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물찬 제비’ - 최상국


지난 10 31, 해남에서 전국추계1,2학년 축구대회 8강전이 진행되었다. 8강전에서 마주한 성균관대학교와 전북 호원대학교. 어느 게임보다도 피 말리는 접전이 펼쳐졌다. 4강으로 향하는 선수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게임에 임했다. 성균관대에서 선제골을 득점했고, 뒤이어 호원대에서 동점골을 만들었다. 한 골씩을 더 주고받으며 균형을 유지했으나 후반 38분 성균관대에 한골을 내준 호원대는 8강에서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시하던 벤치는 아쉬움이 컸지만 창단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팀임에도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벤치에는 익숙한 얼굴의 감독이 있었다. 바로 87년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한국축구의 역사에 깨어지지 않은 기록을 남긴 최상국 감독이었다. 피아퐁의 공격부문 두개 타이틀 동시석권(득점, 어시스트) 기록은 87최상국(포철)이 다시 한 번 달성한 이후 여태껏 재현되지 않고 있다.

수퍼리그의 원년멤버로 한국축구를 장악했던 그. 이젠 그를 호원대 감독으로서 마주하게 된다. 11 3일 호원대학교 앞에서 지도자가 된 그를 만나보았다. 그가 축구와 함께 해 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저 축구를 생각하면 행복했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를 묻자 첫 대답은 평범한공을 좋아했어요.’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그의 이야기에는 축구를 할 수밖에, 공을 좋아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가 나왔다. 축구를 가까이 접하면서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아이. 그 아이는 축구를 할 때면 행복했다.

 

어릴 때 공을 유난히 좋아했어요. 공을 차고 노는 게 그렇게 좋았죠. 형들 때문에 공을 더 가까이서 접했어요. 형들이 공을 잘 찼거든요. 형이 위로 3명이 있는 데, 모두 축구를 했어요. 동네에서 공 좀 찬다는 형제들이었죠. (웃음)”

 

나름대로 축구를 잘한다는 형들인데, 고등학교까지만 축구를 하고 다 관뒀어요. 대학도 못가고, 그때는 지금처럼 프로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는 축구가 참 열악했어요. 어떻게 보면 못사는 집안의 아이들이 축구를 많이 했죠. 그렇다 보니 중간에 축구를 그만둔 사람들이 많았죠. 요즘은 없는 애들은 사실 축구하기 힘들어요. 축구가 변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이 바뀌었죠. 저희 집안에서도 축구하는 환경이 어렵다 보니까 결국 끝까지 축구를 한 건 저예요. 우연찮게 하다보니 잘 된 것 같아요.”

 

형들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말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자신이 보고 자라온 형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형들은 그에게 크나큰 존재였을 것이다.

 

한 집안에 4명이나 축구를 했으니 어머님이 고생이 참 많았죠. 초등학교 때부터 객지생활을 해왔어요.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는 충북 옥천의 죽향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래서 이리 저리 어머님이 많이 따라다니시면서 챙겨주셨어요.”

 

어릴 적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어린아이. 어쩌면 너무 일찍 익숙해져버린 생활이 되어 외로움조차도 느끼지 못한 것일까? 외로움보다는 재미로 즐겼다고 했다. 다른 안 좋은 건 다 잊을 정도로 그렇게 축구가 좋았던 어린 축구선수였다.

 
가족과 떨어져서 하는 합숙생활이 힘들고 외롭기도 했지만, 그때는 재밌었던 것 같아요. 축구를 또 워낙에 좋아했으니까 축구를 하려고 다니는 건 다 좋았어요. 그리고 놀러가는 재미랄까요? 이리 저리 가보니깐 즐거워했던 것 같아요.(웃음)”

 

과거를 회상하는 그는 과거를 그리워했다. 마냥 축구가 좋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며 지금 지도자가 된 자신에 지친 듯 한 모습을 비췄다.


힘들었던 학생시절, 함께해준 든든한 친구들 

중학교 때는 정말 성적이 좋았는데, 고등학교 때는 왜 그렇게 안 좋았는지 몰라요.’라는 말로 학창시절의 이야기카드를 꺼내들었다.

 

중학교 때 동기들이 참 잘했어요. 멤버가 베스트였던 것 같아요. 전국대회에서 2번 우승하고, 2번 준우승하고, 1번은 3등을 했어요. 거의 저희가 휩쓸고 다녔죠.(웃음)”
 
·고등학교 때 유명한 선배들이 많았어요. 우리학교에서 국가대표도 참 많이 나왔거든요. 저희 학년 때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참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는 청주 대성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청주 대성고(전 청주상고)는 역대 축구 국가대표 및 우수선수들을 배출했다. 그의 선배로는 39이재희(현 청주대 감독, 전 국가대표) 40최순호(전 포항스틸러스 감독, 전 국가대표)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동기들은 41신상근(전 포철 및 럭키금성, 전 국가대표)정기동(현 월드컵대표팀 코치, 전 국가대표)이 있다. 이후에도 이운재, 박성배 등 걸출한 후배들을 배출하며 축구 명문학교로 알려진 학교가 되었다.

 

그때 친구들하고는 거의 20년간 함께 게임을 뛴 것 같아요. 초등학교 동기들이 중·고등학교도 거의 함께 했거든요.” 그는 함께 해온 친구들을 축구와 함께 자신의 일부라 여기고 있었다. 20년을 넘는 세월동안 축구만큼이나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자라온 동료들이다.

 

지금 GK코치를 보는 정기동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2006월드컵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였는데, 그 친구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포항제철, 대표팀까지 함께했어요. 지금 제가 있는 호원대에 와서 GK코치도 봐주다 갔으니 참 오랜 친구죠. 방도 같이 써서 20년 이상을 한방에서 잤답니다.(웃음)

 

정기동이란 친구와는 추억이 남달라요. 트러블이 있기 마련인데,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어요. 서로 단점보다는 장점을 얘기하다보니까 20년 동안 우정을 유지해온 것 같아요.”

 

정기동 코치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쩌면 축구보다도 가깝고 가족보다도 분신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정기동과 함께여서 얻은 게 많다고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때 축구를 했던 친구들과 3개월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어요. 만나서 축구도 하고, 얘기도 하고 즐겁게 놀죠. 대표팀 친구들도 만나곤 하는데, 그때 친구들이 모이면 감회가 새로워요.” 그는 친구를 라이벌로 생각지 않는다. 친구는 동료이지 넘어서야할 라이벌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라이벌은 없어요. 모두 한 동료이죠. 어떻게 따져보면 욕심이나 집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내 개인 스스로가 우성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스스로 남을 이기지 못할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해요. 내 것을 만들다 보면 뛰어넘을 단계가 되고, 자연스레 그냥 넘어서게 되는 것 같아요. 라이벌이라 표현 되는 그들은 축구를 하면서 함께 무언가를 넘을 동료들이에요.”

 

합숙생활은 참 힘들었어요. 그때야 기합도 매도 많이 맞을 때였으니까요. 선배들을 정말 많이 무서워했어요. 그땐 맞는 게 당연한건지 알고 지냈어요. 딱 제 나이 때의 그 시대가 기합도 많이 받고 매도 많이 맞고 그런 시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어느 학교든지 전통으로 내려왔어요. 한번은 힘들고 반항 심리에 무단이탈을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결국은 축구를 찾아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렇게 맞아도 축구를 싫어 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정말 축구에 푹 빠졌었죠.”

 

운동부이기에 힘들게 겪어내야만 했던 그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은 관행이 되어서는 안돼요.’라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부와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도 역시 공부와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책 한줄 읽으려하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곧바로 엎드려 잠을 청하곤 했다.

 

공부에는 참 등한시했어요. 선생님이 수업에 많이 들어가라고 했지만 운동선수가 느끼는 첫 번째가 피곤함인 것 같아요. 결국에는 그걸 못 견디니까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그 시간에 숙소에서 잠을 자죠.” 하지만 그것에 대한 후회도 든다. 지도자가 된 그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자신의 제자들은, 그리고 축구를 하는 후배들은 그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그이다.

 

축구하는 친구들도 공부하는 친구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해요. 최소한 언변에 대한 공부는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면 좋은데, 그게 참 힘들다며 요즘 축구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축구 인생의 끝을 봤던 그때

고등학교 때 멤버가 좋았음에도 대회에서 큰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목표로 했던 상위권 대학교가 아닌 시골의 작은 청주대학교를 입학했다. 실망감이 컸을까, 축구에 회의를 느끼는 반항기였을까 그는 그곳에서 축구를 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축구가 멀어졌고 그에게는 좌절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학은 그에게 새로운 것을 알게 했고, 좌절을 밟고 일어서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대학교 때의 기억은 솔직히 많지 않아요. 1년을 다녔는데, 그것마저 게임도 대충했거든요.
하지만 휴가를 받고 놀러갔던 기억이 나요. 그 시절에는 여름에 배낭을 메고 바닷가에 텐트치고 노는 배낭 족이 참 많았어요. 우리도 한번 해보자 싶고, 대학생이니까 젊음을 즐겨보자고 운동하는 친구들이랑 배낭을 메고 놀러 갔어요. 원주랑 청주 쪽으로 가서 텐트도 치고 물놀이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죠.(웃음) 거의 한달을 배낭만 메고 돌아다닌 것 같아요. 정말 대학 시절의 낙이었죠.”

 

강옆에 텐트를 치고 놀던 운동하는 친구들, 운동에 지쳐있던 심신을 달래러 간 여행이 힘들 법도 했지만 그들은 마냥 즐거웠단다. 대학시절의 추억을 하나쯤은 만든 것 같아 다행이라며 미소를 보인 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축구를 해 오면서 겪은 최대 위기의 순간은 대학입학과 함께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더 좋은 대학을 생각했어요. 나 자신은 좋은 곳에서 꿈을 펼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중간에 그 바람이 이루어지질 않으니까 포기가 되어버렸죠. 1학년 때는 운동을 대충했어요. 게임도 열심히 참여한 게 아니라, 잠깐 뛰고 나오던지 게임에 나갈 생각을 안했죠. 학교생활이 그저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버린 거죠. 2학년 때 축구를 포기했어요. 그때 대학교가 사범대라서 체육교사 자격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사로 갈까 고민을 한 끝에 군대를 가려고 지원을 하면서 축구를 그만 뒀어요. 하지만 군대도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원하는 곳에 못 가게 되었죠. 그래서 축구를 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축구를 포기하지 않는 마지막 선택은 군대뿐이었다. 하지만 군대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축구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이했던 그해. 그는 축구도 인생도 포기하고 싶은 만큼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상무지만 그때는 공군 팀이 있었는데, 보름간 훈련도 받았어요.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안 되면서 못 들어갔죠.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요. 군대마저도 못가니까 내 자신이 참 한심했어요. 축구를 거의 2년 정도 쉬다시피 했어요. 그 과정에 고등학교 선배님이자, 대학교 때 은사님이셨던 조성달 교수님께서 제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어요. 볼을 참 잘 차셨고 제게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이죠.”

 

그는 조성달 교수님으로 인해 재기했다. 그가 처음 발을 들인 곳, 바로 수퍼리그의 시작이다


축구를 다시 시작한 포철, 그곳에서 난 다시 시작했다

나의 시작은 포항에서 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의 달라진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나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포항에 입단한 자신을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겸손함을 내비췄다. ‘일개 촌놈이라는 말로 자신을 낮추며대 포철이라는 말로 자신을 선택해준 포항을 높였다. 그는 고마움을 느끼고 베풀 줄 아는, 겸손한 분이었다.

 

축구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포항(당시명칭 : 포철)에 입단하면서 축구를 다시 했어요. 대학을 계속 다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졸업을 하지 않고 포항으로 간 건 잘한것 같아요. 조성달 선생님께서 포항에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제의를 하셨어요. 그래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잘되어서 입단하게 되었죠.”

 

포항에 처음 입단하고 운이 좋았어요. 좋은 선수들이 많았는데, 내가 열심히 하니까 그 선수들이 자연적으로 퇴보 되더군요. 그러니 나는 경쟁의식 없이 그들을 넘어서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선생님들 눈에 예쁘게 보였고, 길이 열리더군요. 일단 축구를 시작하고 남을 이기려고 한다면 내 자신이 낮아지는 것 같아요. 내 자신만 잘 하면 언젠가는 높은 곳에 도달해 있기 마련이죠.”

 

'열심히, 무조건 열심히…' 그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옆을 볼 시간도, 뒤를 되돌아 볼 시간도 없었다. 개인을 단련시키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이었다. ‘내 스스로가 잘해야 한다. 앞만 보고 달리자.’ 그의 생각은 곧 실행에 옮겨졌고, 곧 빛을 발했다.

 
제가 포항에 입단 할 때 수퍼리그가 처음 생겼죠. 그때 프로가 처음 출범을 했고, 수퍼리그 원년 멤버로 게임을 뛰는 영광을 누렸어요. 그때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어요. 선수들의 기량도 많이 향상할 수밖에 없었죠. , 어웨이를 하다보니까 선수들이 개념부터가 프로화로 바뀌었어요. 그때가 제일 축구 발전성이 있던 해가 아닌가 싶어요. 수퍼리그로 인해 축구가 우리나라에 정착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수퍼리그 출범을 하고 군인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했어요. 각 수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마 거의 다 했던 것 같아요. 축구 붐을 일으켜서 관중도 참 많았어요. 예전에 그 열기는 대단했죠. 앉을 자리가 없어서 육상트랙까지 내려와서 앉을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실감이 나세요? 지금은 축구는 발전했는데 관중은 오히려 낙후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네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그의 말에 탄성이 흘렀다. 많이 발전해야하는데, 관중을 보면 오히려 낙후되어버린 현실에 적잖은 실망을 했다.

 

프로는 확실히 달랐다. 프로에서 높게만 봐왔던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게임을 뛰었다. 솟아오르는 인기에 스스로 프로의식이 생겼다.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뛰었다

 

포항에 입단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 한 것 같아요. 개막하고 첫 해 도움순위 2위라니.. 몇 게임 되지 않았지만 제 스스로 많은 변화를 느꼈죠. 축구를 새롭게 접하게 된 것 같아요. 다시금 축구를 하는 게 즐거웠고,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관중도 많고, 그들 앞에 서다보니까 제가 업이 된 것 같아요.”

 

그가 넣은 수많은 골 중에 기억에 남는 골이 터졌다. 그 해의 최고 골을 뽑아 주는 상. 바로 85년 그 해의 베스트 골을최상국그가 터뜨렸다.


내 생에 베스트 골이 터졌어요. 예전에는 그 해의 최고 멋진 골을골든볼이라고 상을 줬어요. 멋진 골을 뽑아서 전 국민이 투표를 하고, 뽑히면 상을 받죠. 제가 그 해에 골든볼로 뽑혔어요. 의정부에서 럭키금성이랑 게임을 했는데, 호샤가 띄어준 볼을 골 에어리어에서 그대로 왼발 슈팅을 했는데, 일명 바나나 슛이라고 볼이 휘어들어간 거예요. 그 골이 그 해의 골든볼이 되었죠.”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골 장면이 있어요. 86년 유공이랑 게임이었어요. 그때 얼룩무늬 유니폼을 입을 적이었는데, 지금 없어진 서울운동장에서 게임을 했죠. 골키퍼가 킥한 걸 제가 잡아서 한번 뜨고 때렸는데 골문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골도 참 기억에 남아요.”

 

“86년도에 정말 재밌던 경기가 있었어요. 럭키금성이랑 했던 게임인데 골이 참 많이 터졌어요. 두골을 넣고 두골을 내줬어요. 그래서 동점인 상황에서 또 두골을 더 넣고 42로 이겼죠. 골이 많이 터지니까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나 프로에 온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하지만 더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었기에 그 시기를 슬럼프라고 논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랄까.

 

하지만 86년도에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느라 게임을 많이 못 뛰었죠. 그래서인지 공격 포인트를 많이 내지 못했고, 스스로 견디기 힘들만큼 경기가 풀리지 않았어요. 시즌이 끝나고 방출 대상자로 제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어요. 참 치욕적이었죠. 몸값도 많이 떨어졌고 힘들었어요.”

 

“87년 킹스컵대회(2)에서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됐죠. 꿋꿋이 이겨내고 열심히 했어요. 동계훈련을 통해서 그동안 단점으로 지적된 개인플레이랑 문전처리 미숙함 등?개선했어요. 욕심도 버리고 침착하게 경기를 할 수 있는 자제력을 기르는데 제일 힘을 썼죠.”

 

그리고 체력적으로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단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죠. 볼 트리핑이나 이동 트리핑, 드리블 같은장점으로 커버했어요. 상대편이 오는 것을 역이용하는 기술도 많이 했죠.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봐도 제가 그런 쪽으로 극복을 잘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약점을 극복하고 우뚝 올라설 수 있던 그. 그는 욕심이 있었다. 스트라이커로서도 최고의 자리에,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힘을 내어 달렸다.

 

그가 지켜온 자리는 윙이라고 불리는 공격수다. 공격수이기에 공격 포인트는 그에게 꼭 필요한 성적이었다.

 

포항에서도 여전히 포워드를 봤어요. 축구를 시작하면서 쭉 포워드만 봤네요. 지금은 윙이라고 하는 포지션인데, 예전에는 그저 스트라이커라고 했죠. 축구를 하는 25년을 그 자리 하나만 봤으니 도가 텄다고 해도 되겠죠? (웃음)”

 

한자리를 지켰고, 큰 부상은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그 자리에서 최고가 되게 하기위해 따르는 운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운도 실력의 일부분이다. 큰 고비 없이 무난히 이어온 선수생활, 그는 부상이 잦은 선수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감사할 일인지 크게 다쳐본 적은 없어요. 제일 크게 부상을 당했던 게, 한달정도 인대가 늘어났던 정도뿐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크게 부상당해서 공백기가 크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어요. 자기 관리를 잘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 스스로는운이 참 좋은 놈이다.’라고 생각해요. 부상당하는 선수들을 보면 꼭 다친 선수는 다치고, 다치지 않는 선수들은 또 다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다치지 않는 것에 아주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부상을 피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는 분명 운도 좋고, 능력도 있는 선수였다.

 

최선을 다해서 매 경기에 임했다. 그런 그에게도 태극마크의 기회가 찾아왔다. 축구선수 모두가 염원하는 태극마크. 찾아온 최고의 기회를 그는 꽁꽁 붙잡았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안고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다는 순간을 기억하면 짜릿함이 온몸을 감싼다. 1987년 제 8회 아시안 컵 명단에최상국이라는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이 게임은 2 2패라는 성적으로 쓴맛을 봐야했다. 하지만 그는 배운 게 더 많았다.

 
“84
년 아시안 컵 대표 명단에 이름이 올랐어요. 굉장히 영광이었죠. 예전에는 학연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뽑힌다는 게 신기했어요. 시골학교에서 갓 올라와서 포항제철에 입단하고 게임을 뛸 수 있는 게 얼마나 영광이에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때 동료들이 함께 잘되었죠. 대표팀에서 같이 뛰기도 하구요. 그때 당시 선배님들이 쟁쟁했어요. 박창선, 허정무, 이강조 등등 대 선배님들과 같이 볼을 찬다는 게 얼마나 영광이에요. 제가 대표팀이 되었다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어요.”

 

해외 팀들과 겨루면서 많은 차이를 느꼈어요. 한국축구가 그래도 프로가 되는 과정인데 유럽과 비교를 하면 많이 처지죠. 텔레비전으로 보다가 가서 몸으로 부딪혀보니까 정말 많은 차이도 느끼고, 부족함도 많이 느끼게 되었죠. 한국축구가 발전하려면 개개인이 많이 발전을 해야겠다고 많이 느끼게 되었죠.”

 

그는 유럽과의 벽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자극제가 되어 마음가짐을 다잡게 했다. 밤마다 개인훈련이 이루어졌다. 유럽의 그들만큼 나 자신도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으려고 그 후로 개인훈련을 참 많이 했어요. 한번은 포항에서 독일로 전지훈련을 갔던 것 같아요. 같이 방 쓰는 정기동이라는 친구가 골키퍼다 보니까 매일 밤마다 같이 훈련하러 나가는 거예요. ‘야 내가 공을 막을 테니깐 너는 슈팅해’ ()기동이는 골키퍼고 저는 스트라이커니까 둘이 개인훈련하기에 참 좋았어요. 그때 둘이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많이 해요. ‘우리가 그때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다.’구요.”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함께해준 동료 덕분이다. 그들은 함께 성장해왔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자극제가 되어줬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나라의 최고 대들보가 되지 않았을까?

 

87년 대통령배에서 미국을 상대한 한국. 10의 승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왔다. 승리의 골을 넣은 이가 바로최상국이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87년 대통령배에서 미국이랑 경기였을 듯 싶어요. 제 기억에 좋은 골을 넣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역습을 당하다가 수비수 정해원이 볼을 걷어냈는데, 제가 상대진영으로 돌아서면서 때린 볼이 골문에 그대로 꽂혔어요. 35m정도 되는 중거리 슛이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멋있게 들어갔거든요.(웃음)”

 
그때를 회상하면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그는 태극마크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대표로 나가 골을 넣었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그런 자신감으로 그는 앞을 내다보며 달렸다. 그리고 곧 그의 행복의 정상에 도달했다.

 
내 사랑의 그녀 그리고 가족

축구에 회의를 느꼈던 대학시절. 그는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힘든 시기에 위로가 되어주는 그녀는 따스한 햇살 같은 존재였다. ‘사랑이야기 좋죠.’라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에게 그녀는, 그리고 가족은 미소를 주는 행복 그 자체이다.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대학교 때였어요. 일명 C.C.라고 하는 캠퍼스 커플이었죠. 저희는 체육과고 그쪽은 음대생이었어요.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자연적으로 알게 되었고, ‘음악과에 누가 예쁘다.’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체육과 애들이 짓궂다 보니까 음대생들 옆에 가서 좀 괴롭히고 그러면서 다리를 이었죠. 제가 먼저 가서 대쉬했고, 6년을 사귀었어요
.”

만남의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었다. 수퍼리그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매스컴에 그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던 프로 4년차.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유명해진 그를 반대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고.

 

“6년이나 만나고 결혼을 결심하면서 장인어른,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두 분 모두 절 좋아하셨죠. 그때 프로였고, 축구선수로 텔레비전에서 많이 방영을 해줄 때였어요. 매스컴에도 오르고 인기도 있으니까 환영의 대상이었죠. 저는 박수 받으면서 장가를 갔어요.(웃음)”

 

86년 12월 14 날 결혼식을 올렸어요. 고향인 제천에서 했는데, 그때는 시즌이 많지 않았고 시즌도 끝난 후라 여유롭게 했죠.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어요. 그때 당시에 외국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을 때였고, 신혼여행으로 손꼽는 곳이 제주도였어요.”

 

축구선수로서 결혼 생활이 평범하진 않았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함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포항에서의 배려로 집에서 다닐 수 있었다.

 

포항은 결혼 한 사람은 합숙을 제외시켜줘서 집에서 다녔어요. 하지만 원정을 많이 다녀서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이 참 많았어요. 원정을 가도 지금처럼 하루 만에 오가는 게 아니라, 며칠이 걸리니까 거의 떨어져 있었다고 보면 되요. 경기 전에 결혼한 사람들도 불러 모아서 합숙을 하면 거의 한달을 하니까 오랜 시간을 떨어져 보냈어요. 그러다보니까 애틋함, 미안함, 고마움이 컸죠. 아내만 고생시키는 거죠. 남자들이 그래서 더 잘해야 해요.”

 

결혼을 하고 난 후 많이 안정적이었어요.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축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죠. 결혼을 한 그해에 아들이 태어났어요. 큰애가 태어난 날은 제가 아내 옆에 있었죠. 처음으로 2세를 마주했을 때 신비의 세계랄까? 갓난아이를 안아보는데, 그 핏덩어리를 보니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그 아이가 복덩이였는지 그 해에 좋은 일만 일어났어요.”

 

아이를 마주했을 때의 신비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를 닮은 아이, 내 아들

 

이제 와서 얘기인데 그 아이가 크니까 애 키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란 걸 느꼈어요. 그런데 저는 애가 그냥 낳아놓으면 알아서 크는 줄만 알았어요. 제가 매일 나가서 생활하고 그러다 보니까 가보면 커있고, 가보면 커있고 했던 거예요. 그런 걸 보면 그때 내가 뭘 몰라도 한참 몰랐구나 싶어요. 요즘처럼 애들 키울 때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그런걸 알 리가 있었나요.”
둘째랑 셋째가 태어날 때는 함께 옆에 있어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혼자 힘들었을 아내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요.”

 

그저 알아서 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고 보니 혼자 고생을 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것을 남편인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다며 지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다고 했다.

 

아빠를 닮았는지 세 아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큰 아들을 빼고는 두 아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아버지 같은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첫째는 지금 모델준비를 하다가 군대에 갔어요. 축구를 시키려고 했는데, 키가 너무 커서 안 시켰죠. 둘째와 막내는 축구를 하고 있어요. 경신고등학교 2학년, 경신중학교 2학년인데 축구하는 시간 외에 컴퓨터를 많이 해서 걱정이에요.”

 

아버지로서, 축구의 선배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지도자로서 그는 자식들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옆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응원하고 바라본다. 많은 조언을 하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과는 달리 조언은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좋은 길을 걷고 있는지 뒤에서 지켜봐주고 엇나가려는 것만 자제시킨다고.

 

따로 조언은 하지 않아요. 요즘은 본인 스스로가 잘해야 하는 시대예요. 옆에서 아무리 큰 무언가가 있어도 스스로 못하면 소용없거든요. 본인이 만들어 가고, 직접 부딪히면서 깨달아야만 하는 것 같아요. ‘누구의 아들이다.’보다는누군데 그 아버지가 누구더라.’라는 말을 듣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갈수는 없는 거니까 스스로 잘해야죠. 하지만 가지 말아야 하는 길로 간다면 그것만은 제가 이끌어 줄 수 있는 부분이죠.”

 

그에게 가족과 함께 찾아온 행복이라는 햇빛이 찾아들었다. 그는 그 햇빛에 빠져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최고로 해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프로생활의 최고를 경험하다. 그리고 은퇴까지

프로의 최고 기억을 떠올려보면 1987년이 그에게 최고의 해였다. 그는 타임머신이 있어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과거가 있다면 전성기였던 그 해로 돌아가고 싶다.

 

그 해의 경기는 어느 해보다도 기억에 남는다.

 
포철, 럭키금성에 덜미 잡혀 정상추격 종지부
'87
프로축구대회 정상을 겨냥, 힘차게 대시했던 포철이 막판에 의외의 복병에 허를 찔려
우승의 꿈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포철은 지난 10 31일과 11 1일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럭키금성과의 2연전에서 11패라는 반타작에 그침으로써 대우의 우승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 월간축구


“87
년 럭키금성과 했던 경기가 기억에 남아요.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했던 경기였는데, 저희가 이겼으면 우승권에 들어가는 경기였어요. 그런데 럭키금성에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우리는 좌절하고 대우는 우승을 했어요. 비록 졌지만 긴박했던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많은 순간이 하나의 필름처럼 기억을 스쳐가지만 그에게 최고의 기억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축구계 역사를 썼던 그때이다.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 석권했던 87년의 그 해.

 

여러 장면이 기억에 스쳐지나가지만 87년에 득점왕이랑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운 좋게 제가 그런 영광을 누렸고, 그때가 제일 좋은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는 1987년 시즌에서 15골을 뽑아내, 2위인 노수진(유공), 이흥실(포철) 3골 차로 따돌리며 최고 골잡이의 자리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어시스트부문에서도 8개로 1위를 마크함으로써 87프로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시즌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몸과 마음이 가벼웠어요.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득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히려 골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니까 득점 기회가 많았어요.

 

금년 시즌에 들어서면서 개인적인 인기보다는 팀의 승리에 기여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려 노력했어요. 개인적인 인기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자유로운 기분으로 뛸 수 있었어요.

 

골을 넣다보니 처음과는 달리 다시 욕심이 생기더군요. 욕심이 앞서니까 다시 전과 같이 실수가 많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만 감독선생님과 동료들이 적극 도와줘 생각지도 않았던 개인상까지 타게 됐어요.

 

득점이 많다 보니까 후반에는 상대팀 수비진의 집중 마크를 받게 됐어요. 그래서 시즌 초반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는 길을 택했고 후반에 어시스트가 많았던 것도 이 같은 전략의 변화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었죠. 상대 수비수들의 장단점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체력과 개인기로 정면대결 할 경우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동료들에게 볼을 넘겨주고 마크를 피해 맨몸으로 빠져 들어가곤 했지요.‘
-
득점왕/도움왕 동시석권 뒤 월간 축구와의 인터뷰 (최상국)

 

그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득점왕, 도움왕 동시 석권이라는 영광의 美??앉아있다. 진기한 기록은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한다.

 

당시 포철의 멤버가 상당히 우수했죠. 88년에 우승한 것을 비롯해 득점왕 뿐만아니라 도움왕도 3년 연속 포철에서 나왔어요. 87최상국, 88김종부, 89년 이흥실. 이렇게 말이죠. 거기다가 최상국의 경우 87년 득점왕과 도움왕을 같이 받았으니 아주 대단했다고 할 수 있어요. - 조긍연(현 선문대감독) 인터뷰 中

 

지금 얘기지만 사실 이 기록이 못 깨지고 있으니 저는 고마워요.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동안은 앞만 보고 열심히 뛰었는데, 노력이 제일 최상에 오른 때였죠.”


그 당시 방송에서 아나운서들은 그를물찬제비라고 불렀다. (물찬제비 : 제비가 물을 차고 올라갈 때, 내려오다가 물을 차고 올라갈 때 그만큼 빠르다는 뜻). ‘물찬제비최상국은 그만큼 빠르고 재치 있는 슛을 날리며 사람들의 뇌리에 이름 세 글자를 각인 시켰다.

 

하지만 득점왕의 징크스를 꼭 깨 보이겠다던 그 역시 징크스 앞에 무너졌다. 다음 해 88년부터 경기수와 공격 포인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도 유럽 진출의 꿈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유럽 진출의 꿈이 있었다.

제가 입단한 첫해에 독일훈련을 갔어요. 그때 제의가 들어왔었나 봐요. 솔직히 저는 나중에 들은 얘기였거든요. 차범근 감독이 독일에서 뛰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팀인지는 모르지만 저를 좋게 봤나 봐요. 그런데 포항에서는 갓 입단했으니 허락을 해주지 않았죠. 그때 독일에서 게임을 잘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좋게 보고 제의가 들어왔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많이 아쉬워요. 하지만 그 후로 유럽진출을 꿈꾸진 않았어요. 이 자리에서 잘하려는 마음이었죠. 솔직히 그때 자리에서도 점점 퇴화되어갔고, 감독의 눈길도 못 받는데 유럽을 생각할 틈이 어디 있었겠어요.”


지도자가 되어 새로 생긴 꿈

 1991년 그는 선수의 길을 그만뒀다. 은퇴를 생각지도 않았고,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떠밀려 은퇴를 결심했다.


1991
년 그는 선수의 길을 그만뒀다. 은퇴를 생각지도 않았고,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떠밀려 은퇴를 결심했다.

감독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은퇴를 생각했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나가는 인물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내가 조금만 힘들면 감독이 편한 문제였어요. 그때는 인정받지 못하면 축구를 관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은퇴를 했어요.

 

포항에서는 그쪽 지도자로 남길 바랬는데, 지도자는 하기 싫어서 나왔어요. 교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데 또 지도자를 하고 있죠. (웃음) 아직도 교수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언젠가 이 꿈이 이루어 질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직도 교수의 꿈을 꾸고 있는 그. 지금은 지도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고 싶다.

 

처음엔 제가 1년을 다녔던 청주대학교 감독으로 갔어요. 92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정도를 그곳에서 보냈죠.”

 

중학생 시절에 최감독님 현역시절 게임을 본적이 있어요. 스피드도 좋고 드리블도 멋져서 플레이에 반했었죠. 그리고 대학교에 가서 그분 밑에서 배웠어요. 선수생활을 하신 분이라 선수들을 이해하시고, 선수들의 편에 서시는 분이셨어요. 그리고 참 자율적으로 가르치셨죠. 그분 밑에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정말 존경하는 은사님이세요.
-
청주대 감독시절 제자로 있었던 이현동(. 대전 한국수력원자력)

 

그는 청주대학교에서 10년의 지도자 생활을 접고 새로운 곳에 둥지를 텄다. 포항에 있을 적 선배와 연결이 되어 첫 창단하게된 호원대학교에 오게 되었다. 올해로 2년밖에 되지 않은 팀이지만 그는 열정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미소를 지으며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왔다.

 

재작년 12 2일에 창단해서 작년부터 시합에 참여했어요. 축구를 그만두는 제자들이 더러 있어서 2학년은 2명밖에 없어요. 대회에 나가지만 애들이 아직 선수 경험이 많이 부족해요. 지도자이다 보니까 제자들이 항상 잘해주길 바라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1,2학년 춘계대회에서 저희가 8강까지 올랐어요. 8강에서 성균관대를 만났는데 상대편이 넣고 따라붙으면 또 넣고 따라붙고, 결국 35분정도였을까 골을 내주면서 43으로 아깝게 졌어요. 정말 피 말리는 승부였죠. 하지만 2년밖에 안된 팀인데 성적이 좋았죠. 아이들이 열심히 해줘서 그만한 대가를 치른 것 같아요.”

 

그는 제자들에게 고마움이 크다. 힘든 여건에서, 시합을 많이 뛰어본 그들 사이에서 뒤지지 않고 믿고 따라준 제자들이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다른 제자 양성을 위해서 신입생을 발굴하고 다녔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선택한 제자들이 앞으로 잘 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믿고 있다.

 

올해 신입생을 뽑으러 이리저리 다녔어요. 30명을 뽑았는데, 정말 괜찮은 선수도 있을 것이고 아닌 선수도 있을 거예요. 누구나 다 좋은 선수만 뽑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니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을 거예요. 아직 졸업생도 없는 2년밖에 안된 팀이지만 지금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축구를 정말 잘하게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첫 졸업생을 제 손으로 키워서 좋은 곳에 보내고 싶어요.”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받는 스트레스가 참 많다. 지도자들은선수일 때가 좋았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제자들을 가르치다보니까 힘든 점이 많아요. 선수였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지도자가 되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선수생활이 좋다는 얘기가 그런 얘기인 것 같아요.”

 

그는 지도자로서 받는 힘든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 말속에는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한없이 걱정되는 아끼는 제자들이다. 모두가 잘 되길 바라지만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요즘 지능적인 축구를 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지능을 어디까지 발전을 시켜야 하는 건지... 많은 지도자들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머리에도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지능적으로 하라는 건지 싶어요.

 

저희가 하는 훈련이 갖춰져있는 기술을 반복훈련 하는 거예요, 그걸 잘 해놔야만 머리가 따라 올 텐데, 안 해놓고 지능적인 걸 요구하면 그것도 잘못된 지도인 것 같아요. 어디까지가 머리고, 어디까지 기술인지 지도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지능적인 축구를 해라.’라는 말을 섣불리 하지 못하니 안타까워요. 아이들의 한계가 여기까지인데, 더 높이 바랄 수는 없거든요.

 

방법은 반복훈련밖에 없는 것 같아요. 축구라는 게 공식적인 답이 없어요. 그래서 머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더 힘들어지죠. 머리 쓰라는 얘기만 나오면 힘들어요.(웃음) 다 어디까지 기준을 둬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네가 머리를 쓸 줄 알아야만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은 해요.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도 모르는 게 많은데, 더 이상을 바란다면 내가 잘못된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전 그런 점이 가장 힘들어요.”

 

흔히 얘기하는 501로 싸워야하는데 50명 머리를 다 기억해야하니 그 지도자가 얼마나 머리가 좋아야겠어요. 작전도 짜야하고, 기능적인 방법을 구상해야하고.. 운동장에서 오늘 답을 원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다음날 운동에서 찾아보지만 매번 똑같은 플레이가 나오지 않고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과 함께 답을 찾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게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반복훈련밖에 방법이 없죠. 하지만 여러 사람을 반복훈련 시키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예요.”

 

제자들에게 바라지만 그들이 따라주지 못하는 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바랄 수밖에 없다

 
지도자의 마음으로 축구를 본다면 대학교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요. 그렇게 본다면 많이 평등화가 되서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이 열린 것 같아요.


지도자의 마음으로 축구를 본다면 대학교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요. 그렇게 본다면 많이 평등화가 되서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이 열린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학연위주로 모이다 보니까 수도권의 소위 잘나간다는 학교를 나와야 좋은 선수가 된다고 할 정도였는데 요즘을 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아요.

 

요즘 선수들이 나온 학교를 봐도 그래요. 정말 모르는 학교를 나와서도 잘하는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제는 조금 부족한 팀을 가더라도 자기 스스로만 잘하면 더 좋은 길이 열리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길은 많이 열려있어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하는걸 보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아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대학에 와서 60%는 축구를 그만둬요. ‘축구를 그만두면 할 일은 있느냐. 안 좋은 곳에 고생하면서 알바 할 바에 여기서 끝까지 해봐라.’라고 하지만 마음이 이미 떠나버렸더라고요. 여기에는 미련이 없다고 가버리는데 그게 잘못된 줄 알면서도 붙잡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데 잘된 아이들은 꼭 잘되고, 못된 아이들은 아주 못되는 것 같아요. 잘된 사람이 있는 반면 못된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정말 앞길이 보이는 잘하는 제자들이 관둘 때는 마음이 참 아파요. 누구든지 길은 다 있고, 가능성도 다 있는데 그걸 버티지 못하고 가버려요. 대화로 다잡으려 하지만 대화자체가 안 되서 많이 힘들죠.”

 

제자들에게 크게 바라는 건 없다. 단지 축구를 하는 자식들이 나쁜 길을 가지 않길 원하듯 자식 같은 제자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축구를 그만두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어린나이에 빨리 포기해버리면 그다음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견디지 않고 또 다시 포기하게 될 제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다.

 

요즘 애들은 이겨볼 생각은 안하고 포기부터 해요. 부모님들이 고생이죠. 만나보면 다 힘들다 하는데, 애들을 보면 그걸 못 느끼겠어요. 그런걸 보면 화가 나요. 부모님을 생각해서 열심히 해야 할 애들이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하니.. 부모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만두진 못할 거예요.”

아이들의 생각이 많이 낙후되어있어요. 길이 보이는데 애들한테 주입을 시켜줘도 애들은 그걸 몰라요. ‘네가 높은데 올라가봐야 낮은 곳을 알지, 올라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힘든 걸 아느냐라고 하면 아이들은힘든데 저 높은 데를 왜 올라가요라고해요. 경험담으로선생님이 여태껏 살아와 봤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니 좋았다. 좋은걸 좋다고 하는 거다. 부귀영화가 다 있는데 왜 내려가겠나. 나이 먹기 전에는 안내려가지라고 말해줘도 새겨듣지 않아요. 사고방식의 차이겠지만 제 마음을 알아주고 새겨들었으면 해요.”

 

아이들이 포부나 목표의식이 없는지 얘기를 해줘도 싫다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많은 애들이 축구를 그만뒀고 또 몇 명이 더 그만둘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 남아서 운동하는 제자들은 많이 깨우치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포기하지 않도록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줘요. 잘 할 수 있다, 가능성이 이렇게 있다고 얘기를 해주고 있죠.”

 

그는 한국축구에 바란다. 자신의 제자들만 봐달라는 게 아니다. 시합을 치르면서 우리편, 상대편에서 참 좋은 선수들을 발견한다. 그 선수들이 발굴되어 잘 배운다면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갈 재목으로 손색이 없다고 했다.

 

축구발전을 위해서 전용구장이 많이 생겨야 해요. 스타디움과 전용구장은 느낌이 많이 다르거든요. 전용구장은 만 명이 모이면 엄청 많이 온 느낌이 들지만, 스타디움은 그렇지 않잖아요. 공을 차는 선수들도 관중이 많고, 가까이서 같이 호흡을 하면 더 으쓱해져서 잘하거든요. 전용구장의 최대 장점은 선수와 관중이 하나가 되어서 함께 한다는 점인 것 같아요. 전용구장이 생긴다면 팬들은 지금보다 축구를 재밌게 접하게 될 것이고, 관중은 분명 더 늘어난다고 생각해요.”

 

모든 축구팬들의 염원 축구전용구장. 지도자들도 선수들도 그 점을 거론한다. 축구 발전을 위한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관중들은 선수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되어야 해요.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는 축구를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요. 한 팀을 정하고 그 팀에 내가 무언가가 되어야하는데, 이 팀도 아니고, 저 팀도 아니고 정체성을 모르겠어요. 선수를 응원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그 팀의 무언가가 된다는 소속감이 있다면 축구를 더 재밌게 즐기지 않을까요?”

 

요즘 화두로 떠오르는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재밌는 축구를 해야 한다.’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축구를 재밌게 하느냐, 그게 또 선수들과 구단의 걱정인데 관중들이 헛물을 켜는 부분이 있어요. 관중이 보는 게 저 위니까 밑을 볼 생각을 안 하는 거죠. 텔레비전으로 유럽 축구만 보다가 우리나라를 보면 재미없게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경기장을 찾아서 우리나라 게임을 보면서 유럽이랑 비교할 게 아니라, 우리의 장점을 찾아봐야 해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플레이를 하는 팀이 분명 있거든요. 그리고 유럽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우리는 우리만의 장점이 있으니까 그런 부분을 눈여겨보면 좋겠어요.”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제자들을 위해 그는 제자 양성에 주력을 하고 있다.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해야 해요. 제자들이 더 잘될 수 있게끔 많은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고, 저 역시 좋은 제자들을 배출하도록 힘써야겠죠, 우리 지도자들이 더 한국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회의를 하고 양성을 위해 새로운 움직임을 보일 때 인 것 같네요.”

 

지도자가 된 그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선수의 눈에서, 지도자의 눈에서 축구를 바라보고 있다. 축구발전을 위한 그의 노력은 하나하나 빛을 밝힐 것이다.

 

왕년의 득점왕들이 한자리에 모이는황금발이라는 모임이 있다. 그 모임을 통해서도 후배 양성을 위해 그는 노력하고 있다.

 
황금발 모임이라고 골든 슈즈를 나눠줘요. 기존의 득점왕들이 모이는 자리죠. 1년에 한번씩 모이는데 오는 12 1일 날 모임을 가져요. 득점왕 중에서도 용병은 제외하고 토종 우리나라 사람만을 기본으로 해요. 요즘 용병이 득점왕을 하다보니까 이어나가질 못해서, 2위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는 우리나라의 득점왕이니까 영입을 추진하는 쪽으로 작년에 회의를 했어요. 많은 선수를 영입할 수 있도록 앞으로 그런 제도를 많이 만들어갈 생각이에요. 올해는 우성용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겠죠? 저희가 모이면 후진 양성을 위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래서 수원 경수유소년클럽의 축구 꿈나무를 대상으로 클리닉을 열기도 했어요. 후진 양성위해 힘쓰고 있죠.”

 

그는 자신의 손으로 한국 축구를 이어나갈 큰 재목을 만들고 싶다. 자신이 뛰었던 곳에서 그 행복을 누릴 제자가 단 한명이라도 나온다면 그는 지도자로서의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포항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사진과 이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진을 봤다는 말에바가지머리 밉죠? 예전엔 유행이었어요.’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러 프로팀이 있지만 그래도 그중에 최고 알차게, 화려하게 팀을 일구고 있는 프로팀이 아닌가 싶어요. 포항은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도 꽤 많으세요. 그래서 그렇게 유지되어 올 수 있는 것 같아요.”라며 포항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냈다.

 

그의 좌우명은 至誠開途(지성개도-지극한 정성을 쏟으면 길이 열린다)이다. 그는 지극 정성으로 이 길을 열어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맛본 최고의 순간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그의 지극한 정성은 곧 제자들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빛을 발할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보자. 그리고 그의 좌우명과 같이 한국축구도 지극한 정성을 쏟으면 길이 열릴 것이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저작자 표시
신고

'K리그의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레전드 - 박태하  (0) 2012.01.07
K리그 레전드 - 임근재  (0) 2012.01.07
K리그 레전드 - 최상국  (0) 2012.01.07
K리그 레전드 - 오연교  (0) 2012.01.07
K리그 레전드 - 한문배  (0) 2012.01.07
K리그 레전드 - 함현기  (0) 2012.01.07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115,573
Today : 0 Yesterday :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