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로 얻은 사랑, 축구로 베풉니다. -
왼발을 잘 쓰는 꼬마, 축구를 시작하다
“부모님이 교육자셨어요. 아무래도 그렇다보니까 운동 기구도 그렇고 이것저것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 중 하나가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축구공을 많이 가지고 놀았어요. 제가 왼발을 쓰는데, 부모님께서도 왼발을 쓰는 제 모습을 보시고 조금 신기하게 생각하셨고 눈여겨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축구공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다 보니 축구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축구를 하겠다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어요.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었죠. 부모님께서도 제가 축구를 좋아하고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 보이셨나 봐요. 그래서 제 의견을 승낙해 주셨죠. 그때부터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저 축구가 좋았던 경상남도 곤양의 한 아이는 그렇게 그와 평생 함께 할 축구와의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상남도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때 대표가
봉투 두 개를 놓고 양 팀 주장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팀이 먼저 봉투를 집어서 승부를 결정짓는 그런 방식이었어요. 그 때 추첨을 주장이었던 (김)종부가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바로 진 거죠. 너무 억울했어요. 훈련량도 혹독할 정도로 많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자신감도 있었는데 실력에서 진 것도 아니였으니까 많이 안타까웠죠. 그때 당시 머리 모양, 신발도 다 똑같이 맞춰서 나갔거든요. 그렇게 연습도 많이 하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져서 허무했어요. 저도 그렇고 같이 대회 나갔던 친구들도 그렇고 다들 운동장에 누워서 서럽게 울었어요.”
소년의 날개, 두 번 꺾이다
처음 나가는 대회였던 만큼 많이 설??던 그였다. 하지만 처음 느껴본 패배는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부모님께서 축구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꺼내셨고,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소년 체전을 마치고, 잠시 축구를 쉬었어요. 1년 반 가량 쉬었죠. 부모님께서 공부하시기를 원하셨고, 저도 부모님 뜻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체전이 끝나자마자 축구부가 있던 통영초등학교에서 지내다가, 고향의 곤양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곤양중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축구공 생각이 그렇게 났어요.(웃음) 축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결국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죠. 축구를 다시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서 결국 제 뜻을 다시 받아들여주셔서, 축구부가 있는 진주중학교로 전학하면서 다시 축구를 시작했어요.”
“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뛰어보니까 또 그렇진 않더라고요. 어릴 때였지만 공을 잘 찬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고 실제로 초등학교 4,5,6학년 시절 모두를 경상남도 대표로 지냈었거든요. 그래서 쉬고 다시 축구를 했는데도 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남들보다 많이 뒤쳐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웃음)”
분명 그는 공을 잘 찼던 모양이다. 1년 반 가량의 공백기를 가졌던 그였지만, 그 공백기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춘계 연맹전에서 우승을 하며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춘계연맹전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 대회의 100번째 골을 넣어서 상도 받았죠. 그래서 기억이 좀 남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주최 측에 고등학교 코치분이 한분 계셨는데 저를 스카우트 하려고 그 상을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결국 그 학교엔 가지 않고 고향의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요.”
하지만 막 비행을 시작한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다가왔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발목을 잡았던 기초체력이 그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 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운동을 무리하게 하다가 그는 결국 학교를 쉬게 된다.
"체력이 많이 약했어요. 어릴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몸이 정말 안 좋아졌어요. 그때는 훈련 끝날 때쯤 되면 코피가 줄줄 쏟아졌죠. 그 당시 훈련의 마지막이 체력훈련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체력훈련을 많이 빠졌죠. 친구들이 체력훈련 빠지려고 일부러 코피 내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어렸을 적부터 체력이 좋지 않았는데, 기술적으로 공을 차면서 그 단점을 커버했어요. 그런데 몸이 점점 나빠지다 보니까 기초 체력 자체가 다 소진이 돼버린 거죠.”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아이였지만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서 그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공백기를 그는 끊임없는 훈련으로 채워나갔다.
“그래서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쉬었어요. 쉬면서 보약을 먹고, 운동을 조금씩 하면서 다시 체력을 비축했죠. 집에서는 운동을 그만두라는 얘기가 또 나왔었는데 제가 거부했죠.(웃음) 1년 쉬면서 나름대로의 운동을 많이 했죠. 자신과의 약속을 했어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체력을 많이 비축하자고 다짐했죠.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집 주변 7km를 뛰고, 줄넘기 하고, 계단을 오르고 그랬어요. 학교 가기 전 일찍 일어나서요. 아침에 일어날 때, 눈 뜨기가 정말 싫었어요. ‘눈 뜨면 또 힘든 것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죠.(웃음) 하루만 빠질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결국 스스로 이겨냈죠. 그리고 이 때 기초체력을 확실히 다져 놓았던 것이 대학교 진학하고, 프로 생활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는 다시 한 번 힘찬 비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비행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듯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MBC배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결승에서 창신공고와 경기를 했는데, 제가 왼발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어서 우승해서 기억이 많이 남아요. 그런데 3학년 때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고등학교 재학 할 때 대회 조항 중 하나가 나이제한이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까지만 출전할 수 있었는데 저는 1년을 쉬어서 같은 학년들보다 나이가 한 살이 많았죠.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대회에 나가질 못했어요. 후배들 뒷바라지 하면서 같이 훈련하고 그랬죠.”
같은 학년의 다른 선수들은 대회에 나가서 대학과 프로 팀의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었지만
위기의 끝에서 찾아온 기회
어떤 팀들도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명지대의 유판순 감독은 그를 알아봤고, 그런 그를 조련하여 명지대를 대학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승을 2번 했고, 4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1학년 때부터 주전을 했어요.
“87년도 대통령배 우승이 기억이 많이 남았어요. 준결승에서 제가 결승골을 넣었고, 결승전에서 국민은행과 붙었는데, 그때 국민은행에 명지대 선배들이 8명이 있었어요. 지금 성남을 맡고 계신
유판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유판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명지대 동문들에게는 유판순 선생님이 전설이에요.(웃음) 그분에 관해서는 지금 제가 책을 한권 쓰고 싶을 정도로 많은 기억들이 있어요. 아마 지금 살아계셔서 K리그 감독을 하시거나 했으면 언론을 휘어잡으셨을 것 같아요. 말솜씨가 정말 좋으셨거든요. 말솜씨도 좋으셨지만 선수들에게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죠. 선수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면, 무섭게 꾸짖으시기는 하지만 그 꾸짖음을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어요. 선수들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고, 그 장단점을 개개인이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죠.”
“선수 관리와 심리적 측면의 컨트롤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어요. 선수들의 심리적 특성을 잘 꿰뚫고 계셨죠. 선생님께서 워낙 무섭고 호랑이 같으시니까 주변 사람들이 너 대학시절 동안 몇 대나 맞았냐고 물어보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전 한 대도 맞질 않았어요. 왜냐하면 선생님께서는 얘는 때리고 혼내면 운동장에서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없는 선수라고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명문 팀으로의 입단, 그리고 찾아온 시련
이렇듯 훌륭한 감독 밑에서 큰
“K리그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어요. 기분이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고향에 가깝기도 했고 당시 대우에
“그때의 대우는 정말 엄청난 팀이었죠. 지금 말하면 뭐 레알 마드리드 정도?(웃음) 정말 대단한 팀에 들어와서 뿌듯했는데, 막상 팀에 들어와 보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우 시절 그는 한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가장 선명했던 기억은 데뷔 년도의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아쉬운 준우승을 차지한 그 때였다.
“88년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를 동대문 운동장에서 럭키금성과 경기를 했어요. 결승전 마지막 무렵에 제가 왼발로 슛을 했어요. 발등에 맞는 순간 들어갔다고 느꼈는데
전북으로의 이적, 그의 재능을 꽃피우다
드래프트 전체 순위 2위로 프로축구판에 당당히 뛰어든 그였지만 프로의 벽은 생각만큼 쉽게 넘지 못했다. 그는 부상과 군문제 등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6년간 60여 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결국 그는 94년 전북 버팔로의 창단 멤버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94년도에 전북 버팔로의 창단 멤버로 들어갔어요. 대우에 6년 동안 있었는데, 마지막 계약기간이 끝나고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전북에서 팀을 창단했고 기회가 와서 전북으로 가게 됐죠. 사실 대우에서 있는 동안 부상과 군문제 등으로 많은 경기에 뛰지 못했어요. 주로 근육 부상이 많았죠. 나중에 알았는데 근육 신경 쪽은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한다고 하더라고요.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까 경기를 잘 뛰지 못했을 때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위축되었는데 그게 어찌 보면 쉽게 나을 수 있는 부상을 더 장기화 시켰던 것 같아요.”
“대우에 있는 동안 사실 이적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거부를 했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한낮 오기에 불과했다고 봐요. 나중에 전북 버팔로로 옮기고 나서 좀 더 심리적으로 안정도 되고 그러면서 경기도 잘 뛰고 그랬는데 어린 마음에 ‘성공을 해도 쟁쟁한 선수들이 있는 대우에서 성공하자, 이 호화군단 속에서 성공해야 진정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는 주전 경쟁에 밀려서 딴 팀으로 가서 경기를 뛰는 건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었죠. 팀을 옮기고 기량이 쭉쭉 올라가니까 나중에는 팀을 진작 옮겼어야 되는데 하고 생각했죠. 대우 구단 자체에서 내보냈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을 해요.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스스로가 나서서라도 이적을 요청하던가 했었어야 되는데 아쉽습니다.”
경쟁에서 오는 힘든 프로 생활이었지만 그는 환경을 바꾸며 새롭게 시작했다. 전북의
“전북 버팔로에서 뛴 94년도에 베스트 11에 선정되면서 좋은 시즌을 보냈어요. 하지만 너무 아쉬웠던 것이 득점왕 경쟁에서 밀린 거였죠. 리그를 7경기 남겨 둔 상황에서 제가 11골을 넣었는데 그때 당시 득점 순위 2위였어요. 그런데 마지막 7경기에서 결국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어요. 득점 순위 2위까지 올라가니까 ‘대우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여기에서 이루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골 욕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비웠어야 되는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 보니까 결국 한골도 넣지 못했죠. 결국 그해 골든슈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빛났던 시즌이었지만 팀을 살펴보면 사정은 달라졌다. 신생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전북 버팔로는 엄청난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해체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팀이 어렵다 보니까 선수들이 똘똘 뭉쳤죠. 감독님께서 사비도 내시고, 기업에서 스폰서도 얻어 오시고 하면서 1인 3역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런데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 있으니까 선수들이 더욱 단합이 잘 되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잘 버텨냈고, 현대가 전북 버팔로를 인수하면서 팀 사정이 확 나아졌어요. 물론 저도 재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을 받았고요.(웃음)”
늦은 나이에 실력을 꽃피운 그는 그 실력을 모두 보여줄 시간도 없이 은퇴를 준비하게 되었다. 선수 생활 끝 무렵에 모교에서의 코치 제의가 왔고, 그는 그 제의를 승낙하게 된다.
“96년
선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명지대. 그는
지도자로서의 시작, 그리고
그가 처음부터 지도자로서의 삶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수 시절에는 그 스스로 지도자로서의 냉철함을 가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선수 생활을 할 때 특히 대학교 때 지도자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어요. 한 팀원이 30명 정도 되는데, 감독은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30명 중에 11명을 뽑아야 되잖아요.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프로에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지훈련을 가서 훈련을 하다 보면 학창시절에 접하지 못하는 많은 체계적인 훈련을 하게 되거든요. 프로 선수 시절에 유럽도 갔고 남미도 갔었어요. 한국에서 접하지 못한 색다른 훈련법을 많이 배웠죠. 이런 축구 선진국들의 훈련 방법을 보고 익히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이걸 썩히기가 아까웠어요. 결국 이런 생각을 했어요. 30명의 팀원 모두 경기에 나갈 순 없지만 30명 모두를 훌륭한 선수로 키워내자는 생각을요.”
자신이 배운 많은 것들을 선수들에게 직접 가르쳐주면서 그는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또한
“사실 11명을 선발하는 것은 감독의 권한이잖아요. 처음 코치로 시작했기 때문에 선수 선발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고, 그저 제가 가진 것들을 선수들한테 가르쳐 준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어요. 또 은퇴 직후였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학 선수들에게 많이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몸으로 보여주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쳤죠.”
“코치로서의 5년은 선수들에게 제 가진 것을 가르친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었어요. 시간 가는 줄 몰랐죠. 또
코치 생활을 하던 그의 미래에 두고두고 기억될 하나의 인재가 명지대에 입학하게 된다. 바로
“
당시 명지대의 코치였던 그는
“2001년도 추석, 시골집에 갔는데 집에서 일본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지성이네 팀 축구 중계를 해주더라고요. 간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팀에서 페널티킥을 지성이가 차고 얼마 전에도 두 골을 넣었다는 기사를 제가 접한 다음이었어요. 그날도 역시 페널티킥, 코너킥 다 지성이가 차더라고요. 그 경기에서는 0-1로 뒤지고 있다가 코너킥으로 지성이가 어시스트를 했고, 경기 막판에 페널티킥을 얻었어요. 그런데 지성이가 안차고 다른 선수가 차더라고요.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그날 저녁 지성이한테 추석인데 잘 지내시냐고 하면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죠. ‘전에는 페널티 킥 너가 찼는데 왜 오늘 경기에는 안찼냐’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페널티 킥 찬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선수인데, 시즌 초반에 공격 포인트가 하나도 없었대요. 그래서 감독이 자기보고 차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수에게 양보한 거죠. 그 때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프로 무대에서는 기록이 곧 돈인데, 게다가 지성이는 그쪽 무대에서 용병인데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면서까지 팀원의 사기를 올려주는 역할을 해 낸 것이잖아요.”
“일본 천황배에서 우승하고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할 때, 천황배 결승이 끝난 후 감독, 코치 헹가래를 다 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지성이를 헹가래 쳤대요. 일본 사회에서는 정말 쇼킹한 뉴스였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그렇게 위해주기가 어렵듯이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헹가래 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또 교토 퍼플 상가 구단주는 지성이가 떠날 때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꼭 교토에서 마치라고 부탁했어요. ‘니가 절름발이가 되어도 우리는 널 환영할 것이다’ 라고 말했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지성이가 팀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자세로 뛰었는지 알 수 있죠. 이런 것들이 지금 영국에서도 어필되는 것 같아요. 영국 사람들도 동양에서 온 선수가 뭐 얼마나 하겠냐 하고 지켜봤겠죠. 그런데 한경기 두경기 하다보니까 보이거든요. 팀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동료를 위하는 것. 이런 것들을 보여주면서 신뢰를 얻은 것 같아요.”
또 그는
“지성이가 아인트호벤에서 맨유로 이적하기 전에 수원공고의
“제가 볼 때 지성이의 가장 큰 장점은 정신력과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어떤 상황이 와도 평정심을 유지 할 수 있는 대범함이 있어요. 이것이 정신적인 측면이라고 한다면, 축구 기술적인 면에서는 타이밍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 흐르듯 축구를 해요. 패스 할 타이밍에 패스를 하고, 드리블을 할 타이밍에 드리블을 하고. 보고 있으면 정말 기가 막히죠. 이 타이밍이란 것은 기술보다 위에 있거든요. 또한 이것은 부분 전술이나 공격 작업, 이러한 일부분만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의 흐름을 다 읽어 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죠. 작은 체력으로 세계적인 선수들이 다 모여 있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뛴다는 것이 참 대견해요. 타이밍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국내 최고라고 생각해요. 또한 이러한 장점을 가진 선수는 한국에서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이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 제가 편지를 써 줬어요. 한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차이에 대해서 말해주고, 일본에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 너의 활약으로 동포들에게 기쁨을 주어라, 또 슈팅력이나 힘이 좀 약하니까 집중적으로 연습해라 뭐 이런 것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죠. ‘빅리그에 진출하는 그 날 웃는 얼굴로 보자’ 라고. 사실 마지막 말은 인사말로 한 것이었는데, 편지의 마지막 말을 정말 이뤄낸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지성이가 운을 타고 났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볼 땐 운도 운이지만 자신의 노력이 먼저 있었기에 운이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아직도 지성이 아버지를 만나 뵈면 편지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도 이제 복사를 해서 가지고 있어요. 선수들에게 심리적으로 교육이 필요할 때 편지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죠. 지성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서 프리미어리그까지 진출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선수들한테 자신감을 북돋아줘요.”
감독, 그 무거운 이름
2003년
“감독 첫해, 2003년 4월에 광주에서 춘계 연맹전 8강을 고려대와 했는데, 8강전에서 골든골로 진 것이 너무 아쉬웠죠. 그날 정말 선수들 모두 컨디션도 좋고 경기 내용도 좋았는데 승부차기 가기 직전에 골든골을 허용해서 졌어요. 선수들 전체가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울고, 저는 벤치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쳐져 있으면 선수들이 더 힘들어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운동장으로 들어가서 선수들을 일으켜 세우고 다독거리는데 정말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더라고요. 우승전력이었고, 대진운도 좋은 편이었는데 아쉬웠죠.”
경기에서 진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다음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기 결과 이외의 것이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힘들다기보다는 불안하다? 이런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힘든 것은 없는데,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어요. 이유가 있는데, 예전에 대회 중에 선수 한 명이 쓰러진 적이 있어요. 인공호흡을 해서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선수는 결국 축구를 그만두게 됐어요. 부모님이나 자기 자신은 더 하고 싶어 했었는데 제가 만류했죠. 인공호흡을 제가 했어요. 거기에 담당 의사도 있고 다 있었는데 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달려가서 했죠. 운동보다는 생명이 우선이잖아요. 선수가 쓰러지는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 구조대가 와서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인공호흡을 계속 했어요. 입을 때면 선수가 죽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 1년여 간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했어요. 감독 생활 하면서 좀 힘들었죠. 운동 조금 힘들면 선수들이 쓰러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죠(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많이 안타까웠어요.”
제자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하고 끔찍이도 아끼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지도 철학 역시 축구 능력보다 인성의 완성이 먼저였다.
“물론 선수들이니만큼 축구 실력이 있어야겠죠. 하지만 저는 선수들에게 인성을 더 강조해요. 축구선수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지성이를 모델로 봤을 때, 지성이가 인성이 모자랐다면 저렇게 큰 선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선수들은 더욱 자기중심적 사고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성을 강조합니다.”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축구란 즐거워야 하고. 생각해야 되고. 협동해야 한다고.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에요. 또, 축구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말해요. 객관적인 전력상 떨어지는 편의 팀이 이기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축구를 발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할 때 그런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인연이란 것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들에게 보답하려 더 노력했고, 받은 가르침을 다시 많은 제자들에게 베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그에게 끊을 수 없는 소중한 많은 인연들을 선물해 준 것이다. 인연들을 회상하며 짓던 그의 행복한 미소가 앞으로도 계속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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