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로 얻은 사랑, 축구로 베풉니다. - 김경래

 

김경래. 그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인연이란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게 많은 사랑을 준 그의 스승들, 그리고 지금 그가 베풀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인연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된다. 축구라는 것이 만들어준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다. 따뜻한 사람의 따뜻한 축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왼발을 잘 쓰는 꼬마, 축구를 시작하다

 

“부모님이 교육자셨어요. 아무래도 그렇다보니까 운동 기구도 그렇고 이것저것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 중 하나가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축구공을 많이 가지고 놀았어요. 제가 왼발을 쓰는데, 부모님께서도 왼발을 쓰는 제 모습을 보시고 조금 신기하게 생각하셨고 눈여겨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축구공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다 보니 축구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축구를 하겠다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어요.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었죠. 부모님께서도 제가 축구를 좋아하고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 보이셨나 봐요. 그래서 제 의견을 승낙해 주셨죠. 그때부터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저 축구가 좋았던 경상남도 곤양의 한 아이는 그렇게 그와 평생 함께 할 축구와의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상남도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때 대표가 김종부, 최재식, 양정환 등이었어요. 경남에서 가장 잘 했던 학생들이었죠. 그때 기억이 많이 남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엄청난 훈련량 때문이었어요. 초등-중등-고등-대학-프로까지 이 다섯 단계를 거쳤지만, 훈련량은 어렸을 적 경남 대표 시절이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 이렇게 힘든 훈련을 하고 소년체전에 나갔는데, 1회전에서 탈락했어요. 충남 선발하고 첫 경기였는데, 1:1로 비긴 후에 추첨에서 졌어요. 옛날에는 승부차기가 없었고, 추첨으로 승부를 결정했거든요.

봉투 두 개를 놓고 양 팀 주장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팀이 먼저 봉투를 집어서 승부를 결정짓는 그런 방식이었어요. 그 때 추첨을 주장이었던 ()종부가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바로 진 거죠. 너무 억울했어요. 훈련량도 혹독할 정도로 많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자신감도 있었는데 실력에서 진 것도 아니였으니까 많이 안타까웠죠. 그때 당시 머리 모양, 신발도 다 똑같이 맞춰서 나갔거든요. 그렇게 연습도 많이 하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져서 허무했어요. 저도 그렇고 같이 대회 나갔던 친구들도 그렇고 다들 운동장에 누워서 서럽게 울었어요.

 

소년의 날개, 두 번 꺾이다

 

처음 나가는 대회였던 만큼 많이 설??던 그였다. 하지만 처음 느껴본 패배는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부모님께서 축구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꺼내셨고,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소년 체전을 마치고, 잠시 축구를 쉬었어요. 1년 반 가량 쉬었죠. 부모님께서 공부하시기를 원하셨고, 저도 부모님 뜻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체전이 끝나자마자 축구부가 있던 통영초등학교에서 지내다가, 고향의 곤양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곤양중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축구공 생각이 그렇게 났어요.(웃음) 축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결국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죠. 축구를 다시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서 결국 제 뜻을 다시 받아들여주셔서, 축구부가 있는 진주중학교로 전학하면서 다시 축구를 시작했어요.

 

“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뛰어보니까 또 그렇진 않더라고요. 어릴 때였지만 공을 잘 찬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고 실제로 초등학교 4,5,6학년 시절 모두를 경상남도 대표로 지냈었거든요. 그래서 쉬고 다시 축구를 했는데도 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남들보다 많이 뒤쳐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웃음)

 

분명 그는 공을 잘 찼던 모양이다. 1년 반 가량의 공백기를 가졌던 그였지만, 그 공백기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춘계 연맹전에서 우승을 하며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춘계연맹전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 대회의 100번째 골을 넣어서 상도 받았죠. 그래서 기억이 좀 남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주최 측에 고등학교 코치분이 한분 계셨는데 저를 스카우트 하려고 그 상을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결국 그 학교엔 가지 않고 고향의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요.

 

하지만 막 비행을 시작한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다가왔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발목을 잡았던 기초체력이 그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 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운동을 무리하게 하다가 그는 결국 학교를 쉬게 된다.

 

"체력이 많이 약했어요. 어릴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몸이 정말 안 좋아졌어요. 그때는 훈련 끝날 때쯤 되면 코피가 줄줄 쏟아졌죠. 그 당시 훈련의 마지막이 체력훈련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체력훈련을 많이 빠졌죠. 친구들이 체력훈련 빠지려고 일부러 코피 내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어렸을 적부터 체력이 좋지 않았는데, 기술적으로 공을 차면서 그 단점을 커버했어요. 그런데 몸이 점점 나빠지다 보니까 기초 체력 자체가 다 소진이 돼버린 거죠.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아이였지만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서 그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공백기를 그는 끊임없는 훈련으로 채워나갔다.

 

“그래서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쉬었어요. 쉬면서 보약을 먹고, 운동을 조금씩 하면서 다시 체력을 비축했죠. 집에서는 운동을 그만두라는 얘기가 또 나왔었는데 제가 거부했죠.(웃음) 1년 쉬면서 나름대로의 운동을 많이 했죠. 자신과의 약속을 했어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체력을 많이 비축하자고 다짐했죠.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집 주변 7km를 뛰고, 줄넘기 하고, 계단을 오르고 그랬어요. 학교 가기 전 일찍 일어나서요. 아침에 일어날 때, 눈 뜨기가 정말 싫었어요. ‘눈 뜨면 또 힘든 것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죠.(웃음) 하루만 빠질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결국 스스로 이겨냈죠. 그리고 이 때 기초체력을 확실히 다져 놓았던 것이 대학교 진학하고, 프로 생활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는 다시 한 번 힘찬 비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비행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듯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MBC배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결승에서 창신공고와 경기를 했는데, 제가 왼발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어서 우승해서 기억이 많이 남아요. 그런데 3학년 때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고등학교 재학 할 때 대회 조항 중 하나가 나이제한이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까지만 출전할 수 있었는데 저는 1년을 쉬어서 같은 학년들보다 나이가 한 살이 많았죠.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대회에 나가질 못했어요. 후배들 뒷바라지 하면서 같이 훈련하고 그랬죠.

 

같은 학년의 다른 선수들은 대회에 나가서 대학과 프로 팀의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었지만 김경래는 그렇지 못했다. 스카우터들은 2학년 말에서 3학년 사이의 선수들을 집중 관찰했고, 그는 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두 번째 비행도 이렇게 실패로 끝날 것 같아 보였다.

 

위기의 끝에서 찾아온 기회

 1,2학년 때 명지대가 해마다 진주로 합숙을 왔어요. 그 때 유판순 선생님께서 명지대 감독님이셨는데 저를 보시고 쓸 만하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최진한이라는 고등학교 선배가 명지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선배님이 말씀을 잘 해주셨죠. 그래서 명지대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다른 학교에서는 오라는 제의가 없었어요. 많은 대학들이 고등학교 3학년들이 나오는 대회에 와서 경기를 지켜보고 쓸 만한 선수를 뽑는데, 저는 3학년 때 대회에 나갈 수 없었으니까 대학교 관계자들의 눈에 띌 수가 없었죠.

 

어떤 팀들도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명지대의 유판순 감독은 그를 알아봤고, 그런 그를 조련하여 명지대를 대학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승을 2번 했고, 4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1학년 때부터 주전을 했어요. 조윤환, 신동철 등등 제가 학교에 들어갔을 당시 올림픽 대표만 8명이 있었어요. 정말 대단했죠. 그 땐 제가 주전으로 뛸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는데 다행히 감독님께서 절 1학년때부터 써 주셨어요. 제가 4학년때 대통령배 우승 이후로 정식대회에서 명지대가 우승한 적이 없어요. 그 점은 좀 안타깝죠.

87년도 대통령배 우승이 기억이 많이 남았어요. 준결승에서 제가 결승골을 넣었고, 결승전에서 국민은행과 붙었는데, 그때 국민은행에 명지대 선배들이 8명이 있었어요. 지금 성남을 맡고 계신 김학범 감독님을 비롯해서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죠. 결승전까지는 올라갔는데 솔직히 우승은 무리라고 생각했어요. 상대팀이 일단 전력이 한수 위였고, 제가 준결승전에서 발등을 밟혀서 결승전 치르는 날에는 축구화에 발이 안 들어갈 정도로 부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유판순 감독님께서 져도 좋으니까 축구화 신고 운동장에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제가 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 말씀드렸죠. 제가 들어가면 전력에 누수가 되고 다른 선수들한테 해만 끼치고 좋을 것이 하나 없는데 왜 자꾸 투입하려 하시냐고. 그래도 들어가라면 들어가라고 막 성을 내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마취제를 맞고 들어갔어요. 정상적인 11명이 들어가도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였는데 부상당한 저를 포함한 11명이 경기를 뛰니까 정말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겼죠. 그리고 우승과 함께 저는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저한테 대회 끝난 후 상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감독님이 워낙 잘해주셨고 절 아껴주셔서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유판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유판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명지대 동문들에게는 유판순 선생님이 전설이에요.(웃음) 그분에 관해서는 지금 제가 책을 한권 쓰고 싶을 정도로 많은 기억들이 있어요. 아마 지금 살아계셔서 K리그 감독을 하시거나 했으면 언론을 휘어잡으셨을 것 같아요. 말솜씨가 정말 좋으셨거든요. 말솜씨도 좋으셨지만 선수들에게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죠. 선수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면, 무섭게 꾸짖으시기는 하지만 그 꾸짖음을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어요. 선수들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고, 그 장단점을 개개인이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죠.

 

“선수 관리와 심리적 측면의 컨트롤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어요. 선수들의 심리적 특성을 잘 꿰뚫고 계셨죠. 선생님께서 워낙 무섭고 호랑이 같으시니까 주변 사람들이 너 대학시절 동안 몇 대나 맞았냐고 물어보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전 한 대도 맞질 않았어요. 왜냐하면 선생님께서는 얘는 때리고 혼내면 운동장에서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없는 선수라고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최진한 선배 같은 경우는 제가 볼 때 실력이 정말 출중한데도 선생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선생님께서는 저와는 다르게 최진한 선배는 적당히 혼이 나야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지금도 일선 지도자들 중에 명지대 출신 지도자들이 선수들을 잘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된 근원이 바로 유판순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해요.

 

명문 팀으로의 입단, 그리고 찾아온 시련

이렇듯 훌륭한 감독 밑에서 큰 김경래 88년 당시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명문 구단이었던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K리그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어요. 기분이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고향에 가깝기도 했고 당시 대우에 조광래(경남 감독) 선수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선배였거든요. 드래프트를 하기 전에 유판순 감독님이 저한테 넌지시 이런 소리를 하시더라고요. 너한테는 프로보다 실업축구가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제가 좀 조용하고 소심한 편이다 보니까 경쟁이 심한 프로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하지만 저는 프로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때 윤상철, 황보관 등 쟁쟁한 선수들과 동급으로 비교가 됐었고, 대학교 3학년 때 올림픽 대표도 경험 했으니까 제 나름대로는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의 대우는 정말 엄청난 팀이었죠. 지금 말하면 뭐 레알 마드리드 정도?(웃음) 정말 대단한 팀에 들어와서 뿌듯했는데, 막상 팀에 들어와 보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우 시절 그는 한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가장 선명했던 기억은 데뷔 년도의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아쉬운 준우승을 차지한 그 때였다.

 

88년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를 동대문 운동장에서 럭키금성과 경기를 했어요. 결승전 마지막 무렵에 제가 왼발로 슛을 했어요. 발등에 맞는 순간 들어갔다고 느꼈는데 김현태 골키퍼가 손을 뻗어서, 공이 손끝을 스치고 골대를 맞고 나오더라고요. 그 경기에서 골이 들어갔으면 결승골이 되면서 경기가 끝나는 건데, 그걸 놓쳐서 재경기를 해서 결국 졌어요. 그때 골이 들어갔으면 제가 더 좀 더 좋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 사람들도 그 때 이야기를 하죠. 그 골이 들어갔으면 저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몰랐을 거라고요.(웃음) 저도 정말 아쉬웠습니다.

 

전북으로의 이적, 그의 재능을 꽃피우다

드래프트 전체 순위 2위로 프로축구판에 당당히 뛰어든 그였지만 프로의 벽은 생각만큼 쉽게 넘지 못했다. 그는 부상과 군문제 등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6년간 60여 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결국 그는 94년 전북 버팔로의 창단 멤버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94년도에 전북 버팔로의 창단 멤버로 들어갔어요. 대우에 6년 동안 있었는데, 마지막 계약기간이 끝나고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전북에서 팀을 창단했고 기회가 와서 전북으로 가게 됐죠. 사실 대우에서 있는 동안 부상과 군문제 등으로 많은 경기에 뛰지 못했어요. 주로 근육 부상이 많았죠. 나중에 알았는데 근육 신경 쪽은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한다고 하더라고요.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까 경기를 잘 뛰지 못했을 때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위축되었는데 그게 어찌 보면 쉽게 나을 수 있는 부상을 더 장기화 시켰던 것 같아요.

 

“대우에 있는 동안 사실 이적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거부를 했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한낮 오기에 불과했다고 봐요. 나중에 전북 버팔로로 옮기고 나서 좀 더 심리적으로 안정도 되고 그러면서 경기도 잘 뛰고 그랬는데 어린 마음에 ‘성공을 해도 쟁쟁한 선수들이 있는 대우에서 성공하자, 이 호화군단 속에서 성공해야 진정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는 주전 경쟁에 밀려서 딴 팀으로 가서 경기를 뛰는 건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었죠. 팀을 옮기고 기량이 쭉쭉 올라가니까 나중에는 팀을 진작 옮겼어야 되는데 하고 생각했죠. 대우 구단 자체에서 내보냈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을 해요.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스스로가 나서서라도 이적을 요청하던가 했었어야 되는데 아쉽습니다.

 

경쟁에서 오는 힘든 프로 생활이었지만 그는 환경을 바꾸며 새롭게 시작했다. 전북의 김기복 감독 또한 프로 경력이 많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해 주었다. 감독의 믿음을 등 뒤에 업은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그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30, 조금 늦은 나이었지만 그는 6년 동안의 답답함을 풀듯 연일 골 폭죽을 쏘아 올렸다.

 

“전북 버팔로에서 뛴 94년도에 베스트 11에 선정되면서 좋은 시즌을 보냈어요. 하지만 너무 아쉬웠던 것이 득점왕 경쟁에서 밀린 거였죠. 리그를 7경기 남겨 둔 상황에서 제가 11골을 넣었는데 그때 당시 득점 순위 2위였어요. 그런데 마지막 7경기에서 결국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어요. 득점 순위 2위까지 올라가니까 ‘대우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여기에서 이루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골 욕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비웠어야 되는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 보니까 결국 한골도 넣지 못했죠. 결국 그해 골든슈는 윤상철, 실버슈는 라데, 브론즈슈는 황보관이 탔고, 저는 결국 득점랭킹 4위로 마치면서 상을 타지 못했죠. 심리적인 부분이 켰던 것 같아요. 아쉬웠지만 94년도가 저의 K리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이였죠.

 

개인적으로는 가장 빛났던 시즌이었지만 팀을 살펴보면 사정은 달라졌다. 신생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전북 버팔로는 엄청난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해체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팀이 어렵다 보니까 선수들이 똘똘 뭉쳤죠. 감독님께서 사비도 내시고, 기업에서 스폰서도 얻어 오시고 하면서 1 3역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런데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 있으니까 선수들이 더욱 단합이 잘 되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잘 버텨냈고, 현대가 전북 버팔로를 인수하면서 팀 사정이 확 나아졌어요. 물론 저도 재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을 받았고요.(웃음)

 

늦은 나이에 실력을 꽃피운 그는 그 실력을 모두 보여줄 시간도 없이 은퇴를 준비하게 되었다. 선수 생활 끝 무렵에 모교에서의 코치 제의가 왔고, 그는 그 제의를 승낙하게 된다.

96김희태 선생님께서 명지대에 감독으로 계셨는데 지금 코치를 시작해라 하시면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그런데 전북 차경복 감독님께서는 선수 생활을 좀 더 하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1년을 더 하고 97년 시즌 끝나고 바로 명지대에 코치로 오게 됐죠. 97년도에는 전북에 감독님이 최만희 감독님이셨는데 은퇴 하고 전북에서 같이 코치 생활을 하자고 하셨어요. 하지만 명지대에서 먼저 말을 꺼냈고, 1년이나 절 기다려줬기 때문에 명지대로 오게 되었죠. 모교가 아니었다면 또 몰랐을 텐데(웃음) 명지대에서 보낸 4년 동안 선후배 관계부터 시작해서 지도자 선생님들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주저 없이 명지대로 왔어요. 제 아내는 아무래도 프로가 낫지 않겠냐고 했는데 제가 학교로 왔죠.

 

선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명지대. 그는 김희태 감독 아래에서 혹독한 감독 수업을 받으며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지도자 생활에 또 하나의 인연이 찾아왔다. 지금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이 명지대에 입학한 것이었다.

 

지도자로서의 시작, 그리고 박지성과의 만남
그가 처음부터 지도자로서의 삶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수 시절에는 그 스스로 지도자로서의 냉철함을 가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선수 생활을 할 때 특히 대학교 때 지도자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어요. 한 팀원이 30명 정도 되는데, 감독은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30명 중에 11명을 뽑아야 되잖아요.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프로에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지훈련을 가서 훈련을 하다 보면 학창시절에 접하지 못하는 많은 체계적인 훈련을 하게 되거든요. 프로 선수 시절에 유럽도 갔고 남미도 갔었어요. 한국에서 접하지 못한 색다른 훈련법을 많이 배웠죠. 이런 축구 선진국들의 훈련 방법을 보고 익히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이걸 썩히기가 아까웠어요. 결국 이런 생각을 했어요. 30명의 팀원 모두 경기에 나갈 순 없지만 30명 모두를 훌륭한 선수로 키워내자는 생각을요
.”

자신이 배운 많은 것들을 선수들에게 직접 가르쳐주면서 그는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또한 김희태 감독으로부터 감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

사실 11명을 선발하는 것은 감독의 권한이잖아요. 처음 코치로 시작했기 때문에 선수 선발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고, 그저 제가 가진 것들을 선수들한테 가르쳐 준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어요. 또 은퇴 직후였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학 선수들에게 많이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몸으로 보여주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쳤죠
.”

코치로서의 5년은 선수들에게 제 가진 것을 가르친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었어요. 시간 가는 줄 몰랐죠. 김희태 감독님한테 감독이 되기 위한 일종의 수업을 받았어요. 늘 훈련 끝난 후 과제를 주셨어요. 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많은 과제를 주셨는데, 나중에 감독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켜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때에는 감독님이 내주신 과제를 즐기지 못하고 일로 생각해서 힘들기도 했습니다. 즐겁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간 5년이었어요
.”

코치 생활을 하던 그의 미래에 두고두고 기억될 하나의 인재가 명지대에 입학하게 된다. 바로 박지성이었다
.

박지성 선수가 제가 코치를 할 때 들어왔어요. 많은 사람들이 박지성 선수에 대해 물어봐요(웃음). 일본 교토 퍼플 상가에 가기 전까지 함께 있었죠. 과묵하고, 조용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이 있는 그런 아이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속이 꽉 차 있는 건실한 청년이었죠
.”

당시 명지대의 코치였던 그는 박지성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술적인 면이나 체력적인 면에서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강인함, 그리고 자신보다 팀을 생각하는 마음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

“2001
년도 추석, 시골집에 갔는데 집에서 일본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지성이네 팀 축구 중계를 해주더라고요. 간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팀에서 페널티킥을 지성이가 차고 얼마 전에도 두 골을 넣었다는 기사를 제가 접한 다음이었어요. 그날도 역시 페널티킥, 코너킥 다 지성이가 차더라고요. 그 경기에서는 0-1로 뒤지고 있다가 코너킥으로 지성이가 어시스트를 했고, 경기 막판에 페널티킥을 얻었어요. 그런데 지성이가 안차고 다른 선수가 차더라고요.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그날 저녁 지성이한테 추석인데 잘 지내시냐고 하면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죠. ‘전에는 페널티 킥 너가 찼는데 왜 오늘 경기에는 안찼냐했더니 그러더라고요. 페널티 킥 찬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선수인데, 시즌 초반에 공격 포인트가 하나도 없었대요. 그래서 감독이 자기보고 차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수에게 양보한 거죠. 그 때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프로 무대에서는 기록이 곧 돈인데, 게다가 지성이는 그쪽 무대에서 용병인데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면서까지 팀원의 사기를 올려주는 역할을 해 낸 것이잖아요
.”

일본 천황배에서 우승하고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할 때, 천황배 결승이 끝난 후 감독, 코치 헹가래를 다 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지성이를 헹가래 쳤대요. 일본 사회에서는 정말 쇼킹한 뉴스였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그렇게 위해주기가 어렵듯이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헹가래 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또 교토 퍼플 상가 구단주는 지성이가 떠날 때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꼭 교토에서 마치라고 부탁했어요. ‘니가 절름발이가 되어도 우리는 널 환영할 것이다라고 말했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지성이가 팀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자세로 뛰었는지 알 수 있죠. 이런 것들이 지금 영국에서도 어필되는 것 같아요. 영국 사람들도 동양에서 온 선수가 뭐 얼마나 하겠냐 하고 지켜봤겠죠. 그런데 한경기 두경기 하다보니까 보이거든요. 팀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동료를 위하는 것. 이런 것들을 보여주면서 신뢰를 얻은 것 같아요
.”

또 그는 박지성이 감독의 요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영리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급격하게 바뀌는 경기의 흐름에서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센스를 타고 났다고 했다
.

지성이가 아인트호벤에서 맨유로 이적하기 전에 수원공고의 이학종 감독과 저, 그리고 지성이 부모님이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지성이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국내에 계신 지도자분들한테 자문을 구했는데 대부분이 가라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제 생각을 여쭤보셨어요. 그래서 저는 무조건 가야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죠. 그 이유는 지성이가 코칭 스텝의 스타일을 정확하게 읽어내기 때문이었어요. 감독이 요구하는 것을 100% 소화해 낼 수 있는 선수를 싫어할 만한 감독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성이는 세계 어느 곳 어느 팀을 가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제 생각을 아버님한테 말씀드렸죠
.”

제가 볼 때 지성이의 가장 큰 장점은 정신력과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어떤 상황이 와도 평정심을 유지 할 수 있는 대범함이 있어요. 이것이 정신적인 측면이라고 한다면, 축구 기술적인 면에서는 타이밍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 흐르듯 축구를 해요. 패스 할 타이밍에 패스를 하고, 드리블을 할 타이밍에 드리블을 하고. 보고 있으면 정말 기가 막히죠. 이 타이밍이란 것은 기술보다 위에 있거든요. 또한 이것은 부분 전술이나 공격 작업, 이러한 일부분만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의 흐름을 다 읽어 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죠. 작은 체력으로 세계적인 선수들이 다 모여 있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뛴다는 것이 참 대견해요. 타이밍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국내 최고라고 생각해요. 또한 이러한 장점을 가진 선수는 한국에서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지성의 성공은 스스로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노력을 하게끔 동기 부여를 해준 그의 노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큰 요소일 것이다
.

지성이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 제가 편지를 써 줬어요. 한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차이에 대해서 말해주고, 일본에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 너의 활약으로 동포들에게 기쁨을 주어라, 또 슈팅력이나 힘이 좀 약하니까 집중적으로 연습해라 뭐 이런 것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죠. ‘빅리그에 진출하는 그 날 웃는 얼굴로 보자라고. 사실 마지막 말은 인사말로 한 것이었는데, 편지의 마지막 말을 정말 이뤄낸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지성이가 운을 타고 났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볼 땐 운도 운이지만 자신의 노력이 먼저 있었기에 운이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아직도 지성이 아버지를 만나 뵈면 편지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도 이제 복사를 해서 가지고 있어요. 선수들에게 심리적으로 교육이 필요할 때 편지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죠. 지성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서 프리미어리그까지 진출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선수들한테 자신감을 북돋아줘요
.”

박지성 2002 월드컵 포르투칼 전에서 결승골을 넣었을 때 정말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는 그는 박지성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꽃피었다. 그의 스승에게 받은 넘치는 사랑을 제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 뿌듯함 때문이리라
.

감독, 그 무거운 이름

2003
김희태 감독이 물러나면서 그는 명지대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지휘봉을 잡고 기쁜 순간보다는 안타까웠던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한다.

감독 첫해, 2003 4월에 광주에서 춘계 연맹전 8강을 고려대와 했는데, 8강전에서 골든골로 진 것이 너무 아쉬웠죠. 그날 정말 선수들 모두 컨디션도 좋고 경기 내용도 좋았는데 승부차기 가기 직전에 골든골을 허용해서 졌어요. 선수들 전체가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울고, 저는 벤치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쳐져 있으면 선수들이 더 힘들어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운동장으로 들어가서 선수들을 일으켜 세우고 다독거리는데 정말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더라고요. 우승전력이었고, 대진운도 좋은 편이었는데 아쉬웠죠
.”

경기에서 진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다음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기 결과 이외의 것이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

힘들다기보다는 불안하다? 이런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힘든 것은 없는데,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어요. 이유가 있는데, 예전에 대회 중에 선수 한 명이 쓰러진 적이 있어요. 인공호흡을 해서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선수는 결국 축구를 그만두게 됐어요. 부모님이나 자기 자신은 더 하고 싶어 했었는데 제가 만류했죠. 인공호흡을 제가 했어요. 거기에 담당 의사도 있고 다 있었는데 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달려가서 했죠. 운동보다는 생명이 우선이잖아요. 선수가 쓰러지는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 구조대가 와서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인공호흡을 계속 했어요. 입을 때면 선수가 죽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 1년여 간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했어요. 감독 생활 하면서 좀 힘들었죠. 운동 조금 힘들면 선수들이 쓰러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죠(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많이 안타까웠어요
.”

제자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하고 끔찍이도 아끼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지도 철학 역시 축구 능력보다 인성의 완성이 먼저였다
.

물론 선수들이니만큼 축구 실력이 있어야겠죠. 하지만 저는 선수들에게 인성을 더 강조해요. 축구선수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지성이를 모델로 봤을 때, 지성이가 인성이 모자랐다면 저렇게 큰 선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선수들은 더욱 자기중심적 사고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성을 강조합니다
.”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축구란 즐거워야 하고. 생각해야 되고. 협동해야 한다고.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에요. , 축구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말해요. 객관적인 전력상 떨어지는 편의 팀이 이기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축구를 발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할 때 그런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

인연이란 것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들에게 보답하려 더 노력했고, 받은 가르침을 다시 많은 제자들에게 베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그에게 끊을 수 없는 소중한 많은 인연들을 선물해 준 것이다. 인연들을 회상하며 짓던 그의 행복한 미소가 앞으로도 계속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기를 기대한다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구웹사이트
편집 : 한국축구역사통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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