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17 대표팀의 박경훈 감독 ⓒKFA
공격 차단이 우선이지만 지연도 훌륭한 수비

1986년 6월 2일 멕시코시티,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멕시코월드컵 A조 첫 경기가 펼쳐졌다.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실제 결과도 우승이다). 우리로서는 힘든 경기가 예상됐으며, 마라도나를 누가 막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마라도나는 전반에만 두 골을 어시스트했다.

마라도나를 전담 수비하기 위해 임무가 김평석, 허정무에게 주어졌다가 다시 김평석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이 몸을 아끼지 않는 육탄 방어까지 하였으나 수퍼스타 마라도나의 활약에 세 골을 내주고 만다. 드디어 후반 15분쯤 박경훈에게 마라도나 수비 명령이 떨어졌다. 박경훈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자신에게 마라도나 수비가 맡겨질 것으로 알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터였다.

“그가 몸이 좋은 선수라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했고, 철저한 왼발잡이니까 나는 오른쪽 방향 전환을 염두에 두었으며, 개인 기술이 뛰어난 선수니까 한번에 제압하기보다 그의 공격을 지연시키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수비수는 공격을 차단시키는 것이 최선이지만 대표팀 경기라면 공격수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그럴 때 차선은 지연시키는 것인데 지연도 훌륭한 수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구는 비슷했지만, 스피드가 좋았던 박경훈은 마라도나를 꽁꽁 묶었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은 무뎌졌다. 마침내 후반 28분 박경훈이 수비 지역에서 잡은 공을 오버래핑 끝에 최순호까지 연결시켰고, 최순호가 몸을 돌리면서 패스한 것을 박창선이 페널티구역 밖 정면에서 받아 30m 오른발 중거리 슛을 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나라가 첫 골을 기록하는 순간이다.

“멕시코 고지대에서 힘들었지요. 그러나 마라도나에게 다가갈 때는 힘들지 않은 척 하려고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내가 지친 걸 알면 자신있게 몰고 다닐테니까요. 그가 멀어지면 재빨리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날 애국가가 울릴 때의 긴장했던 감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찡한 감동과 국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야겠다고 결심했죠.”

1980년대 최고의 오른쪽 윙백, 박경훈의 월드컵 본선 첫 경기 경험담이다.
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 나선 박경훈(오른쪽에서 2번째) ⓒ월간축구
공격수보다 한 발 먼저 뛰어야

“수비수와 공격수는 서로 힘들 때 승부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발 먼저 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기술과 체력도 대단하지만 정신력도 훌륭한 선수였어요. 수비와 승부에서 지지 않으려고 한 발 먼저 나왔지요. 보통 공중 패스를 받으면 가슴으로 막고 공이 땅에 떨어질 때 드리블이나 트래핑을 합니다. 마라도나는 왼발을 사용하니까 내 위치에서는 오른쪽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수비했어요. 그런데 그는 가슴으로 막고 내려오기 전에 무릎으로 치고 나를 넘어가더라고요.”

“지지 않으려는 강한 정신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감탄했습니다. 세계적인 공격수가 한 발 먼저 뛰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나도 공격보다 한 발 먼저 뛰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서로 힘들 때 진정한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누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한 발 더 뛰고, 한 발 먼저 뛰느냐에 승리가 달린 거죠. 내가 그쯤하면 마라도나는 헉헉대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또 뛰고 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군요. 세계적인 그 선수를 가진 아르헨티나가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겁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세 경기 풀타임 참가했던 박경훈은 그때의 교훈을 가지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한다. 역시 세 경기에 교체없이 뛰었다. 세 번째 경기에서 당시 유명했던 우루과이 최고의 공격수 ‘루벤 소사’를 전담마크 했는데, 박경훈의 노련한 수비에 막혀 후반 18분에 교체 아웃됐다(경기 결과는 후반 47분 추가 시간에 골 허용 0:1 패).

“1990년에 세계는 압박 축구를 시작했어요. 한국이 아시아에서 전성기를 누릴 때였는데 월드컵 본선에 갔더니 공을 잡자마자 두세 명이 달려들었는데 공을 빼앗기고 나면 자신감을 잃었어요. 아시아의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유럽의 팀들은 공을 잡은 상대에게 두세 명씩 붙었어요.”

공격보다 한 발 더 뛰는 적극적인 수비에 막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에게 3패를 당했다.
포항제철 시절의 박경훈 ⓒ월간축구
그의 장점은 스피드, 장점을 살린 오버래핑

U-17 대표팀 시절 박경훈 감독을 보좌했던 김청훈 코치(현 백암고 감독)는 “스피드가 좋아서 공격수가 달아나지 못했다”고 박경훈의 선수 시절을 평가했다. 달리기가 빨랐던 것은 공격수의 미덕이다. 수비수는 키가 크고 점프력이 좋으면 좋다. 그러나 박경훈은 빠른 수비수였고 자주 공격에 가담했다.

1986년에 국가대표팀이 동대문에서 88올림픽과 평가전을 할 때도 골을 넣었고, 1989년 월드컵 예선 네팔과 경기에서도 골을 넣었다. K-리그에서도 통산 4골을 넣었다. 특히 1986년 프로축구 챔피언결정전에서 후기리그 우승팀 럭키금성(현 서울)을 상대로 골을 넣어 전기리그 우승팀 포항제철(현 포항)의 챔피언 등극에 기여했다. 그의 스피드 덕분이었다.

어린 박경훈은 서울 수유중에서 태권도와 육상을 했고 100m, 200m, 400m 계주, 넓이뛰기, 높이뛰기 종목 대회에 참가했다. 대구 청구고에서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했는데 넓이뛰기로 익힌 순발력과 높이뛰기로 단련된 점프력을 인정받아 수비로 데뷔했다. 변병주, 백종철이 청구고 동창이다.

“나의 장점을 알았어요. 빠르다는 장점을 살려서 수비가 뻥뻥 걷어내기만 하던 시절에 공을 가지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오버래핑을 시도했죠. 그게 팀에 도움이 됐습니다.”

축구를 시작한지 2년,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3학년이던 1979년에 팀은 전국고교축구대회 5관왕에 오른다. 박경훈은 한양대에 입학했고 그해 겨울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많은 축구팬이 변병주만이 오른쪽 측면을 휘저었다고 기억하지만, 국가대표팀의 오른쪽 사이드가 빨랐던 데에는 빠른 수비수 박경훈의 공로가 있었다.

“100m, 200m, 400m를 뛰면 변병주가 이겼을 테지만 축구는 10m, 20m의 순간 스피드가 중요한데 이것은 지지 않았을 겁니다.”

박경훈은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살렸으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다.
짧은 축구 경력을 만회하기 위해 부족한 기본기 연습을 거듭했으며, 20kg의 납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하루 종일 지내다 잘 때만 벗었다. 그는 이러한 비결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포항제철에서 뛰면서 세 차례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1984년과 1987년 프로축구 베스트11에 뽑혔다. 마침내 1988년 프로축구 MVP를 수상했으며 1990년 아시안게임 베스트11에도 뽑혔다.◉

(박경훈 : 1961년 출생. 1980~1990년 국가대표 선수. A매치 92경기 1득점. 1984~1992년 K리그 134경기 4골 8도움. 현 전주대 축구학과 교수)


글=손성삼(KFA 기획실 과장)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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