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득점왕 임근재의 파란만장 K리그 이야기

1992, K리그에 혜성 같이 괴물 신인이 등장했다. 지금으로 치면 박주영이 부럽지 않을 그런 괴물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이 괴물신인은 K리그에 데뷔하던 해 득점왕을 차지해 버렸다. 또 베스트11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골 세레머니로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괴물 신인의 K리그 역사는 채 5년을 넘기지 못했다.

K리그를 떠난 그는 연예계에 발을 담가 잠시 매니저 생활을 하기도 했다. K리그 역사상 신인으로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빨리 K리그를 떠난 그의 이름은 바로 임근재.

2007년 현재, K3리그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장차 K리그 재 입성을 노리고 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K리그에 사연이 많은 임근재 감독의 파란만장한 K리그 이야기를 엿들어 보자.


부상 한 번 없던 축구인생, 천생 축구인으로 태어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했어요. 남산초등학교 태권도부로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었던 충무초등학교랑 축구시합을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처음에 경기를 하러 가서 5:0으로 지고 왔다는 거에요. 두 번째 경기를 할 때는 사실 제가 장충체육관에 가서 태권도 시합을 보고 있어야 했었는데 몰래 충무초등학교와 축구경기를 하러 갔어요. 그때 2:2로 비겼어요. 그런데 2골을 제가 넣은 거죠. 그 자리에서 충무 초등학교 감독님이 저한테 축구 해 볼 생각 없느냐고 물으셨죠. 그렇게 해서 태권도를 5년 정도 하다가 5학년 말에 충무초등학교 축구부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그에게 축구는 전부였다. 5년 동안 정들었던 태권도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뿌리치고 축구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한 것이다. 여느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축구를 하다 보면 분명 슬픔과 기쁨이 함께 공존할 터. 학창시절 그의 축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축구를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대신 그 당시만 해도 선배들이 괴롭힌 적도 많았고 해서 힘들었던 적은 있었죠. 축구를 20년 넘게 했지만 코뼈 한번 부러진 것 빼고는 수술 한번 한 적 없어요. 제일 힘들었을 때가 있었는데 91년 대학교 때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을 열심히 뛰었죠. 그래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연령제한 나이가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예선까지는 잘 뛰다가 본선에는 못 뛰게 되어 버렸어요.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면 힘들었던 때였죠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 3관왕, 고등학교3학년 때 추계대회 준우승, 서울시대화 우승 등 경기를 하기만 하면 이기는 경우가 많아서 그때는 상당히 즐거웠죠. 그때가 몸 상태나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죠. 가장 인상 깊은 경기는 고등학교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결승에서 결승골 넣고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뻤어요.

학창시절 축구만을 하며 살아온 그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함께 운동하며 때론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였던 그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더불어 그가 존경하는 지도자의이야기와 학창시절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자.

서정원(현 오스트리아 SV 리트)과 가장 친해요. 청소년 대표 때도 같이 운동 했고 지금도 자주 통화하고 만나고 있어요. 라이벌 이라고 하면 서정원이나 김병수(현 포항스틸러스 코치)같은 친구들이 있는데 연세대 재학 시절 이 친구들이 고려대 다니던 적수였거든요. 하지만 친구이자 맞수였죠. 같이 올림픽대표에 나가면 친 형제처럼 잘 지내곤 했죠. <내 맞수는 누구다> 이런 것은 없어요. 동료이자 친구일 뿐이죠

그 동안 저를 가르쳐 주신 모든 분들을 존경해요. 고재욱( LG)감독님이 특히 많이 배려해 주셔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학창시절에는 송영욱감독(현 동신중 감독)에게 처음 축구를 배웠어요. 가장 기억에 남고 존경합니다

흔히 <>이라고 하죠. 계속 <>으로 활동하다가 센터포드도 하고 결국 수비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많이 배려를 받아서 수비에 대해 부담을 덜고 공격 쪽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공격하는 포지션은 모두 한번씩 맡아서 활동했어요. 스피드가 뛰어난 것은 아닌데 순발력이 좋아서 간발의 차이로 많은 이득을 봤죠. 문전에서 예측하는 플레이를 많이 해서 제가 골을 넣은 것이 대부분 멋있게 넣었다기 보다는 흔히 말하는 <주워 먹는 골>이 많죠.(웃음)


괴물신인의 탄생, 신인 득점왕의 괴력
갓 프로에 입문한 신인이 득점왕을 차지했다. 굉장한 소식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런 역사가 탄생되지도 못할 번 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K리그 드래프트의 순간에서부터 첫 프로 데뷔 경기, 그리고 신인왕을 차지하기 까지 그의 파란만장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로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드래프트를 하는데 유공에서 1순위로 뽑힐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래프트 당일 날 석간신문에서 LG (현 FC서울) 3순위 지명이 되었다는 거에요. 자존심이 무척 많이 상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드래프트에 참가 안하기로 했던 황선홍, 홍명보가 새로 들어오면서 모든 예상이 백지화 되어 버린 거죠. 그 바람에 LG 3순위로 입단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서 프로로 안 가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나중에 마음을 바꿔 입단했어요. 당시 고재욱감독님이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막상 프로에 가니 좋은 형들이 많았어요. 공격진이 좋아 제가 잘했다기 보다 찬스가 많이 생겼어요. 예측했던 플레이가 잘 맞아 떨어져서 신인이지만 운이 좋게 득점을 많이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어요

사실 신인으로 경기에 선발되는 것조차 힘들죠. 데뷔하던 그 해 동계훈련부터 골을 많이 넣었어요. 매 게임당 1골씩은 넣었죠. 연습경기에서 골을 많이 넣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고재욱 감독님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 배려도 많이 해줘서 모든 것들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첫 게임의 기억은 아직도 아련합니다. 개막하기 전부터 <개막 축포는 누가 넣나> <임근재가 넣나>하는 그런 내용의 기사가 많이 나왔어요. 주변의 기대가 굉장히 컸죠. 그런데 첫 게임에서 슈팅 하나 못했어요. 워낙 매스컴에서 기사화 되어 크게 나가니깐 상대팀에서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를 너무 터프 하게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볼 한번 제대로 못 차보고 첫 경기가 지나버렸어요. 결국 3번째 경기에서 골을 넣었는데 첫 번째 경기에서는 슛도 못하고 두 번째 경기에서 1개인가 2개 밖에 슛을 못했어요. 그때 프로에서 연습이랑 실전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죠
 
지금이야 심판들이 공격수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경고와 퇴장카드를 많이 주지만 그때는 퇴장 상황이면 경고고 경고 상황이면 구두로 주의를 주는 현실이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씩씩거리면서 말로 위협하고 어떤 선배는 경기 내내 그냥 팔짱을 끼고 다녀요. 그 정도로 너무 수비를 심하게 해서 어쩔 때는 선배인데도 짜증을 많이 내고 그랬죠


모든 추억은 기억으로 가슴 한 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법. 득점왕을 차지할 당시의 생생한 느낌과 기분을 물어보았다. 15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쁨은 생생하기만 했다. 1골 차이의 득점왕 경쟁을 두고 벌인 당시의 불꽃 튀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득점왕이었지만 저는 신인왕을 받지는 못했어요. 신태용이 신인왕을 탔어요. 명보형은 포항제철이 우승하면서 최우수선수상을 탔구요.

득점왕도 초반에는 2위 그룹하고 2배 차이가 났어요. 계속 경기를 하다 보니 두 달 반 동안 한 골도 못 넣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맥가이버 머리>도 하고 막판에는 삭발도 하면서 분위기 쇄신을 계속 하며 경기에 임했어? 막판에 결국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무슨 일이든지 1등이 존재하지 2등은 없잖아요. 제가 득점왕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역대 득점왕에도 이름이 오르고 하잖아요. 당시 2등하고 차이는 정말 박빙이었죠. 김현석이랑 신태용이랑 각각 한 골 차이로 제가 득점왕이 됐죠. 막판까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신인이면 이 정도면 됐지>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는데 결과가 좋았던 것 같아요

92년도 마산에서 대우로얄즈와 경기를 할 때 해트트릭을 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초반에 득점왕 경쟁을 하다가 제가 5골을 넣고 2위 그룹이 4골인가를 넣었는데 그때 해트트릭을 하는 바람에 격차도 많이 벌어지고 좋았어요. 당시 스포츠서울에서 매 경기마다 평점을 메기는데 제가 9점을 받은 거에요. 9점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점수거든요. 제일 잘해도 8.5점 정도를 주곤 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스포츠서울에서 평점을 매긴 역사상 처음으로 평점 9점을 주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정도로 칭찬을 많이 받았던 경기라서 그 경기가 지금도 많이 기억에 남아요


5년간의 K리그 활동, 그리고 방황기
천재는 수명이 짧다고 했던가. 혜성같이 등장해서 득점왕을 차지한 이 신인은 3년 차 까지만 이렇다 한 활약을 보여주었을 뿐 그 이후로는 팀을 옮겨 한 자리 수 출장만 기록 했을 뿐이다. 결국 5시즌 만에 K리그를 떠났다. 인생의 전부가 축구였던 그에게 축구를 떠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든 방황기였다.

LG에 있다가 고재욱감독님이 떠나시고 조영증감독님이 오셨는데 조영증감독님은 크고 힘있는 스타일을 좋아하셔서 저랑은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외국으로 가려고 했어요. 마음고생이 좀 심했죠. 싱가폴에 가려고 했어요. 그때는 영어라도 배우려는 마음이었죠. 나중에 뭘 하더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싱가폴에 세미프로가 생겨서 그쪽과 진행이 잘 되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일이생겨 제가 중간에 붕 뜨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정해성(당시 포항코치)코치가 포항이 공격진도 강하고 하니깐 찬스가 많이 날거라며 오라고 하는거에요. 하지만 허정무감독은 거친 경기를 펼치는 스타일이라 서로 안 맞다 보니 출장기회가 없어져 버렸죠. 그때는 내가 여기 아니면 축구 못하냐 하는 마음으로 포항을 나와버렸어요.

 

좋은 기록으로 신인부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기에 방황은 더 고통스러웠다.
96년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바로 K리그를 떠나게 되었어요. 97년에는 가수 이승철이 고교선배인데 그의 로드매니져가 공교롭게도 LG있을 때 후배였던 거에요. 그 후배가 승철이형에게 부탁해서 같이 살자고 말한 거죠. 그래서 1년간 같이 살고 움직이게 되었어요. 정식으로 매니저는 아니었지만 같이 공연장도 따라다니고 방송국도 따라다니면서 반 연예계 활동을 한 샘이죠. 정식으로 매니저를 하게 된 것은 안상수(수와진)씨 매니저 예요. 처음엔 축구 하던 놈이 뭘 아느냐고 거절했지만 결국 매니저 명함도 파고 양복도 입으면서 세 달 동안 같이 다니면서 동거동락 했어요. 그때 욕을 많이 먹었어요. 선배들이 축구선수면 지도자를 하던지 축구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많이 혼났죠. 3개월 후에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대신고 코치자리를 맡게 되면서 축구를 떠난 제 오랜 방황기가 결국 끝나게 되었죠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축구. 오랜 꿈이었던 프로에 진출하고 첫 해 득점왕을 차지한 그에게 K리그는 그의 오랜 꿈이자 희망이었다. 오랫동안 꿈 꿔온 K리그였기에 아쉬운 마음도 컸다.

96년도에 그만두고도 프로 경기를 보거나 어디서 K리그 소식이라도 들으면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어요. 그래서 K리그를 떠난 뒤로는 아예 TV를 안 봤어요. 조금 더 참고 오래 축구 하는 건데 하는 후회는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운동을 더 했다면 대신고 감독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게 내 운명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은 있지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거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첫 발을 뗐던 K리그무대. 성공적으로 첫 데뷔를 마쳤지만 계속되는 시련이 그를 힘들게 했다. 한창 선수생활을 해야 할 나이. 은퇴 아닌 은퇴를 한 그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방황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다시 축구로 돌아왔다. 모교인 대신고 감독을 맡게 된 이야기 그리고 K3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을 통해 다시 도전하는 K리그 이야기 더불어 그가 생각하는 K리그와 92년도와 비교해 본 현재의 K리그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신인 득점왕이라는 화려한 등장과 함께 시작한 K리그와의 인연은 그에게 너무도 짧았다. 5시즌동안 활약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데뷔와 함께 했던 친정팀 안양LG( FC서울)에서의 세 시즌에서만 활약이 있었을 뿐 이적한 포항에서 두 시즌동안의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포항에서의 두 시즌동안 한 골도 넣지 못했고 출장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였으며 단 2개의 슈팅에 멈춰 있었다. 은퇴 아닌 은퇴를 한 그는 1년간의 방황 끝에 결국 축구로 다시 돌아왔다. 물고기는 반드시 물가에 살아야 하듯 천생 축구인으로 태어난 그였기에 다시 축구로 돌아온 것이다.


인생의 전환기, 모교 대신고 감독 그리고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기까지.
연예계에 잠시 발을 내딛었던 1년간의 방황 끝에 임근재는 다시 축구계로 돌아왔다. 선수로서 데뷔와 함께 반짝 재능을 발휘한 그는 한 팀을 꾸려나가는 감독이자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감독으로 보직변경을 한 것. 보인정보산업고 감독을 거쳐 모교인 대신고 감독을 맡기까지의 이야기와 최근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향후 K리그 입성을 노리는 그의 축구인생 전환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방황하던 차에 보인정보산업고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왔어요. 거기 가면 좋은 선수들 데리고 하고 싶은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리를 옮겼어요. 가자마자 첫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 다음 해에는 준우승만 두 번 했죠. 그러던 중 모교인 대신고 감독이 비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대신고 감독이자 제가 모셨던 최기봉 감독님이 그만두시게 된 것이죠. 보인정보산업고가 환경은 좋지만 모교에 가서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대신고 감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서울 유나이티드는 두 시민클럽이 합쳐 만들었어요. 저는 <진수>의 창단 멤버였죠. 안양LG에 있으면서 창단 멤버였어요. 운동 그만두고 감독도 하곤 했었어요. 자연스럽게 새 팀이 생기면 감독은 임근재가 해야 하지 않겠나 라고 사람들이 말을 하곤 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대수롭지 않게 감독직을 수락하게 된 것이죠.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 늘어난 관심 탓에 부담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는 서울 유나이티드를 통해 장차 K리그 입성으로 프로감독데뷔를 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막상 팀을 맡고 나니 서포터스도 있고 규모와 관심도 커지고 해서 이제는 지면 안되겠다는 부담이 크게 다가오고 있어요.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아요. 쉽게 감독을 허락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근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단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서 축구를 즐기는게 아니라 행정이나 마케팅은 여느 프로팀 못 지 않거든요. 좋은 스폰서쉽도 많이 받고 서포터스들도 창단식 할 때 몇 백명 오고 해서 관심이 너무 커 부담이 됩니다. 사실 올해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 실망하면 안 되거든요. 목표가 K3리그 우승이 아니라 장차 K리그로 올라 가려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선수가 완벽한 것도 아니에요. 우리 팀이 나이가 가장 많아요. 올해 끝나면 선수보강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드래프트에서 프로의 선택을 못 받았지만 능력 괜찮은 어린 선수들과 프로에서 나이가 많아 은퇴한 선수들을 통해 신구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향후 5년 안에는 K리그에 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감독을 할지는 모르지만 서울 유나이티드 초대 감독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혹시 잘 되서 N-리그를 거쳐 프로 감독까지 된다면 그거야 말로 큰 영광이죠.


서울 유나이티드의 선수들 모두는 축구선수라는 직업 외에도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팀을 꾸려나가는 감독으로서 애로사항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각자 직업이 있다가 경기가 있을 때 모여서 하는 거라서 어떻게 강요할 수도 없어요. 베스트가 한번에 호흡을 맞추기가 힘들어요. 운동장도 전용구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어요. 일단 저희 팀이 K리그를 목표로 하는 팀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도 대신고 감독을 맡고 있어서 시합 갔다 오고 하면 많이 힘들긴 해요. 올 해 일정을 살펴보니 대신고 경기와 서울 유나이티드 경기가 겹치는 경우는 1-2게임 밖에 안 된다고 해요. 대신고 일정하고 큰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아요.

얘기를 나누던 중 K리그에서의 경고 이야기로 방향이 흘렀다. 그는 깨끗하고 매너 있는 축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선수시절이나 감독을 맡고 있는 지금도 경고에 대해서는 특히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경고가 1개 뿐 인줄 알았는데 2개에요?(K리그에서 활약하던 시절 단 2개 뿐인 경고얘기를 꺼나자) 경고를 받은 게 울산에서 현대전에 수비가 치고 나가길래 태클을 걸고 나서 일어난다고 발을 들었는데 수비가 걸려 넘어져 버렸어요. 고의가 아니라 일어나려고 다리를 든 것 뿐이었거든요. 학창시절에는 초---대학교 다 합쳐서 경고를 1개를 받았어요. 저는 지금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매너를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어요. 연습게임이지만 경고 받으면 벌금을 내게 해요. 유니폼을 꺼내고 있어도 벌금을 물죠. 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지키게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자기 성질대로 하려고만 하거든요. 경고도 필요한 경고가 있지만 쓸데 없이 심판에게 항의한다거나 고의로 지연을 한다거나 하는 불필요한 경고를 받으면 선수들에게 벌금을 물게 하니깐 선수들도 많이 변하고 팀도 어느 정도 바뀐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너희 애들은 너무 순해>라고 말하는데 게임만 지면 되지 매너는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배출한 K리그를 달구고 있는 제자들.
보인정보산업고와 대신고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수 많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코치와 감독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편도 아니지만 특유의 친근함을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다가선 그는 유독 많은 제자들을 K리그에 배출했다.

대신고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있으면서는 정조국(서울FC), 조재진(일본 시미즈 에스펄스), 조성환(포항), 여효진(광주상무), 구경현(광주상무)을 가르쳤고 보인정보산업고에서는 구자철(제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자철이를 엊그제 제주에서 만났는데 아주 착한 녀석이에요.

이제는 옛날의 득점왕이라기 보다 이제는 정조국, 조재진을 가르킨 임근재로 바뀌었어요.(웃음) 과거의 축구선수라기 보다는 이제 <네 제자 잘하더라> <어제 네 제자가 골 넣었더라> 이런 소리 들을 때가 요새는 제일 기뻐요.

오늘도 ()조국이가 학교(대신고)에 잠깐 왔었어요. 집에 가는 길에 학교 들린다고 왔더라구요. ()조국이가 학교 선생님들 축구 유니폼을 다 맞춰줬어요. 참 마음도 착하고 성품이 좋은 녀석이라서 예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요.(대신고는 매주 수요일 5교시 끝나고 선생님들이 축구를 하는 역사가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조국이나 ()재진이나 다 제자이기 때문에 너무 든든하죠. 이 친구들은 코치로 키운 제자로 기쁘고 감독으로 키운 제자는 구자철이 가장 생각이 많이 나요.

얼마 전에는 ()재진이 일본집에 가서 3일 있었어요. J-리그 뛰는 것을 봤는데 많이 부러웠어요. 그 팀이 제이리그에서 잔디가 최고로 잘 되어있다는데 스타디움 자체가 2만명 규모인데 소리가 밖으로 안 빠져 나가고 맴돌아서 흥을 돋구게 잘 되어있더라구요. 축구경기 자체가 전용구장에 스피드가 있다 보니 재미가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전용구장이 2만석 규모가 딱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식의 서비스가 좀 보강되어야 할 것 같아요.

축구 지도자로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그는 짧은 축구선수로서의 아픔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지도자로서 장수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축구 지도자로서의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들어봤다.

올 겨울 지나면 브라질쪽으로 가서 축구유학을 받을 계획이에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배워서 차근차근 지식을 습득하고 경력을 쌓아보려고 합니다.

지도자로서 목표가 있다면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선수를 키우는 것이 목표예요. 우승은 순간이지만 선수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제가 코치로 있을 때 정조국, 조성환, 조재진을 키웠는데 이 선수들이 어디 가서 제 밑에서 축구 배웠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보람을 많이 느껴서 상당히 기뻐요. 감독으로서 훌륭한 선수를 키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1992
년도의 K리그 그리고 K리그에 대한 그의 생각
프로축구가 10살이었던 1992년과 25살이 된 현재의 K리그. 15년의 시간적 차이 동안 K리그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92년을 회상하는 K리그의 추억과 더불어 K리그를 위한 임근재의 아낌없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2년에는 관중들의 열의가 굉장했어요. 지금 보면 빅게임이나 관중들이 많잖아요. 엊그제 제주의 시합도 가서 보면 괜찮은 경기인데 관중이 많지 않아서 정말 안타까워요.

K3 리그가 기반이 잘 되어야지만 K리그도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각 지역의 시민클럽들이 잘 되야 하고 그 지역 프로팀에서 지원도 잘 해주면 같은 자매팀이다 하는 마음이 되어서 활성화가 잘 이루어 질 것 같아요. 용병에 투자하는 것도 좋지만 지역 축구발전에 신경을 많이 쓰고 투자하면 K리그 발전도 함께 이루어 질 수 있을 것 같아요.

1992년에는 주말에 평균 13천명 정도 왔던 것 같아요. 당시 동대문경기장에도 2만 명 오고 그랬어요. 그 당시 동대문에서 그 정도 규모면 굉장히 많은 거에요. 경기장 사이드만 조금 비고 거의 다 찼어요. 관중들이 많아 잠도 안 오고 그래서 세레머니도 준비하고 그랬던 때가 있었죠.(웃음).

그때는 머리도 특이하게 하고 염색도 하면서 당시 획기적인 시도를 많이 했었어요. 신인이라는 놈이 물들이고 다닌다고 말도 많았었죠. 골 넣고 슬라이딩 세레머니도 하고 덤블링도 하고 했었던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누가 슬라이딩 세레머니 하는걸 보면 참 추억이 새록새록 하죠. 특히 ()선홍 형이 수중전에서 슬라이딩 세레머니 하는걸 보면 <저거 내가 5년 전에 처음 하던 건데> 하는 생각도 하고 그랬습니다.(웃음)

그 당시에는 인기가 상당했죠. 스포츠서울의 올해의 인기 선수상도 타고 했는데 사실 지금 팬이라고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면 잊지않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지금의 박주영에 비하면 세발의 피죠(웃음).

그래도 예전에는 축구선수 누구라고 하면 특기가 하나씩은 있었는데 지금은 특기가 없어요. 축구 흐름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개인기가 많이 없어졌어요. 테크닉이 많이 부족해서 아쉬워요. 선수들 자체가 옛날에는 노력을 더 많이 하곤 했었는데 지금 보면 고등학교 선수들도 그렇고 노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노력이 부족하다 보니 자기만의 테크닉의 완성이 부족한 것이죠.


그는 현재 역대 득점왕들의 모임인 황금발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축구를 통해 인상적인 결혼식을 올리며 축구와 함께 하는 제2 인생으로의 도약을 시작했다. 축구를 통해 되돌아 본 그의 축구 이야기와 함께 그를 사랑해 주고 있는 팬들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황금발은 역대 K리그 득점왕의 모임이에요. 3년 전에 만들어졌죠. 초대회장은 박윤기 회장이에요. K리그 초대 득점왕이죠. 최근에 하도 토종 득점왕이 안 나오잖아요. 작년에 우성용이 5년 만에 토종 득점왕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가 순수 제작한 황금 슈즈를 제작해서 증정하고 황금발 가입을 시켰어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찾아서 하자는 취지 하에 뭉치게 되었어요.

황금발에서 이벤트 준비를 해주는데 당시 MBC-ESPN에서 중계를 해준다고도 해서 황금발하고 열하나회(국가대표 축구선수 모임)하고 <웨딩매치>를 하게 되었어요. 저한테는 너무 고맙죠. 금요일이고 바쁠 텐데 많이 축하해 주시고 중계도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도 많이 받아서 너무 좋았어요.

축구로 살아온 지난 인생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신체적으로 특출 난 것도 아니잖아요.  임근재가 축구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어쨌든 득점왕을 했기 때문에 한국 축구사에 임근재라는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아쉬운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어요.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대학이나 갔겠나? 요새 다 큰 사람만 선호하는데 어딜 가겠나?>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해요.


우리나라 축구가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축구가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대표 경기도 좋지만 프로경기에 많은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한국축구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울 유나이티드가 언제 어떻게 잘 되서 K리그에 갈지는 모르겠지만 K리그에 가면 그때는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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