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된 후, 챔피언이다 - 최대식

최대식 센터링! 황선홍 헤딩~ ! 2-1 역전입니다!”

1994 10 11일 일본 히로시마 스타디움. 이 날은 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의 8강전이 벌어졌다. 그것도 숙적인 대한민국과 일본의 맞대결. 경기 전 내린 이슬비로 그라운드는 촉촉이 젖어 있었고, 울트라 니폰을 비롯한 2만여 일본 관중의 일방적인 푸른 물결이 거세게 몰아쳤다.

심리적인 추가 움직였을까. 우리는 94 미국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결승골을 헌납했던 미우라 가즈요시에게 또 다시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전반을 마친 대한민국은 후반전에 필승의 각오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하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홍명보를 대신하여 전반전에 교체되어 투입된최대식의 발끝이 범상치가 않았다. 후반 8분 당시 신예였던 유상철의 동점골을 기점으로 최대식의 측면 플레이가 일본 수비진을 당황시켰다. 결국 후반 33, 최대식한정국과의 스위치를 시도하며 절묘한 크로스를 올렸고, 황선홍의 헤딩골을 이끌어낸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승리를 예감할 무렵. 그러나 후반 41분에 이하라의 기습적인 중거리슛을 허용하며 2-2 동점을 허용한다. 그러나 극적인 한-일전의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한 복선이었을까? 로스타임이던 후반 46, 이번에도 최대식의 크로스를 이어받은 황선홍이 이하라로부터 패널티킥을 이끌어내며 3-2의 극적인 역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일본의 중계 캐스터가 2년 전인 92년 다이너스티컵 결승전에서 비가 내리면서 일본이 우승했다며, 승리를 예감하는 발언조차 무색해지며 만들며 일본 열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역대 한-일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의 하나였다.


2007년 9월 3
의정부의 경민정산공고 축구부 훈련장. 벌써 13년이라는 시간은 흘렀지만 94년 히로시마의 숨은 MVP인 그의 모습을 오랜만에 찾아볼 수 있었다. ‘최대식’. 바로 그였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랜만에 프로축구 팬들을 접하게 되니까 반갑고 설레입니다

현재 경민정산공고 감독을 맡고 있는 최대식은 때마침 훈련을 지휘감독하고 있었으며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리고설레 인다는 표현을 하며 K리그의 전설에 선정된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에서달콤, 살벌했던축구 인생여정을 오랜 시간동안 들을 수 있었다.


확고한 목표, 그리고 과정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대식은 부모님과 두 명의 형을 두며 막내로써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형들과 줄 곧 어울리며 남다른 우애를 쌓았고, 인생에 있어서 멘토자로서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축구라는 삶의 인연도 형들에게서 이어받았다고 한다.

축구는 사실 형이 권유를 해서 시작을 했죠. 동네에서 축구를 할 때도 남들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물론 형들도 축구를 했었는데 막내인 제가 진정 축구의 길로써 걸어오게 된 것이죠

함양군의 안의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최대식은 처음 축구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부모님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당시 만해도 축구로써 무엇인가를 이룩해보려는 농익은 목표보다는 단순히 축구 자체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엿본 감독은 계속적으로 축구의 길을 권유했고, 그만 두려했던 최대식의 마음속에도 작은 축구공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점차 성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격형 미드필드 자리에 있었어요. 그 자리는 성인 축구에 와서도 변하지를 않았죠. 그 당시에는 남보다 덩치도 큰 편이었고, 축구를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안의 중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감독님은 26살의 아주 젊은 분이셨는데, 아주 열정적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저희들에게 쏟아주셨죠. 이날까지 많은 스승이 저에게 있었지만 어찌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세요. 감사드리는 면도 많구요. 지금은 함양에서 노후를 즐기고 계신데 연락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의 전국 소년 체전 등에서 공격형 미드필드로써 자신의 진가를 알린 최대식은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마산의 창신공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선뜻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춘기에서 올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갈망 등이 그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선택의 기로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축구 인생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고등학교에 오면서 이제는 축구를 통해서 성공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죠. 여기까지 온 거 헛되지 않게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을 했어요. 결국 창신 공고로 갔는데 처음에는 부모님 생각도 나고 타지 생활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목표를 확고히 갖고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도 생겼어요

최대식의 첫 번째 목표는 대학 진학. 그것도 고려대학교였다. 한창 꿈 많은 시절의 본 고려대학교의 빨간색 줄무늬 유니폼과 호랑이 마크는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때 공격형 미드필드로 인정을 받아가면서 고려대학교로의 진로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실 대학 진학할 때에 타 대학교와 문제가 생기면서 우여곡절도 있었어요. 물론 잘 해결이 되었고 목표로 했던 곳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때 선배님들중에는 대표 선수가 많았어요. 특히 83년 세계청소년 축구 선수권에서의 4강은 잊지 못할 일이었죠. 저희 선배님들이 멤버에 많이 포진되었었는데 정말 멋지고 부러웠습니다
 
멕시코에서의붉은 악마신드롬과 함께 4강신화를 일으켰던 83. 그것은 대학 신입생이었던 최대식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으며 대학 선배들의 활약이 그토록 선망적이었고, 목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동기부여가 되었다.

대학교에서 대회에 나갔을 때는 신입생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베스트11에 포함이 되어서 뛸 수 있었어요. 물론 부담도 되고 선배들과 함께 뛰니까 긴장도 많이 되었죠. 그런 순간에도 감독님과 선배들이 많이 믿어주셨기에 자신감을 갖고 플레이를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상치 못한프로의 어두운 첫 걸음, 그리고 운명적인 세렌티피티

--고의 눈에 띄는 활약으로 고려대학교의 목표를 이루었던 최대식의 프로행은 역시 순탄했다. 당당히 대우로얄즈의 지역우선지명을 받으며 고대하던 한국프로축구 K리그로 입성한다.
 
일단 자신감은 있었어요. 대우로얄즈에 입단하면서 저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실망을 불러일으켰던 원인이 되었던 것 같아요. 프로에 와보니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고, 첫 시즌부터 출전 기회를 잡지를 못했어요. 프로에 오기 전에는 저의 능력이면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감과 좌절감을 갖게 되었고, 심각하게 고민까지 하게 되었죠

화려하게 프로에 입단하면서 절정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던 최대식에게는 뜻밖의 시련이었다. 첫 시즌부터 벤치신세를 면치 못하며 출장이 적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의 기량에 대한 의구심과 좌절감만 뇌리에 맴돌았다. 자연스레 의욕은 꺾이게 되었고, 축구 인생에 있어서 쓰디쓴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은사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그 분들은 그렇게 심각하다면 차라리 프로에서 실업에 있는 안전한 은행 팀으로 가라는 말까지 들었어요. 정말 그만두려는 고민을 하게 된거죠. 내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혹은 내 실력이 이거 밖에 안 되면 축구를 정말 접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 이었어요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역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 있는 부모님들과 형들이었어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잘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해주시면서 마음을 고치게 되었죠

가족들의 사랑은 대단했다. 막내 아들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큰 용기를, 좋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다면 호통도 마다않는 진심어린 사랑 속에서 최대식은 평생 같은 핏줄들의 힘을 지금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감사하고 있었다.

새롭게 축구를 다시 한번 해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럭키 금성으로 이적을 하게 되었어요. 우선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대우에서 2년 만인 1990년에 새 둥지를 틀었죠. 다행히 그곳에서 고재욱 감독님을 만나서 새로운 동기 부여를 얻을 수 있었어요. 운동장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회를 많이 주셨고, 저는 기회를 잡으려고 했고 잘 맞아떨어졌어요. , 럭키 금성과 고재욱 감독님, 선배님들, 후배들과의 호흡이 게임 마다 아주 잘 맞았어요

가족의 격려 속에서 그의 축구는 럭키 금성에서 새롭게 꽃 피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적 첫 해인 1990년에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1990년 시즌을 앞두고 축구 전문가들이 하위권으로 분류한 럭키 금성은 최대식을 비롯한 윤상철, 최진한 등의 활약 속에서 대우 로얄즈를 제치고 두 번째 K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특히 이적생 최대식은 친정팀을 상대로 자신의 진가를 선보이며 드라마틱한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다. 더군다나도움왕에 오르며 K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친했던 선수요? 아무래도 90년도에 럭키 금성에서 함께 활약하면서 득점왕을 거머쥐었던 윤상철 선수죠. 눈빛만 봐도 통했어요. 아주 영리한 선수였고, 볼을 잡으면 위치만 봐도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죠. , 득점왕이나 도움왕을 수상한 것이 중요한 것 보다는 서로간의 운동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꿈에 그리던태극마크’, 그리고 애증어린단상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럭키 금성으로의 이적은 그에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선물해주었다.
 
프로 선수에게 대표 선수는 꿈이지 희망이잖아요? 선수들이 유럽 진출도 원하지만 일단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죠. 첫 성인 대표팀으로 발탁이 되었을 때 너무 좋았죠. 물론 그 이후에 주전으로 뛰는 도전이 있었지만 일단 팀을 옮겨서 선발이 되었다는 것이 큰 영광이었고 책임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94 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한 최대식은 국내에서 펼쳐진 평가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주전을 꿰차는 듯 보였다. 그러나 기쁨과 환희도 잠시, 그에게 또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인생의 아픔이 다가왔다. 바로부상이었다.

굉장히 가슴이 아픈 이야기예요.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이 되어서 평가전에서 최고였다는 말을 들으면서 부각이 되었는데 부상과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면서 정작 본선에서는 한 게임도 나가지 못했어요. 아직까지도 가슴 속에서 아쉬움 그 이상의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선수가 판단할 수는 없어요. 선수를 관리하고 지도하는 코칭 스태프가 판단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그 분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선수로써 꿈이 월드컵 출전이고 세계 무대에서 기량을 보여주는 것인데 좌절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실망스러웠지만 제가 부족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생의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릴 수 있을까. 한 순간의 환희와 기쁨은 최대식에게 작게나마 불운을 안겨다주곤 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달랐다. 바로 승부사기질이 있는 선수였다. 슬럼프나 혹은 자기 플레이에 대한 주눅이 들 법도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이 뒷받침했다. 그리고 바로 월드컵 끝난 직후 열린 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못다 이룬 한을 품어냈다.

제가 생각해도 잘 이겨낸 것 같아요. 꼭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반전을 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의지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당시 한, 일전에서 결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게임 자체도 재미가 있었어요. 우리가 먼저 선제골을 허용 하고 두 골을 넣어서 리드를 하다가 일본 이하라 선수에게 중거리슛을 허용했죠. 그렇지만 ()선홍이가 저의 크로스를 받아서 로스 타임 때 패널티킥을 얻었어요. 극적이었죠. 일본 축구 팬들도 가장 기억에 남을 거예요

·일축구 애증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최대식은 예선부터 줄 곧 주전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진가를 선보였고, 8강전이었던 일본전에서히로시마 침몰을 이끌었던 결정적인 활약을 하며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시합을 마치고 들은 이야기인데 ()상철이가 골을 넣었을 때 심장 마비로 돌아가신 국내 팬이 계시더라구요. 결국 모두 빈소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그런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 축구가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 제왕으로 군림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사실 90년대 한·일전은 2000년대 한·일전과 비교했을 때 흥행적인 요소가 더 강했다. 현재는동반자를 운운하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90년대보다 비교적 한·일전의 명승부가 자주 연출이 되지 않자, ‘라이벌로의 회귀를 운운하는 여론도 있을 만큼 달라졌다.

동반자라는 것은 서로 같이 가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서로 발전을 한다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발전과 동반은 의미가 다르죠. 시스템이나 시설과 같은 여건이 일본이 앞서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국민성이 있고, 축구 선수들의 근성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우리의 열정이고 뜨거운 피죠. 같이 가는 것은 성장으로의 의미는 좋지만 어떤 길은 같이 갈 수 없어요. 분명히 승자와 패자는 있습니다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본 최대식은 아시안게임을 경험한 이후 국내에 돌아오면서 플레이에 눈이 띄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온 과거의 화려함보다 더욱 값진 소중한 추억과 화려함을 느꼈다며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오후 5가 지날 무렵, 인터뷰를 하고 있던 사무실 주위에 훈련을 마친 경민정산공고 선수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 아무리 축구를 하는 선수이지만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들뜬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들도왁자지껄하루의 보람된 양식을 얻은 듯 들뜬 목소리가 연일 들려나왔다.
그리고 최대식의 축구선수로서의 마지막 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J1’ 드림, 그리고 네덜란드 행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은연중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며 축구에 눈을 뜬 최대식  그 이후 두 시즌 뒤인 96년에 일본 J-리그 진출을 타진했다.

 

럭키금성(현 FC서울)에서 96년도에 J리그에 오이타로 이적을 했죠.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당시에는 제가 일본 진출을 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축구가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요구하는 것에 매력도 느꼈고, 직접 가서 축구를 해보고 싶었어요. 흔쾌히 구단에서 보내주셨고, 새로운 축구를 접할 수 있게 해주셨죠. 저는 항상 우리 럭키금성(현 FC서울)이 친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비록 대우 로얄즈에서 이적을 했지만 제2의 축구 인생을 열 수 있게 해준 구단이기에 잊을 수가 없죠

당시 럭키금성의 최대식 J리그 진출은 전력에 아쉬움을 더할 수 있었지만 6년간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의 뜻을 존중하여 선수 말년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J리그 오이타로 이적을 했다.
 
오이타는 94년에 출범한 구단으로 당시 문정식씨가 초대 감독으로 활동을 했고, 97년부터는 박경호가 기술고문에서 감독으로 올라서며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일본 프로축구팀이었다. 당시 J2리그 소속으로 사상 첫 J1 승격을 노리고 있던 터라 용병인 최대식의 활약은 말 그대로 팀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는 기폭제가 되기 바랄 뿐이었다.

J리그 진출 4년차였던 99시즌. 용병이었던 최대식은 당당히 주장 완장을 차고 선수 생활을 말미를 향한 불꽃 투혼을 일본 땅에서 선보이고 있었다. ‘의지의 한국인의 빛깔나는 주장 완장 속에서 하나가 된 오이타 선수들은 사상 첫 J1 진출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흥분의 도가니가 계속되었다.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승점 62점으로 FC 도쿄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선 오이타는 마지막 상대인 당시 7위 팀의 몬테디오 야마가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다면 자력으로 J1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최대식은 당시 가시와 레이솔에서 활약했던 홍명보 현 대표팀 코치로부터함께 J1에서 뛸 수 있도록 잘하라는 격려 전화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나섰다고 한다.

드디어 최종전이 열리는 그 날. 몬테디오를 상대로 전반전을 0-0으로 마친 오이타는 드디어 후반전에 선제골을 올리며 스타디움은 열광의 함성으로 젖었다. 그리고 후반 45. 전광판 시계가 멈추었고, 최대식은 마지막 공격을 하기 위해 공을 잡고 상대 골문을 향해 회심의 중거리 슛을 날렸다. 박경호 감독도 J1 승격을 위해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운이 찾아왔다. 최대식의 슈팅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오며 상대 선수에게 전달되었고, 폭팔 적인 드리블로 오이타의 문전으로 달렸다. 당황한 오이타 수비수는 30여 미터 지점에서 파울을 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몬테디오의 선수가 직접 찬 프리킥이 오이타 골키퍼인 고야마의 펀칭 미스로 동점골을 허용했다. 야속한 심판의 휘슬이 불리며 결과는 1-1 무승부. 오이타의 승점 1점차로 뒤지던 FC 도쿄가 니가타에 1-0 신승을 거두며 J2리그 초대 챔피언인 후론타레 가와사키와 J1 진출권을 따냈고, 오이타는 꿈에 그리던 J1 드림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승리라는 것은 의외성이 있잖아요.. 주장을 맡았던 99년 시즌에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승리를 거둔다면 사상 처음으로 J1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죠. 그러나 최종전에서 우리가 1-0으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 로스 타임에서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J1 승격이 무산되었어요. 물론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을 갖지는 않죠...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죠. 그렇지만 승격을 시켰다면 마음은 편했겠지만 최선을 다한 부분은 매스컴과 축구팬들이 모두 알아주셨고, 박수를 쳐주셨어요


반드시 오이타를 J1으로 승격시키고 축구화를 벗겠다던 최대식의 꿈은 아쉽게 무산되었지만, 최선을 다한 플레이와 주장 완장을 차며 팀에 헌신한의지의 한국인에게 팬들은 무한한 격려와 박수로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5년 동안 활약하면서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고, 구단에서도 큰 도움을 주셨어요. 마지막에 J1으로 승격을 했다면 마음이 더 좋았겠지만 혼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모든 선수들이 함께 해야 되요. 다행히 그 이후에 우리 후배들이 못다한 꿈을 이루어주었어요. 그렇기에 당시의 기억이 헛된 노력은 아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긍심을 갖고 떠났습니다
 
오이타는 최대식에게 또 하나의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지도자 연수를 원하던 그에게 구단에서는 실력 있는 지도자들과의 커넥션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알크마르로 2년간의 연수를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2년간의 유럽 선수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오이타에서 저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즉 지도자로써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주셨어요. 당시 지도자 연수를 관리하는 분이 계셨는데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AZ 알크마르로의 2년 연수를 보내주셨죠. 저에게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2년 동안 직접 코치의 일을 함께 하면서 운동도 했죠. 오이타에서 큰 경험을 얻게 해주셨고, 선진 축구를 볼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국내 팬들에게는 스타를 보기위해 경기장을 찾는 것이기에 아쉽죠. 그렇지만 선수들이 J리그로의 진출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금전적인 고려도 있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 자신의 기술을 보여줌으로써 어쨌든 국제적으로 우리와 개인을 알릴 수 있다는 것에서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국내 여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망주 혹은 대표 선수들의 J-리그 진출에 대한 의견에 대해서 최대식은 국위 선양과 개인의 뜻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먼저 밝히며 긍정적인 시각을 밝혔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의 경험담과 아시아 선수들의 빅 리그 진출의 교두보에 대한 시각을 들을 수 있었고, 최근 페예노르트에 진출한 후배 이천수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두 시즌을 직접 지켜보면서 확실히 수준의 차이는 느꼈어요. 실제로 프로에서 몸을 담고 있다가 불과 몇 달 되지 않아서 네덜란드로 갔지만 지켜보니 유럽 선수들의 기술과 스피드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네덜란드 리그가 빅리그 진출을 위한 교두보라는 것은?)
교두보라는 것은 확답을 못해요. 저는 이영표, 박지성 선수의 능력을 보면 영국으로 바로 진출을 했어도 통하지 않았을 까하는 생각을 해요. 물론 유럽에서의 경험을 통해 익숙해진 점은 맞겠지만, 답은 없어요. 그곳에서 돌아온 선수들도 있습니다

 

지도자로써의 첫 제자들과 훈련 이후에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

이천수 선수에게는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철저한 자기준비와 관리, 그리고 자기의 팀이라는 인식을 더욱 갖는 것이죠. 준비된 자는 성공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준비가 없다면 절대 간다고 말해서는 안되죠. 선배로써 이천수 선수가 꼭 성공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후배들이 더욱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고, 스페인에서의 실패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욱 큰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도자의 꿈, 해외 진출 1호를 꿈꾸며

“2003년에 네덜란드 연수를 다녀오고 파주 NFC 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협회 관계자께서 경민정산공고를 소개해주면서 감독직으로 바로 오게 되었어요

2003. 네덜란드 연수를 마치고 고국 땅을 밟은 최대식은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에서 지도자 연수를 밟으며, 새로운 축구 인생을 향한 본격적인 담금질에 나섰다. 숨가쁘고 애환을 간직한 소중한 선수 생활을 정리하며 이제는지도자의 위치를 향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인연은 경민정산공고였다.

제 눈에 선수들이 맞추는 것보다는 제가 맞추려고 하죠. 한 선수의 능력이 5라면 10에 맞출 수는 없어요. 5인 선수에게 10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0에 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성적 보다는 선수들이 발전하는 기술과 피지컬을 강조하고 있어요

전설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숙소를 올라가던 중 은연중 문 밖의 눈에 번쩍할만한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된 후 챔피언이다바로 이것이었다. 들어가는 문은 코 앞이었지만 한참을 그곳에 서서 문구를 응시하며 사뭇 잠시간의 묘한 느낌과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인성이 잘못된 선수는 야단을 치게 됩니다. 앞으로 축구가 우리에게는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죠. 그렇지만 인성이 어긋난다면 어렵습니다. 축구와 인생은 같아요. 인성은 똑바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숙소 앞에 있는 문구도 학교장님과 제가 같은 생각으로 만들게 되었고, 지금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3년 계획을 잡았습니다. 3년 동안 팀을 어느 정도 만들어놓고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선수들과 같이 생각을 하다보니까 욕심이 생기고 정을 쉽게 뗄 수가 없더군요. 고민이 되요. 언젠가는 가야할 시기가 오면 가야겠지만 어떻게든 우리 선수가 잘 되고 팀이 명문이 될 수 있는 기반을 세우고 떠나고 싶어요

선수에서 감독으로의 최대식. 그의 꿈은 어느 감독이나 꿈꿀 수 있는 팀의 성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지도자로써의 목표는 분명히 있습니다. 역시 모든 지도자들이 마찬가지지만 프로 팀을 지도하고 마지막에 대표팀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지도자들이 유럽으로 진출한 사람이 아직 없죠? 능력이 거기까지 될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현재는 불가능할 수 있겠지만 제가 아니더라도 후배들이 유럽 빅 리그에서 활약하는 감독이 나와 줘서 축구를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아시아지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런 지도자들이 있고 선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축구는 90분의 미학이다. 90분 속에서 수 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인생의 굴곡과 여간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의욕적인 초반부에서 시작하여 사점을 넘는 숨가쁜 고통의 순간과 자기와의 싸움. 그리고 후반기의 경기에 몰두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 그리고 막판으로 흘러가며 지친 몸을 이끌고 투혼을 불사르는 모습. 그렇다 인생과 다르지 않다.

최대식의 선한 눈빛과 애환 어린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승부욕을 갖고 있는 승부사였으며, 원대한 꿈을 갖고 있는 비전을 갖고 있는 인물. 그리고 90분의 미학을 실천한 아름다운 선수였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의 꿈은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축구는 그에게 저 머나먼 수평선 너머의 인연을 꿈꿀만한 인생의 그림자이자 동반자가 아닐 까 한다. 감독 최대식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또 다른 이유이다.

“K리그보다는 원천적인 것부터 생각을 하고 싶어요. 먼저 초--고와 기타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분들이 더욱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사실 그런 분들이 잘 계셔야 K리그가 있고, 대표팀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한국 축구도 먼 앞날을 바라보고 어린 선수로부터 계획적으로 100년 대계는 아니지만 계획을 잘 세워서 어린 선수부터 지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축구의 미래입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저작자 표시

'K리그의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레전드 - 김현태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김동해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최대식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임종헌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손형선  (0) 2012/01/09
K리그 레전드 - 이영익  (0) 2012/01/09
Posted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 PREV : [1] :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 [125] : NEXT ▶

BLOG main image
by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보기 (125)
사진으로 보는 한국 축구 (4)
K리그 역사 바로 알기 (9)
K리그의 전설 (42)
K리그 꿈의 구장 (2)
축구인 인터뷰 (68)
K리그 역대 순위표 (0)
K리그 역대 수상 내역 (0)
K리그 역대 엠블럼 (0)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39,630
Today : 0 Yesterday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