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백여우, 한문배를 아십니까? - 한문배

 

 

지난 4 17, 전남광양운동장. 험멜코리아배 전국춘계대학축구연맹전 결승전에서 한양대와 숭실대가 만났다. 후반 23분 숭실대의 첫 골이 터졌으나, 후반 37분과 38. 한양대 고경민의 연속 골이 터지면서 우승컵은 한양대 품에 안겼다. 그 순간, 기쁨과 환희에 취한 선수들 틈에서 조용히 미소 짓던 한 사람이 있었다. “모두 다 우리 선수들이 잘해준 덕분이죠.” 우승의 공을 선수들에게 돌리던 사람, 바로 한양대 축구부 감독, 한문배였다.

 

한문배. 80년대 이후 출생한 이들에게 그는 축구명문 한양대 축구부를 이끄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허허, 웃을 때마다 풍기는 인자한 향기와 구수한 말투는 참으로 사람 좋은 지도자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푸근한 모습을 보며, ‘그라운드의 백여우라고 불리던 20년 전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까?

 

1984년 수퍼리그 출범 당시 럭키금성 주장이었던 그는, 이듬해백여우라는 별명에 걸맞게수퍼리그 우승 ‘M.V.P’ 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에 성공했다. 당시 수많은 매체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지만, 그중 단연 인상 깊었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상대 공격수의 다음 동작을 간파해 공격의 맥을 끊는 한문배 선수의 돋보이는 수비는 그의잘 돌아가는머리와 더불어닳고 닳은노련함이 앙상블을 이룬 것이다. 그는앞으로도 기량을 더욱 가다듬고 보완하여 좋은 플레이를 팬들에게 선사하겠으며, 체력이 다해 은퇴하게 되면 지도자의 길을 택해 후배들을 양성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축구발전을 위해 조그마한 힘이나마 바치겠다고 말했다. (럭키금성 사보 中)

 

결국 그는 M.V.P 수상소감 그대로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물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랐다. 다음해인 86년 수퍼리그를 마지막으로 프로무대를 떠났으니 말이다. 1000일이 조금 넘는 3년간의 프로생활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아쉬움이라는 석자는 없었다. 10년 넘게 프로에서 뛰던 선수들도 얻기 힘든 것들을 모두 안고 떠나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저 소중하고 뿌듯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꼭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청량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9월의 어느 오후, 한양대 축구부 숙소에서 전설 속 그라운드의 백여우, 한문배를 만났다.     

 
축구는 내 운명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급식 빵을 줬어요. 그런데 그 강냉이 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우리 집은 넉넉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난 그게 너무 맛있어서 도시락하고 그 빵하고 바꿔먹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런데 축구부에 들면 방과 후에 운동이 끝날 때마다 그 빵을 두 개 씩이나 준다고 하대요. 그 급식 빵 타먹기 위해 들어간 것도 있었지요. (웃음) 그때가 4학년 때에요. 뭐 지금처럼 잘하는 애한테 가서 선수로 들어오겠냐고 제의하고 그런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 발로 걸어 들어갔죠.”

 

축구가 좋았다. 운동 후 먹는 강냉이 빵도 좋았다. 그렇지만 평생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링고스타의 손놀림 때문이었을까? 발로 하는 축구보다 손으로 하는 드럼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축구부에 있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선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았죠.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드럼을 하고 싶었는데 밴드부에 못 들어갔어요. 놀아야하는데 수업 끝나고 할 건 없고. 그래서 아버지 몰래 형들 따라 신문 돌렸죠. 옛날에는 보급소에서 신문 받아서 돌리고 수금도 직접하고 그랬어요. 한 한달 돌리고 있는데, 친구가 신문 돌리지 말고 축구부 들어와라. 그러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같이 축구하던 친구가 먼저 축구부를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알았다, 하고 들어갔죠. 심심하니까. 공부는 하기 싫고. 친구들, 형들하고 놀러 다니다가 다시 축구부로 들어간 거예요. 마침 내가 다니던 수원 중학교에도 축구부가 있었으니 다행이었죠. 축구부가 없었으면 다른 길로 갔을 지도 몰라요. 그럼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죠

 

그래. 어떻게 해서든, 결국 축구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나보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안 하겠다고 한 사람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했고, 아버지도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셨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할 필요도 없다고, 그저 알아서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부유하고 여유가 있으니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고, 그때마다 도와줄 수 있는 건 뒤에서 도와주겠다고 하신 것 같아요. 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유 있는 생각도 하실 수 있었던 거겠죠,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거든요. 지금도 제일 안타까운 건 자식들 중에서 아버지 대를 이어서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거죠. 그렇게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공부는 싫었고. 축구도 처음에는 노는 재미로 했어요. 그냥 즐기는 거니까, 그걸로 출세를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없었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있다 보니 다들 어려서부터 축구를 열심히 하면 내가 이만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데, 그때는 그저 다들 애들하고 노는 재미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밤이 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죠. 저녁에 어두컴컴해지면 집에 가구 그랬어요. 집 앞이 바로 학교니까들어와서 밥 먹어하면 그때 집에 들어가는 날이 다반사였어요.” 

 

축구하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한 시절,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 시기는 모두에게 어려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중학교 때도 집에서 왔다 갔다 했어요. 집에 갈 때면 공을 차면서 갔어요. 공이 지금처럼 많은 게 아니었거든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학교에서 공을 많이 사줄 수가 없었어요. 학교 공인데 잃어버리면 큰일 나니까 애들이 각자 공을 맡았어요. 자기가 맡는 공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다녔죠. 수업이 끝나면 2시간 반 정도 연습했는데 그때만해도 지금처럼 프로팀에서 나와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니고, 대개 학교 체육선생님이 많이 가르쳤어요. 그렇지 않으면 서울서 축구하던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줄 때도 있었고요.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유니폼 하나 갖기도 힘들었던. 그래서 중학교 들어가 유니폼을 받았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가끔씩 시합 앞두고만 연습했고 연습할 때나 시합할 때만 유니폼을 줬어요. 시합이 없을 때는 연습도 없어 유니폼을 입을 수도 없었죠. 그런데 중학교에 가니까 유니폼을 주더라고요. 물론 그것도 선배가 물려서 주면 그걸 입고 생활하다, 나중에 졸업할 때 내놓고 가야했지만 그것마저도 고맙다고 생각했죠.”

 
오직, 축구 때문에 

그저 어리기만 했던 소년 한문배도 어느새 열 일곱이 되었다. 거뭇 거뭇 턱 수염이 나기 시작했고, 축구를 향한 욕심 역시 조금씩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수원중학교, 수원고등학교 시절에는 6교시 수업까지 꼬박꼬박 들어갔어요. 안 그러면 담임 선생님께 혼이 났어요. 사실 요즘 축구하는 애들은 수업 잘 안 들어가잖아요. 선배 된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게 아쉬워요. 수원고 시절 한번은 영어 선생님이 내준 시험에서 4점 밖에 못 맞았어요. 그때 잘 맞는 애들도 40, 50점이었지만, 시험 못 봤다고 혼난 기억도 있어요. 수업 들으랴, 운동하랴, 그때 참 힘들었죠. 새벽에 체력훈련을 시켰는데 그게 또 무척 힘들었어요. 수원 남문 옆에 산이 있어요. 새벽 6에 일어나서 그 산 중턱까지 10번 뛰고, 또 올라가서 줄넘기 하고 계단까지 뛰는데, 보통 한 시간 반이 걸려요. 그러고 집에 와서 씻고 밥 먹고 수업을 가야해요. 지금 수원시 축구협회 회장 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우리 코치로 계셨는데, 서울서 축구를 하다 내려오신 분이에요. 그래도 그때 축구에 관한 모든 걸 배운 것 같아요. 그때 배운 기술을 축구인생 동안 참 잘 써먹었죠. 볼 컨트롤, 패스 같은 기본기를 거기서 충실히 배울 수 있었거든요.”

 

1 때 문교부 장관배에 나갔는데 경신고한테 5 0으로 진 기억이 나요. 당시 서울팀하고는 플레이가 안됐어요. 차이가 많이 났어요. 우리가 실력이 없구나. 우물 안 개구리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초였어요. 축구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전학을 가게 됐죠. 수원 중학교 시절에도 전국대회에는 나가보지 못했어요. 나갈 실력들이 안 되니까요. 수원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던 중 월드컵 예선을 할 때였어요. 동대문 운동장에 구경을 갔다가 막차를 놓쳐서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숙소에서 자게 됐어요. 그때 고재욱 감독이 선수로 있었는데, 거기서 하루 자고 연습하는 거 보고 아, 나도 축구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처음에 중동고로 옮겼는데 중동고 감독 선생님이 영등포공고 축구부가 재창단을 했다고 거기로 날 데리고 간 거예요. ()정무도 중동서 만난 거죠. 걔는 목포에서 졸업해서 왔고 거기서 영등포 공고로 갔죠.”

 

오직 축구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끈 선택이었다. 그러나 영등포공고에서의 생활은 분명 달랐다. 쉽지 않았다. 아니 결코 쉬울 수 없었다.

 

영등포공고에서 비로소 축구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 처음으로 합숙생활을 하게 됐어요. 힘들었어요. 그동안 자유분방하게 생활했잖아요.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운동했는데 합숙소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그게 힘든 거죠. 또 수원서 생활할 때는 다 동네 선후배였으니까 괜찮았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니까요. 선배를 모셔야한다는 점에서 힘들었죠. 청소해야지, 빨래해야지, 밥 차려 줘야지, 아줌마가 있으니까 설거지는 안 하더라도 밥상 치워야지. 매 끼 부엌에서 음식 가지고 와서 우리가 차려야했고, 밥통에서 밥 퍼 와서 떠놓으면 선배들은 그냥 와서 먹기만 했어요. 그런 걸 그때 처음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 힘들 수밖에요. 게다가 매일 6 일어나서 당산동 3가에서 화곡동까지 매일 도로를 뛰었거든요. 물론 쉽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이걸 해야만 내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이걸 안 하면 내가 축구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생각하며 극복했죠. 축구가 좋아서 왔는데 이런 걸 안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가끔씩 선배들하고 트러블이 있을 때가 있었어요. 심한 기합은 맞을 수도 있지만 타당성 없이 심부름 시키고 그럴 때는 성격상 막 대들었거든요. 그래서 혼도 많이 났어요.”

 

힘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학교를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우승의 기쁨을 처음 맛보게 해준 곳 아니던가. 바로 이곳, 영등포공고는.  

 

학교를 옮기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죠. 물론 그때만 해도 크게 늘었다는 느낌을 잘 몰랐지만요. 그냥 다 같이 어울려서 축구한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그때 당시 영등포공고 운동장이 무지 작았어요. 정규구장 크기가 안 나왔죠. 아마 반코트도 안 나올 거예요. 그래서 조그만 골대 놓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숏게임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기술이 있어야하니까 거기서 정무도 나도 기술이 많이 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등학교 때 우승을 참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7번 결승 올라가서 4번 우승, 3번 준우승했어요. 3 때는 2번인가 했죠. 그때는 시합을 딱 나가면, ‘부산하면 동래, 부산. ‘서울하면 경신, 한양, 중동, 영등포, 동북. 이렇게 강호인 학교들이 있었어요. 웬만한 지방고등학교는 시시했죠. 다들 그렇게만 알아줬어요. 2년 동안 포지션 역시 참 많이 바꿨네요. 처음에는 센터포워드를 봤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른쪽 사이드 백을 봤고, 3 때는 스위퍼 자리를 봤죠. 나중에 대학교 가서는 미드필드 지역에서도 자주 있었지만 그래도 주로 수비 쪽에 있었죠.” 

 
고교시절, 추억 하나, ,
제가 지금도 닭고기를 잘 안 먹어요. 왜 그러냐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진주에서 문화장관배 축구시합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금의 MBC배죠. 그 대회를 갔는데, 친구들하고 여관에서 내일 시합인데 우리 통닭이나 한 마리 사서 간식으로 먹자, 그랬어요. 그런데 네 명이서 통닭 한 마리 가지고 어떻게 배를 채워요. 한 마리 사고, 한 마리 사고, 그러다 결국 한 사람당 한 마리씩 먹게 됐는데 그게 탈이 난거에요. 그때 후배는 닭 뼈가 목에 걸렸고, 전 탈이 나서 밤새 설사하고 그랬어요. 다음날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가야했어요. 선생님이 보호자로 병원에 같이 가야했고, 결국 선생님도 전날 밤 우리끼리 몰래 닭 먹다 그랬다는 걸 알게 되셨죠. 그런데 워낙 기진맥진해서 야단칠 수 있나요. 야단은 다음에 치기로 했는데 우승하는 바람에 잘 넘어갔죠, . (웃음) 다행히 예선 때 아파서 우승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때만 해도 다들 어렵게 살고 그랬으니까 같이 놀러가기 힘들었죠. 지금은 같이 놀러가서 추억도 만들고 그러는데 그땐 그러는 게 힘들었어요. 휴가가 주어져도 다들 각자 집에 가기 바빴어요. 정무 같은 경우도 집이 진도니까 휴가 때마다 바로 집에 가고 그랬어요. 그러고보니 한번은 이랬던 적이 있어요. 우리 학년이 다 같이 무단이탈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수원 우리 집에 다 데리고 왔죠. 다 데리고 오니까 우리 아버지가 너희 왜 왔냐, 하시길래 얘네들이 딸기 먹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고 했죠. 그래서 아버지가 애들 다 데리고 가서 딸기 사주고 고등학교 선생님께 연락하셨어요. 선생님은 고놈들 어디 못가게 집에다 잡아놓고 있으라고 했고, 그것도 모르고 집에 있던 우리는 그대로 잡혀 들어갔죠. 사실 그때 바로 위 선배들하고 트러블이 있었거든요. 선배들이 정상적인 나이로 학교를 다닌 사람이 없었어요. 나보다 1년 선배인데 나하고 동갑인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까. 그때는 그것 때문에 기죽기 싫더라고요. 나이는 동갑인데 형, 하면서 예우를 해줘야하는데 당시에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대학 진학은 보통 6월 전에 거의 다 결정이 나요. 워낙 공부를 싫어하는 놈이니까 대학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무가 연대로 가기로 결정됐고, 저 역시 연대로 결정 나서 둘이 같이 가기로 됐어요. 그때만 해도 정무가 저보다 조금 더 잘했던 게 사실이에요. 물론 포지션이 완전히 달랐지만 마치 제가 꼭 딸려가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또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시 한양대 감독선생님이나 부장 선생님이 우리 고등학교 감독 선생님하고 워낙 친밀한 관계가 있었거든요. 아마도 제가 거기에 속은 것 같아요. (웃음) 그때 정무가 스카우트 파동 때문에 고대로 도망갔다 다시 연대로 왔는데, 우리 선생님이 너 허정무가 고대로 도망갔으니까 연대에서 너두 안 받아, 그랬거든요. 바로 전에 연대 감독선생님이 가서 열심히 하고 있어, 그랬고 저는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빵집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막 우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왜 그러세요?, 했더니 저를 연대서 안 받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아, 그래요? 그럼 나 연대 안 갈게요, 했죠. 그럼 너 어디 가고 싶어? 하길래 저요? 군대 갈래요.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때 공군 팀이 처음 만들어질 때였거든요. 그래서 군대나 빨리 마치고 오던지, 서울신탁은행, 그러니까 지금의 하나은행이지. 그 팀 가겠다고 그랬더니 왜 대학 안가냐며 설득했고 결국 한양대로 가게 된 거예요. 또 마침 친구도 같이 갈 수 있었고요. 그해 겨울에 스케이트 막 타고 있는데 감독 선생님이 와서너 뭐해? 빨리 가방 싸.“ 그래서 한양대에 갔던 기억이 나요.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랑 한양대 같이 가겠다고 진로를 바꾼 게 지금 더 좋은 결과로 오게 된 것 같아요.” 

 

갑자기 찾아온 위기
고교시절 추억을 되짚던 중, 당시 찾아온 위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3시절, 그는 폐를 앓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위기이자 사건이 닥친 것이다. 그렇지만 심폐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축구선수에게 폐병이라니.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3 5월 달쯤일 거예요. 효창운동장에서 시합을 하는데 힘이 들어서 그랬는지 자꾸 가래가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가래를 뱉었는데 입에서 비린내는 계속 나고. 그래서 이상하다. 가래도 끓고. 참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봤더니 가래에 피가 살짝 묻혀 나오더라고요. 그 상태로 뛰었어요. 시합 끝나고 우승하고 집에 가서 아버지께 말씀 드렸죠. 그때 아버지 친구 분이 내과 의사였는데, 그 병원에 데리고 가서 가슴 사진을 찍게 했어요. 사진 나온 걸 보면서 제가 못 알아듣게 하려고 그랬는지 아버지하고 의사하고 전문용어를 쓰더라고요. 여기 모세혈관이 살짝 터졌네. 이런 식으로 말씀을 주고받는데, 전 모세혈관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때 병원에서는 운동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의사지만 아버지 친구였으니까, 아저씨, 나 축구선수에요. 그렇게 말하고 병원을 나왔어요. 일 년 정도 약을 먹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주는 약을 참 엄청 먹었어요. 원래 폐병 환자들이 약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서 밥도 잘 안 먹게 되고 마르고 그러는데 다행히 나는 밥을 참 잘 먹었어요. 그래서 빨리 완치가 됐죠.”

 

 “초기에 발견해서 약 먹고 병원 다니면서 완치가 됐지만, 항상 지구력이 부족해 체력훈련할 때 무지 힘들었어요. 선생님들도 제 체력을 아니까 심한 운동할 때는 쉬라고 할 정도였어요. 끝까지 안 해도 좋다고, 힘들면 쉬라고. 대학에 와서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훈련보다 한 단계 업이 돼서 해야 하니까 힘들었어요. 굉장히 힘들었는데 폐까지 아팠으니. 그래도 그런 훈련을 고생하며 겪어나갔기 때문에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대학 때 선생님들이 제 몸 상태를 아니까 많이 도와줬어요. 힘든 운동할 때는 몸 생각하면서 맞춰서 하라고 하셨어요. 물론 지금도 안타까운 건 체력 때문에 더 큰 선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아쉬웠지만 그때 다짐했죠. 체력이 안 되면 머리로 해야겠다. 두뇌 플레이어라고 요즘 많이들 그러잖아요. 제가 바로 그런 선수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래요. 머리로 공 찼지 몸으로 찬 건 아니라고.”


새로운 시작, 한양대학교 축구부.  

대학 와서도 수업은 자주 들어갔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축구 선수들이 수업에 잘 안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전 수업을 자주 들어가고 그 덕분에 체육과나 다른 과 친구들이 많이 생겼어요. 지금도 그때 사귄 친구들과는 일년에 3~4번 정도는 꼭 만나요. 아쉬운 게 있다면  M.T를 한 번도 못 가봤다는 거예요. 그게 제일 아쉬워서 우리 학생들이 들어오면 M.T는 꼭 보내요. 1학년 애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짬을 내서 꼭 보내줘요. 중요한 시합 이런 거 아닌 이상은 다 보내죠.” 

 

그렇게 대학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그에게도 세계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종합선수권 대회에 나갔어요. 요즘으로 따지면 FA컵인데 그때 결승전에서 육군 팀하고 붙었어요. 우리가 2 1로 져서 준우승을 했죠. 그런데 그 대회 우승팀이 인도 DCM컵을 나가야했는데 군인 팀이라서 못 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준우승팀이 대우를 받아 DCM컵을 나갔죠. 돌아오는 길에는 축구협회 후원을 받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을 들려 친선경기를 가졌어요. 그때는 운동부가 외국에 나가면 외교사절단마냥 우리나라 홍보하려고 시합 갖는 그런 게 있었어요. 당시 인도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를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웃음) 사람 없는 마을에서는 차타고 갔다가 사람 있는 마을에서는 내려서 걸어서 손 흔들고 가고 그랬어요. 그때 인도 아쌈이라는 데를 갔는데, 우리가 시합하는 날이 공휴일이 된 거예요. 친선경기 있다고요. 그때 당시 대사님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이범석 씨라고 아웅산 사건 때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그 분이 지방 가서 시합할 때는 좀 져줘라. 친선경기니까. 슬슬 져주고 해. 그래서 일부러 비겨줬던 기억이 나요.”

 

그 다음 3학년 때도 인도 DCM컵에 나갔고. 그때도 우승하는 바람에 4학년이 됐을 때도 자동으로 초청이 됐어요. 그런데 그때 태국에서도 퀸스컵 초청장을 보낸 거예요. 고민하다 퀸스컵에 나가기로 결정했죠. 모험을 걸러 간 거였어요. 갔는데 가자마자 3 0으로 졌어요. 그렇지만 그 다음 두 경기를 다 이겨서 예선통과를 했고 결승전까지 올라갔죠. 그때 당시 방콕국립경기장이 다 찰 정도로 사람들이 참 많이 왔어요. 잔디 바로 앞까지 줄쳐놓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어요. 그 정도로 많이 왔어요. 모험이라 생각하며 왔는데 결국 우승까지 하고 말았어요. 거기서 참 잘했거든요.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 서울대는 몰라도 한양대는 다 알았죠. 한양, 한양, 이렇게 외칠 정도였으니까요. 한국, 한양하면 다 알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초청이 힘들어졌고 요즘 퀸스컵엔 자국 팀만 참여하는 것으로 바꿨어요.”

 
붉은개미군단이 왔다!

인도 DCM컵 우승, 태국 퀸스컵 우승, 모두 다 값진 우승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그래서 꿈만 같던 그런 우승도 있었다.

 

“76년도에 우루과이에서 열린 세계대학선수권 대회에 나갔어요. 그때 축구로서 금메달 딴 건 아마 우리가 처음일 거예요. 그게 지금은 유니버시아드대회 안으로 편성이 됐는데 그때만 해도 세계대학선수권대회만 따로 했어요. 처음 참가하는 대회인데다가 그때만 해도 정보가 없어 날씨도 몰랐어요. 우리가 여기서 7월 말 쯤 출발해서 9월 초에 돌아왔는데, 우리는 여름이었지만 거기는 겨울이었어요. 그런데 그 정보를 몰라서 다들 짧은 옷을 입고 간 거죠. 도착해서는 추운 날씨 때문에 다들 무스탕에 긴 옷 하나씩 사 입고 그랬어요. 한국에는 무스탕이라는게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는데.”

 

떠나기 전 훈련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보름 전에 가서 훈련하면서 적응했는데 지금도 어느 나라랑 게임했는지 생생히 기억나요. 첫 번 게임이 프랑스였고, 두 번 째 게임이 칠레. 세 번 째가 브라질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다 이겼어요. 그 다음에 8강전에서 세네갈, 그 다음 4강전에서 네덜란드, 그리고 결승전에 우루과이가 지는 바람에 파라과이가 올라왔어요. 우승은 우리 차지였죠. 중간에 세네갈과 할 때 승부차기로 이기는 바람에 좀 힘들었어요. 지금 FC서울에 있는 김성남이 게임 도중에 세네갈 애들이 찬 공에 맞고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고요.”

 

쟁쟁한 나라들을 누르고 차지한 우승이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구라파 애들이나 남미 쪽 애들보다 기술이 없으니까 많이 뛰었어요. 많이 움직여주고 뛰어주고, 그 덕분에 성공한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걸로 누른 거죠. 그때는 선수진도 좋았어요. 조광래, 박창선, 김황옥, 김성남, 신현오, 유동춘 등 멤버가 고루 좋았어요. 거기다 그때 선수들은 승부근성도 대단했거든요. 요즘 애들은 그때 선수들만큼의 오기가 부족해요. 승부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 선수들이 체력과 체구는 좋아졌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예전 선수만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 더 위의 선배님들은 배고플 때 운동을 했다고요. 그래서 내가 이걸 꼭 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이걸 꼭 해서 우리 가족 생계를 꾸려나가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애들을 하나, 둘 낳잖아요. 그러다보니 자식들이 손 벌리면 부모들이 다 해줘요. 편해요. 그래서 남한테 의지하는 것은 있어도 자기 스스로의 의지들은 다들 부족해요.”

 

그리고 여기서 잠깐! 우리 대표팀이붉은개미군단으로먼저 불렸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그때 붉은개미군단이 왔다고 현지 언론에서 그랬어요. 우리 유니폼이 빨갰거든요. 게다가 시합 때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개미처럼 뛰어다니니까 다들 우리를 빨간 개미라고 부른 거예요. 우승하고 나서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를 돌면서 친선경기를 가졌어요. 그때만 해도 다들 우리나라를 잘 몰랐을 때니까요. 또 이민 간 사람도 별로 없었을 때였고요. 친선경기를 통해 대한한국을 알리고 서울로 돌아왔죠. 그런데 서울에서 카 퍼레이드 행사가 열렸어요. 공항에서부터 시청 앞까지 카 퍼레이드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꿈같은 얘기죠. 꿈같은 순간이었고요.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볼 정도라니, 라고 다들 그랬어요. 74년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겨우 대학 3학년인데, 어린나이잖아요. 그래도 큰 기대 없이 갔는데 우승까지 하고 돌아왔으니 우리 스스로도 장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카 퍼레이드를 했죠.”

 
대학생활을 마치며

대학 4년 동안 매년 꼭 한번 이상 우승했어요. 그때는 딱 결승전에 간다, 준결승전 간다, 하면 고대, 연대, 한양대, 경희대 이렇게 넷이서 항상 올라갔어요. 거기에 가끔 끼는 학교가 중앙대, 성균관대, 동국대 정도였죠. 그때는 대학팀이 16개 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당시에도 고등학교에서도 잘하면 은행으로 간 애들도 많았어요. 요즘 드래프트가 다시 부활돼 선수들이 대학으로 다시 오는 추세에요. 그 때문에 대학축구가 다시 강해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학원 스포츠는 학생다운 면에서 접근하고 시작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 공을 잘 차면 빨리 프로로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FC서울에 있는 ()동원이를 중학교 3학년 때 프로에 보낸 거예요. 빨리 프로 가서 공이나 열심히 차라. 열심히 차면서 어느 정도 부와 명예를 쌓게 되면 주위에서는 따르게 돼 있다. 그러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어라. 그렇게 말했죠. 아직도 학벌 때문에 대학교를 많이 가잖아요. 그렇지만 사실 대학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대학 나온다고 돈 많이 버나요? 대학 나온 사람만 바른 인격을 갖나요? 지금 애들을 살펴봐도 대학 때 전공을 사회에서 제대로 살리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다들 학벌을 따지는 사회 속에서 살기 때문에 다들 대학에 오려고 하죠. 그걸 보면 서글퍼요.“

 

시간은 흘렀다. 어느새 한문배, 그도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생이 되었다. 그렇다. 새로운 길을 선택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은행에서 보낸 실업생활 

진로는 3월에 정해졌어요. 은행에서 게임을 같이 해보고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니까 가겠다고 했죠. 그때는 직원으로 들어가는 거였어요. 대학교 때는 정식직원이 아니고 임시직이어서 3월부터는 본봉만 줬고 연말에 졸업증명서 떼서 갖다 주면 그때부터 정식직원이 되는 거였죠. 12월부터 바로 은행에 들어갔으니까 놀고 그럴 시간은 없었어요. 은행에 가서도 훈련은 똑같이 받았어요. 훈련이라면 대게 비슷해요. 그렇지만 은행 들어가서도 아침에 운동이 끝나면 일부러 은행에 갔어요. 나중에 은행원으로 근무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무를 좀 배운 거죠. 선수들마다 소속 지점이 있었어요. 당시 충무로 2가 지점에 처음 발령을 받았는데 거기로 출근을 했죠. 넥타이는 매기 싫으니까 넥타이를 하나 놔두고 출근하면서 넥타이 매고, 거기 직원들하고 점심 때 되면 같이 밥 먹고 그렇게 지냈어요. 사회생활을 하니까 뭐가 틀려지냐면, 이렇게 은행에서 근무를 해보니까 우리는 여기서 친구들하고 만나서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이렇게 밥을 산단 말이에요. 통상적으로. 그런데 은행에 딱 갔는데, 직원들이 낙지볶음 먹으러 가자해서 내가 내려고 하니까 직원 한 사람이 와서 무조건 더치페이다. 다들 월급쟁이니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사회에서는 이렇게 생활하는 거구나를 알게 됐죠. 거기서부터 사회생활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요.”

 

오후가 되면 다시 훈련하러 들어갔는데, 내가 처음 들어갈 때는 신탁은행만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입사를 하면서 서울은행하고 신탁은행하고 합쳐져서 서울신탁은행이 됐어요. 오늘날의 하나은행이 된 건데, 은행에 대출을 받아서 못 갚으면 은행에서 압류를 하잖아요. 그런 집들을 축구부 숙소로 썼어요. 거기서 버스를 타고 나오면 원당에 축구장이 있어요. 원당에 있던 우리 신탁은행 축구장은 잔디도 깔려있고 아주 좋았어요. 거기서 운동을 했죠. 78년도에 입사를 해서 79 1월까지 1년 정도 근무하다가 해병대에 갔어요. 81년도 1월에 제대해서 다시 은행으로 돌아왔죠.”

 

군대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사랑
당시만 해도 해병대프로축구팀이 있었어요. 해병대가 복무기간이 짧았어요. 전반기 교육은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받아요. 재식훈련 그런 거 받다가 나와서 해군본부 안에 있는 축구단으로 배치를 받았죠. 참 운도 좋은 게 가자마자 우승을 했어요. 훈련소에서 훈련 받다가 대통령배가 있다고 해군사관학교에 가서 연습하게 해주고 서울 올라가서 시합을 했는데 우승을 한 거예요. 군대생활 편하게 보낸 거죠. 그게 3월에 있었던 일이고, 5월에 군실업대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우승을 했어요. 2연패를 했으니 1년 편하게 운동만 하다 지낸 거죠. 그 다음에 6월인가 인도네시아 마하린컵이라는 데를 갔어요. 거기서 3위를 해서 돌아왔고요. 벌써 6월이면 다 간 거잖아요. 정무는 그때 제대고 나는 1월에 제대니까 6개월 더 남아야했지만 금방 지나갔죠. 당시 군대에는 김성남, 김강남, 조영중, 허정무요런 친구들하고 같이 있었죠.”

 

그렇게 조용히 군대생활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랑은, 그 사랑의 운명은, 그도 모르는 새에 찾아오고 있었다.
 
나 군대있을 땐데, 아직도 기억해요. 10 3일 개천절이었어요. 우리 수원에 선배 형 하나가 있는데 그 형이 내가 혼자다 보니 염려를 했나봐요. 자기 처제를 해주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보다하고 난 신경도 안 썼어요. 한번은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자기네 조기회 축구모임이 있으니까 구경나오라고 해서 나갔죠. 난 선수니까 같이 차지는 않고 가서 구경하고 있는데 처제하고 지금 우리 애기엄마하고 거기 온 거예요. 그 양반들은 처제를 해주려고 했는데 잘못하면 처갓집에 욕먹는 거잖아요. (웃음) 그럼 친구를 해주자. 그래서 애기엄마를 만난 거죠. 거기 우리 선배하고 형수하고 있는데 둘이 왔는데, 형수가 나한테 이 것 저 것 물어봤어요. 제대하면 뭘 하냐. 그런 여러 가지 신상에 대해 물어본 거죠. 아무 생각 없이 난 제대하면 은행 들어갈 거구, 축구선수 계속 할 거구,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때 당시 나한테 홍콩 세미프로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올 때였어요. 사우스 차이나라고. 얼마나 주냐 했더니 월 100만원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은행에 다닐 때 21 3천원 받을 때니까 5배를 많이 주고 이기면 수당까지 준다고 했는데, 문제는 집을 안 준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안 간다고 말했죠. 그래서 난 그쪽하고 트라이 중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런 얘기를 죽 했지요. 그러다 처제랑 애기엄마랑 가겠다고 하대요. 그래서 가라고. 나야 상관없는 아가씨들이니까 잘 가라고 그러고 헤어졌죠.”

 

그해 전국체육대회 때 우리 해병이 경남 팀으로 나가게 됐어요. 전국체육대회 가기 전인데 아는 형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대요. 그래서 그 형 사무실로 갔는데 몇 시야? 그래서 7요, 그랬더니 빨리 가자고 하대요. 막 뛰어서 다방까지 따라갔는데 지금 우리 처가 거기 나와 있었어요. 그 형이 와서 찻값 내고, 담배 한 갑 사주고 가버리대요. 그런데 그때 내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집 앞 시내고, 또 군인이다 보니. 저녁은 사줘야겠는데 돈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야기하던 도중에 우리 사촌형이 잠깐 왔길래 기다리라고 한 다음에 3만원인가, 2만원이니까 빌린 다음에 밥 먹으러 갑시다, 했죠. 그랬더니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거기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했죠.”

 

이야기 중에 나보고 중학교를 어디 나왔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수원 중학교 나와서 수원고등학교 잠깐 다녔어요, 하니까 우리 처가 중학교 선생님들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알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그냥 잘 안대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들어서 옛날 앨범을 뒤졌어요. 찾아서 전화번호를 딱 보니까 우리 중학교 때 선생님 딸이었던 거예요. , 이 선생님 딸이면 틀림없다. 그러면서 만나기 시작했어요. 우리 처를 10 3일에 처음 보고, 1 25일에 약혼하고, 8 15일에 결혼했죠. (웃음)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가 내가 자꾸만 결혼 안하고 돌아다니고 그러니까,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게 어디 있냐? 세상에 완벽한 여자는 없으니까 적당히 맞으면 데리고 와라, 였거든요. 그때 당시 우리 처도 결혼은 생각 안하고 만나고 있었는데, 군대 갔다 와서 저녁 때 저녁 먹고 데려다주고 왔다 갔다 하는데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굉장히 편안하다고. 만나서 대화하고 그러는 게. 그래서 그날 우리 어머니인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서 거기 가야했는데 데이트를 하다 거기로 끌고 갔어요. 여기 병원에 입원하셔서 잠깐 인사드리고 나올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라. 그랬다가 거기까지 데리고 간 김에 끌고 데리고 갔지요. 가서 인사시켰어요. 결혼하자. 그런 이야기도 없이 그냥 끌고 들어가서 나하고 만나는 여자야. 이렇게 인사시켰죠.”

 

그런데 우리 처가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의 장인어른을 굉장히 어려워해가지고 내 이야기를 못했어요. 당시 내 친구가, 지금은 캐나다에 있는데, 성격이 굉장히 좋아요. 아주 화통하고. 그 친구가 우리 처 어머니, 아버지께 이야기해서 우리 처 모르게 만나게 해줬어요. 다방에 가서 인사를 드렸죠.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는데 오, 자네구만, 하는데 나를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그때 해병대 옷에 얼굴은 까맣고 머리는 짧고 (웃음) 그랬거든요.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한참 후에 이야기했죠. 어머니, 나 안 좋아했죠? 얼굴도 시꺼멓고 도둑놈 같아서 나 안 좋아했죠? 그랬더니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처음 처갓집에 간 날은 11 21, 우리 처 생일날이에요. 부대에서 마지막 대회를 하러 들어갔는데, 합숙훈련을 하고 있던 중에 잠깐 짬을 내서 갔어요. 그런데 부대에서 막 나온 거라 추리닝 바람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어르신들 만나러 가면 양복입고 가고 그래야 되는데 그렇게 입고 가니까 다들 뭐 저렇게 하고 왔나. 저런 놈이 있나. 다들 그런 표정이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런 걸 개의치 않아했어요. 그때 장인어른도 나를 알아봤더니, 주변에 그 집은 괜찮다고 다들 그랬다고 하던데, 뭐 결국은 우리 아버지 보고 준 거죠. 나보고는 줄 수가 없고. (웃음) 수원시내 사방팔방 모르는데 없이 구석구석 다 돌아다니고 그랬으니까. 축구선수라도 우리 처는 그런 걸 전혀 몰랐어요. 내가 유명하고 그런 것도 전혀 몰랐고요. 시내 다방 앞에 가보면  구두 닦는 애들이 있어요. 우리 잘 가는 아지트 앞에도 그런 애들이 있었는데 걔네들도 나한테 인사할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이 사람이 무슨 깡패인가? 그런 오해도 했었대요.”

 

 “우리 부인은 결혼하고 나서 처음 축구장에 갔어요. 우리 애기아빠가 축구를 잘하나 못 하나도 모르고 구경을 하고 있을 때 관중석에서 내 욕을 많이 했나봐요. 그런데 거기서 싸움을 할 수도 없잖아요. 그렇지만 자기 신랑 욕을 하니까 기분은 나쁘고. 그래서 혼자 속상해서 울었대요. 원래 결혼식 다음날이 시합이었어요. 그런데 비가 와서 하루 연기가 되서 게임을 해야 했어요. 이걸 하구 신혼여행도 가고 그랬는데, 그때 나 시합 안한다고 신혼여행 가야된다고 하니까 감독선생님이 이거 끝나고 가래요. 결혼 첫날 내 동생, 우리 처제들 새로 얻은 집에서 다 같이 자고, 다음날 나는 시합을 뛰러 숙소로 들어갔죠. 그런데 합숙기간이니까 집에 가서 자지 말고 합숙소에서 자래요. 그래서 싫다고, 왜냐하면 신혼인데, 이제 시집온 여자 그 빈집에다 혼자 놔두고 어떻게 합숙소에 들어오냐.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죠. 그래서 나 혼자만 집에서 다니면서 게임을 하고 일주일 지나서 신혼여행을 갔던 기억이 나요. 찢어진 눈으로. (웃음) 그때 상대선수랑 부딪혀서 눈 옆에 피가 났는데 그냥 가서 꿰매고 그 눈으로 신혼여행을 간 거예요 .”

 

지금도 자랑스러운 수퍼리그 원년멤버
알다시피 그는 수퍼리그 첫해부터 뛰었던 원년멤버다. 프로축구 첫 해는 어땠을까? 럭키금성 초대주장이었던 그가 당시 이야기를 잠깐 들려줬다.

 

내가 은행에 있을 땐데, 마지막 대회 뛰는 날이었어요. 결승전까지 올라갔는데 우리가 한양대한테 2 0으로 졌어요. 마지막 날 게임 뛰는 거 보고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마침 해병대 있을 때 선생님이 럭키 금성 초대 감독으로 가셔서 그 선생님이 나를 아니까 스카웃 제의를 하신 거죠. 그래서 처음에 가서 대우를 어떻게 해줄 거냐? 그랬더니 직원하고 만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난 한과목만 붙으면 은행 대리가 되는데 돈 많이 안 주면 나는 안 간다, 그랬죠. 은행 대리되니까 3 5백만 원 안 주면 안 간다고 했어요.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가 65평짜리가 7천만 원 갈 때인데, 난 은행 대리 될 거구 너희가 나 필요하면 불러라고 했어요. 결국 그 돈 받고 은행에 계신 선배님들 양복 해드리고, 같이 지내던 동료들 저녁 사주고, 선생님들께 인사 드렸죠. 그때 내가 이다음에 나이 먹으면 살 거라고 수원에 땅도 샀는데 97년에 그걸 팔아서 지금 사는 아파트를 샀으니까, 당시 그 돈으로 결국 집 한 채 마련한 거죠. 럭키금성에는 그렇게 해서 들어간 거예요.”

 

프로축구 1년 차일 때는 시합하러 다니기 바빴어요. 지방 참 많이 다녔어요. 그때는 홈 앤 어웨이 경기가 아니고, 요번에는 부산에서 한다고 하면 부산에 팀 다 몰리고, 그 다음에 대구에서 한다면 대구에 다 몰리고, 그렇게 지역으로 몰렸어요. 지금처럼 연고지 정착도 안 돼 있었고요. 말로만충청도이렇게 돼있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우리가 시합하면 관중이 많았어요. 꽉꽉 찼죠. 관중 많은 데서 하니까 참 좋았어요. 그러다 점점 줄어들어서 은퇴할 때쯤 되니까 관중이 많이 줄더라고요.

 

계속 지방으로만 다니다보니까, 지금처럼 시합전날 시합이 열리는 장소에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일 년 내내 합숙이었어요. 그런 게 힘들었죠. 그래서 우리 아들이 아직 애기였을 때 동네 애들이 보면 얘네 아버지는 없거든요. 그래서 동네에서도 우리 애기 엄마를 세컨드로 본거예요. 남편이 프로선수인지도 모르고, 차하나 있으니까 애 태워서 유치원 보내고, 학원 보내고, 그렇게 젊은 여자가 혼자 사니까 자기들끼리 무슨 세컨드로 안거죠. 한번은 휴가를 받아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들이 지 친구들을 막 데리고 왔어요, 우리 아빠라고. 나도 아빠 있다. 이런 식으로. 얘가 우리 아빠가 축구선수여서 집에 많이 없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어서 그냥 데리고 와서 나를 보여주던 그런 재밌는 일도 있었어요.”

 

지방 다니는 게 참 힘들었어요. 버스타고 계속 다니면서 유랑한 거죠. 여기 서울에서 출발 땅하면 원주, 강릉, 다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이렇게 한 바퀴 도는 거예요. 이렇게 와야지 한 리그가 끝나는 거였어요. 그때 조광래는 대우에 있었고 허정무는 현대에 있었고 나랑 정해성이 박항서. 그 다음에 김현태, 이용수, 이영진 등이 우리 팀에 있었어요. 당시 첫해 때 주장을 했고 그 다음해에 물러났어요. 그 해 우리가 우승을 했고 MVP도 탔는데, 그렇게 활약이 대단해서 탄 건 아니에요. 내가 전 게임을 다 뛰고 주장도 했고 그러니까 우리 감독 선생님이 주신 거죠.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평생 지울 수 없는 거잖아요. 기록에 남아있는 거니까.”

 
“86
년도 5월에 여기 한양대학교 체육부 실장님이 코치로 올 의향은 없냐고 하셨어요. 그럼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생각해봤는데, 이때 안 들어가면 기회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만약 계속 있었더라면 프로축구 코치라도 했겠죠. 그런데 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할 수도 있었지만 은퇴를 하기로 결심했죠. 사실 우리 애기엄마하고 약속한 것도 있었어요. 3년만 뛰고 가겠다고 했거든요. 기왕 우리나라에 프로에 생겼으니까 이것도 나한테 복이다. 우리 선배님들은 이런 혜택도 못 누리고 지냈는데 나는 그래도 프로라는 게 생겨서 3년이나 뛰는 게 영광 아니냐. 그러니까 3년만 하고 안한다.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 시기에 운이 좋아 85년도에 MVP도 탔지만, 모든 게 나한테는 참 좋은 기회들이었어요. 그래서 86년도에 그만두고 학교에 간 거죠. 5월 달에 그런 제안이 들어오고 그걸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다음에 감독님을 찾아가서 말했죠. 저는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겠습니다. 학교에 들어오라는 요청도 있고 해서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위치에는 다른 애를 넣어서 빨리 보강해주세요, 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게임을 많이 안 뛰었어요. 많이 안 뛰어도 선생님이 승리수당이 있으니까 따라가라 그래서 가서 앉아 있다가 10분이고 20분이고 뛰었어요. 그렇지만 내 자리를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다른 선수를 키울 준비를 하라고 다른 선수한테 물려줬고, 그래서 마지막 해에는 크게 게임을 많이 안 뛰었어요.”

 

지도자 생활
3
년간의 프로생활을 마치고 그는 다시 아마추어 무대로 돌아왔다. 젊은 나이에 시작한 지도자 생활. 보람도 컸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첫 대회를 치르는데 난 우리 애들 잘하는 줄 알고 내 생각만 갖고 준결승까지 나갔지만 결국 졌어요. 그때 실망을 했죠. , 축구는 내가 했을 때와 내가 남을 가르쳤을 때 또 틀리는구나. 처음 우리 감독님이 딱 하는 이야기가 너는 코치일 때는 많이 져봐라. 그래야 이기는 법을 안다. 이거였어요. 요즘은 우리 코치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해줘요. 지는 걸 좋아해야해. 그래야 지면 어떻게 해서 이겨야겠다고 분석을 하고 방법을 알 거 아니냐고.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처음부터 이기고 그러면 사람이 나태해져요. 그런데 감독을 하면서 처음 3년 동안은 준우승 한번 하고 성적을 못 냈어요. 그런데 요즘은 4년 째 우승을 하고 있어요. 산전수전 겪어야 좋은 결실 얻는 거라고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제일 힘들었을 때는 1992년 청소년 코치를 하고 있을 때에요. 최용수, 뭐 그런 애들을 데리고 아시아 청소년 대회 출전 티켓을 땄는데 그때 한양대 감독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청소년 대표팀 코치직을 그만뒀죠. 그래서 혼자 한양대학교 축구부를 맡고 종합선수권 대회를 끌고 갔는데, 혼자서 코치 감독 역할 뿐 아니라 애들까지 신경써야해서 그때 굉장히 힘들었죠. 그렇지만 그 애들을 데리고 가서 우승까지 시켜 참 좋았어요. 당시 선생님이 6월에 돌아가셔서 지역예선 때까지만 청소년 대표팀 코치로 있었어요. 그 팀이 바로 세계대회까지 갔는데, 어떻게 보면 아쉬웠다고 봐야겠지만 그게 내 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내가 욕심내서 거기 가면 한양대학교 축구부는 누가 맡아요? 그건 아니죠. 그때 선수들이 누구냐면 이기형, 김형일, 최성용, 김대의, 최용수, 김진우, 우성용 이런 선수들이었어요.”

 

지도자 생활하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선수는 유상수이관우에요. 나한테 매, 정말 죽도록 맞았죠. 훈련하다가. 나는 축구를 하면서 교묘하게 반칙 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그런데 대학교 때 상수하고 관우가 그럴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요놈이 뺏기고 끊기면 상대편 뒷다리를 차고 그랬어요. 몇 번 주의를 줬는데도 말을 안 들어서 죽도록 맞았죠. 관우도 대학시절 나한테 그거 때문에 맞았어요. 지금 게임 보면 볼 예쁘게 차는 애잖아요. 그런데 그런 오기가 있었어요. 자기가 하다 뒤에서 차이고 끊기면 돌아서서 차는 그런 나쁜 버릇이 있었어요. 전반전 끝나고부터 후반전 끝날 때까지 야단쳤죠. 그랬더니 그런 게 없어졌어요.” 

 

“()남일이는 묵직해요. 남일이가 대표선수 되기 전에 처음 프로 갔을 때 이동국이랑 고종수하고 술 먹으러 다닌다.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불러서 혼낸 적이 있었어요. 너 거기 가면 죽을 줄 알아. 그랬더니 선생님 저 술 안 먹는 거 알잖아요. 저 안 먹어요. 하더라고요. ()동현이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보고 잘만하면 큰 선수 되겠다고 생각해서 뽑은 애에요. ()승현이는 스피드도 좋고 장기가 많은 선수에요. ()진용이는 운동에 대한 욕심이 무지 무지 많은 애에요. 인간성 자체도 돼 있어요.”

 

축구철학, 그리고 지도자론
일찍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서 그런 것일까. 그는 분명 다른 지도자들과 다르다. 깨어있는 지도자. 그를 가리키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지도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그냥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돼요. 한번 선수들 자신도 생각해봐야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말해요. 너희를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나도 축구에 대해서 다 모른다. 너희가 아는 게 있으면 나에게도 좀 가르쳐주라. 그래야 나도 배울 수 있다, 라고요. 자기들끼리 움직이다 이게 막힌 거 같으면 선생님이 이렇게 움직이라고 했지만 저희가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다고, 그걸 가르쳐주면 다른 방법으로 고칠 수 있잖아요. 항상 생각하며 축구하라고 말해요. 실제 축구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아들(한종원·제주유나이티드)도 축구를 해요. 중학교 1학년 때 하루는 학교 갔다 와서 엄마, 나는 나중에 엄마가 바라는 판사나 검사 이런 거는 못되고 그냥 회사원 될 것 같은데 내가 하고 싶은 축구를 하고 싶어요. 나중에 원망 듣지 않으려면 축구 시켜줘요. 그러더라고요. 난 그렇게 꼭 하고 싶으면 하라고 시켰죠. 대학시절에는 내 밑에 있었어요. 처음에는 불편한 점도 있었죠. 그런데 애들끼리 한 이야기는 절대 나한테 하지 않았어요. 처음 한양대 축구부에 들어오자마자 애들 보는 앞에서 아들을 때린 적이 있어요. 고놈도 고등학교랑 연습 뛰는데 고등학교 애를 발로 차더라고요. 걔가 자꾸 붙잡고 그랬나봐요. 그러다 발로 차길래 사정없이 때리고 야단쳤죠. 다들 놀랄 정도로. 맞고도 엄마한테 얘기도 안하고 그 다음날 그냥 웃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아프냐 했더니 아빠, 맞을만했는데요 뭘.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2004년 태백대회 때 아들덕분에 우승했어요. 준결승, 결승 때 골 넣고 나한테 달려와서 안기더라고요. (웃음) 요즘은 제주도에 있는데 통화도 자주해요. 그러면 항상 그러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축구는 즐겁게 하는 거라고.”

 

나보다 더 잘 된 사람도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 내 분야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지금 이 자리에 후배들도 가르치고 얼마나 좋아요.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난 항상 즐거워요.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그 일을 지금까지 할 수 있으니까요.”

 

프로축구가 처음 태동하던 그 시절, 그라운드의 백여우라 불리며 호령하던 한문배. 그 시작은 축구를 진정 즐기는 마음에서부터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새로운 전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경기장에 나선다. 그러기에 한문배, 그는 분명 더욱 빛나는 전설이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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