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박상인




생년월일

1952-11-15




175 Cm




몸무게

65 Kg




포지션

MF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3-1985

할렐

65

17

7

1986-1987

현대

21

3

0

86

20

7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1970년대(?)

성인 대표팀

?

?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우승

1983




리그컵 우승

1986




K리그 베스트11

1985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아시안게임 본선

1978


원년 우승의 주역 미드필더 - 박상인

 월드컵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판타지스타 안정환의 행보는 많은 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 J리그의 고액연봉과 안정된 생활을 뒤로한 채 유럽무대에 다시 한 번 도전했고 결국 프랑스의 FC메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이 불운한 스타의 행보는 끝내 평탄하지는 않았다. 팀의 전력은 부실하기 그지없었고 결국 FC메스를 떠나 다시 분데스리가로 진출, 약속의 독일 땅에서 마지막 도전의 불꽃을 태우게 되었다. 그의 도전이 아무쪼록 성공으로 마무리 되어 한국축구사에 더욱 짙은 족적으로 남기를 바란다.

 

 이번 겨울부터 안정환이 몸담게 될 MSV뒤스부르크, 그런데 이 구단에 첫 번째로 진출한 한국인이 안정환이 아니란다. 현역시절 엄청난 지구력과 활동량을 자랑하던 최고의 플레이어, 1970년대 대한민국 대표팀의 허리를 책임졌던 당대 최고의 링커, 그리고 할렐루야의 프로 원년 우승 멤버이자 85시즌 프로축구 베스트 일레븐의 주인공, 박상인(55)이 이미 25년 전인 안정환이 뛰고 있는 그 땅에 한국인의 흔적을 남겨놓았었다고 한다. 올 시즌 K2리그 참가가 확정된 부산교통공사팀의 초대 감독으로 또 다른 축구인생을 꾸며가고 있는 왕년의 축구스타 박상인감독을 K리그의 전설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모신다.



선생님의 집요한(?) 권유로 축구를 시작하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월 초순의 어느 날, 경남 창녕군의 외곽에 위치한 창녕 공설운동장에는 창단 후 첫 시즌을 준비하는 부산교통공사 팀의 훈련이 한 창이었다. 따듯한 햇살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찬 기운이 매섭게 볼을 스쳐갔지만 그라운드의 선수들과 코치들은 큰 소리를 주고받으며 전술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박상인 감독, 부산교통공사의 초대감독직을 맡은 그는 그라운드 바깥 한 쪽에서 선수들과 코치진의 훈련모습을 살펴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K2리그에 참가하게 된 새 팀을 이끌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그에게 그의 인생이 시작된 땅 창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인 듯하다. 창녕, 그렇다. 다소 낯설고 조그마한 이 마을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축구스타 박상인의 일생과 축구인생이 시작되었다. 1965, 그러니까 1952년생인 그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이야기다.

 

 “당시 제가 다니고 있던 영산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저도 축구선수를 꿈꾸거나 축구를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할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그 학교에 계시던 체육선생님이 축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신 겁니다. 남들보다 잘 달리고 지구력이 좋았던 제 능력을 잘 봐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선생님의 소개로 중학교 2학년 때 정식 축구부가 있는 창녕중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 심하셨어요. 공부도 그렇게 못하는 게 아니었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고 축구란 게 워낙 또 힘든 거잖아요. 하지만 영산중학교의 체육선생님이었던 김대원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는 것은 물론, 제가 공부하는데도 찾아오셔서 너는 축구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며 확신을 심어주셨죠. 돌이켜보면 그 때 선생님의 집요한(?) 권유가 후회 없는 제 인생을 살아오는데 씨앗이 된 듯합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타고났던 그가 축구에 재미를 붙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축구선수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또래 친구들과 재미있게 어울릴 수 있고 신나게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축구명문인 동래고등학교로의 진학은 본격적인 축구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낙운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단 동래고 출신 선배님들의 조언이 저에겐 목표이자 큰 힘이었습니다. 김호, 박영태, 김호곤 등 당시 축구로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선배님들이 가끔씩 학교에 오셔서 후배들을 격려해 주시는데 그 모습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그 때 결심을 했습니다. 꼭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고, 나도 다음에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후배들 앞에 나타나는 선배가 되겠다고 말이죠.

 “그 때 선배들이 해 주신 조언들이 제 목표를 받쳐주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남들보다 더욱 많이, 더욱 진지하게, 더욱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차피 다른 이들도 훈련하는 것은 비슷하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계획한 훈련을 흔들림 없이 해 나간다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평범한 진리 같으면서도 참으로 뼈가 있는 말이었어요. 그 말을 생각하며 참 많이 연습한 것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기술 훈련도 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상인은 바로 실업팀인 상업은행에 입단했다. 때는 1972, 축구부 고등학교를 나온 선수들의 대학입학이 필수처럼 여겨지던 1980~90년대와는 달리 당시는 바로 실업팀에 입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업은행에 입단한 지 1년 만에 군 입대를 결심했다. 어차피 치러내야 할 일, 빨리 마치려했던 것이 그 배경이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간 육군팀에는 박상인이 축구선수로서  성공을 하게 되는 큰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업은행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육군팀,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상무팀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제 인생을 바꿔주신 지도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바로 1950년대 국가대표로 활약하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낙운 선생님이었습니다. 제 지구력과 성실성을 인정해 주시고 저를 참 열심히 키워주셨어요. 특히 다소 왜소한 제 체격적인 부분을 보강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주셨는데 당시에는 마땅한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직접 콘크리트와 쇠파이프로 아령과 역기를 만들어서 제 훈련을 이끌어 주시는 겁니다. 그것도 정규훈련이 끝난 다음에 저를 따로 불러서요. 어떻게 제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성낙운 선생님의 애정과 박상인의 노력은 이내 결실을 맺었다. 입대 후 2년이 지난 1975, 박상인이 주축이 된 육군팀은 그해 국내에서는 가장 큰 대회인 대통령배와 축구선수권의 패권을 잇달아 차지하며 위용을 떨쳤다. 팀의 중심에 있던 박상인에게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  축구선수권을 마친 3일 뒤, 대회 MVP를 차지했던 박상인에게 축구협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다.

 

 “정말 기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왔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성낙운 선생님께도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저를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 주셨죠. 저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은사님입니다. 대표팀에 뽑히면서 자부심과 자긍심이 마음 깊은 곳에 심어졌습니다. 축구선수로서 새로운 목표도 생기게 되었구요.


대표선수 박상인, 잊을 수 없는 추억들

 당시 대표1진이었던 화랑팀의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차범근, 이회택, 이영무, 김진국, 박성화, 김호곤 등으로 70년대 아시아를 제패했던 막강한 전력이었다. 박상인의 포지션은 당시 4-2-4전형을 사용하던 팀에서 중원을 책임지던 링커, 전술에 표기된 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링커포지션은 보통 체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쉽게 소화해 낼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박상인은 특유의 지구력과 성실함으로 이내 대표팀의 핵심주전멤버로 급부상했다. 1975년 한일 정기전에서 터트린 센세이셔널한 대표팀 데뷔골은 대표팀 주전도약의 시금석이었다.

 

 “제 대표팀 선수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이 바로 한일 정기전에서 터뜨린 골이었습니다. 9월이었으니까 제가 대표팀에 뽑히고 몇 경기 출전하지 않았을 때였죠. 한일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금도 대단하잖아요?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아마도 제 4회 한일 정기전이었을 겁니다. 뜨거운 관중석의 열기와 선수들의 투지,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죠. 후반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동현의 골로 우리가 1: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문전에서 강력한 슛으로 추가골을 넣었습니다. 일본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게 기쁘기도 했고 또 그 골이 골네트를 찢어버린 거에요. 다음날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그날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해 12월에 벌어진 대만과의 올림픽 예선전에서도 이영무와 함께 골을 터트리며 2:0승리에 일조한 박상인76 3월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올림픽예선에서 또 다시 일본을 상대로 쐐기골을 넣으며 2:0승리를 일구어 냈다. 그렇게 국민들에게 인상적인 골을 선사하며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1977,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 전에서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선사했다.

  일본, 이스라엘과 한 조가 되어 아시아 1차 예선을 치르던 한국은 이스라엘과의 마지막 홈경기를 앞두고 12무로 2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21, 무조건 승리가 필요했다. 전반22, 차범근의 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한 한국은 그러나 후반 31분 이스라엘에 동점골을 내 주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종료 3분을 남겨놓으며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 물거품이 되어가던 상황, 박상인의 발끝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 온 대한민국을 열광시킨 극적인 순간이었다.


경기 전 저는 스타팅 멤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반 채 5분이 되지 않아 김강남이 허벅지 부상을 당하면서 갑작스럽게 제가 투입되었죠. 그런데 그 교체가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 겁니다. 최종덕의 드로인이 차범근의 머리를 맞고 제 앞에 떨어졌고 지체 없이 발리슛을 때렸습니다. 골이 들어간 순간 정신없이 뛰었어요. 제 인생에 그렇게 짜릿한 순간은 지금까지도 다시 없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으로 올라간 최종예선이었건만 끝내 월드컵 본선행의 티켓을 따내지는 못했다. 당시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티켓은 한 장, 한국을 비롯해 5개국이 치른 최종예선에서 결국 한국은 이란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341패로 2위를 차지, 당시 박상인 7경기에 출전하며 2골을 뽑는 등 분전했지만 월드컵본선과의 인연을 맺는 데는 결국 실패를 하고 만다. 이 후에도 박상인은 선수로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무대에 나서는 영광을 맛보지는 못한다. 당시 박스컵, 메르데카컵 등 아시아 주요 대회를 제패하며 최강의 전력을 뽐냈음에도 월드컵, 올림픽 무대에 나서지 못 한 것은 지금도 그의 축구인생에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독일무대를 두드린 박상인. 그러나...

 1976, 육군팀에서의 제대와 함께 박상인은 다시 상업은행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화랑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은 그는 소속팀 훈련보다 태릉선수촌생활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축구를 비롯해 전 스포츠 종목의 대표선수들은 국가의 명예를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집중훈련을 받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기였다.

 태릉선수촌과 상업은행을 오가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1, 박상인에게 축구인생의 또 다른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바로 해외진출의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지금이야 정식 에이전트를 통한 협상과 구단을 통한 계약 등이 비교적 체계를 잡아가고 있지만 당시 국내에는 그러한 환경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었다. 그저 현지축구팀과 인맥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막연한 제의가 온 것이었고 조건도 사전계약이 아닌 현지 입단테스트 이후 계약협상이었다.
 
 78/79시즌부터 차범근이 활약하며 어느 정도는 국내에 알려진 분데스리가였지만 당시의 안정적인 생활을 팽개 치고 미래도 불확실한 독일로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염원하던 해외무대에 대한 경험과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하고자 하는 그의 도전정신은 한국땅이 그의 발목을 잡도록 놔두지 않았다.

 

 “낯설기 그지없었습니다. 당시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었고 허정무가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에서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현지에 대한 정보가 무지했죠. 저에 대한 사전 비디오 자료 같은 것도 없었으니 순전히 맨몸 하나로 현지의 테스트에서 모든 기량을 펼쳐보여야 했습니다. 바로 뒤스부르크에 바로 입단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에 앞서 몇몇 구단에서 테스트를 받으러 다녔었죠. 첫 번째 찾아 간 구단이 FC쾰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차라던가 이런 문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테스트에서 별 활약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였죠.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컨디션도 좋았고 입단 테스트에서도 좋은 활약을 했습니다. 분위기는 좋았어요. 구단 관계자들과 감독에게도 좋은 평을 얻었었고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선수노조가 들고 일어난 겁니다. 외국인 선수가 구단에 이미 세 명이나 있는데 왜 또 더 입단을 시키려냐는 거였죠. 당시 국내와는 달리 유럽은 축구를 비롯해 각종 노동 분야에 노조가 매우 조직적으로 결성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는데 바로 그 노조의 주장 때문에 저의 입단이 단번에 유야무야 되 버렸습니다. 난처했죠. 시간은 흐르고 코앞까지 다가왔던 계약은 무산되어버렸고 이렇게 그냥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가야하나 하는 막막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 뒤스부르크 구단에서 테스트 제의가 들어 왔어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테스트에 임했습니다.  계약은 무산되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개인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가 6월 말이었는데 다른 유럽선수들이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던 것에 비해 저는 계속해 훈련을 해오던 중인지라 테스트에서 상대적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죠. 그렇게 구단과 계약을 체결했고 독일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단에서 박상인에 대한 대우는 상당했다. 살 집은 물론 승용차까지 제공하며 현지적응을 도왔고 박상인은 가족들과 함께 독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출발은 좋았다. 연습경기에서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기량을 뽐냈고 1981년 8월 8, 시즌 개막전전인 칼스루허SC와의 경기에도 교체출전하며 분데스리가 무대에 그의 족적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창창대로를 달리던 그의 앞길에 장애물이 들어서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바로 허벅지 부상이었다. 한국과는 전혀 딴판이었던 현지 그라운드와 높은 습도, 우중충한 기후, 그리고 낯선 생활환경은 그의 부상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 또한 부상회복을 앞두고 나선 연습경기들에서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결국 그는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분데스리가 공식 2경기 출전의 기록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이 현지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고 그들과 언어 문화적으로 소통하지 못했다. 부상에 대한 물리적인 치료는 물론 심리적인 부담감이 결국은 아쉬운 독일 생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지 교민들의 따듯한 사랑과 유럽의 축구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프로원년 우승의 축배를 들다.

 독일에서의 씁쓸한 패배를 맛보며 한국으로 돌아온 박상인을 기다린 것은 바로 프로팀의 창단과 수퍼리그의 태동이었다. 1982년 프로출범 1년 전인 그 해 대한민국 최초 프로축구단인 할렐루야는 박상인을 전격 입단시키며 전력을 보강했고 이듬해 수퍼리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창설 첫 해인 1983, 할렐루야는 가장 많은 국가대표선수가 모인 우승후보 0순위의 팀이었다. 대표팀 수문장이었던 조병득을 비롯해, 86년 멕시코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박창선, 박성화, 최종덕 등이 공수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고 80 12월부터 프로로서 팀을 운영하며 탄탄한 조직력을 구축한 상태였다. 

 

  독일에서의 실패가 있었지만 국내에 돌아 온 뒤 허벅지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하며 예전의 기량을 찾아갔습니다. 방황할 틈 없이 바로 할렐루야에 입단하며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갔구요. 그리고 꿈에만 그리던 프로축구가 개막한다니 다시 도전할 목표가 생겼죠. 당시 저를 비롯해 저희 팀 선수들이 비교적 나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대표선수출신이라 경험이 많고 자기관리가 철저했어요. 또한 선수생활 막바지에 뭔가 하나를 이루고 싶어 하는 선수들의 의지가 상당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였구요.

 

 박상인의 기량은 독일에서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예전의 위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유공과의 개막전에서 2:2로 무승부를 거둔 뒤 국민은행과 벌인 두 번째 경기에서 박상인은 전반전에만 두 골을 뽑아내는 활약을 펼치며 팀의 창단 첫 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우승후보 할렐루야의 행보는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전기리그 6경기를 치르는 동안 거둔 성적은 251, 341패를 기록한 실업팀 대우에도 뒤지는 성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할렐루야의 선수들이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낸다며 비판의 소리를 높여갔다.

 하지만 후기리그는 달랐다. 주말 2연전을 치르는 대신 주말과 주중으로 나누어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방식이 바뀌며 체력적인 부담이 많이 줄어든 것이 추격의 원동력이었다. 후기리그 초반 네 경기에서 121패로 부진하던 할렐루야는 마지막 네 경기 동안 31무의 상승세를 연출하며 대우를 승점 1점차로 제치고 프로원년 우승타이틀을 따냈다. 독일에서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박상인에게도 팀의 우승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선수들의 목표의식이 무엇보다도 뚜렷했고 대표선수로서의 자존심이 마지막 분전의 힘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하나로 뭉쳐서 최선을 다 해 경기를 뛰었지요. 당시 팀을 이끌었던 함흥철 감독님께서도 너희들의 능력은 충분하다. 우승하려는 욕심만 가진다면 못할 것이 없다라며 저희를 자극시켜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독일에서 돌아 온 이후 자칫 힘든 시간을 보낼 뻔 했는데 팀의 우승을 맛보며 성공적인 재기를 하는 발판이 되었구요.

 

 하지만 프로원년우승의 환희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 이면에 남모를 씁쓸함이 박상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열악한 프로축구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이 그것이었다. 비록 한 시즌이었지만 독일에서의 생활은 박상인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다. 주말이면 하나의 정례 행사처럼 어김없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는 도시 주민들의 열정은 그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었고 또한 분데스리가를 비롯한 유럽의 축구환경과 선진 시스템, 풍부한 인프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부러움을 한 가득 안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 땅에도 그런 프로리그가 생긴다고 하니 여간 기대되는 일이 아니었다.
 

 “제 욕심이 컸나 봅니다. 우승은 분명 기쁜데 프로축구의 실상을 바라보면 영 개운치 않았죠. 시즌 첫 해 관중들은 참 많이 경기장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런 인기 속에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 또한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5개의 팀으로 운영되는 리그, 게다가 그 중에서도 정식 프로팀은 고작 두 개, 지역연고와는 거리가 먼 유랑극단식 경기일정은 독일생활을 통해 알고 있던 프로리그와는 천지차이였죠. 그 때부터 아마 우리나라 프로축구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웃 일본의 리그운영은 참 인상적입니다. 철저한 준비와 계획 속에 단 시간에 유럽 못지않은 리그를 만들어 냈잖아요. 물론 시작에 의의를 둘 수는 있겠지만 좀 더 늦더라도 확실한 준비를 해서 시작을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 첫 해 우승의 기쁨이 있었지만 할렐루야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4년 시즌에는 6개 팀 중 4위로 추락했고 85년 수퍼리그에는 8개의 참가팀 중 대회에 처음 참가한 한일은행과 상무에도 뒤처지며 최하위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박상인 85시즌 베스트 11에 선정이 되며 고군분투 했으나 팀의 추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장선수들의 체력저하와 목표의식의 상실, 종교적인 성향이 짙은 팀 컬러 등은 할렐루야의 발목을 잡은 결정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그 해 9월말, 할렐루야는 프로의 짐을 벗어던지고 아마추어 팀으로 복귀하며 프로축구계를 떠나고 말았다.

 

 후회 없는 은퇴, 모교로 돌아가다.

 자신의 몸 관리를 철저히 하며 조금이라도 선수생활을 더 이어나가려는 오늘날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 때는 서른 살을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선수은퇴를 하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인 관례화가 되어 있었다. 물론 선수에 대한 관리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선수생명이 짧기도 했다. 85시즌을 마친 당시, 박상인의 나이가 33살이었고 모두들 그의 은퇴를 생각했다.
 하지만 박상인은 자기관리가 너무나도 철저한 선수였다. 타고난 기초체력도 있었지만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해 훈련하고 축구이외의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 관리를 해 왔다. 몸에 밴 인내력을 바탕으로 십여 년 간 지속해 온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그의 필수 덕목이었다. 박상인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당시 현대를 이끌던 감독이 문정식 선생님이었습니다. 85년도까지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셨는데 그 때 저를 엄청 아껴주시던 분이었어요. 할렐루야가 갑작스레 아마추어로 전향하는 바람에 팀이 사라졌으니 내심 답답했었습니다. 비록 나이가 있긴 했지만 전 분명히 뛸 수 있었고 더 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문정식 선생님께서 저에게 또 다시 기회를 주셨죠. 그렇게 1987년까지 현대에서 선수로서 활약했습니다. 비록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고 87시즌에는 체력적으로 힘들어 경기에도 자주 나서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36살 까지 현역선수로서, 그것도 체력적 부담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미드필더로서 활약했다는 것은 저에게 큰 자부심입니다. 아마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 중에 국내프로축구에서 가장 오랜 나이까지 뛴 선수가 저 일겁니다. 그렇게 선수생활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은퇴를 했습니다.
 

 선수생활을 마친 박상인은 곧 자신의 모교인 동래고의 축구부 감독직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래고 감독으로의 복귀는 훌륭한 선수로서 명성을 쌓고 떳떳하게 후배들에게 다시 나서려 했던 그의 학창시절의 다짐이 실제로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14년 동안 동래고 감독생활을 해 오면서 박상인최용수, 김치곤(이상 FC 서울), 박준홍(부산), 노병준(전남) 등을 키워내며 명문 동래고의 전통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감독직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축구팀의 전략가 이전에 학생의 미래를 책임지는 선생님이잖아요. 자연스레 학생들의 진로를 책임져 주어야 한다는 점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의 땀과 그 부모님들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 진로개척이었어요. 그래도 처음 부임한 1988년 이후 10년 동안 단 한명의 선수도 빠짐없이 모든 축구부원들을 대학에 보냈어요. 그런 점은 저 스스로도 참 뿌듯합니다. 내 손에서 길러진 어떤 학생들도 낙오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동래고 감독을 지내던 가운데 1993년에는 청소년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제9회 호주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했다. 당시 멤버들이 김진우, 이기형, 최성용, 최용수, 김대의, 서동원 등으로 지금껏 K리그 무대에서 많은 발자취를 남겨온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지독한 뒷심부족에 8강 진출의 꿈은 무산되었다. 잉글랜드, 터키, 미국과 펼친 조별예선 세 경기에서 거둔 성적은 3무승부. 모든 게임들이 한 결 같이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후반 막바지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승리를 놓친, 아쉬움 짙은 경기였다.

 

K2리그 무대를 준비하며...

 

  몇 년 박상인은 오랜 시절 몸담았던 동래고 감독직을 그만둔 뒤 부산축구협회 전무이사로 지역축구의 행정에 관련된 업무를 보기 시작하며 축구무대의 1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2005, 전국체전 출전을 위해 부산시체육회 축구팀이 창단이 되자 부산축구협회 임원들 중 가장 많은 경력을 쌓은 그에게 감독직이 맡겨졌다. 그리고 이 부산시체육회 축구팀은 올해 부산교통공단으로 새롭게 거듭나며 K2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K2리그의 구단으로 재창단 된 과정이 참 극적이었다.

 

 “작년 다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시 체육회 축구팀을 이끌고 울산전국체전에 부산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시 측에서는 만약에 전국체전에서 1승을 거둔다면 K2리그에 참가할 수 있는 축구팀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며 사기를 돋웠는데, 사실 팀 전력이 승리를 바라볼 만 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선수들의 면면은 물론이고 제대로 연습할 시간조차 가지지 못했는데 1차전 상대는 K2리그의 강호 강릉시청인겁니다. 하지만 결과는 승리였지요. 그것도 극적인 역전승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시 관계자를 비롯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마치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결국 약속대로 부산시체육회 축구팀은 부산교통공단팀으로 거듭나며 K2리그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지금 저희 팀 전력이 그리 탄탄하지 않아요. 시체육회에 있던 선수들이 대부분 팀을 빠져나가서 급박하게 다른 선수들을 모아 이렇게 전지훈련을 오게 되었는데 강한 전력이 나올 수 가 없죠.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일은 아니잖아요? 힘들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팀이 참으로 힘든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선수들 역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차에 입단했기 때문에 그만큼 동기부여가 잘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적어도 첫 시즌은 하위권에 맴돌지 않도록 하자고 선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저 역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좀 더 멀리 내다보자면 3~4년 정도 팀의 전력을 꾸준히 다진 다음에 K리그 무대로 승격하는 것을 중기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이제 업다운제 도입이 현실로 다가온 만큼 K2리그에 참가하는 클럽이라면 당연히 그런 목표를 가져야겠지요. 저희 같은 경우는 당장 2~3년은 힘든 시기를 거치겠지만 K2리그 무대에서 적응만 해 나간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선수들 역시 의지와 열의가 상당합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만큼 더 높은 무대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죠. 비록 화려하게 부각되는 선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 점이 좋은 팀이 될 수 있는 기초가 될 거에요. 저 역시 아직까지 프로팀 감독직은 맡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K리그 무대로 진출한다면 저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미드필더 박상인, 자신에 대한 끝없는 채찍질과 겁 없는 도전정신으로 후회 없는 축구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이제 또 다른 무대에서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비록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머물러 있는 K2리그의 신생팀의 수장이지만, 이 미약한 시작을 화려한 결말로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자신한다. 지금껏 한 치의 후회도 없었던 그의 축구인생이 또 한 번의 성공으로 장식될 수 있게 말이다.

 

 “지금 돌이켜 제 인생을 바라보면 정말 축구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축구가 아니었다면 지금 제가 이렇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축구는 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지금의 저를 만들었으며 제 삶에 한 점 후회 없도록 해준 소중한 보물입니다. 앞으로 저의 남은 인생도 언제나 축구와 함께 할 겁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감독직을 그만두게 된다면 제 고향땅 창녕에서 저를 찾아 주세요. 제 마음의 안식처인 이 땅에 축구센터를 만들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정말 즐겁게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게 제 마지막 꿈입니다. 그렇게 축구와 함께 제 인생을 마무리 한다면 저는 정말 마지막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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