다는 것도 구단측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었죠. 감독님께서물러설 곳은 없다.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붙여라라는 주문을 하셨습니다. 함께신생팀이니만큼 경험이 부족하니 우리가 몰아붙이면 당황해서 경기운영의 리듬을 잃어버릴 것이다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어요.”

 

고재욱 감독의 작전은 주효했다. 초반부터 양 팀 선수들은 거칠게 맞붙었고 한 골의 리드를 가지고 있음에도 수원은 침착하게 경기를 운영하지 못했다. 김현석, 유상철, 황승주의 발끝에서 나온 세 골, 스코어는 3-1이었고 울산은 우승컵을 차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기내용은 그렇게 추억할 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이어진 거친 경기 가운데 두 팀 합쳐 5명의 선수가 퇴장을 당했고 계속해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부끄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엄청난 혈투였습니다. 퇴장도 많이 나왔고 몸싸움도 속출했죠. 그런 경기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두 팀 선수들 모두 너무 흥분해 있었습니다. 수원은 수원대로 창단 원년우승이라는 꿈에, 우리는 우리대로 청단 첫 우승이라는 꿈에 욕심이 컸죠. 그런 경기가 벌어진 것만큼은 죄송스럽지만 우승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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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 하나 하자면 우승을 차지한 다음에 저희 직원들을 故정주영 회장께서 현대본사에 초청해서 축하를 해 주셨어요. 긴 테이블에 선수단을 빙 둘러 앉혀 놓고는 잘했다며 박수를 치시는데 자꾸 손이 어긋나더라구요. 당시 대선을 마치고 몸이 상당히 안 좋으실 때  였는데 그 모습을 보며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96년 우승을 차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최영일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부산으로 팀을 옮겼고 98년까지 세 시즌 동안 부산에서 활약했다. 대표팀에 줄곧 불려 다니는 통에 리그 출장기록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팀 내에서의 입지는 여전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지역예선에서부터 열심히 경기를 펼친 뒤 프랑스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프랑스월드컵에서 최영일이 출전한 경기는 단 한차례. 그것도 0:5의 참패를 맛 본 네덜란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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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경기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온 스탠드를 붉은 색으로 물들인 관중의 응원, 참 멋졌지요? 하지만 전 그 모습을 현장에서 1998년에 경험했어요. 다만 색이 붉은 색이 아닌 오랜지 색이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습니다. 경기전 워밍업을 할 때만 해도 관중석이 듬성듬성 차 있었기 때문에 실감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그라운드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오랜지색의 물결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공만 잡으면 아유가 들리고 네덜란드가 공격만 하면 터질듯 한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데 주눅이 안 들 수 없었죠. 더구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역전패를 한 터라 팀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는 상태였는데...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죠. 두 골을 넣고  세 골을 넣고 그래도 네덜란드는 지난 월드컵 독일처럼 헤이 해 지지가 않았습니다. 결국엔 다섯 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기죠. 제가 마크했던 베르캄프가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것만을 느낀 채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지금도 오랜지색만 보면 그 때의 악몽이 떠올라요.”

 

98월드컵을 치렀을 당시 최영일의 나이가 33. 최영일은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고 K리그 무대에서도 98년을 마지막으로 부산을 떠났다. 많은 나이로 선수로서의 입지는 많이 줄어들었고 1999년 중국 수퍼리그에 한 해 동안 머문 뒤 2000년 안양에 돌아와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비록 마지막이 그리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선수로서 후회는 없었다.

 

1989년부터 2000년까지 K리그 11시즌을 소화하는 동안 최영일 266번의 경기에 출전했다. 사실상 선수생활의 황혼기였던 2000년을 제한다면 매 시즌 평균적으로 26차례의 게임에 출전했다는 수치가 환산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평균의 기복이 별로 없다는 사실. 한 시즌도 부진한 기록을 남긴 적이 없는 꾸준함이 기록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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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수생활하면서 정말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큰 부상 한 번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프로에 입단하며 당한 발목부상, 그것이 제가 깁스를 해야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부상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자부하는 거지만 철저한 자기관리가 부상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부상을 당하기 쉬운 부위는 훈련이 끝난 후 개인적인 시간에 따로 근력을 길렀었거든요. 선수로서 부상 없이 은퇴를 한 다는 것이 정말이지 어렵고 힘든 일인데 돌이켜 보면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어느덧 은퇴를 하고 동아대감독 지휘봉을 잡은 지 6년차. 선수보다는 감독의 자리가 더 익숙해지고 그 책임감도 더 커졌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철학은 선수시절과 변함이 없다. ‘성실함그 명제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분명 좋은 결실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최영일이다.

 

프로에서 은퇴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백이 크지 않았던 것이 애들을 가르치면서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선수생활을 해 오면서 가졌던 성실함과 꾸준함, 그 속에 녹아있는 체계와 과정을 선수들의 몸에 배도록 하는데 지도의 역점을 두고 있어요. 대학생이지만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어린 나이거든요. 이 시기에라도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다면 축구 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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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이러한 지도방침이 팀 성적에 나쁘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당장 한 경기 한 경기에 집착하는 것 보다 꾸준하게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법은 결국 꾸준한 팀 성적의 상승을 불러왔다.

 

지방대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동아대 축구부는 명문입니다. 김태영, 윤정환을 비롯해 여럿 대표선수들도 배출했고 대학선수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왔어요. 처음에 이런 팀을 맡은데 조금 부담은 있었지만 제 원칙만 지킨다면 명문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꾸준히 전국대회 4강권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뭐 들리는 소문에 상대팀이 우리를 만나기 싫어한다는 이야기 들릴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하하

 

올해가 끝나면 다시 몇 달 동안 해외로 나가 지도자에 대한 여러 공부를 더 할 계획입니다. 아직은 부족한 게 많아요. 비록 선수생활을 끝났지만 지도자로서는 갈 길이 멉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져왔던성실함이라는 좌우명을 지도자생활을 해 오면서도 지켜나간다면 좋은 모습으로 여러분들 앞에 다시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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