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기의 전설은 아직현재진행형이다. - 신홍기

전설은 일반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내력이나 위대한 성과 혹은 기이한 체험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전설이 태동하며 그 내용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에 대해 경외감을 표시할 때 비로소 전설의 진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전설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이야기 혹은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여기아직도” “여전히” “지금도라는 부사를 총 동원하여 설명해야 할현재진행형전설 신홍기가 있다.


2008
<삼성 하우젠 K리그 2008>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수원의 무패행진이다. 패배를 모르고 달려가는 수원은 무패행진의 기록을 깨고 전설로 남고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수원의 최다연승 기록은 1998 8연승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원은 같은 해 수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코리아컵, 바이코리아컵 K리그까지 그야말로 1999년의 K리그를 모두 정복했다. 2008년의 수원이 넘어야 할 산은 다름 아닌 1999년의 수원인 것이다. 그 중심에는 수원의 주장 신홍기가 있었다. 울산에서 데뷔해 탄탄한 기량을 자랑하다 90년대 후반 수원의 전성기를 이끌고 현재에는 전북의 코치로 K리그의 한 부분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 신홍기. 그의 살아있는 축구 이야기를 파헤쳐보자.


만능 스포츠맨 신홍기, 큰형의 도움으로 축구화를 신다.
신홍기의 축구 입문은 필연이었다.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탁월한 실력으로 모든 것을 뒤집고 축구의 길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는 축구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큰형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어요. 축구부가 없는 대신에 시합이 있으면 잘 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시합을 하고 끝나면 흩어지고 그랬어요. 우리 가족이 3형제이고 제가 막내인데 그 당시에 큰형부터 시작해서 저까지 모두 운동을 잘했어요. 형들도 모두 그렇게 했고요. 5학년 때 마산에 있는 학교에서 어떻게 보면 처음 스카우트을 당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다른 학교와 시합을 했는데 우리학교가 졌어요. 그런데 이긴 학교에서 또 나를 스카우트 했어요. 결국 소년체전까지 가게 되었죠.”


진짜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되었어요. 공부를 할 것인지 운동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어요. 그때 전국 초등학교 시도대항 대회가 부활이 되었어요. 그때 잠시 몸담았던 학교가 경남 우승을 해서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우승한 축구부 친구가 저에게 와서 자기네 학교로 와서 축구를 같이 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내서 제가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시키라고 했어요. 기로에 서있었죠. 그 때 큰형이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결국 전학을 해서 시합에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아버지하고 약속을 했어요. 시합에 나가서 골을 넣으면 계속 운동을 하는 것이고 못 넣으면 공부를 하는 것으로요. 결국 시합에 나가서 결승골을 넣었죠. 그래서 지금까지 축구를 하게 된 것 이구요.”


큰 형이 키가 조금 작은데 축구를 많이 좋아했어요. 큰 형의 영향으로 축구를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핸드볼을 했어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운동부가 없어서 대회가 있으면 핸드볼, 씨름, 육상 등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고루고루 활약했죠.”

 
대학교 1학년의 신분으로 감투상을 받다.
감투상에서 감투의 의미는 한자로 敢(감히 감) (싸울 투)자를 써서 과감하게 싸움 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홍기는 화려한 멤버로 주전의 자리를 꿰차지 못한 대학교 1학년 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꿰차 춘계대회에서 감투상을 수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격수로 활약하던 그의 재능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축구를 시작할 때는 센터포드였어요. 지금 키는 중학교 3학년 때 키에요. 소년체전에 나가서 6개월 만에 키가 30cm나 자라버렸어요.”


대학을 한양대로 진학 했는데 구성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시합에 주전으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주전자나 나르고 있었죠. 저하고 고향에서 라이벌이라고 불렸던 친구가 명지대에 갔고 저는 한양대에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첫 게임에서 명단에도 못 들고 있는데 친구는 대통령배에 나가서 결승골을 넣은 거예요. 고향에서는 저랑 고등학교 때 라이벌이었는데 대학교에 가서 그 친구가 첫 대회에서 그렇게 잘하니깐 여기저기서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도 노력을 많이 했는데 기회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마침 선배가 부상을 당했어요. 그때 기회가 온 거에요. 춘계시합에서 그 자리에 제가 경기를 뛰게 되었어요. 그 시합에 내가서 4게임 연속 5골을 넣었어요. 비록 4강에서 떨어졌지만 1학년이 감투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시합이 많이 기억에 남아요.”


전설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꼭 나오는 것이 학창시절 축구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 지금까지 업
을 이어오고 있지만 꼭 한번 쯤 방황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질풍노도의 혈기왕성한 시기에 누구나 겪는 과정이 전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방황기와 절친한 친구 이야기, 그리고 학창시절 그를 이끌었던 가장 인상 깊었던 지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저하고 이흥실 코치(현 전북 수석코치)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인데 명문학교일수록 군기가 세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도망간 게 아니라 그 나이 때는 그런 걸 경함하고 싶어서 그랬을 거예요. 가출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결과야 뻔 하지만 그 나이 때는 한 번 쯤 구속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아요. 꼭 선배들이 괴롭혀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초등학교 때 진해 덕산초등학교가 경남 대표로 나갔었는데 그때 경남에서 잘하는 아이들 11명이 모였어요. 그 중에서 지금 K리그에 활약하고 있는 친구가 김귀하(현 경남 코치)에요.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랭킹 1위였죠.”


중학교 때 제가 가는 학교가 창단을 했어요. 마산중앙중학교 하나가 유일하게 축구부가 있었는데 창신중학교가 창단을 했어요. 그때 김종순 감독님이 나를 데려가려고 거의 매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니 와서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진학을 하고 당시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감독님께서 생활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셨죠. 그런데 고등학교 때 사이가 안 좋았어요. 같은 재단인 창신고등학교를 안가고 마산공고를 가서 감독님이 조금 섭섭하셨나 봐요. 조금 소원했었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또 다 잊혀지더라구요.”

 
너 마크맨이 최순호, 꼭 잡아!
학창시절 뛰어난 체구 때문에 그는 훌륭한 공격 자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K리그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축구인생에서 큰 변화가 생긴다. 그의 첫 번째 팀은 울산이었다. 설레는 K리그 데뷔의 순간, 그는 아직도 그 짜릿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K
리그에 처음 와서 차범근 감독(현 수원 감독)을 만나고 포지션이 바뀌었어요. 지구력이랑 기술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최강희(현 전북 감독), 변병주(현 대구 감독)등 멤버가 너무 좋았어요. 차 감독님이 사이드를 한번 서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조금 잘 했나 봐요. 포항과의 개막전인데 왼쪽 사이드를 맡게 되었어요. 당시 마크맨이 최순호(현 현대미포조선 감독)였어요. <최순호야 꼭 잡아.>라고 감독님이 짧고 굵게 지시하셨죠. 그래서 기억에 아주 오래 남아요.”


데뷔전은 포항과의 개막전이에요. 40게임 중 39게임을 뛰었어요. 한 게임은 경고누적으로 못 뛰었죠. 2년차 때 감독님이 불면증이 있었는데 제가 워낙 잠을 잘 자서 같이 방을 쓰면 잠을 잘 잘까 싶어 저랑 룸메이트를 했어요. 그래서 그때 감독님과 같은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기억에 남아요.”

  

울산에서 수원으로 이적, 그리고 결승에서의 얄궂은 만남.
가장 기억에 남는 K리그 경기는 수원으로 이적했을 때에요. 96년에 수원이 창단을 하면서 선수수급을 위해서 기존 팀에서 베스트11을 빼고 지명을 하면 보내주게 되었어요. 수원이 창단을 하면서 선수를 뽑아 가는데 김호 감독이 당시 창단 멤버였는데 저를 지목한 거예요. 베스트를 지명하면 안 되는데 저를 지명해서 결국 성사는 안 되었죠. 그러다가 2년이 지나고 좋은 분위기에서 수원으로 이적하게 되었어요.”


“97
년도에 이적을 하고 98년도에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이랑 만났어요. 96년 울산이 우승할 때는 수원과 만나 울산이 우승했었는데 98년도에 상황이 반대가 돼서 만난 거예요. 울산이 먼저 원정이었는데 파울이 났어요. 그런데 기분이 이상한 게 제가 차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당시 키커가 고종수였는데 내가 찬다고 했죠. 그런데 골이 들어갔어요. 결국 결승골이 돼서 수원이 우승을 했어요.”


수원으로 이적할 때 나이가 31살 이었는데. 2의 축구인생을 하고 싶었어요. 5년만 좋아하는 사람과 축구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 제가 제2의 축구인생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축구를 좀 알고 미쳐보자는 마음으로 뛰었어요.”

 

역대 최강의 팀인 1999년 수원, 그 중심에 서다.
현재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는 수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1999년의 수원과 비교가 많이 된다. 1999년 당시 수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홍기는 수원에서는 유일하게 2년 연속 주장을 맡으며 수원의 중심이자 군기반장으로 확실한 역할을 했다.


“1999
년에는 선수들도 좋았어요. 시합을 나가면 3골을 먹어도 4골을 넣을 수 있는 전력이었어요. 실제로도 3골을 먹고도 4골 넣고 역전하기도 했었죠. 선수들 간에 눈빛이 맞았어요. 팀이 단합이 잘 되었어요. 운동도 힘들게 시키지도 않고 선수들에게 자율을 주었어요. 승리의 흐름이 잘 이어졌죠.

지금 수원은 흐름이 아주 좋아요. 좋은 멤버로 구성되어 있으니 만큼 선수들을 편안하게만 해주면 잘 될 것 같아요. 자유롭게 운동을 잘 할 수 있게 하면 좋은 성적을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창단하는 팀의 단점은 융화가 잘 안 되는 거예요. 감독님도 그런 부분을 많이 생각하셨어요. 한국 축구가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단합이 잘 된 팀은 이기기 힘들어요. 프로가 돈이 있기 때문에 이기심이 생기기가 쉬워요. 수원은 다른 팀에서 선수들이 모이기 때문에 단합이 부족했어요. 잘 할 때는 잘하는데 못 할 때는 너무 못했죠. 누가 와서 잡아줘야 할 상황이었죠.”


저를 꼭 수원에 데려가고 싶었던 이유가 다부진 면에서 주장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체계가 없었던 것을 많이 잡았어요. 융화를 많이 시키도록 노력했죠. 하지만 부담도 많이 느꼈어요. 동료나 후배들에게 욕은 들었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위계가 잡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람을 느꼈어요.”

 
아쉬움이 남는 은퇴
그는 2001년 은퇴하는 그 해에도 30경기에 출장하며 데뷔부터 은퇴까지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11년의 K리그 생활 동안 336경기출전 35 42도움의 기록을 남겼다. 하향곡선이 아닌 곧은 직선으로 선수생활을 한 셈이다. 하지만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은 아쉽게도 부상이 이유였다. 더 뛰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지만 큰 부상으로 인해 그는 너무도 아쉽게 선수로서 K리그에게 안녕을 외쳐야만 했다.


바깥쪽은 부러지고 안쪽은 인대가 다 나갔어요. 큰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어요. 은퇴하던 해 까지 많은 경기를 소화할 수 있었던 비법이 있다면 몸 관리라고 생각해요. 몸 관리는 프로로서 당연한 것 이잖아요. 시합에 나가서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꼭 다쳐요. 노장 소리를 들으면 밖에 나가서 노는 것도 줄여야 해요. 그런 것이 관리인 것 같아요. 쉬는 날 돌아다니고 그러면 나중에는 부상이 와요. 30살이 넘으면 진짜 관리라고 하는 것이 중요해요. 보약 먹고 이러는 것 보다 집에 와서 잘 쉬고 잘 먹고 그러는 게 관리인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시에 최다출장기록이 338게임이었어요. 김경범(당시 부천FC)선수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K리그에 와서 가서 그런 기록을 남겼어요. 저는 그 기록을 깨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수비수니까 골에 대한 욕심보다 최다출장기록에 욕심이 있었는데 2게임을 남기고 부상을 당해서 은퇴경기도 못하게 되었죠. 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있어요.”


신홍기는 현역 시절 화려한 전성기를 구사하며 K리그의 기록에 또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토록 남을만한 업적을 세웠다. 비록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은 아쉬움을 잔뜩 남긴 채 끝나버렸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지도자로서 새롭게 발돋움한 그의 이야기, 전북의 코치로서 다시 K리그의 한 축에 서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아직 못 다한 그의 모든 이야기가 <신홍기의 전설은 아직현재진행형이다. >에서 계속됩니다.

선수시절 화려한 성적표를 남긴 신홍기는 그 명성 그대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선수의 마지막 마침표를 아쉽게도 부상으로 인해 깔끔하게 찍지는 못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산뜻한 첫 걸음은 성공적이었다. 지도자로서의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야기와 아직 못 다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학원축구 감독의 경험
현역 은퇴 후 신홍기는 수원 삼일공고 축구부 감독으로 탈바꿈한다. 더 원대한 목표를 위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소중한 경험을 쌓고 싶어 시작한 학원축구 감독의 경험은 그에게 많은 고민을 남겼고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수원에서 생활을 하다보니까 경수유소년축구클럽이랑 친분이 생겼어요. 처음에 어린이 축구교실로 시작을 하다가 좀 인원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초등학교와 중학교 팀을 만들었어요. 이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야 해서 고등학교를 창단하게 됐어요. 그런데 저더러 팀을 맡아달라는 거예요. 나는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경험삼아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감독으로 있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프로랑은 다르고 또 내가 배울 때 랑도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전문적으로 축구만 하는 축구부라기보다는 클럽의 개념으로 운동을 하던 아이들이다 보니 수준이 조금 떨어졌어요. 경수클럽 취지가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진학의 문제가 있으면 조금 달라져요.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죠. 조금 수준이 떨어지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진주MBC배 대회에 데리고 나가 8강에 들어갔던 게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선문대 2학년에 올라가는 아이와 전주대 2학년짜리 제자가 있어요.”

 
전북 코치로의 변신 - K리그로의 귀환
삼일공고 감독으로 지도자의 첫 걸음을 뗀 신홍기는 이후 전북으로 자리를 옮겨 지도자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전북에서 그는 달콤한 지도자로서 첫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고 외국인 선수 길들이기의 총책을 맡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경험을 쌓게 되었다.


전북 코칭스텝으로 합류는 최강희 감독님이 부임하시 난 뒤에 이루어졌어요. 2005년에 전북이 FA 8강전을 수원과 김해에서 한 적이 있어요. 승부차기까지 가서 전북이 이겼죠. 그 경기 직후에 감독님께 전화가 와서는 갑자기 제 안부를 물으시더니 짐 싸서 마무리 하고 오라고 말씀 하시더라 구요.”


우리 팀에서 눈여겨 볼 선수는 서정진 선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선수를 아무도 몰랐었어요. 드래프트에 명단이 올라와서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는데 감이 좋았어요. 감독님께 좋은 선수라고 추천해서 선발하게 되었어요. 다른 팀들도 경합이 있었는데 전북이 잡은 거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왔지만 빨리 경험을 쌓고 하면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믿어요.”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기쁨은 말로는 표현을 못하죠. 선수로서 우승을 많이 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우승은 처음이니까 남달랐죠. 8월까지는 예선전을 같이 하다가 10월까지는 외국인 선수 관련 업무 때문에 브라질에 있었어요. 울산과 경기에서 4:2로 역전했다는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접하고 나서 돌아왔죠. 우승의 기쁨은 말로 표현을 못하죠. 드라마였다고 하잖아요. 다시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
전북이 기대보다 성적이 안 좋아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선수 한 명이 와서 우승권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재진이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팀이 초반 분위기를 잘 못 탄 것 같아요. 다 모여서 훈련을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요. 한 명만 못해도 표가 나는 것이 축구에요. 선수들 자신들도 경기 나가면 역전패를 자꾸 당하니까 자신감도 잃고 그러다보니 힘들었어요. 지금 10게임 정도 지나다보니 선수들 간에 융화도 되고 힘이 조금 생기는 것 같아요.”


분위기를 타야 하는데 그 분위기를 타는 것이  힘들어요. 젊은 선수들이 많다보니 한 번 지면 푹 쳐지거든요. 지금 분위기를 타고 있으니까 아마 우리가 원했던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나마 걱정이 덜한 것이 6위와 승점차가 적다는 거예요. 지금 2군 선수들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많이 기회를 주려고 하고 있어요. 2군에서는 전북이 1위를 달리고 있거든요. ”

 

코치로서의 꿈 보다 현재의 역할을 먼저 강조하고 싶다.
신홍기에게 코치로서의 가치관을 물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지도자로서 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원대한 꿈과 목표보다는 현재의 역할을 강조했다. 차근차근 배우고 준비하다 보면 꿈은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저는 고교 감독도 하고 코치도 하면서 어려울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 같아요. 전북도 많이 힘들었는데 감독님이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그것을 보고 배우고 있어요. 경험 많은 분들이 감독이 되는 이유가 연륜을 통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때문일 거예요. 내 나름대로도 많이 배우고 있고 잡초근성을 배우고 있죠. 꾸준히 선수들과의 가교역할을 해서 성적을 내게 하는 것이 목표인 것 같아요. 코치로서 꿈 보다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빨리 K리그 감독이 되고 싶죠. 그런데 저는 절대 서두르지 않고 잘 준비하고 싶어요. 그러다가 영원히 코치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감독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 위치해서 꾸준히 잘 준비하고 싶어요. 꼭 목표가 K리그 감독이라기보다는 뭐든지 잘 준비를 하고 싶어요. 와이프도 지도자가 되려면 영어를 배우라고 해요. 이렇게 부족한데 어떻게 감독이 되겠어요.(웃음) 차분히 준비를 잘 하고 싶어요.”


(
나의 현역시절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선수가 있다면?) 한 명 있어요. 정종관 선수요.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지만 제가 몸이 그 친구만 했어요. 키도 비슷하고 몸도 호리호리 하고 스타일도 비슷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성격도 그렇고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그런 부분이 많이 닮은 것 같아요.”


(
선수로서 경기장에서 뛸 때가 좋은가 지도자가 좋은가?) 선수 때가 훨씬 좋죠. 선수 때는 감독과 코치가 지시를 내리지만 그래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잖아요. 지도자로서 선수들마다 특성도 있고 다른데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 힘들어요. 감독의 의도를 잘 알아듣고 움직이는 선수들은 더 나은 선수가 되는데 고집스럽게 하는 선수들은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아요.”


(
코치로서 경기를 바라보다 보면 차라리 내가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가?) 처음에 왔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39살에 왔는데 처음에는 2군 등록까지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하지 말라고 만류하셔서 안했죠. 그때 까지만 해도 열정이 있었죠. 물론 자기가 자기 몸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당시에는 전지훈련에 가서 게임도 같이 뛰고 그랬어요.”


신홍기의 아직 못 다한 이야기
신홍기의 프로필을 보면 보물 1호가 가족으로 되어있다. 축구선수를 하다보면 가족에게 많이 신경을 못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가족이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무엇보다 묵묵히 뒷바라지 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 정서상 쉬는 날에는 가족끼리 놀러가길 바라잖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 와이프에게 고마운 게 내가 운동하는 동안은 잘 배려해 주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집에 아빠는 거의 없는 거예요. 아빠가 쉬는 날 같이 놀러가고 싶은데 우리는 노는 날 시합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많이 빵점 아빠죠. 1하고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어요.”


아들도 축구를 하려고 하는데 아이 엄마가 반대를 해요. 조금 지나서 다시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원체 축구를 좋아하거든요. 축구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본인이 좋아하는데 안 시켜 줄 수도 없고 고민이 많아요. 지난 5 5일에 전주에 게임 보러 내려왔었어요. 그런 게 아직 어색해요. 어린이 날이라고 선물주고 무슨 날이라고 선물 받고 하는 게 어색해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으니까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은퇴를 하고나서 참 힘들었어요. 나라는 존재가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에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은퇴 후 6개월 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했어요. 그 때도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 준 와이프가 너무 고마워요.”

 
그에게 있어서 K리그는 목표이자 꿈이었고 좋은 추억과 소중한 기억을 가득 품고 있는 대상이다.
K
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현재도 진행 중인 K리그의 전설로서 과거와의 차이점을 물었다.


지금 선수들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선수들은 모두 특징이 있었어요. 킥이 좋다거나 스피드가 빠르거나. 그런데 요즘 선수들은 특징이 없어요. 그런 부분이 예전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선수들은 또 정신적으로도 나약한 것 같아요. 힘들 때 버티고 이겨야 하는데 자꾸 피해가려고 해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한 명 있어요. 지금도 울산에서 무슨 날이 있으면 선물을 보내주는 팬이 있어요. 그 팬도 나이가 서른 네 다섯 살이 되었을 거예요. 여자 분이신데 꾸준히 저를 좋아해주셔요. 운동장도 자주 찾아주시고 응원도 잘 해주셔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축구를 해야죠. 다시 태어나면 더 좋은 시대겠죠? 그럼 또 축구를 해야죠. (축구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매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운동을 다 복합시켜 놓은 것 같아요. 그게 매력이에요. 육상은 뛰기만 하면 되고 역기는 들기만 하면 되고 핸드볼은 공을 던지기만 하면 되지만 축구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하거든요. 몸싸움도 해야 하고 스피드도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하거든요.”


(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축구를 통해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는?) 일단 어느 정도 다 이뤘다고 생각해요. 선수 때는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고 지도자로서도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듯이 저도 그런 꿈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 보다 내가 현재 하는 일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꿈이에요. 꼭 국가대표 감독이 꿈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가든 지도자를 할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
마지막으로 신홍기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 마디) 일반 사람들은 내가 전북에 애착이 없다거나 전북 출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어느 팀에 가든 그 출신이 아니더라도 내가 속한 팀을 좋아하니깐 일을 하는 것이에요. 애착이 없이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도 않는 일이구요. 그런 일 때문에 저를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작은 실수 때문에 애착이 없다는 말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팬 여러분들도 응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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