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책임감이다 - 이흥실 코치

85 K리그에 처음으로 신인왕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신인왕을 차지했던 그. K리그 무대에서 5경기 연속골이라는 기록을 남긴 그. 2년차 징크스라는 벽을 허물고 86년에는 MVP를 수상한 그. 88년 부상을 딛고 89년 도움왕을 차지한 그. K리그 베스트11 5차례나 포함된 그. K리그 역사상에서 이런 대단한 업적을 가진 사람...그는 과연 누구일까?

K리그에서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는 바로 전북현대의 이흥실 코치이다. 스타급플레이어들보다 이렇게 많은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세를 타지 못한 것은 아마 8년의 짧은 선수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7 3 27 전북현대 선수단숙소에서 이흥실 코치를 만났다. 그는 92년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마산공고 감독으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했다. 13년 동안의 긴 기간동안 고교축구 감독생활을 하였고 2005 7월 전북현대의 수석코치로 선임되면서 다시 K리그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옛날 경기라 다 잊어먹었어요. 오래전 일이라 아무것도 생각 안 나는데요?(웃음)

인터뷰 시작부터 농담을 던지던 그는 인터뷰 내내 특유의 사투리를 쓰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한 게임만 뛰자고 시작한 축구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워낙 좋아했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공이 고무공이었어요. 그런데 그 고무공을 몇 번 차면 터져버리곤 했거든요. 아버지께서는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매번 고무공을 사주셨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버지께서 큰 맘 먹고 가죽으로 된 공을 사주시더라고요. 그 가죽 공을 잘 때마다 항상 안고 잤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하지만 5학년 때 선수를 하라는 권유를 체육선생님으로부터 받았었지만 거절했어요. 그때는 축구하는 것이 좋았지 선수로 활동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6학년 시장배 대회에서 단지 시합만 뛰려고 참여했는데 우리 팀이 우승을 차지한거에요.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이흥실은 쉽게 공을 놓지 않았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공차기에 매진했고 결국 축구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합포초등학교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고 부모님과 상의 끝에 재수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학교에서 6학년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축구를 시작하게 된 거죠


그는 합포초등학교에서 마산중앙중학교로 진학을 했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집이 있었던 진해에서 통학을 했다.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매일 2시간씩 걸리는 통학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축구를 너무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만두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해 본적이 없어요. 축구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고 시합을 나가면 그 긴장감을 항상 즐겼기 때문에 전 체질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좋아하는 일도 힘들게 하면 방황을 한다는 말처럼 그도 방황할 때가 있었으니바로 중학교 때 학교를 아예 가지 않은 사건이다.

그때 전 통학을 하는 상황에서 다른 몇몇 친구들은 학교 근처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게 조금 편해보였던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학교가기가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께 마음과 다르게 축구를 하기 싫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코치님의 상의 끝에 결국 저도 학교근처에서 하숙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웃음)

그는 전국체전 등의 활약으로 마산공고에 진학 할 수 있었다. 마산공고에서도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마산공고 시절 많은 대회를 치뤘지만 2학년에 재학 중인 시절 대통령금배 결승전이 가장 생각이 나네요. 결승전을 동대문운동장에서 청구고등학교하고 붙게 되었는데 그 때 청구고등학교에는 백종철, 백치수, 변병주, 박경훈 등등 그 당시 대표선수들이 3학년에 재학중이였어요. 경기는 저희가 아쉽게 1:0으로 져서 준우승을 차지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MVP를 탔었거든요. MVP는 우승팀에게 돌아간다는 관례를 깼던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을 만큼 좋더라고요.(웃음)

하지만 MVP수상은 그의 활약이 그 누구보다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산공고에서 여러 대회를 치르면서 대학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 덕에 서울에 있는 한양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한양대 2학년이었을 때 그는 대학선발과 함께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지만 3년 동안의 국가대표 시절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저와 같은 시절에 활약했던 쟁쟁한 선배들과 부상에 가려 벤치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었죠. 운이 조금 좋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프로팀에서 원하는 역할과 대표팀에서 원하는 역할이 달랐고 감독님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벤치를 지키는 후보생활이 저에게는 약이 되었던 거 같아요. 당시 괴로웠던 심정을 개인 훈련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거든요. 그리고 항상 제 곁에는 저를 생각해주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더 잘 이겨낼 수 있었어요.


힘들 때 항상 옆에 있어준 가족

85년 어느 잡지사의 인터뷰에서 그는 3~4년 뒤에 결혼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말 88년도에 결혼식을 올렸고 1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축구를 하면서 기나긴 하숙생활과 합숙생활을 시작했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던 그. 항상 믿고 바라봐 주었던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합숙을 하다보니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하고 아내가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은 벌써 아들녀석이 고3이니...


마산공고 감독으로 있을 때는 집에서 다녔으니 괜찮았는데 2004년 전북에 오면서 또 떨어져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요즘은 컵 대회와 정규리그를 같이 하니까 시간도 잘 안 나고 집에 갈 시간이 잘 나지 않더라고요. 거기에다가 또 아이들이 수험생이다 보니까 제가 가도 아이들이 시간이 없고요(웃음)
그에게 전화를 할 때면 통화연결음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최신곡, 신세대곡으로 선곡되어있는데 본기자가 전화했을 때에는 모 시트콤에서 나와 히트를 친 사랑은 개나소나라는 곡이였다.

가족들이 전화를 자주 하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알아서 바꿔줘요. 저에게 전화하는 분들이 항상 그러세요. 젊게 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웃음) 근데 그게 아니거든요. 저도 제 통화연결음이 뭔지 잘 모를 때가 많아요. 이번곡은 저도 한번 들어봤는데 참 괜찮더라고요.(웃음)


K
리그 데뷔화려한 신고식

그는 85년 한양대를 졸업하고 신인드래프트 2순위 지명으로 포철에 입단했다. 85년 4월21 대우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골인 선취 골을 신고했고 27일 현대와의 경기에는 총알 같은 헤딩슛을 성공시켜 2게임 연속 골을 넣으며 화려한 K리그 데뷔를 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프로생활은 시작되었다.

한양대를 다니던 이흥실은 85년 포철에서 2순위로 지명되어 프로선수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는 프로리그에 데뷔하면서 과연 주전으로 뛸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걱정은 85년 4월 21 대우와의 경기에서 프로 첫 골을 넣으며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처음 프로에 데뷔하면서 과연 내가 이길용, 조태천, 김경호 등등 이런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주전으로나 뛸 수 있을까 염려를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시작이 중요하다고 첫 골을 넣고 난 후부터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바로 이어서 27일에 두 번째 골이 넣었을 때 탄력이 붙는 거 같더라고요.(웃음)

 

“첫 데뷔했을 때는 개인기록보다는 동료선수들이 득점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어시스터로 팀에 공헌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궁극적으로 팀의 승리와 직결되는 것이고 팀의 우승이 바로 제 개인의 우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신인왕, MVP. 그리고 도움왕까지  

그러한 자세로 임했기 때문일까? 85 3차 리그에서 5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으로 그가 프로로 데뷔하던 85년에 도입된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제가 신인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낸다는 생각 보다는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달려들었었죠. 김종환 등 경쟁 할 수 있는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프로데뷔 2년째인 86. 그는 2년차 징크스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회 MVP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포항에서 2년차 때였어요. 저희 팀이 축구대제전에서 1등을 했죠. 85년도에는 포항이 준우승을 차지해서 너무 아쉬웠었거든요. 꼭 우승을 하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뛴 것 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다른 분들도 제가 열심히 뛰는 것 같이 보였는지 MVP를 주시더라고요”(웃음)

 

85년 신인왕, 86 MVP에 이어 89년에는 도움왕까지 차지하면서 한국 프로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89년에는 도움왕을 차지했었어요. 그때 11개의 어시스트를 했었는데 사실 도움왕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었거든요. 좀 더 많은 기회를 동료선수들에게 연결시키려고 노력했고 개인적으로 운도 따른 것 같아요.(웃음) 그런 활약 때문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로 발탁되기도 했죠.

 

그는 프로로 뛰던 당시 87년도 태국에서 열린 제18회 킹스컵축구대회의 영광을 제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87년 포항에서 뛰던 시절 우리나라 대표로 나갔던 킹스컵이 제일 생각이 나네요. 그때 대회가 태국에서 열렸었는데요. 공교롭게 북한하고 예선전을 하게 되었어요. , 후반 경기가 모두 끝나가고 있어서 비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저한테 찬스가 오더라고요. 제가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켜서 우리 팀이 이겼던 적이 있었어요. 제가 넣은 골로 팀이 승리하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었어요. 특히 우리나라 대표로 뛴 경기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고요. 그런데 웃기는 건 결승에서 또 북한하고 만났었거든요. 결승에서는 졌답니다.(웃음)

 

갑작스런 은퇴.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생활

 

장애물이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선수시절에도 부상이라는 악재가 있었다. 바로 92년 시즌초반 발목부상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목부상 때문에 그는 선수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원치 않았던 은퇴를 하게 되었다.

 

“전 88년에도 부상이 있었지만 부상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어요. 92년 부상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그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고 주위에서도 은퇴를 권유하더라고요. 맘 같아선 계속 뛰고 싶었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다만 아직까지도 아쉬운 게 있어요. 제가 프로리그에서 처음으로 30-30(득점-도움)클럽에 가입했었거든요. 50-50클럽을 꼭 달성하고 싶었었는데 적어도 40-40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은퇴하기 전 기록이 48 35어시스트였으니까 딱 어시스트 5개만 있었으면 됐었거든요.(웃음)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어요. 요즘 선수들보면 은퇴경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것을 보면 ‘나는 왜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굉장히 커요. 물론 그때는 은퇴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이 없었기도 했고 은퇴경기를 처음도입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거든요.(웃음)

 

그는 은퇴를 하자마자 마침 감독자리가 공석이었던 모교 마산공고의 감독 자리를 제의받았다.

 

“솔직히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감독을 하고 싶었었어요. 축구 지도자라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었거든요. 누군가를 지도하고 대단한 선수로 키우고 그 제자가 잘되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웃음) 물론 기다렸다가 다른 프로축구팀이나 더 나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마침 모교인 마산공고 감독자리가 비어있었고 이번이 아니면 마산공고를 맡아볼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죠.

 

학원 축구에 따끔한 충고

 

그는 마산공고 재임시절 마산공고를 무학기와 청룡기 등의 대회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정상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선수를 양성했고 그 위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강호 마산공고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학원축구에 10여 년 동안이나 있었기 때문에 학원축구의 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학원스포츠 같은 경우 자꾸 유럽에 있는 클럽식으로 가려고만 해요.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학원축구는 일본 시스템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축구를 시키는 곳이 바로 일본이에요. 일본에서는 한 학교에서 방과 후에 할 수 있는 특기활동 등으로 축구를 100명 넘게 해요. 물론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이죠. 야구하고 싶은 사람은 야구하고, 농구하고 싶은 사람은 농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요. 그런 활동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 교과점수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한 활동이 나중에 대학을 가거나 직장에 취직을 하더라도 이익이 된다고 하고요.

 

“말 그대로 일본은 공부 다 하고 축구를 하거든요.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 축구부를 한 번 시작하게 되면 그만두지를 못해요. 공부를 전혀 안 하고 축구만 하거든요. 어떻게든 축구로 대학은 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나보더라고요.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학원축구는 이런 체제가 얼른 달라져야 해요.

 

인생에서의 좌우명, 축구를 통해 얻다.  

그가 8년 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또 은퇴를 하고 지금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은 바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축구는 책임감이라는 사실을 항상 머릿속에 새기고 그것을 첫 번째로 가르친다는 그.

 

“전 프로선수들이나 감독이나 심판이나 경기장 안에 있는 일원 모두가 책임감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프로선수라면 자기 몸 관리라든지 경기에 임하는 자세라든지, 심판이라면 경기진행에 대해, 팬들이라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대한 책임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우리 지도자들도 특히 홈경기에서는 굉장히 선수들에게 강하게 압박을 하는 편이에요. 홈경기는 절대 놓치면 안 되고 지더라도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것이 바로 책임감이거든요. 현재 프로선수들은 아직 그런 점에 있어서 제가 선수로 뛰던 때보다 미흡하다고 생각해요.

 

“책임감이라는 말은 단지 축구에서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사회생활을 하거나 다른 운동을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바로 인생에서 꼭 생각해야 될 말이죠.(웃음)

 

K리그가 더 발전하려면?  

책임감을 말하는 그의 눈빛을 보니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 한국프로축구의 발전을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지도자였다. 그에게 K리그가 발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물어보았다.

 

“우선 지금보다 더 나은 경기를 위해서 일정이 조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공격축구, 재미난 축구를 하고 싶어도 팀 일정이 빡빡해 버리니까 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요. 몇몇 팀을 제외하고는 선수층이 얇거든요. 부상을 당해버리면 한 시즌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격적인 축구를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프로선수들 보면 모든 포지션을 다 잘해서 멀티 플레이어라고 불리지만 이런 멀티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선수가 전체적으로 다 해버리면 문제가 있다고 보거든요. 물론 그런 선수들이 많으면 좋겠지만 옛날처럼 이태호 하면 ‘등을 지고 골을 잘 넣는다’ 박경훈 하면 ‘엄청나게 오버래핑이 빨랐다.’ 변병주하면 ‘빠른 다리에 체력도 좋았다’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인기, 특기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그런 선수들이 없다고 생각해요. 멀티 플레이어라면 팀에 유용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 보면 그런 게 아쉽습니다.

 

또 그는 관중들에게 K리그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팀 별로 전술적인 면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많지만 현재 일부 구단을 제외하고는 2~3천명의 관중들만 오고 있거든요. 현재 제가 코치로 있는 전북현대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요. 2~3만 명 관중과 2~3천 명 관중을 두고 경기를 하는 것은 경기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께서 좀 더 축구에 관심을 보여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항상 축구만을 생각하면서 한국프로축구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이흥실. 현재 전북현대 수석코치인 그는 항상 꿈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만의 프로팀을 맡는 것이다.

 

“아직 부족함이 많고 배울 것도 많지만 마지막에는 프로팀을 하나 맡아서 우승하고 싶어요. 프로선수로 활동할 때 우승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았고 마산공고 감독시절에도 우승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번엔 프로팀을 우승시켜 보고 싶네요. 제가 바라고 원하는 축구 즉, 책임감 있는 축구를 선수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게 제 꿈이랍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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