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세계청소년대회 4강의 기적 - 김풍주

역대 K리그 최고의 수문장은 누구일까? 원년 최우수 골키퍼 조병득을 비롯해 15번째 ‘K리그 전설의 주인공 故오연교, 10년간 최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김병지, 이운재 등. 각자의 기준과 선호도에 의해 다양한 골키퍼가 후보에 오를 것이라 생각된다. 재빠른 순발력, 안정적인 경기운영, 탁월한 상황 판단 능력 등 골키퍼가 가져야할 다양한 능력들이 그 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에 뛰지 않은 인물들의 우열을 비교하기에는 그것도 격투기와 같이 1:1 대결을 펼칠 수 없는 분야에서의 비교는 더욱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들은객관적이라는 명목아래 데이터를 수치화하고 그것으로나마 우열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83, K리그 원년부터 2006년까지 24시즌 동안 12명의 최우수 골키퍼가 배출되었다. 대부분 대표팀 골키퍼를 겸업했고 소속팀과 국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이다.

 

그 중 유일한 외국인 출신인 신의손이 가장 많은 6번의 이름을 올렸고 이운재와 김병지가 3회로 그 뒤를 잇는다. 포워드는 골로, 미드필더는 어시스트로 자신의 진가로 입증한다고 했을 때 골키퍼에 가장 중요한 수치는 역시 실점률. 12명의 역대 골키퍼 중 경기당 실점률이 1.0 미만인 선수는 단 두 명 존재한다.

 

올 시즌 골키퍼 상을 수상할 박호진 87, 91 시즌 최우수 골키퍼 김풍주. 경기당 0.93골의 실점률의 박호진이 아직 K리그 100경기도 출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1경기에서 158실점으로 경기당 0.87골을 허용한 김풍주의 기록은 쉬이 넘볼 수 없는 기록임에 틀림없다. 6회 수상의 신의손도 1.1, 월드컵 4강 주역 이운재도 1.05골에 그친다. 역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야신의 A매치 0.9골의 실점률 보다도 나은 수치다.

 

83세계청소년대회 4강의 기적, K리그 3회 우승, 2회의 최우수 골키퍼 선정에 빛나는 김풍주가 17번째 ‘K리그 전설의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그냥 축구를 좋아했어요. 제가 살던 곳이 시골(경기도 김포)이었는데 당시에 흑백TV로 축구를 보면 동네가 난리가 났어요. 워낙 인기가 있었잖아요. TV 보면서 축구에 매료가 됐고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공을 차고 그랬어요. 중학교 고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거든요. 해봐야 고작 학교 특별활동정도였어요.”

 

그저 동네의 공차는 아이들과 다름없었던 김풍주. 공차는 것이 좋아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여느 선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축구를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통상적인 경우에는 아무리 늦게 축구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전에 육상이라든지 다른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정말 평범했다. 단지 남들보다 키가 컸을 뿐. 게다가 처음으로 보러 갔던 축구부 테스트도 낙방이었다. 불과 몇 년 후에 세계를 뒤흔들 골키퍼를 낙방시켰다고는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통진종고에 축구부가 있어서 테스트를 받으러 갔어요. 근데 탈락했지요. 그러던 찰나에 양곡고등학교에 축구부가 창단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축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시골에 있으면서 농사일하고 밭일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냥 농사짓는 거보다는 운동을 정말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너무 적응하기가 힘들더라구요. 다른 선수들은 계속운동을 해 오던 애들이라 괜찮은데 동계 합숙하면서 따라가기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기합 받고, 맞고 이런 선후배 관계도 엄청나고. 집에서는 한 대 안 맞고 자랐는데 너무 힘들고 슬펐거든요. 이걸 과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많이 고민했어요.”  

 

그는 외도를 했다. 하지만 축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돌아가려 마음을 먹었다.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계추를 뒤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해프닝은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만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안용 중학교로 내려갔어요. 양곡에서는 골키퍼를 하라고 했거든요. 키도 크고 운동도 처음 하니까 감독님이 시키신 거지요. 저는 정말 골키퍼는 하기 싫었어요. 그냥 공차고 뛰는게 좋아서 축구를 시작 한건데 골키퍼는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골키퍼에 대한 기초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중학교로 내려가서 센터포워드를 봤어요. 축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어요.

 

물론 결국은 양곡고 감독님이 찾아와서 억지로 끌려갔어요. 내 재능을 아셨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팀에서는 골키퍼가 필요하니까 억지로 데려가신 거예요.”

 

끌려가다시피 돌아간 고등학교였지만 기왕 시작한 축구를 대충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굵은 구슬땀을 흘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한 발 더 먼저 뛰었고 어느새 김풍주는 그들보다 한 발 앞서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시작하기 전까지 전문적으로 운동을 배웠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남들 잘 때 밤에 나가서 다이빙 연습하고 점프 연습하고. 졸업한 선배님 중에 고대 나오신 분이 있었어요. 필드 선생님이신데 그나마 골키퍼 가르치는 것을 많이 아셔서 그 분께도 많이 배웠고 그렇게 연습하면서 축구란 이런 거다, 골키퍼란 이런거구나를 조금씩 알게 되었지요.”

 

예전에는 고등학교 상비군제도 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때는 고등학교 4강제도가 있어서 그 안에 들어야지만 대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4강에 못 든 학교 선수들 중에서도 학교당 한 명씩을 뽑아서 대학교에 갈 수 있게 해주는 제도가 있었지요. 제가 그 상비군에 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대학교에 꼭 가고 싶었거든요. 감독님한테도 정말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구요.”

 

대학을 가고 싶었던 김풍주. 축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고등학교 상비군에 들었고 당연히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행운이 그에게 찾아온다. 원년 K리그에 참가하는 대우팀의 입단 제의였다. 대학에 가고 싶었던 그는 고심을 거듭했다. 아들을 타지까지 내려 보내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심정도 한 몫 했다.

 

어느 날, 지금은 타계하신 장운수 감독님(당시 대우 감독), 오세권 코치님(현 내셔널리그 사무국장)께서 저희학교에 오셨습니다. 저를 보러 온건 아니었고 프로출범을 앞두고 괜찮은 선수를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운동을 하러나왔더니 대뜸 대우로 가자고 하는 거예요. 저는 대학에 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대학가야 되서 안 된다고 버텼지요. 근데 그 때 워낙 장운수 감독님이 축구계에서 큰 역할을 하던 분이었고 그런 분이 대우에 가면 실력이 많이 늘 것이라고 설득해서 결국은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프로의 길을 걷게 된 김풍주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대우에는 정성교 골키퍼가 버티고 있었고 이제 막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풋내기가 프로 경기에 투입되기에는 좀 더 많은 경험과 기량의 발전이 필요했다. 때마침 한양대학교에서는 아시아청소년대회에 참가할 청소년 대표팀 선발전이 열리고 있었다.

 

대우 입단 이야기가 다 마쳐질 때 쯤 청소년대표 선발전이 있었는데 1차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대우에 들어가서 운동도 많이 했고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을 때였지요. 어떻게 보면 조금 안일하게 생각한 것 일수도 있어요. 제 실력도 있으니 장운수 감독님이 조금은 밀어주시지 않을까 그러니 당연히 뽑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떨어진거에요. 나름대로 진짜 열심히 했는데. 실망을 많이 했죠.”

 

그의 두 번째 외도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축구를 위한 외도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룬 그에게 크나큰 좌절과 패배감이 찾아왔다. 더 이상 운동을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그는 그대로 팀 숙소를 빠져 나왔다.

 

얼마가지 않아 장운수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들어오라는 전화였다. 운동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김풍주는 감독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뜻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 팀을 찾았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이 굳었지만 여전히 감독님 방으로 가는 다리는 후들거렸다. 매일 선글라스를 쓰고 이북사투리로 선수들을 통솔하던 감독님은 그만큼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장운수 감독이 의외로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실망했나?”
. 많이 실망 했습니다. 저 이제 운동 그만두겠습니다
.”
하하하하. 그러면 실력으로 한 번 붙어 보라우.”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평소에 그 흔한 미소 한 번 날려주지 않던 장운수 감독이 크게 웃으며 태연히 말하자 더 이상 그만두겠다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김풍주의 두 번째 외도도 감독의 힘으로 끝이 났다. 강제로 끌려갔던 첫 번째 외도와 달리 부드러운 웃음에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팀 훈련에 합류한 김풍주. 뉴델리아시안게임이 벌어질 때 즈음 마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그는 대우의 주전 골키퍼로 출장하게 된다. 공군, 현대, 포철과 대결한 토너먼트 경기에서 김풍주는 승부차기를 선방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들린 선방의 소식은 박종환 청소년대표팀 감독에게까지 흘러들어갔다.

 

전국체전이 끝나고는 휴가를 받고 집에 있었어요. 그 때 북한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징계를 받아 국제대회 출전정지 조치를 받았고 우리가 뒤늦게 아시아청소년대회 최종예선에 출전하게 됐지요. 근데 박종환 감독님이 빨리 오라고 연락을 하신 거예요. 청소년대표팀에 소집이 된 거죠. 최종예선까지 고작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효창운동장에 모여 합숙을 했는데 결국 제가 경기에 뛰었고 우승까지 하게 되었죠.”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UAE와 이라크를 잡은 한국은 2 1무로 세계 청소년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운 좋게 세계대회까지 참여하게 된 한국 청소년대표팀. 고산지대인 멕시코에서 열리는 본선 무대에 대비해 드디어 그 유명한 마스크 훈련이 시작되었다. 막무가내 식으로 실시된 이 훈련이 세계 4강의 초석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훈련을 했는데 멕시코가 고지대에 있다보니 산소가 부족할 것을 대비해서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했어요. 근데 이 마스크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힘들면 내렸다 올렸다 요령도 피우면서 했으니까요. 그보다 힘든 건 엄청난 체력훈련 때문이었지요. 운동장을 한 번 뛰면 최소 30바퀴씩 뛰었으니.
박종환 감독님이 정말 화끈하셨어요. 잘하면 칭찬 해 주시고 못하면 크게 윽박지르고. 훈련도 비슷했죠. 또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지는 걸 싫어하세요. 당시 마땅한 상대팀이 없어서 실업팀과도 시합을 했는데 한번은 유공이랑 평가전해서 우리가 이긴적이 있어요. 유공은 자존심이 상하니까 다시 한 번 더하자고 했는데 박종환 감독님이 안한다고 빼시더라구요. 허허허.”

 

마스크를 쓰고 하는 엄청난 체력을 훈련을 견딘 대한민국 청소년대표팀은 마침내 멕시코에 입성했다. 세계청소년대회에 참가한 2,3회 대회가 모두 일본, 호주에서 열린 점을 감안해봤을 때 아메리카 대륙까지 날아가서 국제대회에 참여한 경험은 당시까지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산지대로 유명한 멕시코였기 때문에 선수들은 적응에 어려움을 느꼈다. 국제경험이 일천했던 김풍주는 더욱 심했다.

 

저는 그 이전까지 국제대회 경험이 거의 없었어요. 아시아 청소년 최종예선이 유일한데 그 경기 다녀와서는 허리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실은 그 당시에 다친 건데 그것도 모르고 뛰었던 것이에요. 다치고 나서는 다른 원정 평가전에도 참여를 못했지요.
멕시코에 들어갔더니 일단은 고지가 높으니까 호흡이 안 되서 너무 힘들더라구요. 예상은 했었지만 몸도 안 움직이고 머리고 아프고 첫날은 30미터 뛰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다행히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조금씩 적응이 되더군요.”

 

한국과 본선에서 맞붙게 될 팀은 스코틀랜드, 멕시코, 호주였다. 이 중 8강 토너먼트에 올라갈 수 있는 팀은 두 팀. 우리의 목표인 8강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유럽의 스코틀랜드를 넘고 멕시코의 무시무시한 홈 텃세를 극복해야했다.

 

톨루카에서 열린 본선 1차전. 스코틀랜드를 상대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김풍주가 골문 앞에 섰다.

 

우리의 첫 상대 스코틀랜드는 예선전에서 잉글랜드, 알바니아, 터키,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대전에서 단 한 게임도 지지 않고 진출한 유럽 최고의 팀. 브라질, 아르헨티나, 소련 우루과이와 함께 우승후보로 손꼽힐 정도였다. 결국 경기도 역습에 의한 필드골과 페널티킥 한 골을 허용하며 0:2로 지고 말았다. 수치상으로는 분명 불안한 스타트였다. 하지만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경기에서 지긴 했지만 내용상으로는 거의 대등한 경기였어요. 모두들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릴 거라 예상했는데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였죠. 비록 경기는 지고 말았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당시 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은 수문장으로 김풍주와 이문영을 번갈아 내세웠다. 두 번째 경기인 멕시코전에서는 이문영, 세 번째 경기인 호주전에서는 다시 김풍주가 골문을 지켰다. 그리고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기에서 한국팀은 모두 승리를 거두며 기적의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특히 장신선수들이 즐비한 호주와의 3차전에서 김풍주의 큰 키는 그들의 크고 높은 롱패스 공격을 차단해 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였다.

 

“8강에 오르자 선수들 간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박종환 감독님 아래에서 정말 고되게 받았던 훈련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었어요. 그리고 집중적으로 연마한 몇 가지 패턴의 전술들 역시 상대를 공략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구요. 저 같은 경우에는 예선 막바지에 대표팀에 합류해서 국제경기 경험이 거의 전무했는데 상승분위기를 타면서 그런 긴장도 떨쳐버릴 수 있었죠.”

 

8강전의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사실 그 대회의 대진운은 가히 최악이라 봐도 무방했다. 죽음의 조나 다름없는 예선전을 통과해서 만난 팀이 다시 우승후보라 불리던 우루과이였으니, 거기에 4강전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하지만 한국청소년팀의 상승세는 무서웠다. 연장전 끝에 우루과이를 꺾자 개최국인 멕시코가 들썩거렸고 그 유명한붉은 악마들이라는 애칭도 등장했다. 비록 브라질에 패해 결승진출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사건은 분명했다.

 

사실 언론이 우리한테 많은 기대를 안했습니다. 아시아 최종예선 할 때도 2위만 하면 잘한거다 이런 예상을 했었는데 본선무대는 더욱 그랬죠.” 한국 방송단은 애초에 예선 탈락을 기정사실화 하고 예선전까지만 중계하기로 계약을 했을 정도. 청소년 팀이 8강에 진출하자 중계연장을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졌었다.

 

그런 상황에서 4강까지 진출했으니 더 기쁘더라구요. 저희를 바라보는 멕시코 국민과 세계각국의 시선도 무척이나 뜨거웠습니다. 그 이전까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재팬은 알아도코리아는 몰랐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승승장구하면서 4강까지 가니깐한국, 잘한다. 최고다.’이러면서 난리가 난거죠.

특히 멕시코는 우리한테 졌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순수하게 우리에게 뜨거운 성원을 보내줬어요. 그만큼 저희 팀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겠지요.”

 

한국 역시 난리가 났었다. 이전까지 월드컵 무대에도 단 한차례 밖에 출전하지 못했던 한국팀인데 어린 청소년 대표팀이 세계의 축구강호들을 하나하나 물리치고 4강에까지 오르자 온 나라가 들썩였다. 마치 2002년 월드컵처럼... 당시 한국국민들에게 청소년 대표팀의 성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멕시코에서 돌아와서도 참 놀랐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반겨줄 줄은 몰랐어요. 카퍼레이드 행사도하고 영웅이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향에 돌아가서도 학교에 가서 환영인사 받고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청소년 대회 4강의 환상도 곧어제 내린 눈으로 돌려놔야 했다. 청소년 대표팀의 4강신화가 있던 그해는 바로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소중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때. 냉혹하고 치열한 프로무대의 생존경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소년 대표팀 출신이라는 명함도 별 소용이 없었다. 김풍주는 그저 유망하고 가능성 있는 20살의 어리기만 한 골키퍼였을 뿐이었다.

 

첫 해에는 많이 뛰지도 못했고 감히 뛴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쟁쟁한 선수들, 대표선수들이 팀 내에 수두룩 했거든요. 처음 몇 년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면서 많이 배우고 노력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운동은 열심히 했습니다. 어차피 발을 들여 놓은 거 뒤로 물러설 수는 없잖아요. 첫 시즌에 리그 경기 때 따라가서 보는데 경기장이 관중들로 꽉 차서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하루 빨리 저곳에서 뛰어야겠다 싶었죠.”

 

생각보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실력과 노력은 결코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프로에 입단한 지 딱 1년 만에 팀의 주전으로 뛰어올랐다.

 

“83년에는 수퍼리그 말고 실업팀이랑 프로2군들이 뛰는 형식으로 코리안리그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많이 뛰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운동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장운수 감독님이자신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자신없다.’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데 첫 경기 잘 하니깐 그 다음경기에도 계속 나서고 그 다음시즌에는 장운수 감독님이 프로로 올려 주시더라구요.”

 

장운수 감독은 1983시즌이 끝난 뒤 조윤옥 감독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팀을 떠났다. 하지만 84시즌에도 성적이 신통치 않았고 시즌 중반, 다시 대우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김풍주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등학생 김풍주를 직접 대우로 데려와 청소년대표, 프로데뷔전까지 바로 옆에서 지켜주고 힘이 되 주었던 감독이었다.

 

당시에는 키 큰 골키퍼가 거의 없었어요. 키가 크면 다이빙도 못하고 순발력도 안 좋고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거든. 근데 장운수 감독님이 재능을 잘 봐주신 거죠. ‘키가 큰 골키퍼를 잘만 키우면 아주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어.’이런 말씀을 하고 다니셨다 하더라구요.”

 

전기리그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대우는 장운수 감독의 복귀 이후 놀라운 상승세를 기록한다. 7 1일 현대전에서의 승리 이래 6연승, 8게임 무패의 신기록을 세우며 선두권에 진입했고 8 4 2, 승점 29(84년에는 승리시 3, 득점 무승부시 2, 무득점 무승부시 1점의 승점 제도 사용)으로 결국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 결정전의 상대는 전기리그 우승팀인 유공이었다. 1차전에서 대우는 박창선의 한 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우승에 한 발짝 더 다가섰고 2차전에서 1-1무승부를 기록, 결국 프로축구 두 번째 시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된다.

시즌 중반 이 후 줄곧 골문을 지키며 주전으로 자리매김 한 김풍주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기쁨을 누리던 그 자리에 김풍주는 없었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2차전, 그러니까 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전했죠. 우승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말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경기 중반에 상대선수와 부딪히면서 종아리 근육을 크게 다친 겁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경기 중간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이대병원으로 실려 갈 정도였어요. 우승 세레머니도 못하고 병원에서 TV로 그 장면을 봤는데 어찌나 억울하던지. 그래도 웃긴 게 다리 절뚝절뚝 거리면서도 나중에 뒤풀이 하는 데는 갔었어요. 그래도 우승인데 그렇게라도 기쁨을 만끽해야죠.”

 

프로팀 입단, 세계 청소년 대회 4, 21살에 프로팀 주전확보, 리그 우승까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축구를 배우지 못했던 한 소년이 불과 5년 남짓한 시간동안 이룬 것으로는 무척이나 대단한 성과들 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인 이제야 본격적인 날개 짓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 대우에서 확고한 주전으로 거듭난 것은 물론 각급 대표팀에도김풍주라는 이름 석 자는 빠지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선수생활 초반에는 정말 운이 따랐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해서 청소년 대표도 되고 4강에도 올라가고 프로에서는 2년만에 우승도 하고 많은 빛을 봤죠. 고등학교 때 힘들게 축구 배웠던 거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워요. 대학교팀들과 연습경기라도 하는 날에는 네골 다섯골 먹고, 그리고는 많이 구박받고. 하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힘들게 축구를 하면서 저 스스로를 많이 다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에서 첫 번째 우승을 차지한 지 3년 만에 대우의 김풍주는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이미 다수의 국가대표가 포진한 가운데 그해 신인왕을 차지했던 김주성 마저 영입. 막강한 전력으로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던 대우는 시즌 종료 세 경기를 앞두고 단일리그로 치러진 그해 우승을 확정지었다. 시즌 성적은 14 13 2패였다.

 

비록 우승팀의 감독은 장운수에서 젊은 이차만으로 바뀌었지만 김풍주의 자리는 굳건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며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지만 15경기에 출전해 단 9개의 골만을 허용하는 경이로운 방어율을 기록한 그였다. 그해 최우수 골키퍼의 영예도김풍주에게 돌아갔다.

 

당대 최고의 팀에서 당대 최고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속구단이 자동차, 조선, 전자가 돌아가면서 엄청난 지원을 해 줬는데 다른 팀들의 부러움도 많이 샀어요. 그해 중반까지는 현대랑 1위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것도 참 재미있었어요. 두 팀이 붙으면 라이벌전으로 팀간, 기업간 자존심대결이 대단했거든요. 지금 가져다 놓아도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대결이었을 거 같아요.”

 

하지만 고공질주를 이어가던 프로에서와는 달리 대표팀 무대에서는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다. 대표팀에 관해서는 김풍주에게 계속 불운이 따랐다. 88서울 올림픽,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모두 대표팀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결정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와일드카드 제도가 없었던 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베테랑 조병득 골키퍼에 자리를 내주며 경험을 쌓는데 만족해야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더욱 아쉬웠고 불운했다. 월드컵 출전을 확정지은 아시아 예선전에서 골문을 지킨 것은 대부분 김풍주였고 8경기에서 그가 허용한 실점은 단 하나였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뛰지 못했다.

 

최종예선에서 월드컵 본선진출 확정 시켜놓고, 그해 겨울이었나? 수원에서 스파르타 모스크바랑 평가전을 가졌어요. 당시만 해도 소련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강팀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경기에서 제가 그만 무릎부상을 당하고 만 겁니다.

상대 공격수랑 1:1 상황이 났는데 저는 공을 쳐내고 상대선수는 달려와서 내 무릎을 때린 거예요. 그래도 저는 일어나서 코너킥 막으려고 하는데 무릎이 안 움직이는 겁니다. 알고 보니 인대가 완전히 끊어져서 바로 주저앉고 한동안 운동을 못했죠.”

 

그래도 월드컵 대표팀에는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로지 재활에만 집중했거든요. 팀에서도 제가 예선전 때 좋은 활약을 보였으니깐 쉽게 포기 못했고, 그런데 이탈리아가서 또 부상부위가 안 좋아 지더군요. 너무 부담감이 많았던 것 같아요. 별 수 없이 벤치에나 있었죠. 다음 대회를 기약하면서...”

 

하지만 김풍주는 1994년 월드컵과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당시에는 확고한 주전은 아니었지만 대표팀에 발탁되어 미국에 가기에는 충분한 실력이었다. 월드컵이 열린 해 봄까지만 해도 대표팀에 승선하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미국 가는 비자까지 신청해서 다 받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창원에서 대표팀 훈련하다가 또 다시 무릎인대를 다쳤습니다. 그냥 엔트리에서도 탈락하고 말았죠. 제가 참 월드컵이랑은 인연이 없더라구요. 청소년 대표팀이랑 프로팀에서는 운이 참 좋았는데 운을 그때 다 써 버렸나 봐요. 어쩔 수 없죠.

 

돌이켜보면 1991년 프로무대도 부상의 불운에 가슴 아파야 했던 때였다. 1987년 이후 4년 만에 대우는 다시금 리그 패권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독주였다. 8월 중순 이후부터 2위와의 승점차를 계속해 벌려가며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물이 오른 김주성의 활약과 헝가리 대표팀 출신 비츠케이 감독이 사용한 3-5-2전술도 인상적 이었지만 김풍주의 활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회 막바지가 되니깐 저희가 거의 우승팀으로 굳어지고 누가 MVP를 수상할 거냐에 관심이 모아졌어요. 무척이나 아쉬웠던 게 시즌 막바지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MVP후보가 저였거든요. 아는 기자분들이 전화해서는 제가 MVP 탈 수 있을 거라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사실이 그랬다. 시즌 34번째 경기까지 그는 19개의 실점만을 허용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활약이었다. 하지만 끝내 종아리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35번째부터 37번째 경기까지 단 세 경기 동안 8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세 경기에서는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그 시절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전무한 골키퍼의 MVP수상은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부상을 참고 뛰었습니다. 상에 대한 욕심도 났고 웬만한 부상은 다 참고 뛰는 게 당시의 분위기였거든요. 그런데 점점 종아리근육이 뭉치면서 점프하기도 힘들어지고 달리는 것도 어려워지고...그렇게 시즌 마지막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정말 전무후무한 골키퍼 MVP수상이 날아가 버렸어요. 지금 돌이켜봐도 선수생활에서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이 그때예요.”

 

1991년도 말미에 당한 부상으로 김풍주는 1992년 한 해 동안 단 하나의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1993년부터는 다시 팀의 주전 자리를 되찾고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지만 전성기의 기량까지는 다소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부상 때문에 안타깝게 보낸 선수시절이 지금도 많이 생각나죠. 그때는 재활하고 부상관리하고 이런 개념이 지금과는 천지차이 였으니. 조금만 아파도 그저 참고 뛰는 게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냉엄한 프로무대의 경쟁에서 그렇게 아프다고 핑계를 둘러댈 여유도 없었구요. 그게 결국은 선수 빨리 죽이는 길인데 그걸 잘 알지 못했죠.”

 

1995년 역시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 덕에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던 김풍주는 1996년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 한다. 기쁨도 있었지만 아쉬움과 미련도 많이 남았던 선수생활이었다.

 

“1994년부터는 저 스스로 기량이 조금씩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조금씩 힘들었죠. 또 저희 팀에 신범철선수가 새로 들어왔거든요.

1996
년에 김희태 감독님이 계셨는데 시즌을 마치고 저를 조용히 부르셔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이제 물려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제 심정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방황을 많이 했죠. 그만둬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팀이라도 가서 더 해야 하는지
.

누구한테 터놓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거든요. 혼자서 술도 많이 먹고 아내와도 이야기 많이 하고, 결국에는 그래도 골키퍼로서 많은 것도 이루고 좋은 기억도 만들었고 나쁜 모습 보이기 전에 은퇴를 하자고 어렵게 결심했죠.” 

 

갑작스런 은퇴이긴 했지만 방황은 없었다. 곧 바로 지도자의 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
실은 몇 해 전부터 스스로 지도자 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였다
.

선수시절부터 골키퍼 훈련에 관련된 외국서적을 보고 따로 번역을 해오고 정리하던 그였다. 체계적이지 못한 당시의 골키퍼 교육 시스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이 무척이나 간절했다. 부산대우 구단에도 제의를 해 골키퍼코치라는 것을 만들어 직접 후배골키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97년부터 99년까지 대우에서 골키퍼코치를 하다가 99년 말에 서울에 있는 재현초등학교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선수시절과는 분명 다른 일이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하던 일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2001
년에는 유소년 축구협회에 들어가서 유소년 실기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는 13세에서 15세 사이에 있는 전국의 괜찮은 유소년 골키퍼 선수들을 모아서 따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했어요. 그것도 꽤나 보람 있는 일이었죠.”

 

유소년 축구협회에서 어린학생들을 가르치다 2002년에는 박성화 당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의 요청으로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활동하게 된다. 그 때 거쳐 간 선수들이 김영광, 염동균(전남), 정성룡(포항), 권순태, 성경일(전북) 등이다. 하나 같이 소속 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비록 2003년 대회에서 김풍주 자신이 경험했던 4강 신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2003년 대회에서는 16강 진출) 충분히 보람찬 경험이었다.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마치고 2004년에는 울산으로 오게 되었죠. 당시 임종헌, 윤덕여 코치와 저,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울산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선수시절 라이벌 관계를 이루던 팀에 들어오게 되니깐 느낌이 조금은 어색 했는데, 그래도 코치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임무, 좋은 선수를 길러내고 팀에 보탬이 되게 한다는 것에만 충실 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어요.”

 

지난 2005. 선수시절과 마찬가지로 팀에 새롭게 둥지를 튼 지 2년 만에, 이번에는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 팀의 우승을 이끌게 된다. 특히나 그 우승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즌 마지막의 울산의 극적인 역전우승이 바로 골키퍼의 교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인 전북전에서 시즌 내내 주전 자리를 지켜온 서동명을 빼고 김지혁을 투입한 것은 예상키 어려웠던 도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어요. 당시 서동명선수가 컨디션이 워낙 좋지 않았는데 그 경기에서 플레이까지 나빴잖아요. 사실 지혁이도 그런 상황에 대비해 충분히 준비를 시켜 놨었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 경기가 벼랑 끝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울산은 2:0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시키며 극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결국 성남과 인천을 꺾고 9년 만에 챔피언에 등극했다.

 

선수시절에 맛본 우승의 느낌과는 또 다른 쾌감이었습니다. 선수시절에는 마냥 열심히 운동해서 그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성취감 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지만 코치로서 우승을 경험하니 내가 가르친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우승에 기여했다는 데에서 오는 보람, 그리고 그 선수들에 대한 고마움, 뿌듯함 등이 먼저 느껴지더라구요. 비록 선수들한테수고했다라는 한 마디 밖에 하지는 못했지만 많이 고맙고 자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저 축구가 좋아 공을 차기 시작했고 그래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시골 소년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골키퍼가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졌다. 비록 부상과 함께한 몇 번의 불운들이 그의 명성에 빛이 바래도록 했지만최고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가 분명하다.

이제는 기억 저편에만 남아있는축구 골키퍼 김풍주가 되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꿈과 목표는 우리에게 또 다른최고를 선물해 줄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꿈들마저 이룰 수 있는 그런 선수를.


선수생활이 끝나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좋은 골키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많은 공부도 하고 준비도 했었구요. 지금 몸담고 있는 프로팀 골키퍼 코치도 저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하고 보람찬 일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어린 선수들, 골키퍼를 꿈꾸는 유소년들이 재미있게 축구를 배우게 할 수 있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 3회 째를 맞는 GK클리닉이라는 것이 있는데 KFA GK 1급 코스를 수료한 사람들이 강사가 되어서 매년 유소년들을 지도하는 행사입니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많은 것을 가르치고 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요.

 

앞으로 제가 얼마나 골키퍼 코치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힘닿는 데까지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머지않아2의 김풍주아니김풍주를 넘어서는 세계최고의 골키퍼를 제 손으로 길러내겠습니다.”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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