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 김봉길

세상 모든 일에는 인연이 있다. 인연이 닿지 않은 일에 고집을 피운다고 해서 연이 닿지는 않는다.

반대로 인연이 닿는 일에는 행운과 행복이 함께 찾아온다. 무슨 일을 해도 좋은 일들이 물결치듯 밀려오기 마련이다. 자신과 인연이 되는 업을 찾는 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중하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여기 자신의 인연을 너무도 잘 찾은 사람이 있다. 축구라는 인연을 만난 김봉길(42, 현 인천 코치)이다. 그는 유독 창단하는 팀에서 부름을 많이 받았다. 부평동중도 그랬고 부평고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창단팀의 어려움을 겪고 팀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다. 연세대로 진학해서도 연고전에서 승리를 안기는 등 승복은 꾸준히 따라다녔다. 1989K리그에 발을 내딛은 그는 데뷔 첫 해 우승의 꿈을 이룬다. 이쯤 되면 축구는 그와 천생연분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

전남으로 이적해서도 팀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 FA컵 우승컵을 차지했다. 지도자로 자리를 옮기고도 그는 부평고와 백암종고를 모두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전남의 수석코치에 있으면서 FA컵 우승컵은 두 번이나 들어올렸다. 이 정도라면우승 청부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축구라는 인연을 만났기에 그에게 계속해서 행운과 행복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축구와 함께한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버지는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정신적 지주

김봉길이 처음으로 축구와 손을 잡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다. 또래와 축구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던 그에게 축구는 우연한 기회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그 우연한 기회가 평생의 업이 될 것임을 단번에 파악했다. 최고의 공격수로 조련되기 시작한 그의 학창시절에서 아버지는 정신적 지주역할을 톡톡히 하며 그의 방황을 막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었어요. 지금은 없어진 축구팀이지만 어렸을 때 부평동초등학교에 다녔어요. 3학년 이었을 때 월드컵 때문에 축구가 인기가 있었어요. 아이들하고 공차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공을 차는데 축구감독님이 저를 보시고 축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어요. 원래는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는데 저는 3학년인데도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감독님이 보시기에 제가 좀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

축구를 시작하서 지금까지 공격수만 했어요. 윙 포지션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리고 스트라이커를 맡았고요. 그 후로 프로 은퇴할 때까지, 대표팀에서도 스트라이커 아니면 윙을 맡았어요. 지금은 윙이 아니라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부르죠
.”

가장 기억에 남는 학창시절의 경기는 아무래도 우승했을 때겠죠. 일단 중학교 때 창단팀인 부평동중에 들어갔어요. 그때 전국대회를 우승했을 때가 기억이 남아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도 부평고 창단멤버로 들어가서 우승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대학교 때는 연고전에서 승리했을 때가 기억이 남아요. 3학년 때 정기 연고전에서 3 2로 역전승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경기가 참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아요
.”

학창시절에 축구가 전부였던 김봉길에게 방황기가 찾아왔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된다. 그때 그를 잡아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

맨 처음 방황을 했을 때는 고3때에요. 청소년대표 선발전을 하는데 당시 대학 선수들이 많이 왔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어요. 선발전에서 떨어졌거든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왔거든요. 청소년 대표는 꿈이어서 많이 기대했는데 발표된 명단을 보니 제가 없는 거예요. 그때 처음 외박을 했어요. 친한 친구네 집에 가서 잤어요. 집에 가서 아버지께 말하기가 창피하기도 하고 제 자신에게도 실망했거든요
.”

그때는 핸드폰도 없을 때였는데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셨나 봐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거든요.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셨나 봐요. 아침에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혼내지도 않으시는 거예요. 그러시더니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뭐 사먹으라고 토닥거려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결국은 추가선발로 뽑혀서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조금 늦게 들어가기는 했지만 결국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

아버지는 학창시절에 제게 너무도 큰 영향을 주셨어요. 가장 큰 정신적 지주에요. 4형제 중 막내인데 가정이 부유하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저를 잘 후원해주셨거든요. 또 제가 중고등학교를 창단팀만 들어가서 선배가 없잖아요.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칫 방황할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를 잘 이끌어 주셨어요. 축구선수로는 요한 크라이프(네덜란드) 선수를 좋아해요. 74년 독일월드컵 준우승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동경을 했어요. 그 선수처럼 축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어요.”

 
만족하지 못한 K리그 데뷔, 하지만 결국 우승컵을 들다.
김봉길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9년 드래프트 1순위로 유공(현 제주)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학창시절 최고의 자리에만 있었던 그는 K리그를 동경해 왔고 많은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K리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는 데뷔 초반 프로에 잘 적응 하지 못해서 본인 스스로 실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갈고 담금질을 거듭했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그는 데뷔하는 해 유공에게 우승컵을 선사하며 결과적으로 화려하게 K리그를 시작했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에게 데뷔전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K
리그 데뷔전이요? 기억나죠. 제가 1989년에 유공에 입단을 했는데 개막전에 투입되었어요. 포항과의 경기였는데 그때 감독님이 이회택(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감독님이었어요. 국가대표팀 감독이기도 하셨고요.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고 해산을 한 다음에 K리그에서 활약상을 보고 재소집을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더 긴장을 했었던 것 같아요
.”

경기가 시작하고 20분 정도 지났는데 골키퍼하고 11 기회를 맞았어요. 당시 포항 골키퍼가 조병득(현 수원 GK코치)이었는데 너무 쉬운 찬스였어요. 옆으로 밀어 넣으면 골이었는데 제가 못 넣었어요. 프로 데뷔전이라서 긴장을 참 많이 했나 봐요. 결국 2 1로 졌어요. 그래서 후반전에 교체를 당했어요. 만약 그 경기에서 더 침착하게 잘 했으면 K리그에 더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아요
.”

그는 데뷔 첫 해 24경기에 출장하여 5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신인이었지만 신인답지 않았다는 이야기이지만 속사정은 조금 달랐다
.

제가 전반기는 상당히 부족했어요. 개막전 경기 이후 국가대표팀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했어요. K리그에 적응도 빨리 못하고 대표팀에서도 탈락하고 방황이라기 보다는 실망을 좀 했어요. 전반기를 그렇게 보내고 후반기에 골을 거의 몰아넣었어요. 결국 그 해 유공이 우승을 했는데 우승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서 그나마 위안을 삼아요
.”

그 해 우승이 유공 우승의 마지막이에요. 현재 제주까지 통틀어 봐도 그 때가 마지막 우승이에요. 그래서 당시 김정남 감독(현 울산 감독)이 저를 복덩이라고 부르셨어요. 단장님도 저를 참 예뻐 하셨고요. 제가 유공에 들어오자마자 골도 넣고 우승도 해서 복덩이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죠
."

1994
년도에 유공은 또 한 번 우승문턱에 다가서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팀의 우승도 그에게는 중요했지만 그는 팀 내 공격수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

“1994
년도에 우승을 못해서 좀 아쉬웠어요. 프로 생활하면서 정규리그 우승은 1989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정규리그를 한번 밖에 우승 못한 것이 참 아쉬워요. 컵대회나 FA컵은 우승을 하긴 했지만요
.”

당시 유공은 경쟁이 굉장히 심했어요. 최진한, 황보관, 노수진 등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너무 쟁쟁했어요. 저도 물론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자신은 있었어요. 드래프트 1순위로 유공에 입단을 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모자란 부분이 있는데 김정남 감독님이 많이 믿어주셨어요. 많이 중용을 해주시고 그래서 결국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은퇴경기 다음날 심각하게 후회 하다.
K리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이게 된다. K리그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서 활약을 굳히던 그는 프로 3년차인 1991년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부상으로 인해서 경기를 제대로 뛸 수 없게 된 것. 1991년도에 그는 6경기 출장에 무득점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내놓는다. 하지만 축구의 인연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탁월한 치료와 끈기 있는 재활을 통해서 그는 성공적으로 K리그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제일 아쉬운 것이 국가대표죠. 처음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당시 대학생이 저하고 황선홍(현 부산 감독)이었어요. 그런데 김주성(현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 변병주(현 대구 감독), 이태호(전 대전 감독), 함현기(현 묵호고 감독) 너무 쟁쟁했어요. 그때 주눅 들지 않고 잘 이겨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기억에 남는 경기는 88년 아시안컵을 카타르에서 했을 때 준우승을 했었거든요. 왼쪽 윙으로 뛰었는데 지금도 황선홍(현 부산 감독)이랑 만나면 항상 이야기를 해요. 제가 크로스를 해서 황선홍 감독이 처음으로 골을 넣었거든요. 저는 데뷔경기였고요. 그래서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요
.”

“1991
년 당시 대퇴부 근육이 파열이 되었어요. 5경기 째에 몸에 이상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당시 국가대표팀 때문에 선수가 많이 빠지게 되서 뛸 선수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경기를 뛰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뛰겠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하고 면담을 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구단이 많이 도움을 줘서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아마 외국 나가서 치료를 받은 축구선수는 제가 처음일거에요. 일본에 가서 수술을 하고 들어와서 1991년도에는 쭉 재활을 했어요. 안 좋은 시가였지만 잘 재활을 해서 1992년부터 다시 뛸 수 있었어요
.”

그의 통산 기록은 265경기에 출장에 44 16도움이다. 부족할 것 없는 기록이지만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다. 치열한 라이벌들의 경쟁은 그에게 약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1995년에 전남으로 이적하게 된다. 새로운 변화가 더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만족스럽지 못하죠.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1년 정도 공백이 없었으면 300경기 기록도 채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득점도 조금만 더 했었어야 하는 아쉬움도 남고 그렇죠
.”

현역 시절 라이벌 구도를 그렸던 선수들은 동기들이에요. 고정운, 차상해, 유승관등이 있어요. 동기들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까지는 랭킹 1위다 라는 말을 들었는데 프로에서는 1위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학창시절에는 내가 1등이었는데 프로에 와서는 1위라고 말 할 입장이 아니어서 좀 자극을 받았죠. 다른 동기들은 더 좋은 활약을 보이면 선의의 경쟁의식이 생기죠
.”

유공에서 전남으로의 이적은 변화 때문이었어요. 지금은 FA가 짧지만 그 당시에는 6년이었어요. 유공에서 6년이 되었는데 대학교 때 은사님인 정병탁 감독님이 전남 초대감독으로 가셨어요. 예전에는 30살만 되면 노장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인연도 있고 또 변화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해서 이적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 감독님이 2-3년은 더 뛸 수 있지 않느냐고 격려해주시면서 와서 뛰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고요.”

 
한 번의 이적으로 그는 K리그와 10년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가장 깊숙하게 박혀있는 K리그의 한 경기는 역시 우승하던 그 순간이었다고 한다. K리그를 떠나야 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뒤돌아서 바로 후회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경기는 1989년에 LG(현 서울)하고 우승을 두고 막판에 2연전을 붙었을 때에요. LG는 우리에게 2무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는 위치였어요. 당시는 승점이 승리가 2점이고 무승부가 1점이었거든요. LG가 한 번이라도 이기면 그냥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한 번 비기고 한 번 이겼어요
.”

첫 번째 경기는 2: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종료 1분 남기고 제가 골을 넣어서 비겼어요. 한 번 더 기회가 생긴 거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제가 선제골을 넣었고요. 결국 2:0으로 이겨서 유공이 우승을 차지했죠. 전에 K리그 전설 이영익편에서친구인 ()봉길이의 골 때문에 우승을 못했다.’라고 했더라고요. 그 골로 인해서 우승을 할 수 있어서 참 기억에 남는 순간이죠
.”

은퇴할 때는 은퇴경기를 하고 다음날 바로 후회했어요. 은퇴할 당시 전남 감독이 허정무 감독님이었어요. 은퇴할 때쯤 자꾸 아프더라고요. 몇 경기를 쉬었는데 감독님이 부르시더라고요. 몸 상태가 어떤지 물으시더니 제가 전남에서 3년째 주장을 했었거든요. 창단팀인 전남에 와서 고생도 하고 리더십도 있으니 지도자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구단에서 배려를 해주면 지도자 공부를 해서 지도자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시더라고요, 1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인들에게 의논을 하고 가족들과도 이야기하고 에이전트하고 상의도 했어요
.”

상황이 좋을 때 물러서는 것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어차피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구단에서도 힘을 보태줄 때 일찍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포항전에서 은퇴경기를 했어요. 제가 한 70분 정도 뛰었는데 주위에서 선수들이오늘 뛰는 거 보니 은퇴 안 하는 게 낳을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자고 일어났는데 몇 번을 망설였어요. 감독님하고 구단한테 가서 선수생활 더 한다고 말할까. 고민을 했어요. 하지만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다 시간이 지나면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

10
년 동안 함께 했던 K리그와의 인연에 그는 웃고 울었다. 아쉬움이 잔뜩 남아있는 은퇴였지만 그는 내공을 더 쌓아 결국 K리그로 다시 돌아오며 힘찬 날개짓을 시작한다. 은퇴 후 유소년 지도자로 활약한 이야기, K리그 코치로 다시 귀환한 이야기, 20년의 세월을 두고 말하는 K리그 이야기, 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길 바란다는 부인의 내조이야기가 <축구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 김봉길
>에서 이어집니다.


10
년의 시간동안 K리그와 인연을 맺은 그는 비록 K리그와 잠시 이별을 선언했지만 평생의 업인 축구와는 떨어질 수 없었다. 은퇴 후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그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시절의 탁월한 활약은 지도자로서의 활약까지 이어져 맡은 팀을 우승의 문턱에 번번이 올려놓으며 지도자로서도 화려하게 출발하게 된다.

 
부평고를 명문고의 반열에 올려놓다.
김봉길은 부평고의 창단 멤버이다. 모교의 후배들에게 우상이나 다름없는 그는 결국 K리그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모교로 발길을 되돌린다. 지도자로서 다소 짧은 경력이지만 후배들에 대한 사랑과 K리그에서의 활약을 토대로 그는 타고난 조련사로서 활약하게 된다.

처음에는 광양제철중학교 지도자로 갔어요. 유소년 지도자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중학교에서 시작을 했는데 모교인 부평고에서 전화가 왔어요. 전남의 허정무 감독님은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으셨어요. 그래서 상의를 드렸더니 모교라면 한 번 맡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제 생각에도 모교라면 애착이 가득하기 때문에 팀을 맡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

남들이 저를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요. 행운이 많은 사람이라고도 하고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김정우(현 성남), 박성호(현 대전), 조용형(현 제주), 김형일(현 포항)같은 선수들을 만났어요. 선수생활처럼 열심히 하면 잘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선수들에게 지도자 이기 앞서서 선배로서 제대로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공교롭게도 우승한 팀에서 꼭 있었어요. 제가 있었던 팀은 꼭 한 번씩 우승을 했어요, 우승에 대한 인연은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인천만 우승하면 될 것 같아요.(웃음
).”

모교인 부평고를 명문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게 된다. 클럽 시스템을 도입한 백암종고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환경에 맞서게 된다. 고교팀 감독을 계속 맡은 그는 결국 사연 가득한 K리그로 다시 귀환하게 된다
.

백암종고도 창단팀 이에요. 창단팀과 정말 끊질긴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창단한 팀이다 보니까 참 어려움이 많았어요. 또 클럽 시스템을 적용한 팀이다 보니까 편견도 좀 있었거든요. 당시에 처음으로 시작하다 보니까 어려움이 많았죠
.”

학원축구 지도자와 프로팀 지도자는 차이가 많아요. 고등학교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세세하게 가르쳐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반면 프로는 선수들이기 때문에 그 선수들 잣대에 맞는 능력을 가져야 해요. 프로에 와서는 더 노력을 많이 했어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교육이라는 교육을 다 받았어요
.”

그래서 작년에 AFC P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시즌 끝나면 조금 시간이 주어지는데 저 같은 경우는 바로 교육에 들어갔어요. P급 자도자 같은 경우는 2년에 걸쳐서 작년에 끝났고요. 프로팀 지도자를 하려면 선수들과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도자로서 전남의 2연속 FA컵 우승을 이끌다.
그는 선수시절인 1997년도에 전남에서 FA컵 한 차례 우승의 경험을 맛봤다. 지도자로 다시 전남으로 돌아간 그는 선수들을 잘 조련해 2006년과 2007 2연속 FA컵 우승의 기염을 토하게 된다. 전남의 FA 3회 우승 뒤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는 선수시절의 우승보다 지도자로서의 우승이 더 기뻤다고 말한다.

우승에 인연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코치로 가기 전까지 전남이 우승과 인연이 없었는데 FA컵을 2연패나 했어요. 공교롭게도 전남이 FA 3회 우승을 했는데 저는 선수와 지도자로 3번 모두 그 자리에 있었어요
.”

작년 FA컵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포항이 워낙 상승세였잖아요. 5위로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서 우승까지 했잖아요. 그래서 분석을 참 많이 했어요. 전남이 성적이 안 좋아서 FA컵에 대해서만은 절박함이 있었어요. 매일 매일 분석하고 대비를 했어요.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해서 그런지 두 경기 다 이겨서 우승을 하게 되었어요. 축구라는 것이 전력만으로 우승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

(
선수와 지도자 중 우승할 때 기쁨이 더 큰 쪽은 어느 쪽인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요. 지금 지도자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도자로서 우승하는 것이 더 보람 있는 것 같아요. 선수일 때는 우승을 못하더라도 개인 성적이 좋으면 어느 정도 만족감이 있거든요. 그런데 지도자는 무조건 팀이에요. 팀이 우승하지 않으면 빛을 발휘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지도자로서 더 기쁨이 큰 것 같아요
.”

다시 고향인 인천의 코치로 돌아오게 돼서 너무 감사하죠. 인천 토박이로서 국가대표선수가 처음으로 된 사람이잖아요. 그런 점을 높이 사주고 상징적인 점을 인정해주신 것 같아서  참 감사해요. 책임감을 느끼고 인천을 좋은 팀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는 다 되어있어요
.”

인천에 오게 되기까지 사연이 참 많아요. 당시 전남이 감독자리가 비어있을 때 허정무 감독님이 저를 추천하셨어요. 소속 구단인 전남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었고요. 하지만 결정 기간이 상당히 길었어요. 신문에 제가 물망이 올랐다는 기사도 많이 나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안됐었죠. 그래서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했었어요. 처음 축구를 시작해서 그때까지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이번 기회에 1년 정도 머리도 식히고 공부도 더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

어느 나라로 가야 할지 결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천에서 연락이 왔어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향팀이기 때문에 바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선수와 지도자간의 믿음이 최우선이어야만 한다.
K리그 지도자로서 맹활약 하고 있는 그는 지도자로서의 철학이 확고하다. 지도자와 선수들 간의 신뢰와 믿음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코치의 자리에 있지만 언젠가는 K리그의 감독을 꿈꾸는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감독상을 물어보았다.

현재는 코치 입장이기 때문에 제 생각을 다 내세울 수는 없어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도자와 선수와의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경기장에 내보내면서, 또는 훈련하면서 선수를 믿지 못하면 팀이 잘 꾸려지지 않거든요. 내가 믿어주고 선수들도 저를 믿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수와 지도자간의 신뢰와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기술적인 부분은 나중 문제이고요
.”

며칠 전에 연세대 출신 OB들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김정남, 박성화, 정병탁, 허정무, 장외룡 감독님까지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감독님 밑에서 선수로도 뛰어봤고 지도자로도 경험을 했잖아요. 그분들의 좋은 모습들을 다 배우고 있잖아요. K리그 감독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모두가 저를 인정할 때가 그 때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제게 팀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할 때라고 생각을 해요. 지금은 더 많이 배워야한다고 생각해요
.”

유공에 있을 때 잠시 니폼니쉬 감독님하고 인연을 맺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니폼니쉬 감독이 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게 있었어요. 롱 킥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아기자기한 축구를 추구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참 매력적이었어요. 수비에서 롱 킥을 하면 우리 팀을 받을 확률이 절반인데 보고 짧은 패스를 하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거예요. 간단한 원리지만 짧고 빠른 기술축구가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보기에도 더 재미있고 관중들도 더 재밌어하고요. 아기자기한 팬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20
, K리그와의 인연
1989K리그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는 잠시 떠난 적도 있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K리그와 연을 맺고 있다. K리그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K
리그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존재하지 않겠죠. K리그에 들어가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기도 했고요. 우리나라 프로 팀이 14개 인데 그 안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다는 것도 영광이고요. 우리나라에 K리그가 생기면서 아시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조금 수준이 떨어졌는데 K리그 덕분에 수준이 참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지금 조금 주춤하고 있는데 더 노력하고 열심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

“20
년 전에는 프로지만 정말 프로선수라고 느끼는 감이 덜했죠. 지금처럼 서포터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녀 팬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당시에는 편지나 전달해 주고 가는 정도였죠. 환경도 많이 좋아졌어요. 당시에는 에너지파동이 있어서 한 여름에도 3 경기를 하고 그랬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선수들 위상 면서도 차이가 많아요. 20년 전부터 참 많이 노력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K리그가 있는 것 같아요. K리그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금쯤에서 뒤를 돌아보고 더 노력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지도자도 그렇고 선수들도 능력을 갖춘 다음에 대우를 받으려고 해야 한다고 봐요.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롭죠
.”

인천에서만 우승한다면 K리그에서 저는 정말 제가 가는 모든 팀에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인천이 요 근래 2연승을 했고 인천 선수들이 상당히 열심히 해요. 대표선수도 하나도 없는데 뭉치는 힘이 있어요. 분위기도 상당히 좋고 감독님도 훌륭한 분이시고요. 6강은 자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돼야 하고요.”

 
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길 원한다는 부인의 내조
축구선수 가족들은 참 힘들다고 한다. 훈련과 경기 일정으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봉길은 아내가 너무 고맙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김봉길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부인의 내조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족은 와이프하고 아들 둘이 있어요. 와이프한테는 너무 미안하죠. 제가다시 태어나면 나랑 결혼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시 한다고 하더라고요. 축구선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내년이면 결혼 20주년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저랑 산 시간은 10년이라고 말해요.(웃음) 너무 고맙죠. 많이 이해해주고 저 없을 때 자식들 키워주고 하는 모습이 참 고마워요. 저는 가족에게 있어서는 빵점 아빠죠
.”

아들이 신갈고에서 축구를 하고 있어요. 이번에 연세대로 진학하게 되었고요. 부자 동문이 된 셈이죠. 저는 이 세계가 쉽지 않은 세계라고 말해요. 처음에 축구를 한다고 하기에 말렸어요. 제가 보기에는 공부를 해야 성공하는 사람이 된다고 타이르니까 울면서 아빠는 왜 축구를 하냐고 반문 하더라고요. 그렇게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성장한 모습을 보니까 참 대견스럽기는 해요. (부자지간으로 K리그에서 만날 날이 곧 다가오는 셈인가.) 본인이 노력을 더 해야죠. 제 이야기를 많이 해줘요. 노력이 없으면 K리그는 절대 올 수 없거든요
.”

초등학교 3학년에 시작한 축구와의 인연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정도 라면 축구가 있기에 그가 존재하고 그가 있기에 축구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소박하지만 원대했다. 오직 축구를 위해 앞으로도 살아가겠다는 그의 목표와 팬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들 들어보았다
.

저는 정말 힘들 때 와이프하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장사나 할까?’ 와이프는 그런데 저보고 축구인으로 끝까지 남았으면 좋겠대요. 죽을 때까지 어떤 분야이든 축구와 관련된 사람으로 남는 것이 가장 멋있다고 말해줘요. 지도자로 좋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기는 있지만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위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축구인으로 남고 싶어요. 큰 목표보다는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

그동안 저는 항상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K리그에 들어와서 이제 20년이 지났지만 남들 보다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생각해요. 이제 그동안 쌓아왔던 축구의 열정을 지도자로서 좋은 모습으로 돌려드리려고 해요. 과분하게 받은 사랑을 열심히 노력해서 팬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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