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높은 꿈을 향해 -
올 연말 K리그를 비롯하여, 국내 축구계는 한산하다. 국내에서 펼쳐지는 축구 경기는 자선 이벤트 경기가 전부다. 대부분의 팀들은 한 해를 정리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축구 소식이라면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의 활약상 또는 각 팀들의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 보강 소식이다.
국낸 축구계와 달리 동북고등학교
12월 17일
23살에 국가대표 팀에 발탁되었고, 1990년 K리그 MVP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선수 시절을 보낸
이후
항상 축구라는 틀 안에서 도전이라는 단어에 부딪치며, 자신의 한계를 측정하고 있는
축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 때문에 축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축구광이셨거든요. 집안 곳곳을 축구로 채우셨고, 전국의 모든 축구장을 돌아다니셨죠.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매우 크셨어요.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어렸을 때부터 볼을 접했어요. 시간만 있으면 또래 친구들을 모아서 축구를 했습니다. 볼을 차다가 집안 대문을 부슨 적도 많았고, 유리창도 많이 깨트린 적도 많았어요. 또한 아버지 손을 잡고 축구장 가는 것도 좋았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못 가본 축구장이 없을 정도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육상을 했어요. 제가 나온 진주 중앙 초등학교에는 축구부는 없었고, 육상부가 있었거든요. 육상은 축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초 체력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거든요.
축구는 주로 조기 축구회에 나가면서 배웠어요. 제가 조기 축구회에 안 나가고, 늦잠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꼭 깨우셨어요. 깨운 뒤 저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운동장까지 바라다 주셨죠, 제가 나간 조기 축구회는
"육상 특기생으로 육상부가 있는 중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축구를 하려면 두 번 전학해야 했죠. 그런데 제가 그 때 공부를 조금 했어요. 시험을 봤는데, 전교 10등을 한 거예요. 학교에서 축구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안 보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선생님을 찾아가, 이해를 구했어요. 다행이 선생님께서 이해하셨고, 전학에 동의해 주셨죠. 우여곡절 끝에 축구부가 있는 진주 중학교로 입학 후 4개월 만에 전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했잖아요. 그래서 1,2학년 때는 많이 못 했어요. 주로 후보 생활에 만족해야 했죠. 경기에는 주로 2학년 때부터 나갔어요. 남들보다 뒤쳐진 실력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기본기였습니다.
볼 컨트롤, 패스 연습 등을 주로 했습니다. 반복 훈련을 통해 기본기를 습득했어요. 새벽,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까지. 하루 종일 기본기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남들이 쉴 때도, 나와서 운동을 했어요. 그러면서 축구에 눈을 튼 것 같아요.
이후 진주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당시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故
기본기를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서, 주기적으로 경기에 출전시켜 주셨어요. 1학년 중에 저만 출장 기회를 주셨어요.
특히 16, 17, 18세 시기에 경기 경험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저는 이 시기에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선배들과 함께 볼을 차면서 실력을 가장 많이 향상되었죠.
그리고 부모님의 서포터도 큰 힘이었어요. 열정이 대단하셨죠. 오직 축구 하나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어요. 물론 좋은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저의 실력과 노력이 필요했죠. 전반적으로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련 뒤 찾아온 기쁨
1980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여러 팀에서 입단 제의가 왔어요. 연세대, 명지대, 서울시청, 한양대, 경희대 등에서 제의가 왔습니다. 이 때 아버지 선택을 따르기로 했어요. 아버지는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다,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더 낳을 것 같다.'며, 명지대에 입학할 것을 추천하셨어요. 그래서 명지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자리를 좀 더 쉽게 차지하기 위해, 좋은 팀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명지대학교를 선택한
그리고 부족한 체력은 대학 무대에서 여지없이 들어났다.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대학교 1~2학년 시절 친구들은 대표팀에 자주 들어갔어요.
대학교 1학년 때 인도 DCM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도를 간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해외를 나가봐서, 음식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냄새도 심하게 나고, 비유가 약했죠. 그래서 밥 조금하고, 고추장. 그리고 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어요. 음식을 제대로 못 먹게 되자. 뛰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첫 경기를 선발로 뛰었습니다. 너무 못 먹어서, 전반 20분 만에 체력이 다 소진되었어요. 전반전이 끝난 뒤, 감독님께 호되게 혼났죠. 혼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큰 선수가 되려면 음식을 잘 먹어야 되고, 체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해서 체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했어요. 더군다나 저의 포지션은 뛰는 양이 많은 미드필더잖아요. 먼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어요. 특히 외국에 나갔을 때, 음식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습니다. 약도 꾸준히 먹었죠."
"대학교 3, 4학년 때, 힘과 경험이 붙으면서 기량이 많이 발전했어요. 4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를 나갔어요. 그 대회 첫 경기가 상무와의 경기였습니다. 그 경기에서 너무 못했어요. 감독님께 혼이 났습니다. 그 혼이 저에게 자극제였어요. 이후 연속골을 터트렸고, 팀은 결승전에 올려놓았죠.
결승전은 인상에 남는 경기 중 하나입니다. 상대는 첫 경기 상대였던 상무였어요. 초반에도 경기 내용이 안 좋았습니다. 2골을 먼저 허용했죠. 하지만 전반전을 마치기 전에 한 골 따라잡고, 후반전에 제가 동점골을 넣었어요. 이후 한 골을 추가해, 대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득점왕과 MVP라는 상도 따라 왔고요."
"메르테카배는 88팀이 나갔어요.
그 대회에서 주장을 맡았어요. 책임감이 막중했죠. 그래서 먼저 솔선수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경기는 큰 어려움 없이 뛰었고, 결과도 우승을 하며 좋았습니다. 당시 은퇴를 앞둔 케빈 키건이 말레이시아 B팀으로 뛰었습니다. 그런 선수와 한 번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했다는 것 자체도 영광이었죠. 여러모로 많은 것을 얻은 대회였죠." 대학랭킹 1위
명지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스카우트 경쟁이 심했어요. 럭키금성과 현대가 저를 영입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저의 선택은 럭키금성이었습니다. 당시 럭키금성 회사가 진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어요. 주변에서 '고향 팀에 가서 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는 의견이 많았죠. 그래서 드래프트 1순위로 럭키금성에 입단했습니다."
1984년 럭키금성은 성적이 저조했다. 전기리그에는 3승 3무 8패로 7위, 3승 5무 6패로 6위를 기록하며, 종합 성적 7위를 기록했다. 그래서 럭키금성은 1985년 대 변화를 예고했다. 당시 럭키금성의
"당시 체력 훈련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정신력 싸움이었죠. 아침에는 주로 산을 많이 뛰었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산을 많이 뛰었죠. 그리고 선수들끼리는 부메랑이라고 불리는 훈련을 했어요. 줄넘기, 웨이트트레이닝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순환해서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85년에 처음 도입하는 시스템이었죠."
강력한 체력훈련을 통해 전력을 가다듬은 럭키금성은 1985년 시즌에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초반부터 돌풍을 이어가며, 1차, 2차 리그에서 선두 자리를 유지했고, 3차 리그에서 5승을 거두며, 무섭게 따라온 포항제철의 추격을 뿌리치고 K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팀 역사상 첫 우승이었다.
하지만
"당시 88팀과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뽑힐 수 있는 나이였어요. 그래서 월드컵 대표팀, 88팀,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등 모든 대표팀에 뽑혔습니다. 그 해 대부분을 대표팀에서 보낸 것 같아요. 당시 월드컵 지역 예선, 대통령배 축구대회, 88올림픽 준비, 고베 유니버시아드 등 많은 대회가 있었거든요.
월드컵 국가대표팀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제 포지션에는
세 대표팀을 오간 것 힘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의 시련을 조금 더 견뎠다면, 좀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요. 마음이 어렸어요. 경기에 너무 뛰고 싶기도 했고요. 대표팀에 오가며 소속 팀에 신경을 하나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럭키금성에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K리그에 적응한
"1986년은 팀과 K리그에 적응한 해였습니다. 그 때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수로 뛰었어요. 포지션 이동이 잦았죠.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내지 못해 아쉬워요. 무릎 부상으로 고생했고, 88팀에 뽑혀 킹스컵에 출전해 팀을 잠시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팀에 나름 보탬이 된 것 같아 만족스러운 해였습니다."
럭키금성은 지난해의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후기리그에서 7승 2무 1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후기리그에
럭키금성의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포철이었다. 하지만 이 중요한 경기에
"경기 중 헤딩을 한 뒤, 떨어지는 과정에서 팔이 접히면서, 인대가 끊어졌어요. 수술을 바로 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했습니다. 그래서 회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3개월 정도 부상이었는데, 5개월 정도 갔어요.
그리고 재활 과정도 체계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먹구구식이었죠. 재활 트레이너도 없었습니다. 재활은 선수들의 몫이었어요. 그래서 정확하게 재활을 하지 못해서, 더 더디게 진행되었죠."
1987년 럭키 금성은 박제기 감독이 나가고,
동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럭키금성의 성적도 하향세를 그렸다. 세대교체를 단행하며, 팀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조직력은 완벽하지 못 했고, 선수들의 실력도 조금 부족했다. 그래서 럭키금성은 87년에는 5위, 88년에는 4위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2년이라는 경험을 축적한 시기였다.
"1987년 동계 훈련은 부상 때문에 받을 수 없었어요. 동계 훈련을 받지 못해, 체력적으로 완벽하지 않았고, 경기력도 저하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7년에 경기는 많이 뛰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움직임도 더뎠고, 골도 적었죠.
그리고 1987년은 팀의 변화했고, 적응하기 위한 첫 과정이었어요.
1988년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한해였어요.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시즌 베스트 11상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팀 성적이 마음에 걸렸어요. 축구는 개인 스포츠가 아니고, 팀 스포츠였잖아요. 상을 받은 기쁨보다, 아쉬운 마음이 컸죠."
럭키금성,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럭키금성은 리빌딩 작업을 실시했다. 럭키금성은 2년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 했지만, 젊은 선수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며, 잠재력을 키웠다. 조직력 역시 좋아지며, 상대하기 껄끄러운 팀으로 성장했다.
"팀 조직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어요. 팀워크가 좋아졌습니다. 또한
사실 드리블이 많았습니다. 필요 없는 드리블도 많았고, 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인터셉트를 당한 적도 많았죠. 그래서 항상 볼 처리를 빨리 하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아마도 드리블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89년 주장을 맡으면서, 스타일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주장이기 때문에, 헌신적인 부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드리블을 줄이면서, 팀플레이에 주력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기를 보는 눈이 뜨였어요. 드리블이 필요한 타이밍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필요 없는 드리블도 줄이게 되었죠. "
1989년 리그 초반 럭키금성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하며,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럭키금성은 경기를 하면 할수록 강해졌다. 시즌 막판 거침없는 6연승을 달리며, 선두 유공을 따돌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10월 18일과 21일 럭키금성은 유공과의 대결을 펼쳤다. 1989년 K리그 우승 팀을 점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대결이었고, 두 팀 모두 놓칠 수 없는 경기였다. 경기 전 상황은 럭키금성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승점 43점을 기록한 럭키금성은 승점 42점을 기록한 유공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분위기 역시 6연승을 달리고 있는 럭키금성이 앞서 있었다.
"주장일 때, 우승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89년 K리그 우승이 간절했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시즌 막바지에 가졌던 유공과의 연속 2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 컸죠.
두 경기 모두 후반 막판
1989년부터
"항상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예선전은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뛰었습니다. 하지만 본선에는 뛰지 못했어요. 그래서 월드컵, 아시안 컵, 올림픽 등의 대회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죠.
국가대표팀과 멀어진 이유는 기량 부족이겠죠. 생각했던 수준에 오르지 못 했던 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전성기 시절부터 국가대표팀과 멀어졌어요. 국가대표팀에서 마지막 열정을 쏟고 싶었는데요. 아쉬울 따름이죠."
1990년 시즌을 앞두고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럭키금성을 최하위권 팀으로 평가했다. 지난 시즌까지 럭키금성 공격의 핵 역할을 담당한
1990년 럭키금성은
"조직력이 최고였습니다.
당시 럭키금성은 특출하게 잘하는 선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갖추었고, 자신의 몫을 100% 수행했습니다. 팀 밸런스가 잘 맞았죠. 그래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윤)상철이와의 호흡이 잘 맞았어요. 아마도 둘이서 팀 공격의 50% 이상을 책임졌을 거예요. 그리고 (윤)상철의 골 가운데 절반 넘게는 저의 도움이었고요. 저 역시 (윤)상철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1990년 럭키금성은 공격과 수비 모두 안정된 전력을 보였다. 결국 럭키금성은 시즌 내내 선두권 자리를 유지하며, 14승 11무 5패를 기록. 대우를 여유롭게 따돌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승만큼 의미 있었던 것은 바로 럭키금성의 축구였다. 짧은 패스 위주로 하는 재미있는 축구를 펼쳤다. 이에 당시 K리그 팬들도 럭키금성 축구에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럭키금성의 축구는 아기자기했어요. 성적도 중요했지만, 팬을 위한 축구를 했습니다. 미드필더에 숫자를 많이 두었고, 패스를 많이 하며, 상대편 골문을 향해 전진했어요. 물론 선수들도 즐기면서 재미있게 볼을 찼습니다. 그래서 많은 팬들도 럭키금성 축구는 재미있다면, 좋은 평가를 많이 해주셨어요."
이적 그리고 은퇴
1991년
어려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4월 그의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큰 슬픔에 빠졌다. 또한 6월 유공으로 현금 트레이드되며, 팀을 옮겨야 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전체적으로 91년 전반기는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계약 문제로 동계 훈련에 참가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준비가 덜 되었어요. 4월에는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정신적인 충격도 컸죠. 그래서 경기력이 많이 떨어졌고, 유공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죠."
1991년 유공의 시작은 결코 좋지 않았다. 최 하위권에 머물며 패배에 익숙했다. 하지만 유공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유공의 상승세와 맞물려
"이적 후 한 달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기폭제는 역시 골이었습니다. 평택(8월 31일 현대전)에서 펼쳤던 경기일 거예요. 그 경기에서 교체 투입되었는데요. 2골을 터트리며, 자신감을 찾았습니다. 그 자신감에 힘을 얻어 이후 주전으로 뛰며, 골을 많이 터트린 것 같아요.
럭키금성 시절에는 주로 미드필더를 맡았어요. 하지만 유공에서는
사실 이적 후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았어요. 끝이 보이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어요. 특히 럭키금성을 만나며, 정말 이를 악물고 뛰었어요. 골도 많이 터트렸고요."
1992년
"92년 유공의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91년 명지대학교 강의를 한 3주 정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공부하면서, 지도자로 나설 준비를 시작했어요. 때 마침 관동대학교 감독직 제의도 왔고요. 그래서 감독과 선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감독이었습니다. 은퇴를 선택한 거죠.
무엇보다도 좋은 기량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즉 정상에 있을 때, 은퇴를 하고 싶었습니다. 팬들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긴 채 은퇴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은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뛰고 싶었습니다. 감독님의 배려로, 대우전을 뛸 수 있었어요. 명목상 은퇴경기였습니다. 소중한 경기 중 하나죠. 언젠가는 해야 되는 은퇴였어요. 그래서 욕심도, 미련도, 후회도 없이 홀가분히 떠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수 시절 아내의 내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항상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리드를 잘 해주었습니다. 축구만을 볼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어요. 자기 생활도 버려가며, 정말 헌신적으로 해주었어요. 그리고 항상 저의 선택을 믿고 따라 주었습니다. 은퇴 과정 역시 그랬죠. 너무 고마웠어요. 물론 지금도 많이 고맙죠.
감독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
1993년
"지도자 교육을 받지 않고, 바로 감독을 했어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명지대학교, 프로 시절에 배웠던 훈련이 전부였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해, 한계가 있었죠. 젊음 패기 하나로 밀고 나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술보다는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축구를 했습니다. 반복훈련을 계속해서 실시했어요. 훈련 방식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지금과 큰 차이가 있죠. 이 때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미안해요.
처음이라 훈련은 서툴렀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도 따라온 것 같아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학 선수권 대회 4강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어요."
지도자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을 치룬 뒤, 다시 청소년 대표팀 코치로 되돌아왔습니다. 선진 축구 문화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여전했죠. 그 때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대표팀을 맡기 시작했어요. 좋은 기회잖아요.
그래서 2001년 9월 나이지라아와의 평가전이 끝난 뒤, 히딩크 감독에게 직접 찾아가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좋아하면서, 같이 하자고 했어요. 그 때부터 청소년 대표팀 코치와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를 같이 맡게 되었죠.
트레이너의 역할은 큰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미리 훈련장에 나가 훈련장을 체크하고요. 선수가 없으면 같이 훈련에 참가하고, 선수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챙겨 주었습니다. 사실 트레이너 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았죠. 선진 축구를 배워야 한다는 일념 하에 자존심도 버려가며 배웠죠.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훈련에 나갔습니다. 조금만한 쪽지에 필요한 정보를 계속 적었죠. 그걸 본 히딩크 감독이 '뭘 그렇게 적고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에 '머리가 안 좋아서, 꼭 적어야 한다.'고 답했죠. 그 대답을 듣자 편하게 적고 싶은 거 있으면 모두 적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후 노트와 녹음기를 챙겨가며 적었습니다. 월드컵 때는 라커룸에도 들어가 선수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 지까지 체크했죠.
가장 많은 배우고 적은 것은 선진 축구 훈련 방법이었습니다. 빠른 공수 전환, 포지션 게임, 압박 등을 많이 배웠어요. 은퇴 후 8-9년 간 배운 것보다 히딩크 감독 밑에서 보고 느끼며 배운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죠.
선수
그래서 2002 한일 월드컵은 그에게 큰 의미로 남는 대회였다. 처음으로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누볐기 때문. 비록 선수는 아니었지만,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 큰 영광이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축구를 통해 온 국민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큰 선물이었다.
"온 국민들이 한 달 동안 축구를 통해 무한한 즐거움을 누렸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축구를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탈리아전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선수들 모두 한 마음이 되었어요. 준비 역시 완벽했죠. 그리고 선배로서, 후배들이 꿈을 이루어줘 고맙네요."
배울 수 있다는 행복
2002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스페인 데포르티보라는 팀에 들어갔어요. 코치는 아니었지만, 훈련에 항상 참여했고, 1주일에 한 번씩 가지는 미팅 시간에도 참가했습니다. 물론 경기도 많이 보러 다녔죠.
당시 데포르티보는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하며, 많은 경기를 치렀어요. 거의 3일에 한 번 꼴로 경기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경기 운영 측면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이외에도 비시즌에 훈련 하는 방법, 준비하는 과정 등을 지켜보며 배웠습니다.
가장 많은 배운 것은 바로 유소년 훈련이었습니다. 유소년 팀들을 주로 보러 다니며, 훈련 프로그램을 지켜보았어요. 볼 소유 능력을 키우는 훈련, 미니 게임 같은 것을 주로 하더라고요.
당시 데포르티보를 이끈 이루에타 감독은 명장이잖아요. 그 분이 참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었죠. 스페인 생활은 혼자 있으면서 외로웠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배울 수 있다는 행복에 빠져 지내며 살았죠."
"과거에는 체력 위주의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통해 체력은 자연스럽게 올라온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이 아닌 기술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그 2002 한일 월드컵, 유로 2004 등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기술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소년 때 상대적으로 개인 기술 훈련이 소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초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볼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상대를 제칠 수가 없어요. 기술이 있어야 팀 전술로도 발전할 수 있고요. 유럽에서 성적이 좋은 팀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개인 전술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 기술 훈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죠."
2005년 다시 돌아온
"제가 지금까지 배운 것 모두를 동북 고등학교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력적인 부분보다는 기술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적을 쫓아 가기 보다는 저의 축구 철학을 바탕으로 팀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팀은 볼 소유권을 높여가며, 짧은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가는 팀이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어요. 어린 선수들이 참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어린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 기술과 경기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부터 시행될 U-18 클럽리그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런 대회가 빨리 정착된다며, 월드컵에서 충분히 기대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
이렇게 화려한 선수
"선수
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채워야 하는 부분은 밑도 끝도 없이 많아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회만 되면 더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항상 공부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심리적인 부분을 배우고 싶어요. 조금씩 배워가야죠.
요즘 P코스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 코스는 참 좋은 것 같아요. 문제점을 배우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서 배우는데요. 재미있고,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축구에 대한 열정도 여전해요. 지도자는 선수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선수보다 축구에 대한 열정을 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정이 없다면 절대 잘 할 수 없습니다.
저의 마지막 목표는 대표팀 감독입니다. 모든 감독의 꿈이잖아요. 앞으로 조금씩 더 배우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저에게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뛰는 저의 모습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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