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위의 사령관 - 이종화

90
년대 초 한 팀이 K리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주인공은 1989K리그에 첫 발을 내디딘 일화다. 일화는 1992년 아디다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3~1995K리그 사상 첫 3연패의 대업을 이루어낸다. 당시 고정운, 이상윤, 신의손 등은 대단한 활약으로 일화의 3연패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도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한 선수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 선수가 바로 일화 수비의 핵 이종화다. 1986년 데뷔한 뒤 1996년까지 K리그에서 통산 191경기 출장, 9, 3도움을 기록하며 일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종화.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파란만장했던 축구 인생을 걸은 그의 이야기를 지난 3 19. 그가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는 용인 태성고등학교에서 들을 수 있었다.


식빵 한 조각에 시작된 축구인생
“10
살 때 식빵 얻어먹으려고 축구를 시작했어요. 고향이 통영인데 통영 자체가 축구 도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김호, 김호곤, 김종부, 김도훈, 그리고 이종화까지 이들은 국가대표라는 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축구도시통영출신이라는 점이다.


통영 유영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기본기와 체력훈련을 중점적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특이했던 점이 고무공으로 기본기 훈련을 했어요. 훈련량도 엄청났죠.”


당시 은사님이 이낭찬 선생님이셨는데 굉장히 엄하셨어요. 나중에 제가 성장한 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제게 가능성이 보여서 엄하게 훈련시켰다고 하시더라고요.”


많은 K리그 올드 팬들은 그를 최고의 수비수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초,,고등학교 시절까지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축구를 시작할 때는 센터포워드였어요. 키는 컸지만 체중이 별로 안 나갔어요. 몸이 왜소했죠. 그렇다고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았지요. 머리로 축구를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테크니션이었죠.”


축구 감각 하나는 타고난 이종화. 하지만 타고난 것은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강한 승부욕도 타고나고, 이는 그의 끊임없는 발전을 이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근성이 있었어요.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셌죠. 경기장 나가서도 지는 걸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 근성이 대학교, 나아가 프로에 가서도 이어지더라고요.”


이종화는 지금도 자신이 축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주변의 지도자 선생님들 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2
4녀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아버님께서 제가 5학년 때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뒷바라지를 하셨죠. 그러다 보니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어요. 주변의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선생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축구를 그만 두었을 거예요.”


서울에서의 새로운 출발
그는 정들었던 고향 통영을 떠나 낯선 서울로 떠났다. 중동 중학교 감독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한 그는 새로운 감독의 지도 아래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중동 중학교가 통영으로 전지훈련을 와서 통영 중학교와 연습 경기를 가진 적이 있어요. 그 때 제 실력을 보고 중동 중학교 관계자가 관심을 보였죠.”


“3
학년이 되고 서울시 교육감대회에 나갔어요. 당시에 중동 중학교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죠. 대회에서 제가 6골을 넣으면서 팀이 우승을 차지했어요. 굉장히 기뻤죠.”


그는통영이라는 도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는데 하소연 할 데가 없잖아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거죠. 방학이면 통영에 내려가는데 너무 좋았어요. 통영에 내려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설레요. 통영 때문에 축구도 하고, 장가도 가고, 돈도 벌고요. 고향통영이란 도시를 저는 너무 좋아해요.”


이 후 중동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종화. 이듬해 그는 마산 창신 공업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며,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다. 당시 창신 공업 고등학교를 이끈 신철수 감독은 믿음으로 그를 지도하며, 그가 안정적으로 새로운 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마산 창신 공업 고등학교로 전학 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 했어요. 그래서 2학년때 경기에 뛸 수 없었어요. 한창 뛰어야 하는 나이에 뛰지 못 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하지만 당시 창신공고 감독인 신철수 선생님이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적도 없는 선수를 경기마다 데리고 다니시고, 연습경기에서는 꾸준히 출전기회도 주시고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축구인생 최대의 기로
창신 공업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된 그는 축구인생 최대의 기로를 맞게 된다.


창신 공업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됐는데 당시 3학년 선배들 중 4명이 수비수였어요. 3학년 선배들이 졸업을 해야 됐기 때문에 신철수 선생님이 제게 수비수를 보라고 하셨죠. 그렇게 수비를 보게 됐는데 공격 보다 재미있더라고요. 공격을 오래했기 때문에 공격수의 습성을 알고 미리 예측할 수 있었죠. 지능형 수비수였어요.”


그 때의 포지션 변화가 제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격수를 고집했다면 대학교 진학 후부터는 그냥 평범한 축구선수로 남았을 거예요.”


그는 수비수로는 치명적이었던 왜소했던 체격 조건을 판단력과 한 발짝 빠른 예측력으로 극복해 내며 차츰 수비수의 면모를 갖춰갔다.


대학 졸업 때까지도 몸무게가 70kg을 넘지 않았어요. 제가 몸싸움을 질 것 같으면 몸싸움을 안 걸었죠. 그걸 판단하는 능력이 탁월했죠. 우리나라 공격수들은 다 빠르잖아요? 저는 평범한 발을 가졌었는데 그들보다 예측력과 위치선정이 좋았어요.”



처음 가슴에 단 태극마크
수비수로의 포지션 변화는 이종화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수비수 변신 후 그는 끊임없는 성장을 하며,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아시아 학생선수권 대표로 선발 됐어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국제대회를 다녀오니 시야도 넓어지고 기량도 많이 늘었어요.”


국가대표로써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돌아온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진학과 실업무대의 기로에 선다.


대학 생각은 안 했어요. 집이 어려웠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업팀을 가려고 했죠. 하지만 국제대회를 다녀온 후 벌어진 대통령배 대회에서 대학끼리 스카웃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 때 같이 뛰었던 선수 중에 박양하(現 김해시청 감독)선수가 있었어요. 정말 축구 천재에요. 아직까지도 그런 선수를 본 적이 없어요. 축구 능력만으로는 따를 자가 없었어요. 대학 진학에서 박양하 선수는 고려대를 가게 됐죠. 제게도 고려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었는데 고려대를 가게 되면 박양하 선수에 왠지 딸려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들러리랄까?

그래서 연세대학교로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연세대학교에 진학 할 수 없게 되었죠.”


이 후 그는 김호 감독의 조언으로 실업팀 국민은행에 합류해 전지훈련에 참가하게 됐다. 하지만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 그에게 인천대학교 진학의 기회가 찾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은행 전지훈련에 참가했는데 그 곳에서 여러 대학의 제의를 받았어요. 갈 곳 없는 저를 받아주었던 당시 국민은행 감독님인 노홍섭 감독님께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대학 진학을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창단 팀인 인천대로 가뱀의 머리가 되라고 하셨어요.”


노홍섭 감독의 조언에 따라 인천대에 진학하게 된 이종화는 임창수 감독의 지도 아래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며 국가대표로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임창수 감독님이 팀을 맡으셨는데 굉장하셨어요. 박종환, 김판수씨와 더불어 축구계 3대 독사 중 한분이셨는데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각 종 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인천대학교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가대표 화랑팀에 선발 됐어요. 박창선, 허정무 등 정말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같이 뛰게 되었죠. 1년에 150일은 외국에서 생활을 했어요.”


대학시절은 정말 좋았어요. 대학교 3학년 때 이미 프로팀 현대와 계약을 맺었어요.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었죠.”



프로의 높은 벽
1986
. 이종화는 현대(現 울산)에 입단하며, K리그에 입문했다. K리그에서의 출발은 좋았다. 86축구대제전 한일은행과의 경기에 출전하며, 성공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K리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실패를 맛보며,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했다.


프로 데뷔 첫 해 실패를 했어요. 입단 후 2라운드부터 5경기에 연속으로 경기를 뛰었어요. 그런데 자꾸 허점이 나타나니까 후보 선수로 밀리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엔트리에서도 빠지게 되더라고요. 정상에서만 놀다가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충격은 말이 아니더라고요.”


이종화는 프로 데뷔 첫 해의 실패 원인을 바로 자신에게 돌렸다.


자만심이요.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프로에서 필요한 선수가 되지 못한거죠. 대학교 때까지의 플레이를 고집하다보니 프로에서는 전혀 통하질 않았어요. 대학교 때까지는 공격수들의 플레이를 예측이 가능했지만 프로무대의 공격수들은 수비수를 가지고 놀더라고요. 템포도 빠르고, 압박도 강하고, 체격 조건도 좋고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이미 대학 4학년 때 가정을 이뤘던 이종화였기에, K리그에서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로 여길 수 없었다. 그의 곁에서 항상 응원해주는 가족을 위해 반드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운동을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룬 상태였기 때문에 아픔이 더 컸어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이 엄청났죠. 그래서 다음 동계 훈련에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도 잘 안 되더라고요. 수비가 안정되면 벤치 분위기가 편안한데 저는 벤치에 그런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공격은 당일 컨디션에 따라 전술적 변화가 많은데 수비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수비라는 포지션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웬만해선 변화를 주지 않으니까 뚫고 들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 사장이라고 불린 축구선수
그는 프로무대에서 실패한 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첫 시즌이 끝난 뒤, 연봉 때문에 구단과 마찰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저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저를 아프게 했어요. 특히 자존심이 쎈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죠. 그래서 은퇴를 선언했어요.”


15
년을 함께한 축구를 그만둔 그는 이후 제과점 사장이 된다.


“1987
5월에 축구를 그만두었는데, 그 후에 목동에서 제과점을 했어요.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려면 어쩔 수 없었죠. 가족들 굶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장사꾼이 된 거에요. 장사가 잘 안되고 힘들었으면 축구 세계로 돌아갔을 텐데 장사가 그럭저럭 되더라고요.”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호령하던 국가대표 축구선수에서 한순간에 동네 제과점 사장이 된 그의 삶은 화려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처참하기까지 했다.


제과점을 하는 동안에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어요. 아침이면 가게에 나가 장사를 하고, 저녁이면 이웃 가게 사장들이랑 술을 마시는 삶의 반복이었어요. 무릎 수술까지 해가지고 몸도 말이 아니었죠.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리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축구선수로서의 운명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 날 김호 감독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던 국가대표 축구선수에서 한순간에 동네 제과점 사장이 된 그의 삶은 화려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처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축구선수로서의 운명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 날 김 호 감독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어요.”


그라운드로의 복귀
김 호 감독이 현대 구단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선수단에 이종화가 없자 직접 나서 이종화를 찾았던 것이다.


김 호 감독님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저를 찾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인을 통해 제가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게 연락을 해오셨죠.”


하지만 2년이라는 공백은 축구 선수에게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제과점 사장에서 축구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 그는 입에 단 내가 나도록 뛰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송추 연습구장에서 김 호 감독님을 만났어요. 축구를 다시 시작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운동장 한 바퀴도 못 뛰는 몸상태라고 고사했었죠. 그랬더니 체중이 그대로인데 무슨 소리냐며 다시 몸을 만들어 보라고 하시면서 6개월의 시간을 주셨어요.”


하지만 3,4개월이 지나도 몸이 회복되지가 않더라고요. 수술했던 무릎에는 계속 물이 차고, 운동이 마음대로 안돼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렇게 6개월이 지났는데 어느 날 김 호 감독님이 제게 화를 내시더라고요. 운동 제대로 안 할 거면 차라리 그만 두라고 하셨어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은 이종화는 죽기 살기로 운동을 했다. 1888년 동계훈련을 누구보다 성실히 마친 이종화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팀 내 주축 선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동계훈련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89K리그에서 소속팀에서 주전자리를 꿰찼죠. 리그에서 35경기를 출전했는데, 거의 전 경기를 출전했었죠. 못 뛴 경기도 경고 누적 등으로 제한을 받아 못 나갔어요.”


국가대표 선수들이 대표팀에 차출되면 팀이 말도 아니었어요. 대표 선수들이 팀에 있을 때는 그럭저럭 성적을 내다가 차출 되면 성적이 곤두박질 쳤죠. 그럴때마다 김 호 감독님이 저를 항상 찾으셨어요.”


파이터 이종화 
어렸을 때부터 지능형 선수였던 이종화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옛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의 무기를 장착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89
년 프로무대에 다시 복귀하면서 생각했어요. 왜 실패했을까? 생각해보니 제가 느슨했고, 상대를 너무 편하게 해줬더라고요. 그래서 파이터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가 먼저 강하게 나가면 상대 공격수가 겁을 내고 피하더라고요.”


거기에다 제가 스위퍼와 스토퍼,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많이 변했죠.”


화려한 전성기
성공적으로 프로무대에 복귀한 이종화는 1991년 일화로 이적을 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새로운 팀을 알아보던 중 박종환 감독님을 만났어요. 일화로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박종환 감독님의 성격, 축구 컬러가 저와 잘 맞았어요. 그래서 이적을 결심하게 됐죠.”


일화에서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한 이종화는 전성기를 맞이하며일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라운드 위에서만큼은 자신이 감독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팀의 수비진을 이끌었다.


신의손, 신태용 등 선수들이 영입되면서 점점 팀의 모습이 갖춰졌어요. 박종환 감독님이 공격을 지향한다고들 하시지만 수비를 굉장히 중시했어요. 경기 후에는 한 골 한 골 끝까지 추궁을 하고, 책임을 물었어요.”


신의손 선수와 호흡이 굉장히 잘 맞았어요. 서로 덕을 많이 본 것 같아요. 그게 일화 수비 안정에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박종환 감독의 지도 아래 점차 색깔을 입힌 일화 축구는 1992년 아디다스 컵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93~95K리그 최초 3연속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낸다.


“92
년부터 진정한 축구에 눈을 뜬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92년에 연말 시상식에서 베스트 일레븐에도 뽑히고, 수비상도 받았죠. 그 때는 정말 하늘 위를 나는 기분이었어요. 개인적인 안정도 되찾고, 팀에서도 신임을 받고, 확고히 자리도 잡았었죠.”

 
1993
년 일화를 K리그에 우승을 시키고 난 뒤에야 그는 한 가지 짐을 벗을 수 있었다.


우승 확정 되고 굉장히 감격했어요. 그 때서야 비로소 저를 일화로 불러주신 박종환 감독님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에겐 굉장히 소중하신 분이에요. 저를 많이 신뢰해주셨어요. 감사할 따름이죠.”


이 후에도 일화는 연일 승승장구하며 K리그 사상 처음으로 3연패를 이루어냈다.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던 일화였다.


그 당시에는 어떤 팀과 붙어도 진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컨디션이 최악이다 싶으면 비기겠구나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일화에서 많은 성장을 했고, 화려하게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죠.”


최고의 수비수였던 이종화. 어렸을 때는 지능형 선수로 이 후 프로에서는 파이터형 선수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공격수들을 수비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라고 손꼽히는 라데조차도 두렵워하지 않았다.


라데는 참 좋은 선수였죠. 하지만 저에게는 무서운 선수가 아니었어요. 라데 선수는 정면에서부터 측면으로 치고 달리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제가 수비하기는 쉬운 편이었어요. 오히려 저는 이태호, 윤상철 선수들같이 포스트 플레이에 능했던 선수들이 까다로웠어요.”



잊지 못 할 동대문에서의 수중전
축구 선수 생활 중 수많은 경기를 치룬 이종화지만 아직도 그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경기가 있다


1995년 7월 15
포항과 경기를 했어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동대문에서 경기가 열렸죠. 1-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저희 팀 1명이 퇴장을 당했어요. 나머지 5,60분을 수비를 하며 버텼어요. 당시 포항의 서효원 선수가 슛을 한 게 신의손 골키퍼를 맞고 공이 골대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상황에서 제가 슬라이딩을 하면서 골라인 선상에서 볼을 걷어냈죠. 경기가 끝나고 탈진을 할 정도로 힘든 경기였었는데, 그 경기가 그 해 우승의 최대 분수령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웃지 못 할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해프닝 하나를 얘기해 주었다.


“1991
년이었는데, 당시 골키퍼 중에 마르셀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경기 중에 퇴장을 당해 버린 거예요. 그런데 벤치에는 예비 골키퍼가 없어서 참 황당한 상황이었죠. 할 수 없이 제가 골키퍼를 본다고 했어요. 7분 정도 골키퍼를 봤는데 몇 개 막기도 했어요. 골도 안 먹고요.”(웃음)


이 사건이 K리그에서 필드플레이어가 골키퍼를 맡은 첫 번째 사건이다.

 
아쉬움을 남긴 기회의 땅. 미국
소속팀 일화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종화는 마침내 94 미국월드컵 대표팀에 뽑혔다. 하지만 모든 축구선수들이 열망하는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 그는 설 수 없었다.


월드컵이 열린 1994년 당시에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았어요. 개인 기록도 좋았고, 팀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월드컵 대표팀에 뽑혔어요. 굉장히 기뻤어요.”


대표팀에 합류해 평가전에서 홍명보선수와 번갈아가면서 경기를 뛰었어요. 하지만 막상 월드컵이 시작되고 본선무대에서는 경기에 기용되지 못했죠.”


아쉬움이 없을 리 없었다. 다른 무대도 아닌 월드컵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경기보다 경기에 나서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이종화였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코칭스태프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죠. 10분이라도 뛰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죠. 제일 아쉬웠던 게 볼리비아전 이었어요. 당시 허정무 코치님이 경기 전날 불러서 경기 뛸 준비를 하라고 하셨었어요. 하지만 막상 당일에 또 경기에 뛰지 못했어요.”


하지만 받아들였어요. 아끼는 후배이자 제자인데 결정내리기가 김 호 감독님이라고 편했겠어요? 제가 재기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김 호 감독님께 편지를 써서 드렸어요.”


“‘
감독님 선택이 옳았습니다. 저는 월드컵 대표팀에 이름 석 자 올린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감독님 사랑합니다.’ 라는 내용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따뜻한 남자. 이종화
그는 축구선수이기 전에 한 사람, 주위선수들에게는 선배이기 전에 큰형이었다. 앞에서는 무서운 큰형처럼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후배 선수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성격이 뒷전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에요.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경기에서 못 뛰는 선수들과 단장님과의 미팅도 주선했었고, 경기 수당을 모든 선수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제안도 했었어요."


"
특히 2군에서 힘들게 선수 생활 하는 선수들을 도와주고 싶었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2군 생활은 정말 비참해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선수생활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살다
프로무대에서 산전수전을 다겪은 이종화. 언제까지나 그라운드 위를 지배할 것 같던 그도 누구나 그렇듯 그라운드를 떠나게 됐다.


“95
년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사정이 생겨 팀에서 나오게 됐죠. 그리고 96년도에 다시 팀에 복귀했는데 목적의식이 없더라고요. 제가 제일 고참이고, 경험도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지를 했었죠. 그런데 그런 구심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팀 자체가 흔들리더라고요. 그러면서 팀이 최하위까지 밀리더라고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게 됐어요.”


그의 화려했던 선수 이력을 돌이켜 볼 때 그의 퇴장은 은퇴식조차 없이 초라하게 진행됐다.


지도자의 길     
은퇴 후 이종화는 자신의 모교였던 중동고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의 첫 발을 떼었다.


처음 중동고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냥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어요. 선수 육성에만 힘썼고, 팀 성적도 좋았어요. 그렇게 2년을 있다가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어요.”


중동고등학교 감독을 그만 둔 뒤 그는 지도자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르헨티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흔히들 아르헨티나 축구가 우리 축구가 가야 할 모델이라고들 얘기하잖아요. 실제로 가서 보니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Estudiantes클럽에서 지도연수를 받았는데 배울 점이 많더라고요."


아르헨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용인 태성고등학교를 맡아 지도하고 있다. 이종화는 좋은 지도자들 밑에서 축구를 했던 것이 선수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지도자 분들에게 좋은 장점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박종환 감독님의 선수 관리능력, 김 호 감독님으로부터는 기다림, 임창수 감독님에게는 훈련 방법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3
학년 선수들에 대한 배려나 재능 있는 선수들은 기다려 줄 수도 있어야 하죠. 90분을 뛰어낼 수 있는 체력을 위해 동계훈련 때는 체력훈련을 많이 해요.”


또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배워 온 것을 한국축구 미래 꿈나무들에게 가르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자유로움 속에 엄격함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선수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편이에요. 그러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을 중시하죠. 사생활부분도 존중해주고요.”


하지만 훈련 시간만큼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선수들한테도 훈련시간만큼은 혼을 쏟아 축구에 미치라고 주문하죠. 축구하는 순간에는 축구에 미쳐야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일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파란 만장한 선수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지도자 생활이라고 어려운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고등학교 3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리죠. 1학년 때는 적응기이고, 2학년 때 본격적으로 가르치고, 3학년이 돼서 뭔가 해보려고 하면 졸업해버리죠."


"
또 처음에는 지도자로서 자리 잡기 위해 성적에 목을 맸는데, 이제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저를 믿고 압박을 주지 않고요.”


그가 추구하는 축구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들고있던 펜과 핸드폰을 모형삼아 선수들의 움직임을 예로들며 열정적으로 설명해보였다. 그가 추구하는 축구는 생각하는 축구다. 느낌이 있는 축구를 하는 게 그가 하고 싶은 축구란다.


저는 축구가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패스 하나를 해도 왼발로 주느냐? 오른발로 주느냐? 앞쪽으로 주느냐? 뒤편으로 주느냐?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서 패스 훈련을 저는 굉장히 많이 시켜요.”



그는 조만간 용인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갈 계획이다.


“50
세가 되면 통영으로 내려갈거예요. 지금 통영에 시민구단 창단 움직임이 있는데 만약 창단된다면 그곳에서 제 마지막 축구 혼을 쏟고 싶어요.”

요새같이 전문적인 서포팅을 받으며 오빠부대의 응원을 받고 축구하는 후배 선수들이 부럽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K리그의 발전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는 투자를 많이 하는 구단들이 K리그에서 우승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순리에 맞는 것 같아요.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구단들이 노력해 축구전용구장을 만들고, 클럽하우스도 짓고, 유소년 축구에 많은 투자를 했으면 싶어요.”


축구 할 때는 축구에 미쳐야 한다는 이종화.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걸었던 이종화
.
그라운드를 호령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추억이 되었지만, 그의 바람대로 네셔널리그에서 고향팀을 이끌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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