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던 최문식 ⓒ스포탈코리아
90년대 K-리그를 기억하고 있는 축구팬들이라면 '최고의 테크니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최문식(38)을 떠올렸을 것이다.

최문식은 현역 시절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그 어떤 선수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로 인해 별명과 팬클럽 이름 모두 ‘테크니션’이었다. 그는 축구공을 이용한 온갖 현란한 기술을 실전에서 보여줬고, 예측불허의 창의적인 플레이로 축구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K-리그에서 성공한 최초의 고졸스타이기도 했다. 1989년 동대부고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프로팀 포항제철(현 포항)에 뛰어들어 2002년 부천에서 활동할 때까지 총 264게임에 출장, 47골-25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한명으로 활약했었다.

2002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그는 경수클럽 총감독과 포항 U-15팀 감독을 거쳐 현재 포항 2군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보여줬던 그의 번뜩이는 감각은 지도자로서도 이어져 현재 파리아스 감독이 신임하고 있는 코치로 성장했다.

'효창의 마라도나'로 불리던 고교시절

최문식의 고교 시절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동대부고 시절 그는 ‘효창의 마라도나’라 불리우며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로 고교무대를 평정한 바 있다. 특히 동대부고 3학년이었던 1988년 대통령금배에서는 팀 창단 10년만에 첫 우승을 안겼으며, 7골로 대회 득점왕과 MVP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도 제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신감이 넘쳤고, 제 플레이에 만족하며 경기를 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볼을 찼기 때문인지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고, 많은 분들의 관심 속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죠.”

이렇듯 최문식이 또래 선수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꾸준한 기술 연마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공차는 것을 좋아했던 최문식은 팀 훈련 외에도 개인적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팀 환경에서라면 그런 발재간이나 개인기 훈련을 할 바에야 체력훈련에나 더 신경 쓰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지만, 최문식에게는 다행히 그런 부분에 대해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펠레나 마라도나 같이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을 흠모했어요. 그래서 저도 그런 쪽으로 개인훈련을 많이 해왔구요. 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하는구나, 저런 기술은 어떻게 하는거지?’ 하고 생각하며 따라해 보려고 노력을 했었죠.”

“팀 훈련은 충실하게 했고, 그 외의 시간에 개인훈련을 할 때는 볼을 갖고 하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많이 투자했어요. 그렇지만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마라도나의 단단한 체격을 보면서 웨이트를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틈틈이 했죠.”

“그냥 길 가다가도 조그만 공이 보이면 발로 차보고, 그랬어요. 펠레나 마라도나도 어렸을 때 신문지 말아서 차고 그랬다니까 저도 볼이 보이면 그냥 차보고 했던 거예요. 포항에 있을 때는 몰래 나가서 정규공보다 작은 사인볼로 연습하기도 했죠. 나름대로 감각을 익히기 위해 괜찮다고 생각해서였어요.(웃음)”

어쨌든 동대부고를 고교정상으로 끌어올린 최문식은 곧바로 U-19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고, 1988년에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에도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U-19 대표팀은 일본을 3-1로 꺾고 기분좋은 출발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 0-1패에 이어 UAE에게 0-0으로 비기며 결국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멤버가 괜찮았어요. 서정원, 김병수, 노정윤, 김도훈, 신태용 같은 선수들이 있었거든요. 지나간 이야기지만 만약 그 때 U-20 월드컵 티켓을 획득하고, 더 넓은 무대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과는 뭔가 다른 상황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죠.”
1988년 고3시절 숭실고와의 대통령금배 결승전에서 최문식(우) ⓒ월간축구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뛰어들다

지금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당시만 해도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류 선수들은 축구 명문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하는 것이 정식코스.

사실 최문식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에게 프로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바로 동대부고가 동국대와 같은 재단이라는 것과 포항제철(현 포항)의 이회택 감독이 적극적인 구애를 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당시 몇몇 명문대에서 입학제의가 들어왔었죠. 그렇지만 저는 동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동국대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 말들이 참 많았죠. 내가 동국대에 진학하지 않으면 여러 주위 분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었고...”

“그런데 당시 학생신분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실업으로 간다고 하면 아무도 관여를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어요. 여기에 마침 프로팀인 포항제철이 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접근했었죠. 당시 포항제철 감독이셨던 이회택 감독님이 제 플레이에 반하셔서 워낙 적극적으로 입단을 권유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최문식은 1989년 봄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포철행을 선택했다. 고교생이 프로에 직행해 성공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최문식으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성공적인 프로생활을 보낸 선수는 최문식밖에 없었다.

고졸 스타의 첫 번째 성공사례로 기록된 최문식은 이후 프로직행을 노리는 고졸 선수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했고, 90년대 중후반부터 고졸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프로무대를 노크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프로직행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대학에서 4년 지내는 것도 결국 프로에 가기 위한 과정이고, 만약 대학 가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어차피 대학이란 하나의 과정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에 도달한 것이니 지금 당장에 연연하기 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죠.”

“제가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에요. 나로 인해 ‘고교생이 곧바로 프로에 가더라도 괜찮구나’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이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만약 그 때 제가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이런 고졸스타의 계보가 좀 더 늦춰졌을 수도 있었다는 그런 자부심이 있죠.”
89년 포철에 입단할 무렵의 최문식 ⓒ월간축구
신인왕에 도전하다

프로무대에 뛰어든 최문식은 한동안 리그 적응에 애를 먹어야 했다. 일단 경기템포부터 고교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안이한 마음으로는 절대 헤쳐 나갈 수 없는 생존경쟁의 무대였던 것.

더군다나 최문식의 주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80년대 한국프로축구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였던 이흥실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결국 최문식은 공격형 미드필더 뿐 아니라 좌우 측면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 등 여러 위치에서 전천후로 뛰어야만 했다.

“고교 졸업하고 처음 프로에 뛰어들 때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경기를 하면 할수록 부딪치는 것이 있더군요. 힘들다는 것을 처음 느꼈죠.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었던 것과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구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아무래도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이흥실 선배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쪽으로 많이 기용되었죠. 그리고 측면 미드필더도 보고...주로 이흥실 선배가 저보다 약간 처져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 이흥실 선배님은 하늘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같이 공을 찬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시절이었죠.”

다행히 최문식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특유의 감각을 앞세워 리그 적응에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1989년 시즌 17경기에 출장에 6골-1도움으로 고정운(당시 일화), 차상해(당시 럭키금성) 등과 함께 신인왕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신인왕은 고정운(31경기 출장 4골, 8도움)에게 돌아갔다.
포항에서 활약할 당시의 최문식 ⓒ베스트일레븐
90년대 포항의 황금기를 함께 하다

사실 최문식이 포철에 입단할 무렵은 팀에 있어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시점이었다. 80년대 우승 2번, 준우승 2번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던 멤버들이 하나둘 은퇴한 가운데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이흥실-최상국-박경훈-남기영 등도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그 뒤를 이어 김상호, 이기근, 조긍연, 유동관, 윤성효, 이영상 등이 포항의 주축 선수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3인방’ 홍명보, 라데(이상 92년 입단), 황선홍(93년 입단)과 ‘영원한 포항맨’ 박태하(91년 입단)까지 포항에 합류했다. 바야흐로 80년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호화군단’ 포항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다.

최문식 역시 쟁쟁한 동료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과의 호흡을 통해 축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최문식에게는 소중한 추억. 그리고 포항은 92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93시즌 아디다스컵 우승을 잇달아 거머쥐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정말 대단했죠. 대략 95-96년 정도까지만 해도 포항의 전력이 그 어느 팀보다 강했고, 다른 팀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팀이었어요. 물론 우승은 92년 정규리그와 93 아디다스컵 우승 등 2번에 그쳤지만 팀 전력의 막강함은 단연 뛰어났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홍명보 선배로부터 시작해서 윤성효, 유동관, 김상호 선배, 거기에 저도 있었고, 전방에 황선홍 선배와 라데까지...정말 엄청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제가 미드필드에서 찔러주면 황선홍 선배나 라데가 받아서 골 넣어주고...그 당시를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했다는 기억뿐입니다.”

“특히 라데는 제가 상무에 입대한 뒤에도 저를 찾고 그랬다더군요. 제가 없으니까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찔러주는 패스가 라데의 입맛에 잘 맞았었나 봐요.(웃음) 사실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죠. 제가 볼을 잡으면 선홍이 형이나 라데가 적절하게 움직여주고, 제가 거기로 찔러주고...서로 플레이하기도 쉽고, 그러다보니 골 찬스도 많이 나면서, 득점도 많이 하고 그런 거죠.”
94 미국월드컵 예선 당시의 최문식(아래에서 2번째줄 오른쪽) ⓒ베스트일레븐
대표팀에서의 좌절

프로무대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최문식이었지만, 대표팀에서는 번번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 첫 번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출범 초기 권태규(당시 유공)와 함께 유이한 프로선수였던 최문식은 신태용(당시 영남대), 김병수, 노정윤(이상 당시 고려대) 등과의 미드필더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결국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과 본선 모두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92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에서 실패를 맛봤던 최문식은 94 미국 월드컵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에서의 불운을 떨쳐내는 듯 보였다. 최문식은 월드컵 1차 예선과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지속적으로 주전으로 뛰며 김호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문식은 이와 같은 예선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막상 94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하는 불운을 또다시 맛봤다. 김호 감독은 2무패를 기록한 뒤 맞붙었던 독일과의 마지막 3차전을 앞두고 조진호와 최문식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조진호의 투입을 결정했다. 최문식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독일전을 앞두고 경기 전날 밤까지도 저와 진호를 놓고 코칭스태프에서 많은 고심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제 나름대로 기회가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결국 진호에게 기회가 주어졌죠. 당시 미국이 워낙 폭염이였던 관계로 체력적으로 더 많이 소화할 수 있는 진호가 낙점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내가 뛰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상상을 가끔 해보곤 해요.”

각급 대표팀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신 최문식은 이후 98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도 같은 불운을 되풀이하게 됐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의 첫 번째 공식경기(1997년 1월 18일 호주 멜버른)인 노르웨이전에서 최문식은 선발출장, 날카로운 스루패스로 김도훈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98 월드컵 아시아 6조 예선과 코리아컵 등 거의 대부분의 A매치에 선발 또는 교체투입되며 차범근 사단의 주요전력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97년 8월 30일 한중 정기전을 끝으로 더 이상 최문식의 이름을 대표팀 출전선수명단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9월부터 홈 & 어웨이로 진행된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그리고 최종목표인 98 프랑스월드컵 최종엔트리에서도 최문식은 제외되고 말았다.

대표팀 출범 초창기에 좋은 활약을 펼치다 결국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선 외면을 받는 최문식의 대표팀 징크스가 또다시 재연된 것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청소년대표팀 시절부터 번번이 초반에 잘 하다가 결국은 중요한 순간에 외면을 받더군요. 하다보면 계속 좋은 것만 보여줄 수 없는 것이고, 새로운 선수나 감독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선수가 나오면 그 선수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번번이 그런 경우를 당하니까 아쉬움도 많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계기로 한 단계,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97년 일본과의 경기에서 최문식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다

상무에서 병역을 마친 최문식은 1998년 포항으로 복귀했다. 이 당시 포항은 최문식이 군입대하기 전과 비교할 때 많은 멤버 변화가 있었다. 황선홍, 홍명보, 라데 ‘3인방’이 모두 팀을 떠났고, 그 밖에 여러 주축 선수들도 은퇴했다. 반면 베테랑 고정운(98년 입단), 안익수(96년 입단)와 이라크 출신 압바스 자심(97년 입단), 크로아티아에서 온 싸빅(98년 입단) 등이 새로 가세했으며, 새내기 이동국과 백승철이 프로데뷔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도 이회택, 허정무 감독에 이어 박성화 감독이 96년부터 지휘봉을 잡고 있던 상태.

이 시즌 포항은 정규리그 내내 울산, 수원 등과 1위 경쟁을 펼쳤고, 최문식은 풀타임으로 뛴 경기는 적었지만, 주로 선발로 투입되어 후반 중반까지 팀의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적으로 98년은 정말 아쉬움이 많았던 해였습니다. 상무에서 제대하고 포항에 복귀한 첫해였고, 나름대로 제 역할을 잘 해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승을 정말 절실히 원했고, 실제로 우승 문턱까지 갔던 상황에서 놓쳤기 때문에 너무 안타까웠죠.”

98시즌은 독특한 방식으로 리그가 진행됐는데, 90분 경기에서 승리하면 승점 3점, 연장전에서 승리하면 승점 2점,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면 승점 1점을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제도가 신설되어 리그 4위 팀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시스템이었다.

포항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안양과 맞섰고,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정규리그 1위가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최문식은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되었고 후반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서 있었던 포항은 정규리그 1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후반 45분이 지났고, 모두들 1위가 확정됐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저리 타임에 코너킥을 허용했고, 그것을 무탐바가 헤딩골로 넣어버렸죠. 정말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경기에요. 그 순간만 견뎠으면 1위로 직행하는건데...”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7-8로 졌어요. 1위를 거의 손에 넣었다가 3위로 떨어졌죠. 안양까지 올라온 포항 서포터들은 샴페인까지 준비해서 터트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던데...그야말로 다잡은 고기를 놓친 거죠.”

최문식과 포항의 불운은 포스트시즌에서도 계속됐다. 전남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명승부 끝에 승리한 포항은 울산과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포항에서의 1차전에서 최문식은 백승철과 선발 투톱으로 기용됐다. 그리고 이 경기는 K-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명승부로 기록되었고, 포항은 3-2로 극적으로 승리하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최문식 역시 후반 40분에 1골을 기록하며 팀 승리에 일조했다.

“정말 극적인 경기였죠. 우리가 전반에 먼저 1골을 내줬다가 후반에 (김)명곤형이 동점골을 넣었어요. 그리고 후반 40분이 다 되어 가도록 1-1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제가 극적으로 역전골에 성공했죠. (백)승철이의 슛이 울산 수비수 맞고 흘러나왔고, 마침 제가 거기에 있었어요. 감격적인 골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축구라는 것이 참 묘하더군요.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후반 인저리 타임에 울산에게 1골을 내주고 말았죠. 정말 다리힘이 쭉 빠지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 드라마가 터졌어요. 휘슬이 울리기 직전 우리가 또다시 골을 터트린 거예요. 승철이의 정말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이었죠. 정말 보는 사람이 통쾌해질 정도의 슛이었어요. 아마 이 골은 축구팬들은 아직까지도 기억하실 겁니다. 골 터진 후 모두 얼싸안고 난리 났죠. 서포터들에게 가서 다이빙 세레모니도 하고...”

그러나 기쁨도 잠시. 최문식과 포항은 울산에서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문식은 이날 경기에서도 선발멤버로 기용됐고, 경기는 김현석과 박태하 두 베테랑의 득점으로 1-1로 진행됐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포항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이 확정되는 상황.

시간은 후반 45분으로 치닫고 있었고, 사실상 포항의 진출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후반 45분, 울산은 프리킥 상황에서 득점을 위해 골키퍼 김병지까지 공격에 가담했고 김현석의 프리킥을 김병지가 헤딩골로 연결시키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 골은 그날 저녁 CNN을 통해 전세계에 전달될 정도로 극적이었다. 상무 제대 후 첫 시즌에서 기필코 팀을 우승시키겠다던 최문식의 목표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병지 형에게 골을 내준 뒤의 허탈감과 아쉬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울산 선수들과 관중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우리는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죠.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도 그렇고, 어떻게 그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했는지..너무 아쉬웠어요.”
전남에서 뛸 당시의 최문식 ⓒ베스트일레븐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이후 최문식은 99년 전남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당시 전남에는 최문식을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준 스승 이회택 감독이 새롭게 사령탑을 맡고 있었고, 최문식은 옛 스승 밑에서 다시 한번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수많은 포항팬들의 만류와 포항에 대한 자신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전남행을 선택한 이유였다.

동대부고를 졸업해 1989년 포항에 입단한 최문식은 줄곧 포항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고, 일부 팬들은 “포항 경기도 경기이지만, 최문식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운동장을 찾는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런 꿈을 갖고 볼을 찼어요. 축구팬들에게 ‘오늘은 저 선수가 무엇을 보여줄까?’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그럼으로써 팬들이 경기장을 찾게 만드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는 것 말이에요. 100%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포항에서 나름대로 그 꿈에 근접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포항은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어요. 고교 졸업하고 거의 10년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포항을 떠난다는 생각 자체를 꿈에도 하지 못했었죠. 그렇지만 저도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무렵, 마침 전남에 이회택 감독님이 취임하셨고, 저를 원하셨죠.”

결국 99시즌부터 전남에서 뛰기 시작한 최문식은 2000시즌까지 2년 동안 65게임에 나서 11골, 8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그 중 40게임을 90분 풀타임으로 뛰었으니 확실히 포항 시절보다 많은 기회를 부여받은 셈.

그러나 99시즌 정규리그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4위팀 부산에게 졌고, 2000시즌 대한화재컵에서는 결승에서 부천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0시즌 정규리그에서도 7위의 성적으로 우승권과 멀어졌다.

“전남 시절이 오히려 풀타임을 더 많이 소화하면서 개인적으로 괜찮았던 2년이었어요. 다만 팀 전체가 순간의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죠. 그 경기만 이기면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인데, 조그마한 실수들로 매번 무너지고 그랬던 것이 안타까워요. 이회택 감독님과 다시 한번 우승을 해보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서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했는데, 의욕만으로는 잘 안되더군요.”

불운했던 일본 오이타 생활

2000 시즌까지 전남에서 뛰며 제 몫을 해냈던 최문식은 2001년 일본진출을 모색했다. 팀은 J2리그의 오이타 트리니타.

평소 많은 사람들이 최문식의 플레이스타일이라면 일본에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었기에 그의 일본 진출은 긍정적이었다. 더군다나 J2리그라면 최문식의 활약이 단연 돋보이지 않을까라는 예상도 함께 나오곤 했다. 그러나 시즌 중간에 최문식을 스카우트했던 오이타의 감독이 물러나면서 최문식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94월드컵 당시 최문식을 지도한 바 있는 김호 감독(당시 수원 감독)이 최문식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결국 최문식은 2001년 6월 K리그 수원으로 복귀하게 됐다. 고종수, 김진우 등의 부상으로 인해 미드필더가 필요했던 수원에서 2001년 남은 기간을 보낸 최문식은 2002년 부천과 1년 계약을 맺고 다시 한번 팀을 옮긴다. 그리고 2002년 한해 동안 28게임에 출장하며 자신의 몫은 해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최문식은 매년 팀을 옮기며 한 팀에 정착하지 못했고, 이것은 선수 본인에게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처럼 되지 않더군요. 다른 팀에 가서 적응하려니까 힘든 면도 많았고...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 쪽으로 다가가서 더 흡수를 하고, 동화되기 위해서 노력했어야 하는데, 그 팀을 내 팀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착오였습니다. 맞지 않는 부분도 견디고 흡수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박차고 나가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네요.”
포항 코치로서 활약하고 있는 최문식 ⓒ스포탈코리아
테크니션의 계보

90년대 이후 한국 테크니션의 계보는 김병수(현 영남대 감독)- 최문식- 윤정환(현 사간토스 코치)- 고종수로 이어졌다. 그리고 묘하게도 최문식이 존경하는 선수는 1년 선배인 김병수, 윤정환이 존경하는 선배는 최문식, 고종수가 존경하는 선배는 윤정환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유형의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간의 교감이 존재했다고 표현해야할까. 자신과 흡사한 스타일을 지닌 윗 선배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며, 후배들은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 것 같아요. 우리들만의 스타일이 있으니까 그런 스타일로 공차는 선배를 흠모하고, ‘저 선배처럼 차야지’ 하는 마음으로 보고 배우며 자라나는 것이죠.”

최문식에게는 김병수가 바로 그런 선배였다. 불과 1년 선배이긴 하지만 최문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김병수의 플레이에 감명 받았고, 그런 플레이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김병수 선배와는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팀에서 잠깐 같이 뛰었던 적을 제외하곤 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선수들 간에는 어느 학교에 누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때 당시 김병수 선배가 볼을 차는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 북받쳐 올라왔었죠. ‘정말 볼 끝내주게 잘 찬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따라 배우기 위해 제 나름대로 연습하다 보니까 실력이 늘었어요. 제 밑에 있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저를 보고 볼을 찼겠죠. 그렇게 위로부터 아래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 것 같습니다.”

현대축구의 흐름 속에서 입지 줄어든 테크니션

현대축구의 흐름은 점점 변화되고 있으며 이제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빠르고, 부지런하고, 강한 투쟁심을 갖춘 공수겸장의 멀티 플레이어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가장 큰 격전지인 미드필드는 그 변화의 폭이 더욱 거세다. 공격적인 면에서 특화된 이들 테크니션들에게도 이런 변화된 환경에 대한 적응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현대축구가 예전과는 흐름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선수들도 그런 부분을 캐치해야겠죠. 예전에는 기술이 월등하거나 체력이 월등하거나 하는 식으로 선이 확연하게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체력과 기술을 같이 겸비하지 못하면 경기에서 뛸 수가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앞으로 커가는 선수들이 잘 인식하고 노력해야겠죠. 이제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지만 현대축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축구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어요. 제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는데 90%의 이미지를 집중했으니까요. 아마 지금이라면 제가 원하는 그림에 51%, 팀 전술에 맞추는 플레이에 49%의 비율을 조정할 것 같아요."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천재적인 테크니션이 경기를 지배하고, 창의성 있는 킬러 패스 한방으로 경기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그런 축구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 존재한다.

“축구팬들에게는 축구를 보는 즐거움이란 것이 있고, 절로 감탄이 나오는 화려한 플레이에 대한 동경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축구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현대축구의 흐름 속에서는 화려하게 하다가 경기에서 지는 것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죠. 아마 일반 축구팬들도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된다면 화려한 선수보다는 화려하진 않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더 중요하게 인식될 겁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제 선수 시절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그 때 즐겁게 축구했고, 그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껴요."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9년 10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출처 : 대한축구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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