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5 8, 수퍼리그로 명명된 대한민국 프로축구의 첫 경기가 열리던 날. 3만 명이 조금 넘었을까? 모처럼 그라운드를 찾은 관중들은 뜨거운 축구의 향연에 빠져 들었다. 이들이 정부에 의해 동원 되었던 자발적으로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왔던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한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든 대한민국에서 프로축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경기를 처음 목격한 산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살고 있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묻고 싶다. “당신은 이곳에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까?”

 

동대문운동장

 

23년 K-리그의 꿈을 잉태한 곳. 이곳에서 단순히 K-리그의 첫 경기가 열렸다는 이유만으로 동대문 운동장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운동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곳에서는 굴곡진 우리 근대사의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곳이기도 하다.

 

연면적 : 26,989(8,164)

건축연면적 : 11,376(3,441)

수용인원 : 27,000

좌석수 : 22,706

 

경성운동장은 1925년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총 공사비 155,000원을 들여 군대 훈련소로 사용되던 훈련원 자리에 건설된 한국 최초의 종합 경기장이자 동양 최고의 국제적인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출처 :  경성운동장 평면도,  "일제하 한국 근대스포츠시설에 관한 연구" - 손환(중앙대학교) >

 

대규모 체육 시설에 대한 필요성과 영친왕 결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경성부는 조선체육회와 대단위 체육 시설의 건립에 합의했다. 이에 토목기사 오오모리는 일본 내 체육 시설을 직접 방문 조사하고 외국 시설에 대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는 등 오랜 준비와 면밀한 조사 끝에 육상 경기장,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 마장 등 당시 주변국의 체육 시설 규모를 훌쩍 뛰어 넘는 종합운동장의 형태로 설계, 당시 경성부 토목 과장 이와시로의 공사 지휘아래 마침내 1925 10 15. 경성운동장은 드디어 일반인에게 첫 선을 보였다.

 

당초의 건설 목적이 순수한 체육 발전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하나였다 할지라도  

경성 운동장은 각종 체육 단체와 언론사, 각 급 학교의 대회주최가 연이어 이루어지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된다.

<출처 : 한국축구의 아버지김용식 선생의 미공개 사진들 , 미디어다음 / 서준형 통신원 >

특히 한국 축구의 전설적 영웅 중 한명인 김용식 선생이나 그의 영원한 경쟁자였던 김영근 선생등 당시 내노라 하는 선수들이

기량을 발휘하며 억눌린 민족 자존심을 대변했던 곳도 경성 운동장이었다.

<출처 : 도깨비 뉴스 1977년 어린이날 - 어린이날 경축 11회 대잔치>


그저 선수들의 함성과 응원이 목소리가 이곳을 채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마땅히 대단위 군중이 모일 곳이 없던 시절, 각종 대외 행사의 집합지는 경성운동장 시절부터 서울 운동장을 거쳐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언제나 이곳이었다.

 

일제 식민지하 민족의 울분을 분출하는 용광로였고 해방이후 민족 분단의 아픔이 시작되는 좌익과 우익의 집회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곳도 군사 독재 시절 각종 국가 행사에 동원 되었던 학생들이 모이던 곳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맞이한다.

<출처 : 서울 육백년사 - 서울 운동장 확장 공사>


해방과 함께 경성 운동장은 서울 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2 1차 보수 공사에 이어 1966년에는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잔디와 조명장비가 설치되어 야간에도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메르데카 컵에서 우승한 공로에 대한 일종의 포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의해 서울 운동장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전후 어려운 경제사정과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로 인해 세계로 소통하는 문이 굳게 닫혀있던 60,70년대, 서울 운동장은 스포츠 외교를 통해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1970년 에우제비오의 벤피카가 내한해 경기를 가졌고 1972년 브라질 산토스 팀을 이끌고 내한한 펠레는 서울 운동장에서 국가대표팀에게 3:2로 승리를 거두며 스탠드를 가득 메운 한국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1976박정희 배 국제 축구 대회 말레이시아와의 개막전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깜짝 스타가 탄생하기도 했다. 4 1로 뒤처지던 한국은 종료 7분을 남겨두고 투입된 차범근이 내리 3골을 득점,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 내며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한국 축구 명승부의 현장도 서울 운동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3 5 18 역사적인 한국 프로축구 개막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굉장히 기다려졌습니다. 12월에 팀이 창단하고 6개월 정도 훈련을 하는데 이날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겁니다. 어떨까? 잘 될까? 나는 잘할 수 있을까?”

 

원년 득점왕 박윤기씨의 말이다.

 

그때 고등학교 야구, 그러니까 황금사자기나 봉황기 대회의 인기가 굉장해서 바로 옆 야구장에는 관중이 꽉 차는데 실업리그가 열리는 동대문 운동장에는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옆 구장에서 함성소리가 들릴 때마다 항상 나도 저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었지요. 더군다나 프로 야구는 82년에 출범하면서 인기가 대단 했구요. 그래도 국가 대표 경기가 열리면 동대문 운동장에 관중이 꽉 찼단 말입니다. 내가 그걸 보면서 언젠가 나도 저런데서 경기를 하고 싶다. 언젠가 저 자리에 서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게 1983년에 이루어 진 겁니다.”

 

텅 빈 운동장을 달리던 축구 선수에게 수퍼리그는 말 그대로 꿈과 같은 시작이었다. 1980년대 신군부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자 정책적으로 일부 기업에게 구단 운영을 강요하며 프로 리그를 출범시킨다. 한국 프로 스포츠의 시작에 대해 독재의 수단이었다는 원죄를 부여하는 관점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기형적 시작이었다 해도 그 당시 축구를 위해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선수들에게 할렐루야, 유공 코끼리의 2개 프로팀과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의 3개 실업팀이 참가한 수퍼리그는 유일한 삶의 터전이었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아시아 최초의 프로리그였다.

 

11부터 입구는 만원이었다. 수퍼리그 첫날은 상오 11부터 운동장입구를 꽉 메운 관중들로 대성황. 개회식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인 하오 2까지 입장을 완료했고 표를 갖고도 입장 못한 5백여명의 관중과 표를 사지 못한 2천여명의 관중들로 운동장 입구는 한때 혼잡을 이루었다. 당초 비로 인해 7일 개막 예정에서 하루 늦게 연기된 까닭에 우려되었던 텅 빈 관람석은 그저 우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한없이 촌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초대형 축구화나 직경 3미터 짜리 공의 모습도 이때는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상공에는 대형 애드벌룬 3개를 포함한 20여개의 크고 작은 애드벌룬이 떠있었고 스탠드 주변에는 5개 구단의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나붙었다. 화려한 식전행사 한편에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개막전의 서편 스탠드 밑에 신체조시범준비를 위해 도열하고 있던 동 인천여상 학생들이 들고 있던 풍선에 어떤 남자가 담뱃불을 붙여 연속 폭발, 76명이 화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원경 당시 체육부 장관이 시축한 가운데 오후 3에 시작된 개막전 경기는 할렐루야와 유공 코끼리(현 부천 SK)의 경기였다. 유공 박윤기의 선취 득점과 할렐루야 박창선의 만회골로 무승부를 이룬 첫 경기를 시작으로 이어 대우와 포철의 경기가 시작되는 지금은 어색하기만한 야구의 더블 헤더 개념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 아시아 최초 프로리그 출범을 바라보는 일본의 관심은 지대했다. 언제나 한국 축구의 벽을 넘지 못했던 그들에게 한국 프로축구의 시작은 더 깊은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일까? 이례적으로 NHK에서도 수퍼리그 개막전을 직접 취재했다.

 

그렇게 시작한 원년, 42 1 8 58명의 유료 관객이 들어왔다. 첫해의 프로 축구 돌풍은 곧 신생팀 창단 러시로 이어졌다. 84년 대우, 포항제철이 프로로 전환한데 이어 현대와 럭키 금성이 잇달아 창단하며 87년부터는 바야흐로 실업팀은 제외된 순수 프로리그로 운영이 되었다. 84 9월 지금의 잠실 운동장이 개장 하며서울이라는 이름을 넘겨준 동대문 운동장은 89년 창단된 일화 천마의 합세로 유공 코끼리, 럭키금성 축구단, 일화 천마 3팀을 연고로 하는 명실상부한 K-리그 중심지가 되었다.

 

1983년 동대문 운동장에서는 12 경기가 열린데 이어 84 20 경기, 85 10 경기, 86 5 경기, 88 7 경기, 89 19 경기, 90 22 경기, 91 48 경기, 92 48 경기, 93 40 경기, 94 35 경기, 95 34 경기, 96 19 경기, 98 1경기, 99 17경기, 2000 12경기 등, 컵 대회를 포함 총 349 경기가 치러졌다.

 

동대문 운동장의 가장 화려한 시기였던 90년대 초중반, 이곳에서만 3번의 해트트릭을 완성하며 동대문의 사나이라 불리던

럭키금성( FC 서울) 소속의 윤상철 선수는 동대문 운동장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아늑함 같은 것이 느껴졌죠, 편안하고... 한 만 명 정도는 항상 찾아 주셨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랐고 늘 거기서 경기를 했으니까 저한테는 진정한 홈구장이었습니다. 아마 좋은 기록이 있었다면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요. 그때 경기장 분위기는 참 따뜻하고 가족적인 느낌이 있었습니다. 골수팬이 많아서 늘 찾던 분들이 경기장을 찾곤 하셨지요. 시합을 하러 운동장에서 이렇게 보면 언제부턴가 관중석에 눈에 익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그분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러 가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 기준에서는 거기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정말 좋은 곳이었어요. 잔디 구장이 없던 시절이니까 거기서 경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선수도 많았고 그곳을 밟는 다는 것이 선수 자신에게 굉장한 의미를 주곤 했습니다.”

 

외국에 나갔다 들어와서 보니 주차장이 되어 있더군요.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서울에 한 팀이 남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지금이라도 다시 증축을 해서 새롭게 서울에 한 팀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동대문 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렸던 프로 경기는 2000 10 22 3 15 성남과 수원이 가진 2000 아디다스 컵 결승전이었다. 수원이 성남을 상대로 1 : 0 승리를 거둔 이날 경기에서 마지막 득점자는 서정원 선수였다.

 

동대문 운동장은 추억이었다. 천 원짜리 몇 장을 내면 변두리 극장처럼 한번 입장에 2경기를 보고 나올 수 있었던 시절. 변변한 좌석도 없이 까끌한 시멘트 계단에 둘러 앉아 신문지로 햇빛만 겨우 가린 채 축구를 보면서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 불평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눈 앞, 잔디가 파여 붉은 흙이 다 드러난 그라운드 위에서는 벌겋게 살이 익은 선수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달리게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훗날 그곳에서 영근 꿈이 월드컵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2002 3군 사관학교의 체육대회를 끝으로 동대문 운동장에서의 공식 경기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2003 3 1 동대문 운동장은 임시 폐쇄되어 임시 주차장 및 풍물시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에는 어떤 영혼도 뜨거운 스포츠의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다. 푸른 잔디가 덮혀 있던 필드자리엔 두꺼운 아스팔트가 대신하고 있고 선수들 몸짓 하나하나를 주시하던 관중석의 시선 대신 하루 생계를 잇기 힘든 시장 상인들의 인심 사나운 눈빛만이 가득하다.

 

이름을 밝힐 수없는 한 담당 공무원은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현재 동대문 운동장에 얼마나 많은 시선과 의견이 집중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시민단체부터 여기 장사하는 사람까지 이게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해 모두 한마디씩 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현재 체육용지로 되어 있는 이곳을 어떻게 활용한다고 하면 일단 도시계획이 우선이 되어 형질 변경이 이루어 져야하고 여론도 수렴해 공청회도 열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일개 공무원이 쓱쓱 볼펜으로 몇 자 적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거라는 거죠.”

 

대신 다시 축구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힘들 겁니다. 여기를 주차장으로 쓸 수 있다는 건 이 시설물의 역할을 대신하는 대체 시설이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명박 시장님이 내년 6월이면 임기가 끝나시는데 레임덕이라는 표현은 이상하겠지만 이제 와서 굳이 논란거리를 만들 이유가 없거든요. 당분간 어떤 결정이 내려지긴 힘들 겁니다.”

 

이곳에 대한 기사를 쓰기위해 여러 곳을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하려 했지만 정작 서울시에서는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연표하나 찾을 수 없었다. 100년을 바라보는 이 건축물에 대해 고작 a4 용지 반절자리 유인물을 보는 것은 씁쓸한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울시와 이 담당 공무원들을 비난 할 수 없다. 이건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일들이 정치 논리나 경제 논리에 의해 결정 되곤 한다.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빠져서는 안 되고 경제적으로는 실익이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40년간 콘크리트로 깊게 가려져 있던 청계천도 새 하늘을 맞이한 지금. K-리그 역사가 담긴 동대문 운동장이 주차장으로 쓰이는 현실은 아프기만 하다. 추억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잊고 있었지만 동대문 운동장은 기억하고 있다.

 

출처 : K리그 구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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