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박윤기

 

 

 

생년월일

1960-06-10

 

 

 

170 Cm

 

 

 

몸무게

64 Kg

 

 

 

포지션

FW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3-1986

유공

84

19

10

1987

럭금

13

2

 

97

21

10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1978-1979

U-20 대표팀

?

?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준우승

1984

 

 

 

K리그 득점상

1983

 

 

 

K리그 베스트11

1983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U-20 월드컵 본선

1979


K리그 1호골의 주인공 - 박윤기

우리는
처음이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 처음 여행을 갔던 곳, 처음 사랑을 하던 날까지, 처음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애틋함과 설렘으로 남아 꼭 기억하고자 다짐하는 아름다움이 되곤한다.

 

하지만 여기 잊혀진처음이 하나 있다. 윤기(45). K리그 1호골의 주인공, 수퍼리그가 출범한 1983년 첫해 16경기에서 9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등극, 프로 원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그가 망각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있던 지난 23년의 세월을 건너 “K리그의 전설로 여기서 다시 부활한다.

 

소년 박윤기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때는 태백에 소재한 장성 초등학교 4학년.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박윤기를 지켜보던 체육 선생님은 그에게 15번이 적힌 유니폼을 건네주며 축구부에 가입시켰다.

 

매일 공만 차면서 놀았습니다. 그때는 특별한 놀이 감이 없을 때라 동네에서 고무공 차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지요. 내가 항상 일종의 주장이 되어 친구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경기도 하고... 그러다 그 고무공위에 가죽으로 덮어 끈을 묶는 새로운 방식의 공이 나온 겁니다. 그때 그 고무공은 어디 철망 끝에라도 맞으면 바로 터져버렸는데 이 가죽공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걸 사겠다고 그 어린나이에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인 박윤기의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서의 출발은 중학교 진학과 함께 이루어 졌다.

 

그때 6학년이 되면서 집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운동에 소질이 있으니까 주위 사람들도 한우물만 파라고 하고 저도 서울에서 축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저를 보내주려고 하지를 않았었는데 저를 태백중에 특기생으로 보내려고 했었지요. 근데 제가 그랬습니다. 촌놈 서울 구경하러 가겠다. 나는 서울 가서 축구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71년에 천호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지요.”

 

처음 영동선을 타고 청량리역에 내렸는데 그때가 밤이었어요. 눈앞에 서울 야경이 펼쳐지는데 간판에 네온사인이 번쩍 번쩍거리고 그 휘황찬란한 도시의 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 소년 박윤기가 처음 서울에 발을 들어 놓던 날. 그곳에서 30여분 떨어진 동대문 운동장에서 자신이 역사적인 대한민국 프로 리그의 첫 골을 기록하게 될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서울에 전학을 온 박윤기는 축구 명문 동북중학교 축구부 선발 테스트에 응시하게 된다.

 

그때 선생님들 보시기에 테크닉이 좋게 느껴지셨나 봅니다. 내가 이러 저리 막 접고 애들 다리사이로 공을 빼면서 드리블 하고 하는 거 보시고 기본기가 괜찮고 잠재력이 있다고 느끼셨는지 당시 이상환 선생님께서 거두어 주셔서 동북 중에서 축구를 배우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공은 안차고 거울을 보고 패스와 슈팅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이렇게 공을 차는 연습을 하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이런 방법이 의미가 있나 하고 불만스러웠죠. 근데 그게 지금으로 하면 이미지 트레이닝 비슷한 개념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세가 교정이 되고 몸의 균형을 잡는 능력이 생기더군요.”

 

박윤기가 축구 선수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건 동북고등학교로 진학한 1년 뒤부터였다. 이풍길 선생님 밑에서 축구에 관한 다양한 기술을 배우던 박윤기는 고교 2년때 청소년 대표 상비군 고교 3년때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며 다음 세대를 빛낼 축구 유망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1978년 소년 박윤기가 축구 선수 박윤기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 게 되는 대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된 주요 선수들이 그랬어요. 박항서, 장외룡, 정해원, 이태호등 지금 축구계에서 걸출한 인물이 되어 있는 친구들이랑 방글라데시 데카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회가 중요 했던 이유가 세계 대회 출전권도 있었지만 남, 북 대결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겠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지금과 다른 의미로 남, 북 대결은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였습니다.”

 

중국, 아프카니스탄을 완파하고 이란과 비긴 한국 청소년 대표는 드디어 1978 10 26 방글라데시 데카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한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북한에 승리. 결승에서 이라크와 우승을 다투게 되었다.

 

그때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골을 성공 시킨 이태호나 선방한 김기만 골키퍼는 신문에 아주 크게 날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76년 방콕 아시아 대회에서 북한에게 한번 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한 축구가 오히려 한국 보다 세계무대에는 더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날 승리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978 10 18, 이라크와 혈전을 벌인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김석원이 득점하였으나 종료 직전 동점골을 허용하며 공동 우승으로 세계 대회 출전권을 따 내었다.

 

귀국하니까 정말 난리가 났었지요.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시민들이 열렬히 환영을 해주시고 결승전에서는 득점하지 못했지만 앞선 경기에서는 득점을 했기 때문에 저 자신도 상당히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박윤기는 당시 국가 대표 2진으로 분류 되는 충무 팀에 선발되며 축구선수로서 중요한 진로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저는 정말 캠퍼스 생활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가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지요.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실업팀이 아닌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었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특히 얼마 전 서울시청 팀이 해산 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기수로 따지면 3기 맴버인데 그 긴 세월 쌓여온 팀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으니 상실감이 들기도 하지요. 모두 지난 일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대학 생활에 대한 열망을 뒤로 하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당시 창단 3년을 맞는 실업팀인 서울 시청으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처음 팀에 합류를 했는데 뭐랄까? 좀 냉랭하다고 할까? 그때만 해도 박종환 감독님의 훈련이 굉장히 혹독하다고 평가 받던 시절이라 고등학교 때랑은 완전히 달랐죠. 이풍길 선생님이 자상하고 따뜻한 지도방식이었다면 박종환 감독님은 정말 스파르타식 훈련이라 굉장히 힘들어 하는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부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20살을 갓 넘긴 박윤기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야망이 커가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축구 선수.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며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운동이 내가 하는 만큼 나에게 보답해 준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저 운동이 좋아서 학교 훈련이 끝나면 장충단 공원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드리블 연습을 했는데 말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나에게 청소년 대표 선발이라는 열매를 가져다 준거에요. 그때 알았습니다. 그 맛을 안 겁니다.”

 

그리고 시청에 입단하면서 한 아름다운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내가 참 초라하게 느껴지더군요. 남들처럼 좋은 대학에서 폼을 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신분도 불안하기만 한 실업 선수다 보니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나한테는 축구 밖에 없다.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되겠다. 그렇게 3년을 정말 축구만 보고 달렸습니다.”

 

이런 박윤기의 다짐은 그를 실업 리그 최강자중 한명으로 떠오르게 했고 마침내 세계 청소년 대회 선발이라는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1979년 일본에서 열린 제 2회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한국은 파라과이, 포루투칼, 캐나다와 한조가 되어 16강 진출에 도전했다. 최순호, 김석원, 박윤기를 앞세운 한국은 아쉽게 예선 탈락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했으나 박윤기는 해외 지도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브라질의 청소년 지도자 에띠고 셀지오는 박윤기에게 아시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기량을 갖춘 선수로 평가하며 당시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파라과이의 로메로와 함께 속한조의 최고 선수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때 오른쪽에 김석원이라고 아마 지금으로 치면 이천수최태욱 같은 타입의 선수인데 제가 보기엔 그 선수들하고 비교도 안 되게 빨랐어요. 순발력이나 주력 면에서 정말 어마어마하게 빠른 선수가 윙을 보았고 가운데는 설명이 필요 없는 최순호 선수가 포스트 플레이를 했었지요. 그때 우리 팀이 좀 재미있었던 게 오른쪽은 엄청 나게 빠른데 나는 왼쪽에서 좀 슬로우로 자꾸 수비수를 개인기로 제치면서 플레이를 하니까 아마 남미 쪽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들이랑 같은라고 느끼지 않았겠어요? (웃음) 공을 잡고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제치고 제치고 짧게 패스 끊어서 가니 아시아에서도 자기네랑 비슷하게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있구나 하면서 좀 놀랬겠지? 그래서 그런 칭찬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대회에서 마라도나가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런 대회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나갔습니다. 파라과이의 로메로가 누군지,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고 현지 적응이라는 것이 되어 있지 않다보니 좋은 경기를 할 수가 없었지요. 사실 우린 그때만 해도 1년 중에 잔디를 한번 밟아 볼까 말까 할 땐데 이미 일본고베에는 양탄자 같은 잔디가 쫙 깔려 있더군요.”

 

하지만 그 대회를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나빴지만 내용은 괜찮았거든요. 청소년 레벨에서는 세계적인 팀과 큰 차이가 없다. 준비만 잘되면 한번 해볼만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나중에 멕시코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큰 대회였지요.” 

 

세계무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박윤기의 개인기는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느린 편인 주력은 그를 더더욱 테크닉에 집중하게 했고 이는 전통적으로 빠른 윙 포워드를 선호하는 한국 축구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당시 국가 대표 1진에 해당하는 화랑에는 선발되지 못한 채 2진에 해당하는 충무에서 영원한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기가 언제나 특별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왼발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면 초등학교 때는 다리가 곧장 뻗어 있었는데 중학교부터는 사진에 보면 다리가 휘어 보여요. 다리가 휜 선수가 개인기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그런 건지 사실 지금도 볼 만지는 기술은 뭐 좀 된다고 해야 하나? 우리 학생들도 내가 공 다루는 거 보면 깜짝 깜짝 놀라니까.”

 

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문틈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심하게 찧었는데 피가 엄청나게 났습니다. 지금도 보면 오른쪽 검지에 손톱이 아예 없지요.(실제 박윤기 감독의 오른 검지에는 손톱이 없었다.) 너무 아프니까 숟가락도 못 들고 연필도 못 잡고 그때부터 왼손을 쓰기 시작한 거에요. 오른손이 너무 아파서. 중간에 손톱이 날려고 하면 어릴 때 뭘 아나? 그걸 붕대로 잘 싸매고 있으면 되는 건데 옷에 자꾸 걸리고 하니까 빼버리는 거지 그러면 또 아프고. 그렇게 아파서 계속 왼손만 쓰다 보니 공도 왼발로 차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왼발잡이가 된 거지요

 

세계 대회를 치르고 돌아온 박윤기는 실업리그에서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왼발의 명수. 드리블, 패스, 슈팅의 3박자를 모두 갖춘 기교파 윙 포워드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박윤기 79년부터 82년 까지 서울 시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제 37회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득점왕과 MVP를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실업리그 최고 위치에 올라섰다. 그런 그를 새로 출범하는 프로 리그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82년에 유공 팀이 창단을 하면서 저한테 스카웃 제의가 왔습니다. 정말 가고 싶었지요. 그때 제 신분이 임시촉탁발령이라는 거였는데 그때 선수들 입장에서 동사무소 같은 곳에 발령이 나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거였으니까, 또 금융 팀들이 좀 흔들리던 때였고 무조건 프로에 가고 싶었지요. 근데 팀에서 잘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다 프로 출범하면서 계약을 맺고 오는데 나만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팀의 주요 전력이니까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건 데 그때는 서운하기만 했지요.”

 

우여 곡절 끝에 박윤기는 유공에 입단, 83년 출범하는 수퍼리그의 원년 맴버가 된다.

 

화장실에 몇 번을 갔는지 모릅니다. 경기 전까지 계속 들락날락 거렸지요. 사실 선수는 그래요. 훈련 량이 많으면 경기에 자신이 생깁니다. 빨리 시합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훈련 량이 부족하면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지요. 사실 훈련 량에서는 자신이 있었는데 워낙 관중이 많이 찾다보니까 무척 떨리더군요.

 

개막식에 이어 벌어진 할렐루야와 유공의 첫 경기. 3만여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경기 휘슬이 울렸다. 경기 초반부터 할렐루야는 게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승패는 말할 것도 없고 과연 할렐루야의 누가 언제 골을 터트릴 것이냐는 쪽에 온 관심이 집중된 사이 유공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반 22, 전문가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대 사건이 일어난다.

 

유공의 신문선이 오른쪽 공간을 돌파한 후 올려준 크로싱을 받은 박윤기는 쓰러진 수비수를 제치고 여유 있게 대각선으로 차 넣어 신생팀 유공의 선제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할렐루야는 전, 현직 국가대표로 구성된 최강의 팀이었습니다. 그냥 그 팀이 국가대표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죠. 반면에 유공은 12월에 창단해서 5월에 첫 경기를 가졌으니 그야말로 전력상 비교 자체가 되질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공격을 하는 과정에서 신문선 선수가 오른쪽에서 패스를 넣어 주었는데 골대 앞에서 수비수 여럿이 우르르 달려드는 겁니다. 제치고 제쳐서 쓰러뜨렸는데 그만 왼쪽이 막혀 버린 거예요. 제가 항상 왼발로 해결하니까 왼쪽을 탁 막아버린 거지요. 오른쪽은 허빵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웃음) 그래서 정말 순간적으로 부득이하게 오른발로 찼는데 그게 땅볼로 ? 깔려서 대각선으로 골문 왼쪽을 파고든 겁니다. 그래서 첫 골은 오른 발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적인 수퍼리그 1호 골이 탄생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실업의 무명선수가 프로축구 개막전에서 화려하게 비상하며 23 K리그 첫 골의 영광을 거머쥔 것이다.

 

지금이야 기도도 하고 반지에 키스도 하면서 굉장히 멋있는 세레모니를 하지만 그때는 뭐 그냥 막 달려가다 위로 점프하면서 주먹으로 번쩍 하고 하늘을 한번 탁 치는 거 (웃음) 그게 전부였습니다. 골을 넣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지요.

 

경기는 후반 20, 할렐루야의 박창선 35미터 밖에서 때린 중거리 슈팅 한방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 수퍼리그 첫 경기는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비록 경기에는 이기지 못했지만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친 유공의 플레이에 당시 언론에서는 「패기의 유공 노련한 할렐루야를 압도」라고 표현하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다. 박윤기 5 14일에 열린 할렐루야와의 2차전에서도 2골을 몰아넣으며 총 3골을 기록, 본격적인 득점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때는 징크스라고 해야 할까? 시합 전을 몸을 풀다보면 긴장도 되고 먼지도 마시고하면 목도 컬컬해지고 그러다 보면 침을 뱉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그렇게 침을 뱉을 때도 그 경기장 물 빠지는 하수구에 침을 뱉는데 그게 그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면 ! 오늘은 골이 들어가겠구나! 하고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는 거예요.(웃음)

 

프로 원년, 유공의 박윤기와 대우의 이춘석이 펼치는 득점왕 경쟁은 마지막 경기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할만 큼 치열했다. 이춘석이 매 경기 꾸준하게 득점 했던 반면 박윤기는 몰아치기에 강했다.

 

1983 5 22 국민은행 전에서 통산 4골로 앞서가기 시작한 이춘석 910일 경기까지 득점수를 늘리며 총 7골로 2박윤기 3골 차로 앞서고 있었다. 9 13박윤기는 할렐루야 전에서 2골을 추가하며 5골로 뒤를 쫓았지만 이춘석9 17일 포항 전에서 다시 한골을 기록 8골로 1위를 고수, 이변이 없는 한 원년 득점왕에 오르는 듯 했다. 9 20, 박윤기는 대우전에서 이춘석과의 맞대결을 통해 1골을 추가 총 6골을 기록했지만 남은 경기는 단 2경기. 박윤기가 상승세에 있는 이춘석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9 22일 대 국민은행 전. 전반 37, 이장수의 선제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한 유공은 후반 6분 국민은행 김주훈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어려운 경기를 하고 있었다.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지던 후반 28박윤기의 득점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김용세의 헤딩 어시스트를 골로 연결한 박윤기는 다시 10분 후 한골을 추가 이춘석 8골과 타이를 이뤘고 마침내 후반 41분 단독 돌파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통산 9골로 득점 선두로 뛰어 올랐다.
 
83
수퍼리그 마지막 경기는 1983년 9월 25 마산에서 벌어진 유공과 대우의 일전이었다. 시즌 종료 직전 득점 1위를 내어준 이춘석과 기적 같은 해트트릭으로 1위를 탈환한 박윤기의 맞대결을 지켜보는 관중 수는 무려 3 2천여 명. 이미 수퍼리그 우승팀은 직전에 열린 경기에서 할렐루야로 결정이 된 상황이었지만 팬들의 관심은 이춘석박윤기가 벌이는 치열한 득점왕 경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큰 부담감 탓이었을까? 두 선수는 나란히 침묵, 원년 득점왕의 영광은 박윤기에게 돌아갔다.

 

나중에 경기 경험이 많아지니까 어떤 상황이 골 찬스인지 깨닳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잠잘 때 ! 그때 때렸어야 하는데... 하고 곱씹는 경험이 많다보니까 점점 그 순간에 뭘 해야 할지 알게 된다는 거였지요. 그러다 보니 골 냄새를 맡는 그런 능력이 생기더군요.

 

골대 뒤에서 후레쉬가 터지고 할 때, 정말 기자 한명 없다가 뒤에 기자들이 번쩍번쩍하게 사진을 찍으니 골잡이에 대한 매력이랄까? 기대감도 크고, 처음엔 그런 게 없었지만 나중에는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탁 잡아주게 되기도 하고 프로가 없을 때랑 크게 변화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원년 득점왕에 오른 박윤기는 깜짝 스타로 급부상하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 당시 인기 가수였던 방미와 함께>

?너 연예인이냐? 선수냐?? 감독님이 그러시더군요. 유공의 박윤기가 아니라 박윤기의 유공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정도였습니다. 매일 방송국에 출근을 하다 시피 했어요. 계속되는 인터뷰 요청에 사진 촬영, 방송 쇼 프로그램 출연까지 저 자신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요.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당시 청소년 대표가 4강에 오르며 온 나라에 축구 열풍이 불었었습니다. 거기에 원년 득점왕이다 해서 나까지 난리가 난 겁니다. 가요 상반기 결산 프로그램에 앙드레 김, 당시 미스 코리아, 정윤희, 주병진 같은 일류 연예인이랑 함께 출연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바로 선수 죽이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 이유에서였을까? 박윤기 84년부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27경기 5 5어시스트, 나쁜 기록은 아니었지만 첫해의 돌풍에 비해 아쉬움을 남긴 한해였다. 그리고 85 18경기에 2 2어시스트, 86년에 25경기 3 1어시스트로 완연한 하락세를 그렸다.

 

사실 화랑 팀 경험도 없고 충무 팀을 들락날락 거린 선수가 1급 선수들을 다 제치고 스타가 되니까 좀 미움을 샀다고 할까요? 그 다음해부터 집중적인 견제가 이루어 졌습니다. 한해를 경험하면서 나에 대한 정보가 많고 제 플레이가 많이 읽혔지요. 내 경우 슈팅은 항상 왼발이니까 그 왼발로 때리기 위해 수십 번 트릭을 걸었는데 이제 다들 알고 나니까 다음시즌부터는 왼쪽이 탁 막혀 버렸습니다.

 

1986년을 끝으로 박윤기는 유공을 떠나게 되었다. 원년 맴버로 유공이 배출한 최고 스타 중 하나였지만 그것이 냉혹한 프로의 법칙이었다. 1987박윤기를 받아준 곳은 럭키금성이었다.

 

즐거운 추억이 많았었습니다. 내가 처음 프로로 뛸 수 있었던 팀이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좀 재미있는 게 당시만 해도 결혼을 하면 축구 선수 생명이 짧아진다고 생각을 해서 단장님이 종종 선수들한테 결혼을 늦게 하라는 권유도 하셨고. 내 경우는 여성팬보다는 삼다도 섬마을의 소년이 나 같은 축구왕이 되고 싶다면서 공을 좀 보내달라고 해서 공도 보내주고 그랬었습니다.

 

그게 부산에서 경기가 끝나고 였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미팅을 하는데 그냥 몇 분 안하면 끝나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때 꼭 지금 신문선 해설위원이 전술의 장단점에 대해 묻는 거였습니다. 다들 애인 만나러 가고 싶고 시합 끝나고 쉬고 싶은데 갑자기 미팅이 한 시간 이상 짧게는 40분 이상 길어지면서 감독하고 둘이서 전술에 대해 막 이야기하곤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부터 그런 재능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회식을 가서 안다만? 이장수, , 신문선, 김강남, 김성남이 한상에 앉곤 했었습니다. 이상하게 늘 그 맴버가 모여서 앉게 되었는데 지금 그 친구들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이 안 되겠지만 다들 등심을 시키면 고기에 서로 침을 발라가면서 먹는 걸 가지고 막 싸우고 하나라도 더 먹으려는 경쟁도 있고 참 재미있었지요.

 

이런 추억들을 뒤로하고 1987박윤기는 럭키금성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그 화려했던 시간은 이미 4년 전 일. 박윤기는 어느덧 존재감을 잃은 채 그라운드 한 쪽 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생긴다.

 

정말 1호와 2호골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999호 골과 1000호 골은 그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87 10 31 대구. 전반 9, 행운의 여신은 다시 한 번 박윤기에게 미소를 지었다. 83년 득점왕 이후 85년부터 체력 열쇠와 발목부상으로 하향세. 유공으로부터 방출되어 연봉 1 6백만 원에 럭키금성으로 이적한 선수라는 소개가 붙던 박윤기는 포철과의 경기에서 K리그 1000호 골을 터트리게 된 것이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조민국 선수가 롱슛을 때렸는데 그게 수비수 몸을 맞고 나왔고 그게 다시 박항서 선수한테 똑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걸 박항서 선수가 때렸는데 이게 또 사람 몸을 맞고 나한테 떨어진 겁니다. 그 순간 주은 거나 다름없었지요. 골대 앞에서 위치 선정을 잘한다는 듯이 그걸 내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때 그걸 서로 넣고 싶어 했었습니다. 워낙 영광스러운 기록이니까 서로 볼을 안주고 욕심을 내었었는데 그걸 제가 기록하게 된 겁니다. 첫 골은 오른발, 1000호 골은 왼발. 그 부분에 관해서는 천운을 타고 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기록과 관련해 경품으로 르망 승용차가 걸릴 만큼 큰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사가 한편 실리기도 했다.

 

장영기(43), 서울 은평구 대조동 2 14 26(12 5)에서 우등생이라는 문구점을 경영하는 장씨는 행운의 꿈을 꾼 것이 계기가 되어 자동차를 가졌다고. 볼일이 있어 대구에 가던 전날 밤 우주선 같은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꿈을 꾸었는데 핸들에 럭키금성 마크 같은 게 있어 박윤기 선수가 넣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박윤기가 기록한 K리그의 마지막 골이었다. 박윤기는 자신의 프로 데뷔 첫 골을 K리그 1호 골로, 그리고 K리그 1000호 골을 선수생활의 마지막 골이라는 대 기록을 남기며 당시 프로를 준비하던 일본의 히로시마 마쓰다로 옮겨가게 된다.

 

말레이시아 세미 프로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왔는데 거길 안가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실업리그에서 곧 프로로 제이리그가 탄생한다 해서 지금 축구협회에 있는 강신우 선수랑 같이 히로시마 마쓰다로 가게 되었지요. K리그에서는 솔직히 나이도 있고 밀려 나서 아마 지금 신태용이랑 비슷한 경우라고 봐야 할까요?

 

마쓰다에서 1년을 뛰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히로시마 마쓰다 인데 오사카랑 하면 신칸센으로 이동을 했었습니다.

거기도 관중은 별로 없었는데 굉장히 놀랐던 것이 행정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잘되어 있었습니다. 프로처럼 시스템이 아주 완벽했었습니다. 서포터나 용병선수 관리까지 바로 프로로 출범만 하면 진행이 가능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기량은 뭐 그냥. 우리가 가르칠 상황이었으니까 우리는 벌써 프로를 오래 해왔고 경험도 있고 거기 감독이 이마니시 감독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우승은 안 해도 되니까 기술을 가르쳐 주라고, 강신우 선수는 키가 크고 헤딩이 강하니까 포스트 플레이를 가르치고 나는 테크닉에 대해서 지도 했습니다. 근데 이 친구들이 앞에서는 하이, 하이 하는데 뒤로 돌면 코웃음을 치는 겁니다. 그 일본 특유의 혼네와 다테마네가 있었고 문제는 팀이 우승하는 것보다 한국 축구에 있는 장점을 뺐어오자는 전략이 있었다는 겁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선수 생활을 끝으로 박윤기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와 함께 박윤기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 선수 생활 후반부터 계획해 두었던 제 2의 인생인 지도자의 길을 서울 공업 고등학교에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감독 부임 첫해, 그는 그곳에서 어쩌면 대한민국 축구계에 역사적인 한 획을 긋게 될지 모르는 소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안정환

 

K리그가 배출해 낸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인 안정환을 부임 첫해에 서울 공업 고등학교로 스카우트 하며 지도자로서도 처음을 화려하게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오자마자 서울공고로 부임하면서 첫해에 안정환 선수를 스카우트하게 되었습니다. 스카우트 싸움에서 사실 다른 학교를 빼앗길 뻔 했는데 어렵게 데리고 왔지요. 여기 대림동 근처에 광성 교회라고 있는데 그 광성 교회에서 축구팀을 운영했었습니다. 거기에 정광민안정환이 두 명이 눈에 띄는 선수였는데 이 친구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꼭 교회를 나가게 하겠다고 하면서 제가 영입을 했습니다.

 

1때부터 센스가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일들로 방황의 시간도 있었지만 고 2때 「프로로 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니까 큰 꿈을 가지고 훈련을 해라. 반드시 너의 시대가 올 거다.」라고 하면서 마음을 많이 잡아 주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들 어떻게 평가 할지는 모르겠지만 잘 한번 보세요. 문전 앞 노하우, 드리블을 하면서 꺽는 기술, 수비가 올 때 순간적으로 뒤로 제치는 기술 등 기초 훈련부터 응용 훈련까지 내가 프로에서 경험한 득점에 관련된 기술들을 모두 전수해 주었습니다.

 

유독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에 가면 참 잘했어요. 성적과 관계없이 부산 지역에서는 소문이 자자했었습니다. 공을 예쁘게 차고 감각적인 선수가 하나 있다 하고. 대학 진학할 때도 사실 곤혹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내가 정말 가능성이 있고 좋은 선수라고 많이 추천을 했었는데 다들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근데 유독 아주대의 김희태 감독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영입에 공을 들였지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염려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워낙 잘 생겼으니까 대학에 진학해서 여러 유혹에 빠지게 되면 어쩌나, 주전 경쟁이 힘든 명문대 보다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겠다. 그래서 아주대에 진학을 시켰습니다. 근데 입학이 결정 나고 나서 타 학교에서 갑자기 영입 제안이 쇄도 하는 겁니다. 무척 곤혹스러웠었지요. 이로 인해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말 그대로 부산 대우에 입단하는 걸 보고 묘한 인연을 느꼈었습니다. 제가 말했던 대로 억대 연봉과 함께 안정환의 시대가 열렸으니까요.

 

그렇게 지도자로 첫발을 내 딘 박윤기 1994년에 열린 제 29회 아시아 청소년 대회를 준비하는 청소년 대표팀의 코치로 선정되었다. 세계무대를 향해 이번에는 지도자로 다시 한 번 도전했지만 충격의 예선 탈락으로 첫 번째 좌절을 맛보게 된다.

첫 경기였던 태국을 3 1로 완파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원흥재 감독님이 청대 감독으로 선정이 되었고 코치는 고교 지도자중 성적을 낸 순으로 점수를 매겨 선정하는 방식으로 내가 대회 4강 이상도 많이 하고 하면서 선발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정광민, 박성배, 안정환, 변재섭 세대였는데 태국하고 일본하고 물고 물리면서 아깝게 떨어지고 말았지요. 마지막 일본전은 분명히 판정 문제가 심각해서 경기 후에도 잡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맴버들이 정말 세계적인 레벨이었는데 참 아쉬움이 깊게 남아있습니다. 세계 대회에 나갔다면 정말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는데 지금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4 12월 각 스포츠 신문 한 켠에 재미있는 모임 하나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황금발 클럽 15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발족식을 갖고 수원 지역 초,,고 학생들에게 축구 클리닉을 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프로축구가 탄생해서 시상식을 하는데 좀 뭔가 내가 원년 득점왕으로 후배들한테 트로피라도 하나 주고 싶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기근이나 윤상철 같은 후배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한번 모이자 한 게 발단이 되었지요. 유소년 클리닉도 열고 명칭도 「황금발 클럽」이 제일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이 모임을 후원해 주시는 분이 순금 트로피도 만들어 주시고 좋은 취지였는데 아쉽게도 작년에 모따가 못 와가지고 좀 그랬지요. 솔직한 심정에서 올해는 가급적 국내 선수가 득점왕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현역 시절 화려한 기술 축구를 구사했던 박윤기가 가진 코칭 철학은 간단했다. 「수비나 공격은 용서가 되지만 미드필더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끊기더라도 역습을 맞더라도 미드필더는 좌우로 패스하지 말고 앞을 향해 전진하라는것.

미드필더를 향해 끊임없이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는 포백 신봉자였다.

 

앞서가는 축구 선진국이 모두 포백 쓰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오던 본 프레레 감독이 오던 새로 아드보카트 감독이 오던 처음에는 모두 포백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걸 배우기 위해 그 분들을 모셔온 거구요. 근데 그렇게 가르치다가 정작 경기에 나가서는 다시 수비에 3명을 세운다는 겁니다. 저는 실패해도 결과나 좋지 않아도 계속 시도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회전에 포백 외치다 정작 시합에 가서는 쓰리백을 구사하는 것이 저는 답답합니다.

 

탁월한 개인기와 가공할 왼발로 한국판 리벨리노로 불리던 그는 이제 강릉 제일고와 한성대를 거쳐 처음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서울 공고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성적은 좋지 않지만 내용만큼은 보는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는 남은 한 가지 소망을 말해 주었다. 2, 3안정환을 발굴해 내는 것. 언젠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인재로 다시 한 번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축구 선수가 되겠다던 한 소년의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K리그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졌다. 어느덧 이제 불혹을 넘긴 나이, 그라운드를 달리던 그때의 모습은 세월과 일상에 묻혀 어쩌면 그에게 허름한 주점 한 귀퉁이를 지키는 퇴역군인의 무용담처럼 소주잔을 기울이며 떠올리는 잠깐의 추억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그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세계 최고의 프로리그를 향한 우리의 꿈. 그리고 그 꿈을 향한 전설의 시작은 바로 지금 부터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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