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한국의 요한 크루이프로 불리웠던 박상인 ⓒ스포탈코리아
2007년 시즌 K리그는 개인 기록 부문에서 값진 성과를 남겼다.
골키퍼 김병지(37, 서울)가 최다 출장(465경기)을 기록하는 동시에 153경기 연속 무교체 출장 기록을 세웠다. 김기동(35, 포항)도 필드 플레이어로는 역대 최다 경기(426경기)를 소화하면서 ‘철의 다리’로 주목받았다. 두 선수 모두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10년 이상 나이차가 나는 선수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선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앞서 이 길을 걸었던 선수가 있으니 70~80년대 ‘한국판 요한 크루이프’로 이름을 날렸던 박상인(57, 부산교통공사 감독)이다. 1987년 현역에서 은퇴할 당시 그의 나이 36세. 현재까지도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박상인의 ‘최고령’ 타이틀을 넘어선 선수가 없다.

공부보다 축구가 좋았던 아이

박상인이 축구를 처음 시작했던 시기는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늦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달리기, 높이뛰기 등 체육 활동에서 두각을 보였던 박상인이었지만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던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향 인근의 경남 창녕중학교에서 축구부를 창단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평소 운동에 대한 그의 소질을 눈여겨 보던 체육 선생님이 창녕중으로의 진학을 권했고, 박상인은 축구부 창단 멤버로 창녕중에 입학하게 됐다.

“말도 마세요. 축구를 한다니까 집에서는 반대가 엄청나게 심했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공부보다 축구가 더 좋다는 거였죠.(웃음)”

축구 생활에 날개를 달아준 동래고 시절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박상인은 창녕중을 거쳐 부산의 축구 명문 동래고로 진학했다. 입학 당시 특별히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동계 훈련을 착실히 소화했던 것이 이후의 축구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개월의 동계 훈련을 굉장히 열심히 소화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선생님이 좋게 봐주셨는지 1학년 때부터 2, 3학년 선배들과 함께 주전으로 뛸 수 있었지요.”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박상인은 지능적인 움직임으로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드리블 능력과 적재적소에 뿌리는 패스, 미드필드에서 폭넓게 움직이면서 몰아치는 득점력까지. 동래고 2학년 때는 3학년들의 주축 무대인 전국 고교대회에서 MVP에 선정될 정도로 기량이 만개했다.

“청룡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결승전에서 대신고를 만났는데 2골을 넣으면서 MVP를 수상했어요. 좋은 미드필더는 기본적으로 지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빠른 두뇌 회전과 패스 능력, 공간을 파고 드는 능력을 고루 겸비해야죠. 어린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갖추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축구부 주장이 된 동래고 3학년 때는 여러 대학과 실업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했던 것과 달리 박상인은 상업은행에 입단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선수의 의지보다는 학교에서 진로를 정해주는 식이었어요. 저도 꼭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은행팀을 선택했죠. 은행팀 창단이 러시를 이루던 때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유망주들이 바로 프로팀에 입단하는 것이었죠. 어차피 대학을 졸업하면 은행팀에 가게 될 텐데 조금 더 일찍 들어가서 운동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그런 선택에 후회가 없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보니, 대학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조금 생기기도 합니다.(웃음)”

1976년 한국대표팀 단체사진. 가운데줄 오른쪽 끝에 박상인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육군팀과 대표팀에서 전성기를 누리다

어린 나이에 성인 무대에 진출했던 박상인은 상업은행을 거쳐 군 복무를 위해 육군팀에 입대했다. 당시 육군팀은 대통령배, 전국선수권 등 주요 대회 타이틀을 휩쓸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전국대회에 7번 참가해 우승 트로피를 6차례, 준우승 트로피를 1차례 들어올렸으니 그야말로 ‘무적의 행군’이었다.

육군 팀 공격의 핵으로 활약했던 박상인은 1975년 전국선수권 MVP에 선정되는 영광과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화랑(1진)과 충무(2진)로 운영되던 대표팀에는 김호곤, 차범근, 허정무, 김재한, 김진국, 김황호, 이영무, 신현호, 조영증 등 당대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박상인은 소위 ‘스타’는 아니었지만 공격과 수비를 잇는 핵심 역할로 축구팬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돌이켜 보면 저는 언제나 2등 아니면 3등이었어요. 당장 차범근이라는 이름이 버티고 있잖아요?(웃음) 그렇지만 저는 조연 역할에도 만족했습니다. 미드필더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니까요. 당장 골 기록만 봐도 웬만한 스트라이커들보다 제가 더 많은 골을 넣었을 걸요?”

수많은 골 중 박상인 스스로 꼽는 백미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1975년 한일정기전과 1977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차 예선 이스라엘전에서 터진 골이다. 한일정기전에서는 박상인의 슈팅이 그물을 뚫고 나가면서 골이 됐다. 그 강력한 힘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한참 동안 화제가 된 장면이다. 결과는 한국의 3-0 승리.

1977년 이스라엘전에서의 감격은 좀더 특별했다. 강적 이스라엘을 상대로 반드시 이겼어야 했던 경기였지만 후반 종료 시점이 다가오도록 1-1의 팽팽한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 42분, 차범근의 헤딩 패스가 바운드 되는 순간 박상인이 골 지역으로 뛰어들면서 그대로 오른발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한국은 최종덕의 추가골을 보태 3-1로 승리했다.

“지금도 서울에 가면 한 번씩 동대문에 들릅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고 주변 풍경도 많이 변한 듯 하지만 경기장 근처에만 가면 그 시절의 흥분이 되살아나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1977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예선 호주전에서의 박상인
왜소한 체격을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극복

박상인의 선수 시절 체격은 176cm, 65kg으로 운동 선수치고는 마른 편이었다. '한국의 요한 크루이프'라는 별명도 그의 호리호리한 몸매와 크루이프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을 본따 붙여진 것이다.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육군 팀에 있을 때였습니다. 성낙운 감독님이 따로 개인 훈련을 시켰는데, 군 내부에 있는 철제 기구에 시멘트를 둥그렇게 말아 역기를 만들어주시기까지 했죠. 그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팀의 함흥철 감독은 김강남-성남 형제와 박상인을 따로 불러 저녁마다 체력 훈련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때만 해도 대표팀에 선발되면 태릉선수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시절이었어요. 6~7년 정도 태릉에서만 지낸 셈인데, 각종 장비가 다 갖춰져 있는 태릉에서 집중적으로 훈련할 수 있었죠. 상체 근육이 발달되면서 힘이 붙으니까 몸싸움에서도 잘 밀리지 않게 되더군요.”

해외 진출 1세대- 서독 뒤스부르크 입단

1978년 차범근이 서독 다름슈타트에 입단한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데 이어 1980년에는 허정무가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유럽 진출에 대한 열망이 생겼고, 박상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박상인은 대표팀에서의 맹활약을 발판으로 네덜란드 페예노르트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페예노르트를 지도하고 있던 불가리아 출신의 감독은 테스트에 임한 박상인에게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줬다. 금방이라도 페예노르트 입단이 성사될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박상인의 몸값이 문제였다.

“에이전트가 몸값을 너무 높게 부른 것 같아요. 감독은 그래도 놓치기 싫었던지 스페인 테네리페로 떠나는 한달 전지훈련에 동행할 것을 제안하더군요. 거기서 제 능력에 확신을 갖게 되면 제대로 대우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죠.”

“전지훈련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정식 계약도 코 앞에 두고 있었는데, 계약 전날 구단에서 전화가 왔어요. 선수 노조에서 더 이상 외국인 선수와 계약하면 뛰지 않겠다는 압박이 들어왔다며 미안하게 됐다더군요.”

네덜란드에서의 성공 예감에 들떠있던 박상인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뛰겠다는 꿈을 접지 않고 현지에 남아 입단할 팀을 물색했다. 결국 2개월 후 연락이 닿은 서독 뒤스부르크의 테스트를 거친 후 1981년 분데스리가에 데뷔하게 됐다. 분데스리가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흐리고 습한 독일 기후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던 탓이다.

“그라운드에 물기가 많으니까 기술보다는 힘이 있어야 생존에 더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훈련량이 많으면 꼭 뒷근육이 올라오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열흘 내외면 회복이 다 되는 증세였는데 독일에서는 날씨 탓인지 최소한 20일, 많게는 한달 이상 걸렸죠.”
입단 초기 주전으로 몇 경기에 출전했지만 입지를 굳히지 못했던 이유다.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로 유명 선수들의 집결지였던 분데스리가를 경험하고 온 그에게 최근 ‘해외파’ 선수들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느낌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독일이든 네덜란드든 혹은 영국이든,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현지 언어를 익히는 게 최우선입니다. 그 다음에는 실력으로 인정받아야죠. 우리 선수들 기술은 어디를 가든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여기에 파워와 스피드를 갖추면 훨씬 더 유리합니다. 대표적으로 박지성 같은 선수는 워낙 많이 뛰니까 기술만 더 보태지면 정말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 같아요. 이영표는 머리와 기술 모두 좋은 선수니까 지금처럼 꾸준히 기량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요.”

“제가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당시에 덴마크 출신의 알란 시몬센이라는 선수가 있었어요. 165cm 밖에 안되는 선수인데 워낙 날렵한데다 지능적이다보니 수비수랑 안부딪히고도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면서 골을 터트렸죠. 득점왕에다 유럽 MVP까지 수상했으니 대단한 선수였어요. 신체적인 약점을 뛰어넘는 기술을 갖는 게 성공의 열쇠입니다.”
1984년 6월호 월간축구의 표지를 장식한 박상인 ⓒ베스트일레븐
할렐루야 창단 멤버로 국내 축구 복귀

서독 생활이 2년여 지났을 무렵, 대표팀 시절 인연을 맺은 함흥철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서 프로리그가 시작되니 돌아오라는 요청이었다. 박상인은 프로팀 1호인 할렐루야를 이끌게 된 함흥철 감독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장고 끝에 1983년 귀국을 결심했다.

“2부리그라도 서독에서 제 기량을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해외 무대에 진출했을 때 제 나이가 30살이었는데, 좀더 일찍 갔더라면 어려운 상황들을 모두 참고 새로운 무대에 도전해봤을 거라는 아쉬움이 생기는 게 사실이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박상인을 한국 축구는 열광적인 열기로 맞아주었다. 1983년 프로리그가 시작되면서 모든 경기장이 만원 관중으로 넘실댔다. 박상인은 박성화, 최종덕, 오석재, 홍성호, 박창선 등 동료들과 함께 할렐루야를 프로리그 초대 챔피언으로 올려놓았다. 주축 선수들이 노장이라는 한계 때문에 우승 후보에는 밀려 있었지만 후기리그에 저력을 발휘하며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정상으로 올라섰다. 박상인은 전경기(16경기)에 출전하며 4득점 3도움을 기록,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됐다.

“첫 해 관중 열기가 엄청났죠. 이제 K리그가 생긴지 25년이 넘었는데, 지역 연고에 대한 개념만 제대로 적용했어도 일찍 프로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겠나 싶어요. 관중 열기가 지속되려면 지역을 연고로 한 선수들이 많이 나와야 되거든요. 팀마다 지역에 정착하고 스타 만들기에 열중해야 된다는 얘기는 지금까지 하고 있잖아요. 결국 축구인과 구단 모두 적극적인 의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죠.”

박상인은 84년에도 전경기(25경기)출장의 대기록을 세우며 7골 2도움의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에도 전 경기(21경기) 출장을 이어가며 6골 2도움으로 득점 공동 6위에 오르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장수 비결은 철저한 체력관리와 충분한 수면

1985년을 끝으로 할렐루야가 해체되면서 박상인은 현대(현 울산 현대)로 이적했다. 선수로서는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35살의 노장이었음에도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는 팀이 있었다. 박상인은 현대로 이적한 첫해에도 20경기 출전에 3골을 기록하는 등 노장 투혼을 보였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87년에는 1경기 출장하는데 그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언제 은퇴하겠다고 그 시점을 잡아둔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오래 뛰겠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말년이 되니까 스스로 90분 풀타임을 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몸으로 감지 되더군요. 이쯤에서 물러나야겠구나 싶었던 것이죠. 그래도 필드 플레이어로는 최고령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박상인은 장수 비결로 ‘체력관리’를 첫 손에 꼽았다. “달리 비결이랄 것이 있나요. 운동할 때는 운동에 집중하고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잠을 충분히 많이 잔 것과 체력 보강에 좋다는 약도 모두 챙겨먹었어요. 아내의 내조가 큰 힘이 됐습니다.”
부산교통공사 사령탑을 맡고 있는 박상인 감독
최고 위치에 있을 때 더 노력해야

박상인은 현역 은퇴 이후 부산에 터를 잡고 모교인 동래고 감독으로 지냈다. 1992년부터 2년동안은 20세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 최용수, 이기형, 김대의 등을 이끌고 1993년 호주 세계 청소년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2002년 동래고 감독에서 물러난 뒤 2006년부터는 부산을 연고로 하는 실업팀 부산교통공사의 초대 감독으로 새로운 팀을 지휘하고 있다. 부산교통공사는 창단 첫해부터 대통령배 준우승, 전국체전 우승 등 굵직한 성적을 남겼고 내셔널리그에서도 종합 3위를 기록하는 등 ‘신생 돌풍’을 일으켰다.

“실업팀이긴 하지만 첫 해부터 그렇게 좋은 성적을 만든 팀은 유례가 없을 겁니다. 뭐든 될 것 같았죠. 선수들이 워낙 잘 뛰어준 공이 큽니다.”

그러나 2007년에는 ‘2년차 징크스’인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때문에 새 시즌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창단 첫해에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습니다. 저나 선수들 모두 방심한 모양이에요. 올해는 틀을 흔드는 큰 폭의 변화가 있을 겁니다.”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더 노력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올 시즌에는 내셔널리그에서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 뵐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1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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