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프로필

성명

강득수

 

 

 

생년월일

1961-08-16

 

 

 

173 Cm

 

 

 

몸무게

67 Kg

 

 

 

포지션

FW

클럽 통산 기록

연도

구단

출장수

도움

1984-1989

럭금

139

20

34

1990-1991

현대

39

2

8

178

22

42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연도

각급 대표팀

출장수

 

1981

U-20 대표팀

?

?

 

1982-1986

성인 대표팀

?

?

클럽 주요 경력

K리그 우승

1985

K리그 준우승

1986, 1989, 1991

K리그 도움상

1986

K리그 베스트11

1985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

월드컵 본선

1986

U-20 월드컵 본선

1981

아시안게임 본선

1986

어시스트의 달인, 찬스메이커 - 강득수

인류는 역사 대대로 통계 내기를 좋아해 왔다. 우리나라의 인구부터 내가 받은 성적의 등수까지. 통계는 나라를 통치하는데서 부터 나를 평가하는데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효율적으로 쓰인다. 축구를 봐도 마찬가지다. 승리를 거둔 팀에게 승점을 부여하여 가장 많은 승점을 얻은 팀에게 1위의 타이틀을 부여하기도 하고 골을 많은 선수에게는 득점왕의 영예를 안겨 준다.

 

축구에 남는 기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연도별 타이틀과 통산 타이틀이 그 것이다. 그 중 통산 기록은 오랫동안 회자되는 추억거리로 꼽힌다. 한 해 반짝하고 지는 스타가 많은 축구계에서 오랜 시간동안의 활약을 축적하여 기록으로 남긴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년 시즌에 김도훈 선수가 김현석 선수의 통산 110골을 넘기는 모습을 많은 팬들이 관심으로 지켜보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20년의 K리그 역사동안 빠짐없이 등장하는 스타가 있다. 86년 고작 17경기를 뛰며 10개의 어시스트를 몰아친 고감도 찬스메이커 강득수(48). 그가 기록한 통산 42개의 어시스트는 지금도 역대 7위의 성적으로 남아있다. 이는 경기당 어시스트 개수 0.24개에 달하는 수치로 통산 어시스트 10위에 해당하는 선수 중 단연 최고의 성적을 자랑한다. 10명의 선수 중에 80년대에 활약한 선수가 강득수 밖에 없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경기 수가 지금에 비해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매경기 4~5번의 득점 찬스를 만들어주던 고감도 찬스메이커 강득수. 그가 오른발잡이 임에도 불구하고 왼쪽윙으로 밖에 뛸 수 없었던 이유, 중학교 1학년 때 축구를 그만두었던 그가 다시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사연. 그 추억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영화실미도사건의 배경이 되는 해인 1971. 경기도 송탄의 서정리 초등학교에 덩치 큰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이리 저리 뜀박질을 하는 이 아이들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송 맺혀있었다.
 
저 선생님이 서울에서 오셨는데, 우리 학교에 축구부 만든 댄다.” “이번에 축구부 들어가야 맛있는거 많이 먹을 수 있는데.”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70년대 초. 못 먹고 못 입던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있어 소위 먹여주고 재워주는 축구부는 유일한 희망과 같은 존재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서울에서 온 문권태 코치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그런데 키 큰 아이들 사이에 유난히 몸이 작은 아이가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6학년 강득수. 축구를 너무 좋아했던 득수는 덩치도 작고 달리기도 별로 빠르지 않았지만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리고 큰 아이들과 싸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코치 선생님의 눈에도 공을 제법 잘 다루는 득수가 들어왔는지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이르지 않은 나이에 본격적인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6학년 때 학교 축구부가 창설 되어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창단 첫 해에 경기도 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당시는 인천도 경기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 지역이 꽤 넓었던 때죠.”

 

문권태 코치 밑에서 착실하게 기본기를 닦은 득수는 빠른 순발력과 감각적인 드리블 실력을 익힐 수 있었다. 서정리초등학교도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주위의 친구들이 서울로 스카우트 되어 갔지만 체격이 작았던 득수에게 좋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서 알아주던 본동 초등학교의 코치님과 저희 선생님께서 친구였습니다. 덕분에 연습게임도 많이 하고 우리 학교 선수들 중 체격이 크고 빠른 주축 선수들은 그 곳으로 스카우트 되어 전학 갈 수 있었어요. 본동 초등학교에서는 대부분 대신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카우트 되어 간 4명의 친구들은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죠.”

 

아쉽게도 서울로 스카우트되지 못하고 지역의 태광중학교에 진학해 동네에 남게 된 득수는 축구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태광중학교에도 몇 년 전에 창단한 축구팀이 있었지만 서울로 스카우트 되어가지 못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더 이상 축구를 하기 싫었다.
당시 백호팀에 계시던 문구호 선배와 그 분의 동생 문민호 선배. 그리고 이세연 선배도 오셔서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여건도 나쁘지 않았고 코치님들도 와서 축구를 하라고 계속 권유하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더군요. 제 입장으로서는 다른 친구들은 서울에 스카우트 되어 상급 중학교로 진학하는데 그렇지 못한데 대한 창피함이 컸거든요. 부모님이 반대하신다는 핑계를 대고 1년 정도 축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축구를 그만두고 평범한 중학생으로 돌아간 강득수.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요즘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우신초등학교 코치선생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축구 하지 않겠냐고. 축구를 하고 싶었던 저는 당연히 승낙했죠.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저를 비롯해 두 명이 우신초등학교 6학년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주 쪽에서도 세 명이 왔구요.
그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실력이 일정수준까지 차지 않으면 학년을 올려주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나이 많은 5명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하다보니까 6월정도 되니 서울시를 휩쓸기 시작하더라구요. 당연히 중학교에서도 서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구요. 반 정도의 학생은 동북 중학교로 진학했고 저를 비롯한 절반의 학생은 배재중학교로 진학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림중학교를 갔다가 배재중학교로 전학하기로 약속이 되었어요. 그래서 일단 신림중학교로 배정되어 갔는데 그 곳에도 창단한지 3년 된 축구부가 있더라구요.
입학하자마자 전학을 가려고 하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동의를 해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학교장 승인이 있어야 전학을 가는데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옷 벗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 보내주겠다고 하고, 저희들은 가야 된다고 하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버린거죠. 그 때 까지만 해도 수업료 면제나 이런 혜택이 다른 곳에는 없었는데 다행히 교장 선생님께서 혜택을 줄 테니까 이곳에 있어라 이렇게 저희를 구슬려서 그 곳에 눌러앉게 되어버렸습니다.”

 

신림중학교를 거쳐 한양공고에 진한한 강득수는 이미 축구에 미쳐있었다. 한시도 공과 떨어져서는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어떤 훈련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고 남들이 축구에 미친놈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새벽 운동 끝나고 아침 먹고. 좀 쉬고 오전 운동 하고 오후 밥 먹고, 또 오후 운동하고.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계속 공을 갖고 연습했고 신도 벗지 않은 상태에서 신발장 옆에서 쪼그려 잔적도 많았습니다. 거의 밥 먹고 자는 시간외에는 축구에만 몰두했죠.
크리스마스 때도 어머니와 모래 조끼를 만들고 그걸 입고 연습했어요. 한양공고 옆 장충단 공원에서 서울타워까지 모래 조끼를 입고 계단을 뛰어 오르는 연습을 수도 없이 했죠.
개인기를 연마할 때는 후배들을 데려다 놓고 1:1 또는 1:2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동료들과 골대 맞추기, 미니게임 등의 훈련도 많이 했구요. 어느 훈련 하나 축구를 한다고 하면 힘들지 않았습니다.”

 

장편소설괴물의 작가로 유명한 이외수씨의 저서에는 인상적인 문단이 하나 있다.
-
내게는, 타고난 재능으로 고수에 이른 사람보다는 피나는 노력으로 고수에 이른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해 보이고, 피나는 노력으로 고수에 이른 사람보다는 그 일에 미쳐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더 위대해 보이는 사람은 그 일을 시종일관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2006)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내내 축구가 미치도록 즐거웠다는 강득수의 열정은 그야말로 위대한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구타에 시달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그의 말 속에서 축구를 즐기는  모습은 더욱 놀랍게만 느껴진다.

 

한양공고에 럭비부가 있었어요. 동네에 효명 중학교라고 럭비를 잘하기로 유명한 학교가 있었는데 거기서 진학해서 럭비부 주장을 하고 있는 동네 친구가 있었어요. 저는 1학년이다 보니까 운동부 애들이 훈련 끝나고 옷을 다 벗어 던지고 가면 다 빨아야 됐었죠. 친구라도 없으면 모르는데 정말 서럽더라고요. 그래도 나름대로의 룰이다 보니 꾹 참고 따랐습니다.
근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후 10가 되면 자기 전에 항상 선배들한테 맞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운 좋으면 10대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고 선배들 기분이 나쁘면 30대에서 50대까지.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항상 맞는 게 일이었어요. 숙소 앞에 물을 받아놓는 큰 드럼통이 있는데 그 안에 항상 5~6개의 각목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은 축구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잖아요.”

 

한양공고를 졸업하고 연세대로 진학한 강득수는 다시 한 번 축구인생에 있어서의 전환기가 될 큰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1980년 연세대에 입학한 강득수는 입학직전 당한 불의의 발목 부상과 이어진 악재 때문에 한동안을 병마와 싸워야 했다. 첫 부상은 미처 입학식을 치르기도 전. 80 2월에 서울대와의 연습경기에 입은 발목 부상이었다. 3개월 동안 병원을 전전했지만 스포츠 의료 분야가 덜 발달되었던 시절이다 보니 한번 부상당한 발목은 쉽게 나을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발목을 다쳐서 3개월을 쉬었는데 잘 먹고 쉬니까 체중이 10kg이나 불더라고요. 게다가 조금 나았다 싶어서 운동을 시작하면 다시 다치고, 계속 부상이 반복되면서 대학 시절동안에만 5번이나 깁스를 했어요.”

 

악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0학원사태때문에 연·고전 까지 열리지 못한 상황에서 오랜만에 출전한 추계 연맹 준결승전에서 당한 어깨 부상.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전국체전, 대통령배, 추계 연맹전에서 연달아 우승을 거둬 3관왕을 기록한 연세대의 승승장구와는 반대로 강득수의 대학 1년 차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가 탈구되어 더 이상 오른쪽에서 플레이하기가 힘든 지경까지 내몰렸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는 일은 없었다.

 

강릉에서 준결승전을 치르던 도중이었는데 경기장이 맨땅이었어요. 볼이 길게 오길래 슬라이딩을 해서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볼을 못 건드리다 보니까 어깨가 먼저 땅에 닿은 거에요. 그 때 처음 어깨가 탈구가 됐지요.
처음에 치료를 잘 했어야 하는데 재활 치료를 제대로 못하다 보니까 볼에 맞아도 빠지고 상대 선수와 부딪혀도 빠지는 정도까지 악화되었습니다. 게임을 뛰다가도 수시로 빠져서 친구들보고 잡아달라고 해서 다시 어깨를 맞추고. 쑤시는 고통에도 참고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제가 왼발잡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른쪽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어요. 오른쪽 사이드로 가면 상대편 선수와 왼쪽 어깨가 부딪히기 마련이니까요.
다행히 대표팀 합류 후 태릉에서 물리치료사 분께 재활치료를 받은 이후에는 거의 빠진 적이 없는데 그 전까지는 정말 힘들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정도에서라도 그쳤으면 좋으련만. 그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10, 전주에서 열린 충북대와의 준결승전에서 다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상대방의 고의성 짙은 태클에 그는 양쪽 무릎을 동시에 부여잡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참으로 처참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금세 부상을 훌훌 털어 버렸다. 다음해 2월에는 청소년 대표팀에 늦깎이로 합류해 22회 아시아 청소년 대회 우승의 쾌거를 이룩해내기에 이른다. 10월에는 호주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 출전, 이탈리아를 4-1로 잡는 등 선전하지만 아쉽게도 8강 진출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때 같은 조가 이탈리아, 루마니아, 브라질 이었어요.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으니까 난리가 난거에요. 비록 그 이후에 루마니아한테 0-1로 지고 브라질한테는 0-3으로 져서 8강 진출이 좌절되긴 했지만 루마니아가 그 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것을 감안하면 강호들을 상대로 8강을 이뤄낼 뻔 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과가 높았던 대회였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때는 지금같이 유럽 팀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런게 많았어요. 평소에 우리끼리 경기를 할 때는 잘 안 걸리는 패싱 상황에서도 유럽 선수들이 다리 길이 면에서 워낙 차이가 나니까 쉽게 걸리는 거에요. 요새는 유럽에 나가있는 선수도 있고 선진 축구에 대부분 익숙하다 보니 그런 것들을 다 아는데 그 땐 굉장히 생소했지요. 기껏해야 동남아시아권에서만 경기하던 애들이 세계 강호들과 겨루려고 하다 보니까 세계의 벽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정보력 면에서는 차이가 컸습니다. 첫 경기에서는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나름대로 스피디한 스타일로 밀어 붙이다 보니까 이탈리아가 정신없이 당했는데 두 번째 경기쯤 되니까 루마니아나 브라질이 우리를 어느 정도 분석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니까 점점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지금이야 세계 어느 팀과 비교해도 정보력에서 뒤지지 않지만 그 때는 큰 차이가 났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정보력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이 대회에서 세계 축구를 경험한 박종환 감독이 다음 대회인 8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4강의 기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모두가 수긍하지 않을까.


 어려운 정국을 헤치며 대학 생활을 보낸 강득수 84년 프로 창단 팀인 럭키금성에 합류해 프로에서의 첫 시즌을 보낸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프로에 합류한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첫 해부터 팀의 에이스 번호인 10번을 달고 경기를 뛰었다는 사실. 거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겨있다.

 

“83 8월에 선수를 모집해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넘버를 지정할 때가 되니까 서로 눈치를 보고 10번은 선택을 안하는거에요. 제가 그때 막내였는데 내가 10번 하겠다고 했죠. 자신에 차서 그랬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돌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해부터 보여준 강득수의 활약은 No.10의 역할을 채우고도 남았다. 첫 해 27경기를 뛰며 2 6어시스트. 어시스트 순위 공동 6위에 달하는 활약이었다. 다음 해인 85년에는 5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K리그 정상에 자리에 올려놓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가 터뜨렸던 5개의 골 중 4개는 승부를 결정짓는 결승골. 리그 최고의 선수로 꼽히기에도 빠질 것이 없는 활약이었다.

  

포항과의 선두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K리그 역대 최고의 용병 중 한명으로 꼽히는 피아퐁의 맹활약도 컸다. 득점왕과 어시스트왕을 동시에 차지할 만큼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며 강득수와 호흡을 맞췄다.

 

지금 브라질 용병 같이 매우 유연하고 빠른 선수였습니다. 순간적인 터닝슈팅 이라든지 한 박자 빠른 슈팅이 날라 오니까 상대 골키퍼가 많이 애를 먹었죠. 위치 선정도 좋아서 어시스트도 잘 받아 넣었고 탄력이 좋아서 한 번 치고 나가면 스피드 조절을 하면서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죠.”

 

팀을 창단 2년 만에 정상의 자리까지 올려놓으며 맹활약을 한 강득수 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뒤늦게 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부상으로 빠진 김석원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최종 선발된 것이다. 당시 나머지 한 자리를 메울 선수로 지목되었던 선수들이 박성화, 정해원, 이흥실 등의 쟁쟁했던 선수들임을 감안하면 리그에서 강득수가 보여준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표팀 차출로 17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했던 86. K리그에서 그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17경기를 뛰며 무려 10어시스트. 경기당 0.59개의 어시스트에 달하는 역사상 유래 없는 대기록이었다. 럭키금성 역시 강득수의 맹활약을 앞세워 86 한국 프로축구 대제전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게 된다. 포항과 11 22일과 23일 양일간에 걸쳐 1·2차전을 치르는 살인적인 일정. 두 번째 경기에서 강득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1-0으로 지고 2차전이었는데 제가 수비진영에서 조영증 선수한테 백패스 한 것이 상대 용병 호샤 선수한테 빼앗겨서 선제골을 먹고서 1-1로 비겼어요. 결국 1 1패로 우승을 놓쳤습니다. 2차전 같은 경우 제 실수 때문에 실점을 한거라 감독님께도 많이 혼났죠. 아픈 기억입니다.”

 

리그 2연패의 7부능선 까지 넘었던 럭키금성으로서는 아쉽지만 후기 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비록 최후의 실수로 인해 빛이 바라긴 했지만 86년에 보여준 강득수의 몰아치기 어시스트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음 해인 1987. 10 31일 대구에서 열린 포항과의 경기에서 팀 동료이자 ‘K리그 전설코너의 첫 번째 주인공 박윤기K리그 1000호 골을 터뜨린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박윤기는 그 골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그 경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저는 당시에 기록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1000호골 같은 경우는 계속 기록에 남는 것이다 보니까 그런 쪽에 신경 쓰는 동료들은 게임 전에 서로 밀어 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랬었죠. 경기 시작하고 나서는 서로 먼저 넣으려고 찬스가 나면 바로 때려버리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은 강득수가 원체 골 욕심과 기록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가장 먼저 40어시스트를 달성한 선수로서 만약 골 욕심만 더 있었다면 98고정운이 세운 40-40 기록이 적어도 7년은 더 빨리 세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기대는 K리그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어시스트 40개가 넘는 선수 중 40-40 클럽에 들지 못한 선수는 윤정환, 강득수, 신홍기가 전부일 정도로 득점에 비해 어시스트 기록은 세우기 어려운 기록이다. 자신이 직접 결정지으면 되는 득점과는 달리 어시스트는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 주더라도 받은 선수가 골을 집어넣지 못하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욕심이 있었다면 더 넣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시스트를 하면 제 나름대로의 묘미랄까 골 넣는 거보다 어시스트 하는데 더 재미를 느꼈던 것이지요. 그래서 딴 사람들 보기에는 쟤는 왜 넣지는 않고 어시스트만 하나. 그렇게 생각 하신 분도 더러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희열을 느꼈었어요.”
 
87
년과 88년 나쁘지 않은 활약으로 시즌을 마친 강득수 89년에 들어 선수생활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2월에 받은 무릎수술의 영향으로 89시즌을 송두리째 날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느새 30줄에 들어선 강득수에게 무릎수술은 선수 생활을 끝마칠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0월께나 되어야 그라운드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란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8 5일 현대와의 경기에서 30분간 그라운드를 누비며 컨디션 회복에 나선다. 다음 경기인 일화전에서는 결장. 숨고르기를 한 후, 15일부터 6경기 연속 선발 출전하여 내리 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이 후 13경기를 더 뛰며 2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한 강득수 89년 어시스트 순위에서도 3위에 오른다. 1·2위를 기록한 이흥실과 고정운이 각각 39경기와 31경기를 뛰어 11개와 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음을 감안한다면 다시 한 번 그의 어시스트가 얼마나 순도 높은 활약이었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공적인 6번째 시즌을 보낸 강득수는 자유 계약 선수로 변병주, 정종수와 함께 현대로 이적한다. 90년에는 대우의 수비수 이재희(48)와 함께 리그 최초로 통산 150경기 출장의 금자탑을 세우지만 정들었던 친정팀의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일까. 90, 91 두 시즌동안 2 8어시스트에 그친 그는 92, 이적을 요구한다. 그러나 팀은 재능 있는 강득수를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았고 보류선수로 묶여 있던 그는 결국 은퇴를 결심한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에는 91년에 당한 큰 부상의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현대하고 대우 라이벌 전이었는데 김판근 선수와 부딪혔어요. 저는 뒤로 물러가고 있는데 앞으로 점프하면서 무릎으로 제 머리를 친 거예요. 정신을 잃어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다가 깨어나서 다시 경기장으로 가자고 했어요. 근데 머리는 핑핑 돌고 정신없이 경기장에 와서도 계속 헛소리만 해대고. 그 때 당한 부상 때문에 목이 계속 안 좋아서 지금도 목 디스크가 있습니다. 그 이후에 팀과도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목 부상도 있고 해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죠.”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발목, 무릎, 어깨, 목 부상과 간염. 신체의 어느 부분 하나 성한 곳 없었지만 오직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은퇴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93, 최진한 코치의 권유로 숭덕공고의 사령탑을 맡아 95년에는 팀을 전국고교축구대회 정상의 자리까지 올려놓았고 97년에는 고양시에 있는 능곡고에 정착하여 축구팀을 창단해 9년 동안 팀을 지도했다. 현재, 한양 푸드 시스템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얼마 전 브라질로 유학을 다녀왔다.

 

브라질에서 클럽, 유학사업, FC 서울 용병 탐색 등 많은 일을 하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브라질은 하다못해 조기축구회라 하더라도 연중 스케쥴이 모두 잡혀 있을 정도로 각급리그가 짜임새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유럽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게임은 홈&어웨이가 기본이 됩니다. 단판 승부의 개념은 절대 없구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게임 수가 적다고 하는데 브라질 같은 경우 프로 선수들이 거의 해마다 90게임 정도를 소화해요. 1년 내내 축구만을 생각하고 축구에 묻혀 사는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시설이 열악하다는 점은 의아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학교에 운동장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서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꼭 클럽에 소속 되어야만 하죠. 7 7 경기를 할 수 있는 인조 잔디 구장이나 사설 운영 클럽을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같은 학원 축구의 개념이 아닌 완벽한 클럽 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지요. 상파울루 같은 경우 경제의 중심지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든 학생들이 축구를 하겠다고 몰려들어요. 그렇게 많은 선수를 추리고 추려 프로가 유지되니 재원이 항상 훌륭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역 시절 최고의 링커, 최고의 찬스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강득수. 그리고 13년간 학원 축구에 몸 바쳐 후진 양성에 힘썼던 그는 이제 제3의 인생을 위해 다시금 힘찬 날개짓을 시작하려 한다.

 


결코 쉬운 길만 앞에 놓여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50줄에 가까운 나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껏 그래왔다. 모두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몸도 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포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뜨거운 열정이 다시 불타오른다. 그가 서있던 그라운드, 그 곳에 언제까지고 서있을 것이다.

 

강득수. 그의 어시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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