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노수진




생년월일

 1962-02-10 




177 Cm




몸무게

71 Kg 




포지션

 FW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6-1993

유공

136

45

19

136

45

19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1985-1990

성인 대표팀

27

5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우승

1989

K리그 MVP

1989

리그컵 득점상

1992

K리그 베스트11

1987, 1989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월드컵 본선

1986, 1990

올림픽 본선

1988

아시안컵 본선 

1988

아시안게임 본선

1986


월드컵 특집 K리그의 전설 그 두 번째 순서는 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노수진 선수입니다. 그는 86년부터 93년까지 유공에서 활약했으며 89년에는 유공을 첫 정규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는 활약으로 MVP를 수상했습니다. 계란 한 개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의 축구 역사 속으로 쉬이 잊고 살고 있던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자던 그의 이름과 함께 추억속의 그 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아쉬움이 묻어나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0 6 12 베로나 벤테고디 스타디움. 86년에 이어 2회 연속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이 벨기에를 만났다. 당시 세계축구를 활약하던 엔조 시포가 버티고 있던 벨기에. 한국의 당면 과제는 엔조 시포를 잡는 것이었다. 86멕시코 월드컵에서 이미 마라도나에게 당한바 있던 한국은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서 이탈리아를 가니까 이번에는 멕시코 때와는 또 틀리더라구요. 고지대라거나 이런 문제는 없는데 벌써 잔디 상황부터 다른 거예요. 우리나라 잔디는 물을 뿌려 놓지 않으면 거의 잘 구르지 않아요. 그런데 유럽 잔디는 벌써 공이 구르는 속도부터가 틀리죠.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국내 리그를 할 때도 잔디를 짧게 깎던가 해서 미리 그런 적응 훈련이 되어있었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죠.

 

“그래도 처음 출전한 86년 멕시코 월드컵 보다는 그나마 조 편성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86년에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 강한 팀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벨기에나 스페인 모두 유럽에서 조1위로 올라온 팀 이더라구요.

 

첫 상대가 벨기에였는데 벨기에는 벌써 그 당시부터 압박축구를 구사하는 팀이었어요. 월드컵 첫 경기라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무섭게 달려드니까 볼 한번 차기도 만만치 않은 거예요.

 

게다가 유럽 선수들은 정말 몸이 단단해요. 남미 선수들이랑 부딪히면 그냥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벨기에나 스페인 선수들하고 부딪혀 보니까 이건 완전 벽인거에요. 몇 번 부딪혀 봤는데 만만치가 않더군요.

 

“한국에서 월드컵 준비하면서 평가전을 가지잖아요. 그 때 맞붙었던 팀들이 지금 보면 전력상 가벼운 팀이었어요. 사기도 높일 겸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이유가 컸죠. 평가전을 대부분 그런 팀들하고 월드컵에 나갔는데 실전에는 전혀 다른 전력을 가진 강한 선수들이 나오니까 이건 정신이 없는 거예요. 당황하다 보니까 다른 작전은 없었어요. 그저 전담마크로 공격을 저지하는 방법밖엔 없었어요.

 

물론 대표팀의 사기도 중요했겠지만 본인은 실재적이고 우리가 월드컵에서 만날 팀들과 흡사한 팀과의 경기를 바랬던 노수진. 지금처럼 강팀들과 경기하고 부딪힌다면 그 당시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자신한다. 86년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아 느꼈던 세계의 벽.

 

그리 높지 만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 있던 비공식 평가전 이야기 속에는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90이탈리아 월드컵에 임하는 한국의 전력은 꽤나 뛰어났다.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무실점으로 마무리 했을 만큼 정용환, 최강희, 박경훈 등의 수비진이 물이 올랐고 이에 신예 홍명보도 가담했다. 공격진에도 86월드컵을 경험한 최순호와 ‘삼손’ 김주성 선수가 버티고 있었고 황선홍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대한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 벨기에와 맞붙은 한국은 86멕시코 월드컵 때와는 달리 전반 경기를 0-0으로 잘 마무리한다. 마라도나의 활약에 전반에만 두 골을 먹었던 4년 전과는 사뭇 다른 출발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후반 8분 시포의 롱패스가 페널티에어리어 쪽으로 올라오고 이를 차단하기 위해 나온 최인영 골키퍼에 한 발 앞선 데 그리세의 로빙슛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렵게 지켜온 골문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공격의 활로를 좀처럼 찾기 못한 한국은 후반 17, 노수진이태호로 교체하여 반전을 노려보지만 오히려 2분 후 벨기에의 데울프에게 왼발 중거리 골을 허용.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대회 첫 경기부터 패배라는 아픔을 안고 시작해야했던 1990년의 6월은 그와 대표팀에게 많은 숙제를 안기는 날이 되어버렸다.

 

본인도 축구선수이지만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텔레비전 속 대단한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고 또 그 선수들과 함께 대결해야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탄성과 답답함이 밀려온다. 넉넉하지 않은 대표팀에 대한 도움의 손길들에 선수들은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야했다.

 

80년대, 90년대 모두 그랬을 거예요. 저희 선배들이 더 심했겠지만 저희들도 만만치 않게 정말 빨래도 직접하고, 먹을거리도 직접 장만해서 가고 그랬어요. 고추장 집에서 볶아가서 라면에, 김치에 준비해서 가고. 지금처럼 지원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물론 협회차원에서 많이 노력을 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전폭적인 지원과 대회 후 수당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었죠.

 

“코칭 스텝들 같은 경우도 감독, 코치, 닥터 1. 그 정도의 인원이었어요. 열악했죠. 다들 물주전자 나르면서 운동했어요. 훈련 나가기 전에 호텔에서 얼음 챙겨 나가서 먹고 ….

 

지금은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고, 또 좋은 환경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들이 있어서 개선이 많이 되었지요. 점차 더 많은 노력으로 후배들에게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해요. 
      

지나온 시간들의 기억 그 자리에서 이제는 앞을 바라보는 선배의 마음이 더해 축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그의 모습.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지만 그 아쉬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축구가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기에 웃음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86년 처음으로 월드컵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그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러시아나 미국 이런 팀들 불러서 평가전 하고 준비를 하다보니까 정작 텔레비전에서 보던 분데스리가 선수들과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없었어요. 그런 선수들 하고 뛴다는 자체에서 많이 놀라고 많이 긴장했죠. 당시에 몸도 좋았고 의욕도 있고 했는데 아무래도 움직임이나 둔해지더라고요.

 

“첫 월드컵 대표팀으로 출전했던 86년의 기억은 그랬어요. 무언가 많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지요. 이 후 90년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는 일단 선수들에 변화가 있었죠. 86년만 마냥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월드컵에 출전하고, 변화를 준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니구나.’라고 느끼는 두 번째 월드컵 출전이었어요. 그래도 한 번 뛰어보고 뛰는 것이라 그런지 선수들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우리도 할 수 있다. 이정도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죠.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으로 뛴 국가대표. 86년 월드컵에선 쉽게 뛸 수가 없었다. 당시 ‘박창선, 조광래, 차범근’이라는 쟁쟁한 선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상황. 그는 몸으로 뛰는 것 보단 마음으로 함께 뛸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 전에 출전에 전반 45분 동안 경기에 출전했다. 지금은 너무 지나버린 추억에 다소 기억하지 못해 아리송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는 말로 첫 출전의 기억을 정리한다.

 

계란 한 개. 축구나 할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한 痼?아니에요. 지금으로 보면 클럽 활동이라고 하나요? 그렇게 시작을 했어요. 그냥 공차는 것이 좋았어요. 또 그 당시에는 놀만한게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잖아요. 컴퓨터나 이런 것들도 없었으니까요. 재미있어서 했어요. 

 

“학교에 축구부가 있긴 했었죠. 축구부에 들어가면 계란을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결사반대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클럽 활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죠. 주위에서 어느 정도 재능을 보고 축구부 하면 계란 한 판, 두 판도 준다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부모님도 반대하시고 해서 그냥 공차고 노는데 만족을 했죠.

“초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뒤늦게 중학교 3학년에 축구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이 후에도 주변에서 재능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그러다보니까 마음먹고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중학교까지 다녀봤는데 매일 공이나 차고 놀러 다니니까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서도 결국 허락을 해주셨죠.

늦게 시작한 축구,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그에게 없었다.

 

당시만 해도 맞아가며 축구했던 시절, 그만 두겠다는 마음보단 주변의 응원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했다는 그의 말에 진심이 녹아든다.

큰 판에 동그라미로 표시를 하고 정확히 맞추는 슈팅 연습을 자발적으로 하고, 상황을 만들어 상대 키퍼가 잡을 수 없는 방향 등을 고려해 훈련했던 노수진. 정확했던 패스만큼이나 순도 높았던 그의 득점 레이스가 가능했던 이유가 아닐까?

 

“프로 데뷔해서도 패스하고 슈팅에서 자신 있었지요. 주변에서 뭐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많이들 도와주셨으니까 골도 넣었고, 내가 다른 공격수들 보다 슈팅 타임이 조금 빨라서 골을 잘 넣었던 것 같아요. 미드필더를 많이 보다 보니까 패스나 이런 부분에서는 정확해야 했어요. 모든 포지션이 그렇겠지만 더 그랬죠.

 

중학교 시절 그렇게 연습했던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것 같아요. 정말 그 큰 판에 이렇게도 차보고 저렇게도 차보고 혼자 연습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감도 얻었고 생각하는 축구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생각한 것으로 직접 상황으로 옮겨보고 또 연습하면서 정말 생각하는 플레이가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생각하고 한 것이랑 아무 생각 없이 한 것이랑은 차이가 나잖아요. 

  

생각하는 축구. 이상적인 축구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지난날 본인의 모습에서 옛 스승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그는 너무나 소중한 스승의 이름을 조심스레 꺼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금석 선생님은 그의 축구인생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현재 ‘금석배’ 라는 축구대회의 ‘금석’은 최금석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대회로 열리고 있다. 새로운 선수 양성에 무던히 힘쓰셨던 선생님의 옛 모습이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기본기를 강조하시는 분이셨어요. 직접 볼을 차서 어린 선수들에게 지도하시고, 또 반복학습 하면서 왜 중요한지를 몸으로 느끼게 일깨워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학창 시절 내내 어디 가서 기본기가 충실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않은 것 같아요. 말 그대로 기본이 되는 기본기를 충실히 만들어 주신 분이세요. 지금은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각해요.

세월을 함께 한 축구를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 스승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다는 그는 그 시절 추억속의 스승을 떠올린다.

 

선생님 별명이 오토바이였어요. 왜 만화책에 보면 정말 빠른 모습을 표현한 그런 그림 있잖아요. 정말 똑같아요. 공을 저 멀리 차놓고는 본인이 달려가서 마무리 하시는 분이셨으니까. 엄청 빠르셨어요. 겨울에도 냉수마찰 하시는 그런 분이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 밑에서 배운 선수들은 하나 같이 기본기가 탄탄하고 좋은 선수들이에요. 교통사고로 몇 해 투병하시면서 끝내 돌아가셨지만 정말 제 마음속에 오래 남을 분이세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생님 제자들 모두 그럴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성함을 딴금석배라는 대회를 아직도 진행하고 있고요.”

 

늦은 시작에 남과 비슷해지려는 마음보단 탄탄한 기본기로 무장해 더 멀리 나아가겠다는 그의 포부는 프로 데뷔와 함께 빛을 띄운다.
유공에 입단하여 1986년 데뷔를 치른 그는 프로를 마감한 1993년도까지 팀을 이동하지 않고 유공에 남아 팀 화려한 기록들을 세워나갔다
.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넘나드는 플레이로 관중들을 환호케 하는 그의 모습은 신인이지만 당찬 모습으로 축구팬들의 기억에 자리했다.

 

첫 해 프로데뷔해서 공격수로 뛰었어요. 미드필드도 보고 그랬죠. 스카우트 되어서 유공에 입단하게 되었고 데뷔 첫 해 좋은 플레이를 보였어요. 국가대표 차출로 많은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2게임 출전해서 4골을 기록했으니 나쁜 성적은 아니지요. 만약 국가대표 차출되지 않고 프로 경기 계속 뛰었으면 아마 진짜 골 많이 났을 거예요. 한창 몸이 좋았거든요. 프로 첫 해다 보니 의욕도 많았고요. 감이 굉장히 좋았다고 할까요.”

 

프로데뷔 4년차, 아쉬운 순간이 계속되었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에게도 우승의 영광이 찾아왔다. 1989김정남 감독의 지휘아래 있던 유공이 우승을 한 것.
진다는 생각은 이미 모든 선수들에게 사라진지 오래, 그 해 힘들었던 동계훈련의 참 맛을 우승으로 맛보겠다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
우승의 기쁨과 함께 또 하나의 기쁨을 선사받은 노수진. MVP, 최고 선수의 영예에 올랐다

 

“89년도 우승할 때 멤버 정말 좋았어요. 그때 유공이 다른 팀에 비해서 그렇게 넉넉한 재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해에는 유공이 우승을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지원은 조금 넉넉하게 되었어요. 선수들에게 투자를 많이 했죠. 그러다보니까 선수들도 더 의욕적으로 경기에 나섰고 좋은 멤버들이 만들어져서 부상 없이 경기를 잘 했죠. 다들 컨디션이 엄청 좋았으니까. 모든 경기를 자신감 가득 가지고 뛰었어요. 나가면 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요. 대체적으로 이기는 경기를 했고, 조금 몸이 안 좋으면 비기는 거였어요.
득점 경쟁 레이스에서 마지막 경기 남겨놓고 비슷했으니까 욕심은 있었죠.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 근데 일단은 먼저가 우승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좋은데 일단은 개인적인 것 보다는 우승이었어요.”

 

동계훈련을 정말 엄청 힘들게 했어요. 진해 해사에 들어가서 훈련했었어요. 해사 안에 보면 연병장이 있고 그 옆에 도로가 있는데 한바퀴 뛰면 5분정도 걸려요. 한 세트가 5바퀴, 그걸 다섯 세트 정도씩 매일 했어요. 오전에는 그렇게 뛰고, 오후에는 뒤에 있는 산에 가서 운동했어요. 예전 3사단 체육 대회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훈련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했었죠. 과학적으로 만들어놓은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엄청 힘들었어요. 오전, 오후 그렇게 운동하고 나니까 힘들었죠. 그런데도 부상선수는 하나 나오지 않았어요. 뛰면서 정말 배도 고프고 그랬는데... 배고파서 도저히 훈련 못 하겠다는 선수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정남 감독은 전술적인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꾀했다. 그 당시 조윤환 선수를 최종 수비에 두었다가 몸놀림이 느린 것을 보고 다시 올려 리베로 형식의 플레이를 연출, 노수진에게 다양한 볼 배급을 만들어주었다. 골잡이 노수진을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플레이가 적극 활용된 전술에서 부담이라는 단어보단 경기를 즐기고 또한 자신감에 차있는 그의 모습이 들어난다.

 

경기를 하다가 우리 팀이 골 먹으면 조윤환 선배가 수비하다가 다시 올라와서 저한테 기회 만들어주고, 제가 골 성공시키고... 그런 형식의 플레이가 많았어요. 감독님의 특성상 수비위주의 플레이가 많았어요. 일단 골을 안 먹어야 한다는 것이죠. 감독님이 공부를 되게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감독님께 연락도 자주 드리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어서 죄송스러워요.”

 

89년 마지막 경기. 이 경기에서 비기거나 지면 럭키금성에게 우승을 뺏기는 상황. 그는 침착한 한 골과 두 번의 어시스트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경기 스코어 3 : 2 치열한 접전 끝에 얻어낸 승리, 그리고 우승. 매 경기 당찬 모습으로 임했던 그도 그 날, 그 경기만큼은 긴장을 했다는 말과 함께 미소로 그 날 기억의 끝을 맺는다.
 
우승의 참 맛도 보았고, 국가대표로써의 명예도 누렸던 그가 8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치고 이제는 한 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3년 당시 인생의 반을 축구와 함께한 그에게 더 이상 축구는 인생에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여느 선수처럼 부상이 악화되어 선수생활을 마감한 것이 아니다. 축구에 회의를 느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는 그는 아픈 추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

  

은퇴해서 바로 여기 영등포 고등학교로 왔어요. 와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요. 와서 어린 선수들 지도했죠. 지금 인천에서 뛰고 있는 방승환, 군입대한 여승원, 여동원 형제. 지금은 어느새 프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네요.”

 

네덜란드로 잠깐 유학을 다녀왔어요. 박지성, 이영표 선수가 당시 뛰고 있는 시절이었죠. 훈련하는 것부터 게임하는 것들이 모두 좋았어요. 배울 것도 많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하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공격과 수비,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은 플레이가 참 좋았어요.”

 

프로 선수에서 고등학교 감독님으로, 한창 예민할 시기의 학생들을 지도해야하는 그는, 진로를 잡아주어 좋은 선수로 발돋움 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음을 단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정이 묻어난다.

 

이제는 축구를 가르치진 않지만, 나름 그냥 일반학생들하고 수업하는 것도 재밌어요. 축구부 애들하고는 다른 모습들이에요. 운동하는 애들한테는 아무래도 농담이나 이런 것은 못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 학생들한테는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래요. 아이들이 모두 다 애기 같고 순박해요.”


잊혀져가는 우리 축구 역사 속 또 한 명의 주인공을 우리는 2주간의 시간동안 만났다.
한 인간으로써의 삶과 그리고 축구선수라는 인물로써의 삶을 모두 들여다보며 알지 못한 부분들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많은 것이 교차되어갔다
.
인터뷰 내내 K리그를 생각하고 또한 걱정하는 모습에서 아직도 프로선수 노수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짧은 소감과 함께 이 이야기를 닫는다

 

재미있는 경기를 많이 해야 경기장도 많이 찾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외국 리그들 경기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또 즐기는 마니아들을 K리그 경기장으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플레이와 많은 득점 그리고 발전하는 모습들이라고 봅니다. 발전하는 K리그가 되기 바라며 많은 관중들과 함께하는 리그가 되길 소망합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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