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수문장이 되리라 - 故 오연교


이 글은 故오연교님의 축구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주위 분들의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도움을 주신 故오연교님의 동생 오한교님과 고등학교 은사이신 이훈 감독님, 대표팀과 소속팀의 감독님이셨던 김정남 울산현대 감독님, 친구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던 정해성 제주유나이티드 감독님, 변병주 청구고 감독님, 최순호 울산현대미포조선 감독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월드컵 본선 첫 경기가 시작될 텐데. 둘 중에 누구를 기용해야 한단 말이냐. 병득이를 세울까...? 연교를 써야하나...? 32년 만에 나가는 월드컵. 분명 선수들의 부담도 클 것이다. 나조차도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선배들이 경험했던 9점차의 대패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1986 멕시코월드컵을 앞둔 어느 날.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의 베스트11을 구상하는 김정남 국가대표팀 감독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차범근, 최순호, 김주성 등의 공격라인에 대한 구상은 이미 끝났지만 상대편 에이스인 마라도나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최후의 보루인 수문장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월드컵에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은 선수는 조병득과 오연교. 체격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두 선수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185cm정도의 키에 나이차도 불과 두 살. 단지 경험으로서는 조병득, 파워에서는 오연교가 조금 나은 정도였다.

 

월드컵 예선에서는 조병득, 오연교, 최인영이 번갈아가며 골문을 지켰었다. 1,2차 예선에서는 최인영과 오연교가 번갈아 출전하며 골문을 지켰고 일본과 대결했던 최종예선에서는 조병득이 출전해 2경기 1실점으로 선방했다. 세 명의 골키퍼를 경쟁시키는 시스템은 지역예선에서 큰 효과를 거뒀다.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 세 선수 모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예선 8경기에서 3점만을 내주며 32년 만의 본선 진출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도 세 선수를 번갈아 출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22명의 최종 엔트리에는 오연교와 조병득을 선발했지만 안정적으로 본선 세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될 한 명의 선수를 확정해야만 했다.

 

그래. 뚝심 있고 최근 컨디션이 좋은 연교로 가자. 세계 최강팀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배짱을 가진 선수는 오연교 밖에 없다. 게다가 골키퍼 코치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하는 선수가 연교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거다.’

 
1986년 6월 2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 대한민국의 역대 최강 베스트11이 그라운드를 나섰다. 공격을 책임질 차범근, 최순호, 김용세, 박창선, 김주성. 후방을 책임질 박경훈, 김평석, 허정무, 정용환, 조민국. 그리고 골문 앞에는 늠름한 체격의 오연교가 서있었다.

 

상대는 당대 최강인 아르헨티나. 경기 시작 5분 만에 위기를 맞는 한국. 마라도나의 프리킥이 벽을 맞고 나오더니 어느새 페널티에어리어 오른쪽에 있던 발다노에게 절묘한 패스가 연결된다. 반대편 포스트를 보고 강하게 때린 슈팅. 골키퍼 오연교는 손을 뻗어 봤지만 쇄도하는 공격수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출렁이는 골문을 망연자실 쳐다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반 28분에 터진 박창선의 월드컵 본선 첫 골의 감격도 미리 허용한 3실점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은 무거운 마음으로 불가리아와의 2차전을 맞게 된다.

 

이번에도 실점의 비극은 이른 시각에 찾아왔다. 전반 10.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오연교 골키퍼가 뛰어나와 펀칭으로 걷어냈으나 빗맞은 공이 하필 불가리아의 토프 앞에 떨어졌다. 가볍게 빈 골문에 로빙슛으로 집어넣는 토프. 평소 주먹으로 펀칭한 공이 중앙선까지 간다는 오연교 골키퍼의 펀칭 미스는 본인과 팀 동료 모두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이탈리아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오연교 골키퍼가 펀칭했으나 이번에도 상대편 나폴리의 발밑으로 공이 떨어지고 만다. 혼전 중 왼쪽 골에어리어에서 알토벨리가 노마크 찬스를 맞았고 뛰어나온 오연교 골키퍼의 타이밍을 뺏으며 첫 골을 성공. 후반 17, 최순호가 짜릿한 동점골을 넣지만 이내 알토벨리의 추가골이 터진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희망이 있었다. 무승부만 거둬도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 38, 나폴리의 크로스가 중앙으로 연결되는 순간 오연교 골키퍼는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우리들의 바람이. 나의 노력이... 그렇게 평생을 꿈꿔왔던 무대인데. 이렇게...이렇게나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연교야! 학교가자~”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의 아침이 여느 때처럼 해맑게 시작된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가야만 하기 때문에 연교는 오늘도 일찌감치 집 대문을 나선다.

 

조기~ 담벼락에 닭 봐라. 겁나 크지?”
에이, 오늘은 디비 가다가 과수원에서 과일이나 따먹자.”

 

산 넘고 물 건너 학교 가는 길. 또래 중 유난히 덩치가 컸던 개구쟁이 오연교가 지나간 길에는 계란, , 사과, 배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남아나는 법이 없었다.

 

워낙 개구쟁이였다고 해요. 남의 집 계란 같은 건 남기질 않았대요. 지금이야 경찰에 신고 당할 일이지만 그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잖아요. 학교 끝나고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으면서 하루 종일 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소까지 몰래 가져와서 매놓고 했다니까요.”

 

故오연교씨의 막내 동생으로 5남매 중 유일하게 형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오한교씨는 자신과 비슷했다는 형의 유년 시절을 추억해본다. 비록 터울이 많이 지는 형이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축구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성장 후 그는 누구보다 형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가려면 왕복 1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가야만 했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버스 타러 나오려고 하면 3~4km를 걸어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냥 걸어 다니곤 했으니까요. 가는 길도 멀고 시골이다 보니 장난칠 거리도 많고 저절로 운동도 됐지요. 형이나 저나 개구쟁이인데다가 친구들을 주동하면서 장난치고 다녔던 건 비슷한 것 같아요.”

 

5남매 모두 기골이 장대한 그의 가족들은 워낙 체격이 좋고 운동을 잘해운동가족으로 불렸다고 한다. 큰 형 역시 어렸을 때에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육상선수였다고.

 

아버지, 어머니도 덩치가 크시고 5남매 모두 운동을 잘했어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부모님을 비롯해서 온 가족이 출전을 하곤 했는데 5명이 받아오는 공책의 숫자가 엄청났었죠. 공부는 안 해도 집에는 항상 공책이 넘쳐났으니까요. 아버지도 대회에 나가서 괭이, 삽 같은 걸 타오기도 했어요.”

 

운동에 소질이 있던 오연교는 자연스레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게 된다. 부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결코 축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축구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일찌감치 최고의 축구선수를 꿈꿨다.

 

어렸을 때는 보통 공을 차는 재미나 축구부를 하면서 먹을 수 있는 빵과 같은 유혹에 이끌려 축구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흥미위주로 진행해야 하는 유소년들의 훈련에서 체력 훈련은 적합하지 않다고 할 정도로 재미없는 훈련이다. 골키퍼라는 포지션도 마찬가지. 어린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골을 넣고 환호하는 스트라이커를 꿈꾸지 않는가. 보통 골을 먹으면 온갖 질타를 받는 골키퍼는 그 중에서도 기피 1순위에 꼽혔지만 그는 달랐다. 어디를 가든 손에서 줄넘기를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운동 자체에 열심이었다.

 

내가 골키퍼를 선택한 이상 골키퍼로서 대한민국의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은 기본이다. 무엇을 하든지 훈련과 접목시켜야겠다.’

 

골키퍼로서 대성을 해야겠다고 본격적으로 마음을 굳힌 해미중학교 시절. 밤낮을 잊은 그의 노력은 계속 되었고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해갔다. 팀 훈련이 끝난 후에도 운동장 한 구석에서 다이빙 연습을 반복한 그에게는 응당한 결과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선배였던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너희 형은 정말 눈물나게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에요. 훈련이 끝나고 해가 지면 보통은 집에 가기 마련인데 형은 한쪽 구석에서 돌을 양쪽에 놓고 다이빙 연습을 했다고 해요. 지금처럼 골키퍼 유니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츄리닝 입고서 흙바닥을 구르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예전에는 축구공이 귀하다 보니까 축구공도 없어서 달빛 아래서 다이빙을 했으니. 어린 나이에 자기의 꿈을 빨리 찾은 셈이죠.”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체격과 실력을 겸비한 1류 골키퍼가 제아무리 촌구석에 숨어있다고 해도 그 재능이 감춰질 리가 만무했다. 가장 먼저 오연교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고등학교 무대에서 지금까지 숱한 전국대회 우승과 국가대표를 배출한 이훈 감독이었다.

 

제가 대전동중학교에서 3년간 감독을 했는데 그 때 연교를 알아봤어요. 근성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마침 연교가 졸업을 하는 해에 저도 마산공고로 부임하게 되어서 연교를 스카우트 해갔죠.”

 

중학교 졸업 직전, 잠시 용문고에서 운동을 하기도 했던 오연교는 이훈 감독을 따라 마산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1년 동안 차근차근 고교 무대에 맞는 기량을 쌓은 그는 1977, 마침내 2학년이 되는 해부터 마산공고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77년에는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했고 78년에는 진주MBC배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축선수들이 권재곤, 오연교, 백남수, 정원서 같은 선수들이었고 1학년에는 이흥실, 박노봉도 있었어요.

 

연교가 3학년 때에는 청소년 대표도 했는데 정말 기량이 대단했지요. 대학교에 진학할 때도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달라고 난리가 났을 정도였으니까요.”

 

오연교가 2학년이던 1977, 마산공고는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앙고와 맞붙었다. 당시 중앙고에는 현 제주유나이티드의 정해성 감독이 3학년 주축 멤버로 활약하고 있었다. 결과는 중앙고의 1-0 승리. 하지만 오연교는 이 경기에서 우승보다 값진 선물을 얻게 된다. 바로 정해성 감독과의 우정이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이후 상비군도 같이 하고 나중에는 유공에서 코치(정해성은 스카우터, 오연교는 골키퍼 코치)도 같이 하면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훈련시간 외에 대포도 한잔 하고 스트레스도 풀곤 했지요. 성격적으로 잘 맞았고 정말 의리 있는 친구였어요.

 

당시 골키퍼로서는 정말 인정받았던 친구지요. 굳이 장단점을 비교하자면 제공권이나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때 엉뚱한 골을 먹는 단점이 있기도 했어요. 물론 신체적 조건도 좋고 특히 힘이 좋았어요. 의리도 있고 성격적으로 원만했기 때문에 별명이 돌쇠일 정도였으니까요.”

 

79, 상대팀으로 맞붙었던 최순호 감독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교 형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열린 고등학교 대회에서 상대편으로 경기를 펼치면서 입니다. 저는 당시 충주상고 2학년이었고 연교형은 마산공고 3학년이었죠. 당시에는 흔치 않은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위압감이 상당했어요. 그리고 머지않아 같은 팀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79년 대회를 앞둔 청소년 대표팀이었죠. 많이 친해지게 된 것도 바로 청소년 대표팀에서 동고동락 하는 동안 정을 쌓은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저희가 본선까지 진출해서는 아쉽게 8강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연교형이나 저나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기대를 받았었죠.”

 

오연교는 1979, 청소년 대표로 일본에서 열린 제2회 세계청소년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튀니지에서 개최된 1회 대회에는 이란, 이라크 등에 밀려 본선에 오르지 못했으니 세계청소년대회에서 뛴 첫 골키퍼인 셈. 당시 주축 멤버였던 선수들은 최순호, 김용세, 박윤기, 이태호, 정용환, 이길용과 현재 K리그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상용 등이었다. 한국은 2차전에서 캐나다를 1-0으로 꺾고 3차전에서는 포르투갈과 0-0으로 비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나 아쉽게 첫 경기인 파라과이 전의 0-3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8강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비록, 청소년대회에서 조별예선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대표팀에 발탁되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주전 골키퍼로 뛰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연교에게 있어 너무나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 대표선수 유니폼을 입고 일본 땅을 밟기 까지 너무도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운동을 하려면 어떻게든 돈이 있어야 했다. 장비를 사야했고 옷을 사야했고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합숙비도 충당해야 했다. 실력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며 5남매를 키우는 故오연교씨의 부모님께서 그 모두를 감당하시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했다. 결국 오연교 자신 스스로 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동생 오한교 씨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안 해본 게 없다고 하더라고. 학교 다니면서도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었어요. 공사판에 가서 벽돌 나르고 모래 퍼고, 당시 동네 공사가 많았는데 그런데 다 찾아가서 일을 했다고 그럽디다. 하여튼 집에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었으니깐 혼자 알아서 다 개척해 나갔어요. 그러면서 훈련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하여튼 엄청나게 고생했죠. 예전에 다른 선수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형은 정말 대단했어요. 자기 꿈이 워낙 확고하니깐 그럴 수 있었겠지...”

 

형이 학교 다니면서 축구 할 때는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고 세계대회에 나가고 주전으로 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죠. 정말 힘겨운 환경에서 형 혼자 모든 걸 개척해 나갔던 겁니다.”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입학한 뒤에도 꾸준히 대학선발팀에 이름을 올리는 등, 오연교의 성장과 명성은 계속해 이어졌다. 성인팀에서도 오연교는 단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심히 오연교를 지켜봤던 이가 바로 83년 수퍼리그 참가를 앞두고 있던 유공의 김정남 코치(現 울산현대 감독)였다. 때마침 오연교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때가 프로출범 첫 시즌인 1983년도였다.

 

대학교 시절 경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적극적이고 투지 넘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 기억에 깊이 남아 있었죠. 83년 창단을 앞두고 저희 팀에서 연교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보냈죠. 결국 프로 첫 시즌을 저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연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죠.”

 

행운이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개막된 수퍼리그, 시기가 적절했다. 눈물겨운 시절을 이겨낸 끝에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렸고 프로라는, 이전까지 꿈꾸기 힘들었던 커다란 무대가 바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연교의 힘겨웠던 축구 인생에 다시금 밝은 빛이 비췄다.

 

나만의 영광은 아니겠지. 비록 나 혼자 선택하고 개척해 온 길이지만 결국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이 아닌가.’


프로입단으로 받은 돈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왔어요. 500만원인가 600만원인가 그랬는데 그게 당시로는 엄청 큰돈 이었거든. 온 가족이 다 울었어요. 부모님이 힘껏 밀어주지도 못한 게 한이 되어 울었고 그런데도 혼자서 꿋꿋이 성공해 온 게 너무 고마워서 울었고. 그 이전까지만 해도 집안 살림하랴 자식들 키우랴, 부모님이 이집 저집 이웃들 돈 빌리러 다니는 게 일이었는데 형이 그렇게 돈을 벌어오면서 집안도 살아났죠. 우리집 도와준 이웃들한테도 신세 갚아 나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팀 선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었더라고요. 유공에 바로 입단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다른 팀에 가면 국가대표팀에 뽑힐 가능성이 높아지는 대신 돈 받는 게 적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국가대표팀에 대한 명예나 가치가 대단했었고, 형도 그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그 때까지 모든 걸 자기 혼자서 개척하고 결정했던 형인데 프로입단을 앞두고는 집에 찾아와서 상의를 했었습니다. 결국에는 유공을 택했죠.”

 
한국 프로축구의 뜻 깊은 시작을 알렸던 83년 수퍼리그 할렐루야와 유공의 개막전, 그 떨리는 순간의 현장의 한 가운데에 오연교가 서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의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고 오연교는 당시 대표팀의 판박이나 다름없었던 할렐루야의 창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 유공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휘슬이 울린 뒤 100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전광판에는 1:1의 스코어가 새겨졌다. 비록 후반 25, 박창선의 중거리슛을 막지 못해 한 골을 내주긴 했지만 당시 또 하나의 대표팀으로 불렀던 강호, 할렐루야를 1실점으로 막아냈다는 것은 결코 나쁘다 할 수 없는 플레이였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원년, 팀이 치른 16경기 가운데 오연교는 9경기에 출전해 10실점의 기록을 남겼다.

 

첫 시즌의 기록도 그리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오연교의 기량이 본격적으로 만개 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84년이었다. 84수퍼리그에서 팀이 치른 28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그 가운데 허용한 실점은 고작 22개일 뿐이었다. 함께 유공은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 챔피언 결정전에도 진출했다. 비록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대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최종 준우승에 그쳤지만 유공으로서는 13 9 6 38득점을 기록한, 충분히 인상적인 시즌이었다그리고 그 해 연말 치른 프로축구시상식에서 오연교는 시즌 베스트11에 선정되며 한국 최고의 수문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오연교는 꿈에 그리던 성인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오연교 선수가 있을 때만 해도 코칭스태프가 현재처럼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GK전담 코치 같은 것도 없었죠. 골키퍼 선수들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보다는 다른 필드플레이어들과 같이 체력훈련 같은 기본훈련을 거의 다 소화한 다음에 개인훈련을 했죠. 알아서 자신의 훈련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오연교선수는 참 철두철미 했습니다. 정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특히 다이빙 훈련이나 볼 캐치 연습에서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훈련을 했었죠. 기본적으로 기본훈련과 함께 개인훈련도 정말 소홀히 하지 않았죠.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골키퍼로서 이름을 세웠고 저 역시 그 부분을 높이 살 수 있었겠죠.”

 

84년 당시 유공팀을 이끌었던 김정남 감독의 오연교에 대한 평가다. 사실 김정남감독과 오연교의 인연은 꽤나 깊은 편이다. 프로 첫해 소속팀 코치부터 시작해 85년부터는 유공의 감독과 주전 골키퍼로 한 시즌을 보내며 신뢰 깊은 사제지간의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84시즌에 치른 모든 경기의 수문장 자리를 오연교에게 맡겼다는 것은 김정남 감독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성인대표팀 승선 역시 대표팀 코치자리를 맡고 있었던 김정남 감독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오연교 선수는 이미 프로에서 꾸준히 활약을 지켜봐 온 터라 믿고 기용할 수 있었죠. 대신 그래서 당시 프로리그 경기에는 자주 출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대표선수들은 거의 합숙훈련에 참가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팀이 달라졌다고 선수의 기량은 틀려지지 않죠. 대표팀에서도, 프로팀에서도 믿음을 줄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1985 3 10,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월드컵 1차 예선전이 바로 오연교의 성인대표팀 데뷔전이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원대한 목표로 꿈꾸는 대표팀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경기를 영광스럽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오연교는 한 개의 골을 허용했고 공격수들은 단 하나의 득점도 올리지 못했다. 0-1. 이 경기의 패배로 당장 월드컵 2차 예선 진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대표팀의 수장이었던 문정식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게 되었고 코치였던 김정남감독이 사령탑을 이어 맡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대표팀이 전임감독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라 대표팀과 유공, 두 개의 감독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프로에 있다가 대표팀 경기 한 달 전에 모여서 훈련하고 큰 대회 앞두고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해서 장기 합숙하고 그런 방식이었죠.”

 

첫 경기의 패배는 아쉬운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소속팀에서 함께하던 감독과 대표팀에서도 같이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차라리 오연교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김정남 감독은 이후 벌어진 월드컵 예선에서 팀 분위기를 반전, 32년만의 꿈에 그리던 월드컵 본선진출의 꿈을 이뤄냈다. 오연교 역시 최인영, 조뉘麗?번갈아 가며 팀의 골문을 지키며 적지 않은 공헌을 했고 월드컵 출전 최종명단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집에서는 경사가 난 거였지. 형이 프로에서 돈 벌면서 집도 살아났고 게다가 대표팀에까지 뽑히니깐 더 기쁠 수가 없었어요. 동네잔치도 열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고... 이래저래 동네 이웃들에게 신세 진 것도 있었는데 그 때부터 다 갚아나갔죠. 동네 분들 여행도 시켜드리고 월드컵 평가전 한다고 하면 동네 분들 초청해서 경기도 보여드리고 그랬습니다. 사실 해미 이쪽 동네가 시골이니깐 국제경기 볼 일이 거의 없잖아요. 나중에는 가끔 연예인 축구단도 데리고 와서 경기하고... 아무튼 형이 해드릴 수 있는 건 다 해드렸어요.”

 

하지만 월드컵에서 출전했던 세 경기는 오연교에게 있어 너무나 쓴 경험이었다. 평소 때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실수들, 그리고 많은 실점들. 이곳저곳에서 비난, 혹은 비판의 목소리를 뱉어냈고 남들 모르게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기도 해야 했다. 결국 월드컵 이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했던 노력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이대로 내 축구인생을 끝낼 순 없지 않은가. 얼마나 눈물 나는 노력을 해 왔었는데...다시 시작 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런데... 그런데...’

 

욕을 좀 먹긴 했지만 월드컵 끝나고 나름대로 형이 느낀 게 많았어요. 그래도 어떻게 올라선 대표팀인데 쉽게 내려올 순 없잖습니까? 월드컵 끝난 다음에 있던 아시안 게임을 목표로 다시 훈련에 매진했어요. 태릉선수촌 가서도 정말 악바리처럼 훈련 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또 너무 의욕이 앞서다 보니까 무리가 갔나봐. 무슨 은행팀이랑 연습경기를 하는데 걷어 차여서 턱뼈가 다 나갔었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고.... 몇 달 동안 운동 쉬게 되고, 그 때 부터 슬럼프가 온 겁니다

 
퇴원해서 재활훈련 하는데 그냥 형 혼자서 알아서 했나 봐요. 친구랑 잘 알지도 못하는 산에 가서 아침에 뱀먹고 웨이트하고 내려가서 밥 먹고 그렇게 2~3개월 따로 훈련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그 이후로 좀 힘들었지...”

 

월드컵에 출전한 86시즌, 오연교의 프로경기 출전은 단 세 번뿐이었다. 월드컵 이전 까지는 대표팀 차출로, 월드컵 이후 에는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설 기회가 없었다. 부진은 87시즌까지 이어졌다. 역시 단 세 차례 출전, 실점은 무려 8개였다. 유공팀의 주전 골리는 어느덧 이문영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듬해, 오연교의 소속팀은 유공이 아닌 현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오연교의 불씨가 꺼지지는 않았다. 힘겨운 역경 끝에 만들어 온 축구인생이었다. 88시즌, 오연교는 현대의 유니폼을 입고 17경기 출장, 12실점의 기록을 남기며 재기의 불씨를 다시금 불태웠다. 비록 다시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는 데는 실패했지만 1990년까지 현대의 주전골키퍼로 활약, 프로선수 생활을 은퇴할 때 까지 프로무대의 역사 한 켠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새겨 놓았다.

 

프로생활을 마친 뒤 오연교는 예의 다른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랬듯 곧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프로선수로 뛰며 잠시 인연이 멀어졌던 선수들과의 친분도 다시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대표팀 시설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냈던 최순호 감독을 비롯해 몇몇 선수들과 함께 동호회를 만들어 이런 저런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은퇴 후에 연교 형이랑 같이 활동했던 것이슈퍼클럽이라고 있습니다. 96년 정도로 기억하는데요.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수업을 준비하던 선수들끼리 뜻을 모아 꾸준히 운동도 하고 지도자에 관련된 정보도 나누자는 취지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30대 중후반 나이의 대표팀에서 갓 은퇴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었죠. 기업들의 후원도 조금씩 있었어요.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씩 팀을 만들어서 프로축구 오픈 게임으로 그 지역 고등학교, 대학교 팀과 경기도 치르고 나중에 그 학교에 후원도 해 주는 행사를 가졌구요. 일본 대표팀 OB와의 친선경기도 세 차례 정도 가졌습니다. 그렇게슈퍼클럽활동을 하면서 연교 형이랑 계속 만날 기회를 가졌고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죠.”

 
지도자 경력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은퇴 후 처음 몇 년간 지도자 공부를 한 뒤 1994년에는 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발탁되며 미국월드컵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전남드래곤즈의 골키퍼 코치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 오한교씨는 형의 지도자 생활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지도자 말고 딱히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도자의 길은 자기 주관과 개성이 뚜렷한 오연교의 성격과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형이 워낙 무언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스타일이었죠. 하지만 좋아하던 선수생활 끝내고 나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결국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전국 순회 골키퍼 코치 이런 행사도 가지고 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또 골키퍼 코치로 참가했어요. 나중에는 전남드래곤즈에 골키퍼 코치로 가고...”

 

“1999년도에 부산 대우 로얄즈 감독 하시다 돌아가신 신윤기 감독 아시죠? 그 분이 연교형 친구분이셨어요. 사실 지도자를 한다는 것이 경기 안팎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거든요. 프로에 있었고 태극마크도 달았었고, 선수생활에서 이 정도 했으면 나중에 중고등학교 지도자 못하거든. 웬만하면 프로팀, 적어도 대학팀은 맡아야 다른 사람들 눈총을 안 받아요. 그렇게 되려면 막말로 좀 아부 같은 것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형 성격이 워낙 자유분방하고 직선적이어서 절대 그런 걸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스트레스 받으면 술로 풀고, 결국 스트레스성 간경화 이런 걸로 몸이 안 좋아지셨고 그렇게 돌아가시게 된 거죠.”

 

6년 전, 9 27일이었다. 선수생활 은퇴 후 계속 앓아오던 지병이 생각보다 심하게 퍼졌고 결국 40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왕년의 대표팀 수문장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직은 하지 못했던 일들, 하고 싶었던 꿈들이 많이 남아있었던 그였다. 최순호 감독 역시 그 때의 안타까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연교 형이 지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2000년 가을 이맘 때 쯤 이었을 거예요. 연교 형이 전남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죠. 오랜 시간동안 가까이 서로 의지하고 노력하고 힘을 나눠 온 오랜 벗이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죠. 연교 형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구요.”

 

참 아쉽습니다. 형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목표와 꿈이 아직 남아 있었을 건데 그런 계획을 제대로 펼쳐 볼 기회도 다 가져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어요. 형이 참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몸이 일찍 시들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도 아쉽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이지만 형과 쌓아왔던 추억과 흔적들은 쉽게 잊지 못할 겁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오연교의 가족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너무나 큰 슬픔이고 충격이었다.

 

형의 죽음에 아버지께서 가장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어머니께서는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이러셨는데 아버지는 아들 놈 먼저 보내시고 의자에만 앉아 담배 피시고 그러시더라고노인 양반들은 심리적으로 마음이 약해지면 병이 온다고 하잖아요. 저희 가족 대대로 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없었는데 아버지한테는 충격이 너무 컸나 봐요. 형이 그래도 고생하고 자수성가해서 집 다 살리고 했는데 딱히 해 준게 없어서 더욱 그랬나봐요. 결국 아버지도 얼마 가지 않아 돌아가셨고....”

 

사실 전남드래곤즈 코치 끝나고는 감독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거기 감독하시던 박이천 선생님이 전남 드래곤즈 코치 끝나면 TO를 남겨놓고 형 부른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형 상 치르고 짐 챙기다 보니 거기 가시려고 애들 가르칠 수 있는 자료집 가방 두, 세 개는 싸놓으셨더라고. 가슴이 아팠죠.”

 

프로원년인 83년부터 1990년 까지, 8번의 시즌을 치르는 동안 오연교는 97경기에 출전, 97개의 실점을 기록했다. 아쉽게도 소속팀과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린 추억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서 보기도 했지만 영광보다 더 큰 비난의 화살을 맞기도 해야 했다. 뜻밖의 부상과 슬럼프에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고 은퇴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의 굴레와도 힘든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시골 해미라는 마을에서 그저최고의 골키퍼가 되겠다.’라는 일념 하나로 모든 역경을 헤쳐 온 고인의 도전정신은 남은 이들의 기억에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기에 충분했다. 그 누구도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빛을 비춰주지 않았지만 고인의 가슴 속에 품었던 의지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더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세瓚?떠나고 말았지만 지금껏 가려져 있던 그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눈물이 난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이루지 못한 꿈들이 많은데... 아이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며 더 많이 기뻐하고 싶은데, 결코 잘 나지 않았던 나보다 더 멋지고 빼어난 수문장을 내 손으로 직접 키워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이제는 없구나. 내 방 한 켠에 있을 지도서들, 자료들, 내가 기록하고 만들어 놓은, 그리고 직접 해 보고 싶었던 지도방법들.   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아. 내 모든, ‘열정이란 것을 태우며 지금까지 살아 왔잖아. 비록 이렇게 눈을 감지만.....후회하지는 않아....’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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