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이춘석

 

 

 

생년월일

1959-02-03

 

 

 

177 Cm

 

 

 

몸무게

71 Kg

 

 

 

포지션

FW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3, 1986-1987

대우

48

11

3

1985

상무

19

5

1

67

16

4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우승

1987

 

 

 

K리그 준우승

1983

 

 

 

K리그 베스트11

1983

 

 

 

K리그 모범상

1983


그라운드를 달리던 고독한 야생마! - 이춘석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왠 중년의 시골 남자 하나가 등에 커다란 괘짝을 짊어진 채 걷고 있다. 행여 비가 맞을까, 이미 전신이 흠뻑 젖었건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등에 진 괘짝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뺨 밑으로 빗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린다. 잠시 힘이 들었는지 처마 한켠에 섰다가 이내 다시 등에 괘짝을 짊어지고 어느덧 해가 져 어둑한 79년 신촌의 로터리를 나선다.

 

저 춘석이 좀 보러 왔는데요.

 

농사만 짓던 시골 농부에게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조카는 큰 자랑거리였다. 꽤 넓은 캠퍼스에서 무거운 괘짝을 지고 선수단 숙소를 찾아오는 일이 쉽지 않았음에도 이 농부의 목소리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춘석아! 누가 너 찾아 왔다!

 

이 남자. 그만 내려놓을 때도 되었것 만 여전히 무거운 등짐을 지고 품안에는 보약 한재를 안아 쥐며 연세대 축구부 2학년 이춘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삼촌!

 

! 그래, 춘석아. 나다. 자 이거부터 얼른 받아라.

 

삼촌....

 

저기 춘석아....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고 견뎌라. 어머니가 이걸 챙겨주시더구나. 빼먹지 말고 꼬박 꼬박 챙겨 먹어...

 

누가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엉겁결에 나온 이춘석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등짐을 내려놓는 삼촌을 보고만 있었다. 애써 눈물을 참던 춘석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때가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정말 앞만 보고 달려 왔는데 어느 날 그냥 다른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공 꾸러미를 이렇게 등에 짊어지고 먼지가 가득 찬 학교 운동장에 연습을 하러 갈 때면 저쪽 그늘에 학생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긴 벤치에 한손을 뒤로 기대고 앉아 남학생, 여학생들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어가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나는 색다른 내 인생을 찾아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 드렸어요.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었는데 시골에서 삼촌이 사물함을 하나 맞춰가지고 손수 들고 오셨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선수들 사물함이 지급되지 않고 각자가 알아서 나무로 만들어서 썼는데 그 비가 억수로 오는 날 그걸 짊어지고 오신거에요. 한 손에는 나 먹으라고 보약을 들고.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그래서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이춘석 전 대표팀 코치의 눈시울은 뜨거워져 있었다. 이미 십 수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이날의 기억은 아직까지 그의 가슴에 남아 어떤 한스러움으로 서러움으로 그리고 그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이춘석(李春錫)

 

1983년 프로 원년, 그 열정의 그라운드를 달리던 고독한 야생마! 그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결코 포기 하지 않았던 근성과 쉼 없이 달리던 성실함이었다.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그의 축구 인생은 안양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1959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이춘석은 그저 또래보다 키가 큰 말라깽이 소년이었다. 그 시절 그저 아이들라는 이름으로 동네 꼬마들이 몰려다니며 놀던 때 춘석은 제법 빠른 발로 시골 길을 달리던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그저 평범한 시골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김진강 선생님은 하나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그러셨습니다. 「내가 이제 안양 중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는데 너 방학이 되면 그곳으로 와서 축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아 보려무나.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다.」그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당시에 키가 174cm 정도 되었고 시골 동네긴 해도 육상을 제법 하다보니까 발은 빨랐었거든요. 아마 그런 잠재력을 높게 평가 하셨나 봅니다.

 

그해 여름 방학이 되자 춘석은 용인을 떠나 안양에 입성했다. 주어진 테스트 기간은 한 달. 이전 단 한 번도 정식으로 축구를 해본 적이 없는 춘석은 김진강 선생의 말 하나만을 믿고 안양 중학교 축구부 입단 테스트에 응시를 한 것이다. 당시 전국 대회 21연승을 하며 중학 최강의 팀으로 평가 받던 안양 중학교 축구부 모집 테스트에는 2명을 모집하는데 50명이 몰리며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모두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었던 탓에 춘석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한 달 동안 테스트에 통과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님들 눈에 들기 위해 그야말로 목욕도 한번 못 갔습니다. 운동이 끝나고 모두 씻으러 갈 때 저는 계속 연습을 했어요. 불안해서 목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욕을 하는 동안 잊어 버릴까봐. 그날 배운 거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뜨거운 뙤약 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혼자 계속 연습을 했습니다. 누구도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지를 않았어요.

 

워낙 기초가 되어 있지를 않으니까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냥 옆에 잘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이 어떻게 하는 가를 곁눈질 하며 따라해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공을 찼던 친구들이라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따라 갈수가 없잖아요. 하루에 4번씩 빠지지 않고 훈련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어요. 나는 꼭 안양 중학교 선수가 되겠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연습경기에서 저 혼자 6골을 넣어 입단 테스트에 통과했습니다.

 

한 달만에 쟁쟁한 중학 선수들을 제치고 입단 테스트에 통과한 이춘석은 정식으로 축구부원이 되며 중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한 경기, 한 경기 출전 횟수가 늘어 갈수록 춘석은 축구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종덕 선생이 감독으로 있는 안양 공고에 진학을 하기 위해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아마 그분도 당장의 모습보다는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셨을 겁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꽤 장신에 속했고 발이 제법 빨랐으니까요.”  

 

 그의 소망대로 그는 정종덕 감독의 부름을 받아 안양 공고에 진학, 축구 선수로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장운수 감독을 처음 만나게 된다.

 
안양 공고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운수 감독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 말투가 그러셔습니다, 『 니보라우! 그것밖에 못하겄어?』 이북 분이셨는데 당시 축구계에서 유명할 정도로 엄한 호랑이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분이 저를 제대로 된 선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안양 공고에서의 선수 생활은 그에게 꿈을 꾸게 했지만 한편으로 고단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안양 지역의 공장들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운영 되던 안양 공고 축구부는 무척이나 열악한 조건에서 생활해야 했다. 먹을 것이 변변하지 않고 물자가 귀하던 시절, 그는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훈련에 매진했다.

 

거기 선배 형들 중에 고아가 많았어요. 언제 학교를 들어왔는지 나이도 알 수 없고. 무척 무서웠지만 정도 많았고... 식사 시간이 되면 반찬이라고 해봐야 한쪽에 국 대신 라면이 나오고 통장, 어묵 조금, 김치가 다였지요. 그래도 라면을 먼저 먹으면 그 반찬이다 없어지니까 라면은 그대로 두고 그 반찬부터 먹는 거에요. 그러고 나면 나중에 라면이 퉁퉁 불어 있는데 뭐. 그거라도 없어서 못 먹고. 밥을 하고 나면 나오는 그 누룽지는 고참들 몫이고.... 그거 한쪽 얻어 먹으려고 참...

 

한 겨울에도 훈련은 있으니까 빨래도 계속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손수레에 큰 들통을 싣고서 물을 이렇게 길어 와요. 그다음에 나무를 떼서 그 물을 끓어 온수를 만드는 건데 그게 어디 양이나 많겠습니까? 선수들 명수가 얼만데 형들 다 씻고 나면 아래 학년들한테 돌아오는 게 없으니까 1학년들은 2학년 형들한테 「형, 그물 버리지 마세요...?」 그 형들이 씻은 물에라도 좀 씻어보려고... 빨래는 뭐 당연히 얼음 짱 같은 찬물로 했었지요. 지금이야 운동복이 첨단 소재로 가볍고 뭐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광목 같은 천이라 그걸 세탁하고 나면 손이 다 터져서 피가 철철 나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운동을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야 겨우 집에 돌아가는 고된 생활의 연속, 이춘석에게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축구였기에 한발이라도 더 따라 잡기 위해 그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훈련이 고되기로 유명한 장운수 감독 아래서 그는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매일 4차례이상 되는 훈련에 빠진 적이 없었다.

 

Y자 마크 말이에요. 가슴에 크게 붙어 있는 그 마크가 그때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겁니다. 내가 저걸 꼭 한번 가슴에 달아 보고 싶은데 아니 그거 꼭 한번 달아봐야겠다. 나는 저기로 간다.

 

그렇게 이춘석은 소원대로 연세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장운수 감독과의 질긴 인연은 연세 대학에서도 계속 이어 졌다.

 

이렇게 연세대 훈련하는 걸가서 구경하면 그때 굉장히 자유로워 보이고 왠지 편해 보였습니다. 나도 얼른 저기를 가서 훈련해야겠다. 저기만 가면 이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웬걸요. 내가 연세대 진학하는 그해 장운수 감독이 연세대로 자리를 옮기신 겁니다. 그렇게 그분과 다시 4년을 보내게 된 겁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장운수 감독의 훈련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하루 4차례 고강도 훈련. 그렇게 꿈꾸던 대학에 들어 왔지만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만한 여유도 시간도 이춘석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 유행하던 다방 한 번, 여자 친구 소개 한번 받을 세도 없이 장운수 감독은 춘석을 몰아붙였다.

 

내가 원래 골을 못 넣는 센터 포워드였습니다. 열심히 뛰기는 하지만 골을 넣지 못하는 나를 끝까지 믿고 기용해 주신 것도 그분이었습니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본기가 떨어 질 수밖에 없는데 감독님은 수비수를 등지는 방법, 돌아서는 방법부터 공격수가 가져야할 A,B,C를 하나씩 가르쳐 주시며 나를 진정한 선수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대학무대는 고교시절과는 달랐다. 그간 키가 자라 177cm가 되었지만 신장이 더 이상 그를 돋보이게 하는 무기가 될 수는 없었다. 잘하는 선수가 모인 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노하우와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이춘석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특징은 뭘까? 스피드가 있으니까 그걸 무기로 삼아 줄넘기와 허들을 하면서 점프력을 키웠습니다. 공격수로서 내 큰 키를 활용해서 하나의 강력한 무기를 만들려면 헤딩을 잘하기 위해서 그런 훈련 방법을 선택했지요. 장운수 감독도 그런 나를 위해 포스트 플레이의 전반에 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꿈도 많던 시절 인생이 바쁘고 힘들고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학에 오면서 그는 기술면에서 비약적 향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1979년 방콕 청소년 대회 대표 선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항상 멀리서 꿈만 꾸던 태극 마크를 단다는 희망에 부풀어있던 그에게 예상치 않은 좌절이 왔다.

 

연세대에서 선발된  최승길. 이춘석, 장외룡 3인중 장외룡을 제외한 두 사람이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 것이다. 좌절감에 그는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의식을 잃었다. 안양공고 선배 김태완이 그런 그를 추슬러 숙소로 옮기고 마음을 달랬지만 그가 느낀 상실감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장운수 감독은 그를 사무실로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들을 내가 탈락 시켜달라고 했어. 연고전도 있고 중요한 시합이 많잖아. 맘 잡고 운동 열심히 하라우!

 

그러면서 장운수 감독은 이춘석에게 미즈노 축구화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이미 큰 회의감이 밀려 왔다.

 

그때였습니다. , 고등학교 때는 뒤떨어진 것을 따라 잡느라 그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가면서 내가 이룰 만큼 이뤘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 연대 주변의 화려함에 매혹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팀 탈락하면서 목표도 사라져 버리고 친구들과 한참 재미있을 때 숙소로 9까지 들어가야 하는 생활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공부를 하면 저걸 못 따라 가겠는가? 공부를 해서 다시 시작하겠다. 여기 까지 왔으면 많이 왔다라는 단순한 생각에 의해서 운동을 안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이춘석 1년을 방황했다. 마음이 잡히지를 않았다. 아마 그 비가 내리던 날 삼촌의 모습이 없었다면 이춘석은 그대로 축구계를 떠났을지도 몰랐다.

 

운동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만류하셨었습니다. 그래도 결심을 바꾸지 못했는데 그 뒤주를 메고 오신 삼촌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골에서 나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하시는데 내가 여기서 끝내면 나한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겠구나. 다시 축구화 끈을 동여 맺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다시 운동을 시작한 춘석은 곧바로 기량을 회복하며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선수로 일어선 이상 더 큰 꿈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의 피를 뜨겁게 만드는 목표가 더 이상 없었다.

 

그때는 보통 은행 팀으로 많이들 갔으니까 나도 그냥 그럴려고 했습니다. 주택은행에 입단하려고 계약서를 써들고 가는데 가는 길에 딱 장운수 감독에게 잡힌거에요. 바로 나를 낚아채서 동교동에 있는 대우 구단 사무실로 데려가서 물으시더군요? "너 왜 은행에 가려고 하느냐?"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사장님한테 전화를 해서 바꿔주는 겁니다. 근데 사장님이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시더군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게. 나한테 200만원을 쓰라고 주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대우에 입단했습니다. 그렇게 장운수 감독님하고 질긴 인연이 또 이어졌습니다.

 

인생은 순간에 의해 바뀐다. 그 짧은 순간을 통해 평범한 은행원으로 머물지 모르던 이춘석은 뜻하지 않는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내가 선수로서 눈을 다시 뜨게 된 계기가 하나 있다면 1982년 국내 최초의 유럽 전지훈련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실업팀이었던 대우는 프로 출범을 맞아 프랑스 깐느로 전지훈련을 가게 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지훈련을 통해 대우 로얄즈는 현지에서 판초 곤잘레스라는 코치를 영입하며 새로운 훈련 방법과 시스템을 접목시킨다. 프랑스 1부리그 팀이었던 니스를 4번이나 우승시킨 화려한 전력을 가진 곤잘레스는 당시 대우 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다.
 

지금으로 보면 수석 코치로 오신 셈인데, 선진화된 훈련을 거치며 제 스스로 엄청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훈련이라는 것이 코치의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분이 몸풀기, 슈팅, 전술, 회복까지 모든 게 체계를 가지고 훈련을 진행하는 겁니다. 처음 그런 훈련을 받으면서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장외룡, 정해원, 이태호, 조광래, 변병주, 유태목 등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조차 국가대표 레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탄탄한 전력을 자랑하던 팀에서 살아 남기위해 이춘석은 다시 축구를 처음 시작하던 때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82년 실업리그에서도 장운수 감독은 꾸준히 이춘석을 기용했고 이 기간을 통해 이춘석 83년 출범하는 프로를 향해 가늠쇠를 조준할 수 있었다.

 

장운수 감독이 나를 좋아했던 이유는 새벽에 운동을 나가는 것도 나, 낮에 운동을 나가는 것도 나, 밤에 운동을 나가는 것도 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그런 성실성을 좋아 하셨습니다.

 

이런 그의 성실성은 수퍼리그 첫 경기에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앞서 열린 할렐루야 대 유공의 경기가 끝나고 시작된 포항제철과 대우의 개막 경기에서 대우는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하고 있었다. 후반 시작과 함께 대우의 태호가 골키퍼에게 보내는 백패스를 포철의 이길용이 번개같이 낚아채 득점에 성공시킨 것이다. 그리고 6분 뒤 마침내 이춘석의 프로 데뷔 골이 터졌다. 정해원이 올려준 크로스를 강력한 터닝슛으로 연결시키며 팀을 패배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굉장히 기억에 남지요. 그 첫 경기에서 득점을 하고 나니까 진짜 굉장한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근데 그 첫 골보다 더 강하게 기억나는 골은 두 번째 골이었습니다. 부산 구덕 운동장에서 국민은행을 상대로 했던 경기였습니다. 이재희 선수가 센터링을 올렸는데 그걸 내가 전속력으로 가속도를 붙여서 다이빙 헤딩슛을 했습니다. 지금도 프로 축구 하이라이트 같은 곳에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정말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한 10미터쯤 날아서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상식적으로 사람이 10미터나 날수 없는데도 꼭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날았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도.
 
5 14일 부산 경기 이후로 이춘석의 득점포는 불을 뿜기 시작했다. 중요한 순간 이름  값을 해내며 5골로 전, 후기리그로 치러진 첫 해 수퍼리그의 전반기 득점왕을 차지하며 깜짝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저랑 박윤기, 이길용이 트로이카로 불리며 팬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리 모두 국가 대표 경력이 없던 무명이었는데 기존의 선수보다 새로운 선수들이 나오면서 축구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거지요. 제 평생 그때만큼 방송 출연을 많이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슈퍼쇼나 황인용, 서동숙이 진행하는 아침 프로에다, 가요 톱 텐에 출연해서 시상도 하고 방송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다루니 당시 원년의 관중 수는 매스컴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뛰었고 원년 맴버라는 자부심과 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기술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열정과 정신력만큼은 정말 팬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팬들도 그런걸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찾아 주었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만원 관중이었으니까요. 매일 신문에는 축구가 야구를 압도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었지요. 신문사들은 늘 그런 비유를 좋아하잖아요. 정말 경기 할 맛이 나던 때였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이춘석의 원년 득점왕 등극은 시간 문제였다. 8골로 2박윤기를 멀찌감치 떨어뜨리며 팀의 우승과 득점왕 이라는 영광을 거머쥐려는 순간 신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9 17일까지 꾸준하게 득점하던 그의 발끝이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우의 우승을 저지하기 위해 타 팀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소속팀 역시 페이스가 떨어져 버린 채 그만 득점왕은 박윤기에게 팀 우승은 할렐루야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유공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결국 득점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코너킥 찬스만 되어도 공격수까지 모두 나만 잡으니까 기회가 오질 않더군요. 줄곧 내가 앞서 있었는데 눈앞에서 득점왕을 놓치니 아쉬움도 있었지만 내년에 다시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타이틀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대표 선수들을 제치고 리그 1인자로서 활약을 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바람은 84년에는 상무에 입대하며 끝까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입단했던 1984년 그해 대우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팀이 처음 우승하는데 나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상무 시절은 즐거웠습니다. 당시 부대장이 상무에는 저런 선수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원해서 입단을 했고 주장을 하면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거의 운동만 하고 첫해에 선배들도 잘해주었고... 처음에는 육사에 있다가 지금 상무의 모체가 된 성남의 1기 맴버가 되었습니다. 개관식에 남자 대표로 케이크 커팅도 하고(웃음). 부대장님이 결혼할 때도 오셨고 85년부터는 프로 리그를 나가면서 군대 생활이 빨리 돌아갔습니다.

 

85년 상무 소속으로 프로에 복귀한 이춘석 5 18일 의정부에서 있었던 포항제철과의 경기에서 첫 득점을 올리며 83년 이후 1 6개월 여 만에 프로리그에서 다시 득점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6 26일 대우전에서 친정팀을 상대로 득점하는 등 상무에서 19경기에 출전 5득점을 올렸다. 

 

그렇게 상무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86년 대우에 복귀했지만 9경기 무득점에 그치며 혹독한 복귀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1987년 그가 선수로서 뛰는 마지막 해, 부산 대우는 마침내 챔피언에 오르며 이춘석의 가슴에 있던 한을 풀어 주었다.

  

우리가 한번하자 하면 진짜 어려울 때 한 번에 뭉쳐서 해내는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뭐랄까 완전한 팀의 모습이었다고 할까요? 구단 지원도 정말 좋았습니다. 일단 경기에서 이기면 버스 안에서 바로 수당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 일반 직장인 봉급이 30만원할 때 승리 수당이 200만원이었으니까 타 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지요. 은퇴를 결심한 마지막 해 우승하고 떠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떠밀려서 은퇴하기보다는 아름다울 때 떠나고 싶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역시 선수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했었습니다.(웃음)

 

부산 대우를 떠난 이춘석은 곧바로 모교였던 연대에서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해 대통령배 우승으로 코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년 뒤 다시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며 조광래 감독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조광래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모시기 힘든 감독이 없을 겁니다. 합숙 훈련을 가면 공격 반, 수비 반으로 나눠서 하는데 매번 준비 훈련을 바꿔야 하니까요. 자료가 없는데 짜내야 합니다. 아침이 싫을 정도였습니다. 하루 몇 번씩 하는 훈련이 매번 달라야 하니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밤이면 코치를 불러 선진 축구 비디오 보라고 하시니 정말 맥주한잔 할 시간이 없지요. 거의 코칭스태프가 합숙 훈련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입술이 다 부르틀 정도로 힘든데 그분에 그러셨습니다. 힘든걸 알지만 쉬울 때는 다 한다 하지만 어려울 때 할려면 이런 걸 받아야 한다.?

 

이것이 그의 운명일까? 이춘석은 유달리 한 사람과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아르헨티나로 교환 연수를 떠나게 되나기 전까지 조광래 감독과 함께 했던 그는 연수에서 돌아와 안양LG에 가서도 다시 5년간 그와 행보를 같이 하게 된다. 이춘석의 지도자 수업에 있어 조광래 감독은 확실한 스승이었지만 아르헨티나에서의 1년 역시 그에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 4강을 하니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조금알지만 그때만 해도 아르헨티나에서 한국 축구 우습게 봤지요. 아니 아예 인정 자체를 안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으로 간 코치야 선진 축구 전수자로 인정을 받지만 반대 경우인 내가 가서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달간 나를 버리고 완전히 볼보이로 계속 공을 날라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어떠했는가는 다 소용이 없고 여기서는 진짜 바닥부터 시작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볼보이를 했지요. 그랬더니 한 달 후에 그러는 겁니다. 마음이 되어 있다. 하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기회를 주게 되어 있는 가 봅니다. 그렇게 몇 개월 후 부터는 VIP들이 보는 곳에서 경기를 보게 해주고, 훈련도 같이 할 수 있게 해주고 이야기도 걸어주고 내가 거기서 한 식구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문화적 차이도 있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취를 하는데 훈련장이 너무 멀어서 선수들이 픽업을 해주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함께 어울리다보면 결혼식에 초청도 받고 그러는데 파티를 가서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거에요. 그런 걸 경험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 친한 사람하고 돌아가면서 춤을 추는데 진짜 난감했었지요.(웃음) 아르헨티나 사람은 친절하지만 브라질 사람하고는 틀립니다. 예전에 부강한 국가라는 자존심이 무척 강하지요.

 

거기서 외국은 48시간 소집이 가능하겠구나 하고 느낀 것이 전술, 전략이 완비 되어 있기 때문에 와서 정말 발만 맞추면 되요.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거기서 10세 정도 어린이들을 훈련시키는데 승부에 대한 집착 없이 흥미 위주로 끈으로 서로 손을 묶어서 콘을 놓고 선수 서로가 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겁니다. 수비 조직력을 그렇게 훈련 시켜요. 그걸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에서 저런 것이 가능 할 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와 스타 감독아래 조용한 조력자였던 그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건 본 프레레 감독 부임과 함께 코칭스태프로 전격 발탁 되면서부터였다. 결과론적으로 본 프레레 감독과 함께한 시간은 그에게는 기회였던 동시에 좌절이었다. 짧았던 국가대표 코치 생활은 수장의 몰락으로 커리어 상 약점으로 남고 말았다.

 

내가 대표팀 코치로 발탁 된 배경에 조광래 감독 밑에서 7년을 있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면서 느낀 것이 감독이 밑에 사람 의견을 수용 못하면 외로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감독은 한국의 4강만 알지 현실은 잘 모르는 면이 있습니다. 월드컵 4강을 한 국가가 왜 그러냐? 그걸 이해시키기가 힘이 들었지요. 코엘류 감독도 본 프레레 감독도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감독이 와서 잘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언급이 불필요하겠지요. 다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안 좋은 면만 부각시키고 나쁘게 만 보았다는 점이 아쉽네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는 나름의 열정을 가지고, 큰 뜻을 가지고 이끌어 나갔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축구인이 그라운드를 떠나 있을 때만큼 힘든 때는 없다. 지금 그는 갈증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처음으로 지금 그는 그라운드 밖에 서있다. 어쩌면 지금이 그가 맞이한 인생 최대의 갈림길인지도 모른다.   

 

코칭을 하다보면 내 것이 없습니다. 내 선수가 없고 그려 볼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내 것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지도자는 많이 볼수록 많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선수와 대화를 가지고 그 변화에 대한 동의를 가지고 이루어 질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면 상대에게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는 선진 시스템을 많이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13년간 프로 코치로 있었는데 이제 한번은 감독을 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금방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공부 하지 않으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만큼 이제 외국에서 선진 축구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잘 알고 있는 남미로 갈 것인지 새롭게 유럽으로 갈 것인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쪽도 나에겐 큰 공부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 아무도 그에게 무엇이 이루어진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를 주저하게 만들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그의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관의 제왕으로 짧았던 선수생활을 마치고 그는 K-리그의 코치로서 13년간 말없이 그라운드를 지켰다. 야생마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처음 그라운드를 달리던 그때처럼 그는 먼 곳을 달려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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